성경본문
민수기 21:4-9
그들은 에돔 땅을 돌아서 가려고, 호르 산에서부터 홍해 길을 따라 나아갔다. 길을 걷는 동안에 백성들은 마음이 몹시 조급하였다. 그래서 백성들은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였다. "어찌하여 우리를 이집트에서 데리고 나왔습니까? 이 광야에서 우리를 죽이려고 합니까? 먹을 것도 없습니다. 마실 것도 없습니다. 이 보잘것없는 음식은 이제 진저리가 납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백성들에게 불뱀을 보내셨다. 그것들이 사람을 무니, 이스라엘 백성이 많이 죽었다. 백성이 모세에게 와서 간구하였다. "주님과 어른을 원망함으로써 우리가 죄를 지었습니다. 이 뱀이 우리에게서 물러가게 해 달라고 주님께 기도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모세가 백성들을 살려 달라고 기도하였다.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불뱀을 만들어 기둥 위에 달아 놓아라. 물린 사람은 누구든지 그것을 보면 살 것이다." 그리하여 모세는 구리로 뱀을 만들어서 그것을 기둥 위에 달아 놓았다. 뱀이 사람을 물었을 때에, 물린 사람은 구리로 만든 그 뱀을 쳐다보면 살아났다. 아멘.
히브리서 5:7-9
예수께서 육신으로 세상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구원하실 수 있는 분께 큰 부르짖음과 많은 눈물로써 기도와 탄원을 올리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의 경외심을 보시어서, 그 간구를 들어주셨습니다. 그는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당하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그리고 완전하게 되신 뒤에,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사람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하나님에게서 멜기세덱의 계통을 따라 대제사장으로 임명을 받으셨습니다. 아멘.
마가복음서 10:35-40
세베대의 아들들인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께 다가와서 말하였다. “선생님, 우리가 요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해주시기 바랍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느냐?" 그들이 그에게 대답하였다. "선생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에, 하나는 선생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선생님의 왼쪽에 앉게 하여 주십시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고,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 그들이 그에게 말하였다. "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시고,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것이다. 그러나 내 오른쪽과 내 왼쪽에 앉는 그 일은, 내가 허락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정해 놓으신 사람들에게 돌아갈 것이다." 아멘.
설교문
<하늘과 땅 사이에서>
사자성어 중에 ‘겉은 화려한데 속이 텅 비었다’는 뜻의 ‘외화내빈’을 많이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구약성서에 나오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사이의 관계가 ‘외화내빈’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집트 종살이에서 해방되어 광야를 거쳐서 가나안에까지 옵니다. 그 과정은 하나님 입장에서 보면 엄청난 축복을 주신 것입니다. 화려한 이스라엘 역사입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올 때까지 40년밖에 안되는데 그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과 하나님과 살았던 역사가 오늘 본문 중에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이집트 종살이로부터 해방시켜줘서 고맙다고 하더니만 얼마 지나서 배고픔이 있고 목마름이 있자 왜 우리를 해방시켜주었느냐고 하나님의 등에 대고 난리를 칩니다.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고 하나님 없이는 살지 못하는 선택받은 백성들의 이야기입니다.
민족도 해방되었고 나라도 살았습니다. 거대한 민족의 역사가 용솟음치면서 새 역사로 들어옵니다. 그런데 살다가 한 끼 배고프고 물 한 모금이 모자라면 민족의 역사, 하늘의 역사 따질 것 없이 왜 해방시켜주었냐고 큰소리치며 사사로운 역사가 거대담론을 장식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약하지만 다른 나라와의 싸움에서 한 번도 진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사서 점령당한 것 외에는 하나님께 기도해서 이기리라고 약속받았고 반드시 하나님께서 지켜주셨습니다. 외부의 적과 싸울 때는 이스라엘이 강했습니다.
창세기부터 말라기까지 읽어보면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괴롭다, 가슴이 답답하다, 도대체 내 백성이 이럴 수 있느냐? 한탄, 분노, 좌절에 관한 이야기를 예언자들의 입을 통해서 계속해서 성경말씀에 썼습니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백성을 어려울 때마다 고비마다 도와주어서 해방도 주었고 구원도 주었는데 살다가 조금 힘들다고 나에게 왜 구원을 베풀어주었냐는 백성들이 어디에 있느냐?” 하나님의 마음이 이러했을 겁니다.
