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이사야서 50:4-9
주 하나님께서 나를 학자처럼 말할 수 있게 하셔서, 지친 사람을 말로 격려할 수 있게 하신다. 아침마다 나를 깨우쳐 주신다. 내 귀를 깨우치시어 학자처럼 알아듣게 하신다. 주 하나님께서 내 귀를 열어 주셨으므로, 나는 주님께 거역하지도 않았고, 등을 돌리지도 않았다. 나는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등을 맡겼고, 내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뺨을 맡겼다. 내게 침을 뱉고 나를 모욕하여도 내가 그것을 피하려고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 주 하나님께서 나를 도우시니, 그들이 나를 모욕하여도 마음 상하지 않았고, 오히려 내가 각오하고 모든 어려움을 견디어 냈다. 내가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겠다는 것을 내가 아는 까닭은, 나를 의롭다 하신 분이 가까이에 계시기 때문이다. 누가 감히 나와 다투겠는가! 함께 법정에 나서 보자. 나를 고소할 자가 누구냐? 나를 고발할 자가 있으면 하게 하여라. 주 하나님께서 나를 도와주실 것이니, 그 누가 나에게 죄가 있다 하겠느냐? 그들이 모두 옷처럼 해어지고, 좀에게 먹힐 것이다. 아멘.
빌립보서 2:5-11
여러분 안에 이 마음을 품으십시오. 그것은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셨으나, 하나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 그는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를 지극히 높이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에게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 있는 모든 것들이 예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고,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고백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
아멘.
요한복음서 12:12-19
다음날에는 명절을 지키러 온 많은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오신다는 말을 듣고,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 들고, 그분을 맞으러 나가서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에게 복이 있기를! 이스라엘의 왕에게 복이 있기를!" 하고 외쳤다. 예수께서 어린 나귀를 보시고, 그 위에 올라타셨다. 그것은 이렇게 기록한 성경 말씀과 같았다. "시온의 딸아, 두려워하지 말아라. 보아라, 네 임금이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 제자들은 처음에는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였으나, 예수께서 영광을 받으신 뒤에야, 이것이 예수를 두고 기록한 것이며, 또 사람들도 그에게 그렇게 대하였다는 것을 회상하였다. 또 예수께서 무덤에서 나사로를 불러내어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실 때에 함께 있던 사람들이, 그 일어난 일을 증언하였다. 이렇게 무리가 예수를 맞으러 나온 것은, 예수가 이런 표징을 행하셨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리새파 사람들이 서로 말하였다. "이제 다 틀렸소. 보시오. 온 세상이 그를 따라갔소." 아멘.
설교문
<호산나>
귀빈이 어느 나라를 방문하면 공항에서부터 시내 들어오는 길에 경호를 받으며 카퍼레이드가 벌어지고 눈송이처럼 꽃도 뿌리는 그런 그림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지금 같으면 군악대도 동원했을 것이고 많은 사람들이 손에 태극기도 들고 환영을 했을 것인데 이천년 전이니까 이런 장대한 장면은 없습니다만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이스라엘의 수도 예루살렘을 향해서 들어오고 계십니다. 예수께서 ‘호산나’ 외침을 들으면서 입성하고 계십니다.
오늘 성경말씀을 통해 우리는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의 장면을 추리해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얼마나 모였는지는 잘 모르지만 여러 성경학자들이 주석해 놓은 걸 보면 예수께서 입성하실 때 예루살렘이 통째로 다 일어났다고 되어 있습니다. 예루살렘 시민들이 다 일어났을 겁니다. 사람들은 그동안 로마식민지 하에서 고생을 많이 했기 때문에 예수란 사람이 오시면 이 분이 메시야라는 분이기 때문에 행적을 시작하면서 우리나라를 독립국가로 만들어줄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습니다.
로마의 제국에서 통치를 하러 온 총독이라는 사람은 혹시 이 사람이 와서 민란이라도 일으키지 않을까, 하는 걱정에서 총동원령을 내렸습니다. 제사장, 서기관, 율법교사라고 하는 종교 지도자들은 이 사람이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일지, 유대교 율법을 부수고 다른 걸 만들려고 하는 건 아닌지, 하나님을 진실로 우리에게 선포할지, 새로운 나라를 세운다고 자꾸 이야기하는데 그 나라가 어떤 나라일지, 관심의 영역은 다 달랐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에 있던 시민들, 로마 사람들, 이방사람들, 또 유대교의 지도자들이 모두 모인 건 사실입니다. 그 중에 재밌는 장면이 나옵니다. 모여 있던 사람들은 손에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잎사귀를 따서 예수께서 가시는 길에 잎사귀를 다 뿌려드렸습니다. 그 어떤 위대한 사람을 맞이하는 것보다 훨씬 더 영광스러운 모습입니다.
승리를 상징하는 종려나무가지 잎사귀를 따서 ‘제 승리의 소원입니다.’ 하면서 그 마음을 종려나무가지 잎에 담아서 예수께서 걸어가시는 발자국 앞에 자기 종려나무가지를 갖다 놓습니다. “승리를 원합니다. 주님 구원해 주옵소서. 그 뜻입니다. 나를 구원해 주옵소서.”
예수께서는 나귀 타고 가시면서 나귀가 종려나무 잎사귀를 하나하나 밟는 것이 굉장히 애처로웠을 겁니다. ‘내가 밟아야 하는데, 내가 잎사귀 하나하나를 주워서 우리를 구원하여 달라고 갈급히 외치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줘야 하는데’ 이런 심정으로 나귀를 타고 들어오고 계십니다. 팡파르도 없었을 테지만 사람들이 외치는 ‘호산나’ 이 음성은 예루살렘 전 시가지에, 그리고 예수의 마음속에 울려 퍼졌을 겁니다. ‘호산나!’
여러분이 예수라고 가정해 보십시오.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와서 구원해 달라고 하는데 어떻게 구원을 베푸시겠습니까? 뭐라고 답하시겠습니까? 예수님은 답답한 심정입니다. ‘나는 지금 죽으러 가는데, 사형장으로 끌려가는데, 날보고 주여, 주여, 호산나, 구원하여 주십시오, 라고 외치고 있는데 어떻게 구원해 주어야 하는가?’
예수의 심정과 표정은 성경에 기록된 바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마음을 짐작해 봅니다. ‘나는 죽음으로써 그대들을 살려야겠다. 내가 죽어야 그대들이 산다. 예루살렘 입성의 뜻은 내가 죽어야 그대들이 산다는 뜻이다. 그대들의 잘못을 내가 지고 죽어야 예루살렘이 구원을 받는다.’ 그렇게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들어오십니다.
‘예루살렘(Jerusalem)’의 뜻이 성경말씀 원문에 아주 재밌게 쓰여 있습니다. ‘살렘’이 ‘평화’라는 뜻으로 예루살렘은 ‘평화의 도시’ 라는 뜻입니다. 예루살렘은 평화의 도시, 평화의 도시라고 자부하던 예루살렘에는 실제 평화가 없었습니다. 로마 제국에, 그 전에는 헬라 제국에, 그 전에는 그리스 제국에, 바빌론에, 앗수리아에 항상 묻혀 있었고, 지리멸렬했고, 전쟁이 심했고, 안전망도 없었고, 종교도 썩었고, 예루살렘은 이름만 평화의 도시였고 진짜 평화의 도시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예수님 당시에 “예루살렘이 평화의 도시라는 것은 거짓말이다. ‘살렘’이라는 진짜 평화가 아니고 ‘솔리마(Solyma)’라는 가식된 평화가 있다. 살렘이라고 부르지만 살렘이 아니고 솔리마이다.” 라고 했습니다. 헬라말로 ‘솔리마’는 ‘가식된, 회칠한 무덤 같은 평화’라는 뜻입니다. 예루살렘의 헬라어식 표기를 보면 히에로솔리마(Hierosolyma)라고 되어 있습니다.