“기분 나쁜 정도가 아니라 정말 분이 치밀어 못 살겠다.” 구약예언서를 저보고 결론지으라고 하면 이렇게 해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심정 - 분해서 못 살겠다.” 그래도 사셔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분노를 보이기도 하시고 벌도 주셨지만 종래에는 이스라엘 백성을 사랑해 주셨습니다. 이 뜻은 하나님과 인간의 역사는 외형적으로 나타나는 화려한 역사가 중요한 게 아니라 민족 내에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죄악과 잘못과 내빈이 하나님의 관심사였습니다.
요단강 동쪽까지 이스라엘 백성이 올라갔습니다. 산에서 내려다 봤더니 가나안 땅이 보입니다. 이제 곧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을 침략해 들어가 원주민들을 완전히 물리쳐 요단강 동쪽에 진을 치고 있습니다. 지금 민수기 말씀대로 그때 상황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승리했습니다. 전쟁에서 이겼습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자 다시 배고픔이 왔습니다. 목마름이 왔습니다. 옛날 광야에서 있었던 사건과 똑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불평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승승장구하고서 하는 말이, “하나님, 무엇하시려고 우리를 여기까지 인도하셨습니까? 비록 이집트에서 자유는 없었지만 마음 편히 먹고 살게 놔두지 왜 여기까지 인도하셨습니까?”
그 얘기를 모세 때는 사막에 이르러서 했는데 지금은 가나안 땅 입성을 코앞에 두고 요단강을 보면서도 여기까지 온 것은 생각 안하고 왜 우리를 인도해서 지금 배고프고 목마르게 하시냐고 불평합니다. 이 불평을 듣는 하나님은 어떤 심정이겠습니까? 차라리 없애버렸으면 좋겠는데 그럴 수는 없고, 너무너무 속상해서 하나님 가슴이 터지기 직전일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해석하는 하나님의 심정입니다. ‘가슴이 터진다.’
터지는 가슴을 하나님은 뱀을 보내서 해결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불뱀에 물려 죽었습니다. 그러자 그 때서야 이스라엘 백성이 회개하고 모세에게 다가와서 잘못을 빕니다. “하나님께 말씀드려서 독 있는 불뱀을 없애주십시오.” 그래서 모세가 하나님께 간구했습니다. “한번만 봐주십시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불뱀을 없앤 게 아니고 전혀 다른 방법을 주셨습니다. “뱀의 독은 뱀으로 해결하자. 구리로 뱀을 만들어서 장대에 높이 달아라. 그래서 그 구리뱀을 쳐다보면 불뱀에 물린 사람도 낫고, 물릴까봐 괴로워하고 두려워하는 사람도 뱀을 쳐다보면 뱀이 오지 않을 것이다. 독이 있는 뱀은 독이 없는 구리 뱀으로 해결하겠다. 단 장대를 높이 쌓아야 한다.”
오늘 우리는 이 말씀을 이렇게 생각합니다. 세상에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습니다. 그런데 죄 지은 사람이 죽게 생겼습니다. 그러면 누가 와서 구원해야 합니까? ‘사람은 사람으로 구원해야 되겠다. 세상은 세상의 다른 모습으로 구원해야 되겠다.’ 그래서 죽어야 마땅할 우리 대신 하나님이 직접 내려오셔서 인간이 되셨습니다. 같은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무슨 기적으로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 문제는 사람이 된 하나님으로 구원하는 방식을 택하셨고, 그래서 예수께서 오셨고 구리 뱀처럼 십자가라는 장대에 매여서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십자가 나무(장대)에 매달린 예수, 인간이 된 하나님을 보면 산다.” 옛날 모세시대에 주었던 하나님의 약속과 예수시대에 주신 하나님의 약속이 같습니다.
하나님은 왜 인간 예수로 장대에 매여 죽으셔서 인간을 구원시키십니까?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이런 분입니다. 장대에 매달린 구리 뱀을 만들지 않고 불뱀을 다 죽였으면 되는데 전혀 다른 뱀을 통해서 구원을 주셨습니다. 인간의 죄악 때문에 하나님의 징벌을 받아서 죽을 수밖에 없어도 내버려 두시지 그 인간을 살리겠다고 자기 스스로 인간이 되셔서 장대에 매달렸습니다.
하나님은 죽으실 줄 아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런 신을 보셨습니까? 우리 때문에 고통을 택하신 하나님, 기적을 행할 수 있지만 우리와 고통을 나누고 싶어하시는 하나님, 그런 하나님이 우리가 믿는 하나님입니다. 그 하나님의 증거를 우리는 예수에게서 봅니다. 죽기까지 같이 고난을 당하시는 하나님, 그러기에 제가 하나님을 배신할 수 없습니다. 위에서 명령하시면 못 본 척 하겠는데 저를 위해서 저 대신에 죽겠다고 하십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을 때 여러분에게 대신 죽겠냐는 제안이 온다고 합시다. 대신 죽어주기 쉽습니까? 가족이나 친지라면 쉽습니까? 대신 죽는다는 것이 참 어렵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를 대신해서 우리를 위해서 죽으십니다. 죽어주는 정도가 아니라 죽고 난 후에 내가 부활해서 살 때 부활의 영광스런 축제에 같이 참여하자고 말씀하십니다.
삶의 기쁨을 주시고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은 우리를 생명에 동승시켜 주시고, 고난도 생명의 축복도 함께 받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런 신을 역사를 통해서 들으신 일 있습니까? 나 때문에 죽었다는 그런 신을 보셨습니까? 제가 믿는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이고 그래서 저는 이 자리에 서 있고 여러분도 여기 계십니다. 골고다 언덕에 십자가가 있었습니다. 예수란 사람이 높이 달렸습니다. 거기에 달릴 때 그의 심정은 어떻겠습니까? ‘나를 보는 사람은 산다.’
다른 사람을 쉽게 죽이고, 죽이면서 쾌감을 느끼는 사람은 자기 자신의 목숨에 관해서는 한없이 약해집니다. 남을 맘대로 짓밟는 사람치고 자기 자신을 굉장히 두려워합니다. 기독교인이 제일 많은 핍박을 받을 때가 로마제국 초기였고, 네로라는 황제에게 기독교인들이 핍박을 많이 받았습니다. 히틀러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네로 황제는 로마 전체에 불을 질러 놓고 불 지른 것은 그리스도인이라며 잡아다가 사자밥이 되게 하고 심지어는 그리스도인의 목을 따서 왕궁 앞에 놓는 횃불의 기름용으로 썼습니다. 밤새도록 타는 냄새가 진동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횃불의 희생물이 되었습니다. 네로는 그렇게 잔인하고 무참하게 그리스도인들을 죽였습니다.
네로 황제는 어떻게 죽었는지 아십니까? AD 68년에 죽었는데 네로 황제가 망한 것은 외부의 침략 때문이 아니라 자기가 임명한 신복 중의 신복인 스페인 총독 갈바가 더 이상 볼 수가 없는 네로의 횡포에 군대를 몰고 반기를 들어 침략해 온 것입니다. 혁명입니다. 그래서 네로를 둘러쌌습니다. 네로는 자기 신복인 갈바의 군대에 둘러싸여서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네로 황제의 모든 신하들이 다 도망가고 뿔뿔이 흩어졌는데 에바브로는 끝까지 네로를 보필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네로에게 말합니다. “어차피 총 맞아 죽을 거면 스스로 장렬하게 목숨을 끊으십시오.” 네로가 칼을 손에 들고서 하는 말입니다. “나 죽으면 화장시키고 비석을 세워 달라. 이 칼로 어떻게 죽으면 되느냐?” 죽지는 못하고 많은 시간을 지체하며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호소합니다.
신하들이 봅니다. 다른 사람들의 목숨을 죽일 때는 파리 목숨 대하듯 하더니 자기 목숨 죽으라니까 못 죽고 떱니다. 결국 스스로 하지 못하고 에바브로 신하가 네로의 칼 잡은 팔을 함께 잡고 네로의 목에 대고 같이 찔렀습니다. 네로는 그렇게 죽었습니다.