성경말씀에 보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나귀타고 입성하실 때, 그 때 예루살렘의 문자가 ‘예루솔리마’라고 되어 있습니다. 도시도 썩었습니다. 가짜 예루살렘에 예수가 들어옵니다. 거짓, 타락, 좌절 속에서 고생하던 수많은 사람들이 새파란 종려나무 잎사귀를 들면서 “주님, 당신만이 우리의 희망입니다. 살려주세요. 호산나!” 외칩니다. 썩어빠진 솔리마, 가짜 평화의 도시, 그 곳에 들어오면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는 힘이 쭉 빠졌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가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사람들이 등을 때렸고 그들에게 수염을 뽑히고 침을 맞으며 예루살렘에 옵니다. 환영하는 군중들은 환영하는 것 같지만 사실 환영이 끝난 후에 예수님이 등에 십자가를 지고 가실 때 등을 쳤습니다. 수염을 뽑히는 건 권위의 말살을 의미합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침 뱉음 당하고 발길로 차였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백성들한테 차입니다. 침 뱉고 뺨 맞습니다. 그렇게 우리를 구원하러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운명을 안고 지금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옵니다. 예루솔리마, 가짜 평화의 도시를 진짜 평화가 지배하는 도시, 예루살렘으로 만드시려고 들어오십니다. 도시만 가짜인 줄 알았더니 예수께서 목표를 두고 가신 곳도 가짜였습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예수는 메시아시므로 예루살렘에 들어오시면 로마총독이 기거하는 관사 앞에 가서 우리 모두의 함성을 끌어안고 독립시켜라, 해방시켜라, 하고 외칠 것이다.’ 그래서 따라가기로 했습니다.
예수가 들어오시면 바로 로마 총독 관사로 갈 줄로 생각했습니다. 로마 총독도 민란이 있을까봐 사전 조치를 취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는 그 곳에 가지 않고 엉뚱한 곳으로 가셨습니다. 가신 곳은 성전이었습니다. 성전으로 가셨습니다. 이 말씀은 정치 중심지로 가지 않고 신앙 중심지로 가셨다는 말이 아닙니다. 세상 죄를 지고 침을 맞고 매를 맞으며 세상 때문에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의 발걸음을 옮기기 전에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고 싶었습니다. 죽기 전에 나를 만드신 창조주와 마지막 담판을 짓고 싶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싶었습니다.
“세상이 뭐라고 하든 하나님, 당신 아버지, 지금 나를 입성시키셔서 십자가와 부활까지 주신다고 하시는데 무슨 일로 이러십니까? 당신 진짜십니까? 당신의 의중을 알고 싶습니다. 알고 내가 기꺼이 골고다에 가겠습니다.” 하나님 만나러 가십니다. 예수님 생각에 그 하나님은 지금 이스라엘 모든 백성의 삶의 중심인 성전에 가야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성전으로 가십니다. 이스라엘 땅을 지배하는 로마 백성들에게도 복음을 주시고, 로마를 하나님 나라로 만들고, 모두가 예수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게 하실 하나님이 계시는 성전에 찾아갑니다. 건물이 예뻐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계신 곳에 하나님 만나러 갔습니다. 그런데 성전에 하나님이 계셨습니까?
침 맞고, 뺨 맞고, 성전에 갔더니 그 곳에는 하나님 대신에 돈이 횡행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평화의 말씀대신 돈 바꾸는 자들의 책상이 즐비하게 있었습니다. 하나님 만나러 갔더니 하나님은 안 계시고 하나님을 대신한 이상한 이기주의자들이 득실거리고 있었습니다. 살아있는 말씀이 있는 게 아니라 박제된 율법만 있었습니다. 호산나 외치는 소리가 성전에서는 들리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이 성전을 헐라. 내가 다시 지어야 하겠다. 이 성전에는 하나님이 없다.” 하나님 만나러 성전에 갔더니 그 성전에 하나님이 안 계셨습니다. 아니요. 안 계신 게 아니라 사람들이 하나님을 쫓아냈습니다. 돈 바꾸는 사람들한테 갔더니 하나님을 장사꾼으로 변질시켜 버리고 우상화시켰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은 내쫓고 자기들이 섬기는 맘몬신만 있었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은 내쫓고 분노와 좌절이 있는 이기주의가 판치는, 그래서 신앙의 이름으로 모든 것을 정당화하는 미신적 신만 성전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죽었다는 말 들어봤습니까? 하나님이 죽으신 게 아니고 많은 사람들이 그 동안 신앙이라는 명목으로 하나님을 무수하게 죽였습니다. 하나님의 가슴을 찢어놓았고 하나님의 진실을 짓밟았고 하나님을 죽였습니다.
예수님이 성전에 갔더니 그 많은 신앙의 사람들이 하나님을 죽이고 있었습니다. 살인, 아니 살신 행위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죽였습니다. 하나님을 내쫓았습니다. 예수님의 가슴은 찢어지면서 “나는 주님을 만나고 싶은데 아버지, 어디 계신가요? 죽어 가고 계신가요?”
오늘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 이미 예루살렘에서 죽임당하고 계시는 하나님, 털 깎는 자 앞에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의 모습처럼 자기 아버지 하나님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루살렘의 삶의 중심에서, 하늘과 땅을 연결해 주는 성전 속에서 하나님은 죽임당하고 계셨습니다.
예수의 결단일 겁니다. “아버지, 제가 대신 지겠습니다.” 그래서 아들이 아버지의 분부를 받아서 성전을 떠나 골고다 언덕에 올라 대신 죽임을 당합니다. 우리 때문에 우리를 살리려고 말입니다. 성전 정화, 예루살렘 입성,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를 위해 죽음을 택하셔서 대한민국이라는 땅을, 이 세상 온 땅을 가식적인 평화, 가식적인 정의, 가짜가 지배하는 솔리마라는 나라에서 진실로 우리가 추구하는 자유와 정의와 믿음과 진실된 평화가 지배하는 살렘으로 만들어 주시려고 오늘 성전에 들어오십니다.
여러분, 솔리마이고 싶습니까? 살렘이고 싶습니까? 지금은 솔리마라도 괜찮습니다. 주님이 오셔서 여러분을 고치시면 살렘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코리아 살렘, 어떻습니까? 한 사람 한 사람이 진짜이신 하나님을 죽이는 그런 사람 말고 제 안에, 우리 안에 살아계신 하나님을 모시고 삽시다. 그런 사람을 만드시려고 오늘 예루살렘에 들어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솔리마에 들어오신 것은 예루살렘으로 바꿔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부활절 아침의 약속이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나와 함께 이 고난의 길을 같이 가자.” 하십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주신 분부가 하나 있습니다. 공동기도 중 한 구절입니다. “네 탓을 말하려 하기보다 내 탓을 먼저 생각하게 하옵소서.”
이 세상의 불평, 불만, 좌절, 고난, 이유가 뭡니까? 혹시 우리가 ‘네 탓이오’ 하고 손가락질하기 전에 ‘내 탓이기도 합니다’ 하고 생각해 본 적 있으십니까? 민주사회, 화해를 이루는 사회, 여러 가지 말을 많이 하지만 예수님이 가셔서 봤더니 세상이 다 썩었습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성전을 다 헐라.” 예수님께서 네 탓이라고 아무리 말씀하신들 성전이 바꿔질 리가 없고 예루살렘이 변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잘못을 어깨에 지고 하나님이 죽임 당하십니다. 네 탓이고, 내 탓이고, 우리 탓입니다. 십자가가 뭔지 아십니까? 십자가란 네 탓이오, 하고 사람을 죽이는 게 아니고 우리 탓임에도, 우리가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홀로 계시고 싶지 않아서, 인간과 함께 지내고 싶어서, 하나님이 지으신 천지만물과 동거동행 하고 싶어서, 썩은 것을 도려내고 죄진 것을 용서해 주시고 올바르지 못한 것을 올바르게 바꾸셔서 우리와 동고동락하시려고 하나님이 오늘 우리에게 오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이상한 분입니다. 홀로는 못 사시는 분입니다, 기어코 우리하고 사시겟답니다. 우리 탓 때문만이 아니라 우리 탓을 자기 탓 삼아 ‘내 탓이오, 우리 탓이오.’ 그래서 우리는 모두 회개하고 거듭나야 합니다. 그것이 십자가의 진실입니다. 그러고 났더니 우리에게는 부활의 영광이 주어져 있습니다. 그 영광을 오늘 시작하자는 겁니다.
오늘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여러분의 진실 속에, 여러분의 가장 깊은 곳에 썩은 냄새가 나거나 하나님 보시기에 보람되지 않아도 상관없습니다. 우리의 진실된 문을 열고 오늘 예수님을 맞이하시기 바랍니다. 같이 고난을 지고 부활주일 아침에 “내가 이겼다, 하나님의 나라를 선물로 받아라.” 하는 그 약속을 받을 때까지 일주일 동안만이라도 주님 모시고 살아갑시다. 예수님의 수난을 우리의 수난으로 받아봅시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