우리는 사순절 중간에 있습니다. 이것도 모르는 제자 둘이 예수에게 요구합니다. 당신이 왕이 되시면 저는 우편에 제 동생은 좌편에 앉게 해 주십시오. 세배대의 아들인 야고보와 요한이 말합니다. 예수의 심정은 이렇습니다. ‘내가 죽으러 가는데 내 옆에 좌우에서 죽을 수 있느냐?’ 제자들의 생각은 짧습니다. ‘영광을 받으시면 좌우에 있게 해 주십시오.’
예수님 말씀은 “영광은 왕이 되어서 받는 게 아니라 십자가에 죽어야 영광이 된다. 내가 죽을 때 같이 가겠느냐?”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좌우에 있던 사람들은 제자들이 아니고 강도들이었습니다. 물론 로마나 이스라엘 지도자들은 흉악한 강도의 모습으로 죽어간 예수를 밝히려고 그렇게 했을 겁니다. 예수의 편에서 보면 적어도 제자 두 사람은 같이 죽어야 할 것 같은데 하나님의 뜻은 예수 혼자 죽는 것입니다. 좌우에 어느 제자도 있지 않았습니다. 물론 제자들이 도망을 갔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를 보내서 우리를 구원하실 때 우리를 희생 제물로 요구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혼자 죽으면 그걸로 족합니다. 그리고 같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자고 요구하시지도 않습니다. 자기 죽으면 그 뿐이고 모든 죄를 사해주겠다고 하시고 “단 나만 쳐다보면 된다. 같이 죽을 필요 없다. 내가 죽어주마.” 그런 신 보셨습니까? 그 신이, 그 하나님이 예루살렘 성 밖, 골고다 언덕, 갈보리 언덕에 나무위에 달려있습니다.
그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골고다 언덕으로 다 모여라. 갈보리 언덕으로 다 모여라. 나는 3일 만에 부활하리라.” 우리는 그런 예수를 믿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오늘 우리한테 전혀 다른 약속을 하십니다. “나는 골고다 언덕에 머물러 있고 싶지 않다. 나 예수는 십자가에 매인 채로 장충동으로 가고 싶다.”
예수께서 왕이 되셨으면 아마 한동안은 이스라엘 독립군을 이끄는 왕은 되셨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로마제국이 멸망해서 다시 망가졌을 겁니다. 예수가 두 제자의 바람처럼 왕이 되셨으면 이스라엘 역사에서 한 왕조를 이룰지는 모르나 그분을 믿는 신앙의 공동체는 생겨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분이 왕이 되었으면 이곳에 교회는 없습니다. 여러분과 저는 만날 수 없습니다. 전 세계에 무슨 십자가 복음이 있겠습니까? 그 분은 왕이 되지 않는 가장 낮은 모습으로 오셔서 죽으시는 방식으로 우리에게 메시지를 주셨고 우리는 그 분의 죽으심을 지금도 붙들고 있습니다.
부탁이 있습니다. 예수가 우리를 위해 죽으신 것을 다 믿으시겠지만 사순절만이라도 나 대신 나를 위하여, 우리 대신 우리를 위하여 그분이 지금 장충동 골고다에서 죽어가고 계심을 생각하며 예수를 믿지만 조금 더 가까이 믿을 수 없나요? 사순절에 그분이 죽으셨다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 나와 함께 죽으신다고 알고 그분에게 조금만 더 진실하고 진정한 모습으로 갈 수 있나요?
그분을 부활절 아침에 만나지만 만나실 때 자기를 조금만 양보하고 그분에게 마음의 공간을, 결단의 공간을 내어 드립시다. 사순절, 예수의 죽으심을 기리는 축제가 아닙니다. 내가 사순절에 예수와 함께 공동주인입니다. 이 결단을 하라고 하십니다.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가 이곳에 와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만이 아니라 누구든지, 십자가를 보는 사람마다, 모든 백성이, 모든 인류가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구원을 원하십니까? 십자가를 옮기세요. 걸어가는 곳마다 십자가를 들고 가세요. 부활을 담보하는 십자가를 들고 가세요. 예수님은 왕위에 오르시기 전에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낮은 곳에 가셔서 우리 대신 죽어주십니다. 죽어줄 줄 아시는 하나님, 실제로 죽으신 하나님, 우리를 다시 살려내시고 부활시키시려고 그 하나님이 오늘 말씀하십니다. “나는 여러분과 함께 장충동에도 있겠다.” 그 하나님 만납시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