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향린] 이땅을 살다간 작은 예수들(17) 안중근

악과의 투쟁: 예수, 본훼퍼 그리고 안중근

종려주일

시편 72:1-7; 마르코 11:1-10

 
1930년대 초 만주의 항일유격근거지에서 일제에 의해 희생된 숫자보다 혁명조직 내에서 서로가 서로를 의심해서 죽인 숫자가 더 많았던 소위 ‘민생단 사건’을 주제로 하여 작가 김연수가 쓴 <밤은 노래한다>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오늘 다루고자 하는 안중근의사의 시대와는 30년의 간격이 있지만, 안중근의사가 가졌던 그 실존적 고민을 잠시나마 떠올리기 위해 소설의 한 부분을 오늘 하늘뜻펴기 머리글로 대신합니다.

 
[밤은 노래한다.]

 
고개를 들어보니 고동색 군복에 각반을 찬 일본 병사들이 구령 소리에 맞춰 내 옆으로 지나가고 있었다. 그들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죽음이 그다지 멀리 있지 않다는 듯... 죽음이 결국 시간의 문제일 뿐인 곳에서는 누구나 임종을 앞둔 노인일 뿐이다. 총성이 그치지 않는 만주에서 우리는 누구나 노인일 뿐이다. 이 세계가 청년들에게 가혹한 세계라면, 죽음에서 가장 멀리 있는 청년들마저도 노인으로 만들어버리는 세계라면 내가 몇 명을 조금 일찍 죽인다고 해서 무슨 상관이 있으랴...

누구도 주인이 아닌, 노예만의 세상에서 폭력은 예술이다. 단 한 명이라도 죽어가는 노예가 있는 한, 세계를 바꾸기 위한 폭력은 불가피하다. 나는 폭력이 사라진 세계를 믿지 않게 됐다. 어느 세계에나 죽어가는 노예는 있을 테니까 어느 세계에서나 폭력은 예술이 될 것이다. 결국 유토피아란 없다. <밤은 노래한다.> 김연수 문학과 지성사 290쪽

 
2주 전 우리는 청년주일을 맞아 청년들이 펼친 하늘뜻펴기에서 오늘의 청년들이 겪는 암울함과 좌절의 얘기를 들었습니다. 70년대나 80년대를 산 사람들이 오히려 더 행복했을 것이다라는 얘기를 했습니다.(주1) 그러나 7,80년대를 산 오늘의 4,50대들 또한 당시의 살벌한 군부독재시대에서 많은 청년들은 좌절했고 현실에 타협했습니다. 그러면 그 이전 세대의 사람들은 어떠했는가? 5, 60년대를 살아간 청년들 그들은 형제들을 향해 총칼을 들었던 전쟁의 희생자들입니다. 가족이 죽고 굶주림과 방황으로 더 큰 암울과 좌절로 빠져들 수밖에 없었던 시대입니다. 그러면 그 이전 3,40년대를 살아간 청년 세대는 어떠했을까? 일제의 식민지 지배가 더욱 악랄해지면서 우리 말은 커녕 이름까지 일본식으로 바꿔야 했고, 남자는 전쟁의 총받이로, 여자는 정신대로 그리고 남은 사람은 탄광으로 끌려갔습니다. 집안의 먹던 놋그릇 숟갈까지 빼앗기던 시대였으니 그 무슨 희망이라는게 남아 있었겠습니까?

 
제 말은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청년들이 힘든 것은 사실이지만, 어느 시대고 힘들지 않은 시대는 없었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자기중심적이어 누구나 자기 고통이 가장 크다고 느끼고 과거를 미화하기 때문에 그렇지 실상 누구에게나 좌절과 고통의 깊이는 같은 것입니다.

 
<밤을 노래한다>라는 소설이 없다고 하더라도 1930년대 만주 벌판에서 나라 잃은 채 살아가는 조선의 청년에게 당연히 희망이란 없었습니다. 작은 먹이를 눈앞에 두고 제국주의가 서로 맞붙은 전쟁이라는 역사의 광기와 혼란 속에서 개인이 살아간다는 일에 무슨 의미가 있었겠습니까? 그런 세상에서는 폭력만이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슬픈 진실을 작가 김연수는 말하고 있지만, 과연 이 슬픈 진실은 30년대만의 일일까요? 2010년 위성이 화성의 얼음 사진을 찍어 보내고, 트위터를 통해 한 개인의 일상이 세계인 모두에게 공개되는 오늘날에도 폭력만이 구원이 되는 세계가 지속되는 것은 아닌가요? 아프카니스탄과 이라크에서만 폭력이 진행되는 것은 아닙니다. 아프리카 수십 군데에서는 이보다 더한 종족 학살의 폭력이 진행되고 있으며 자국 국민을 보호하겠다는 군대는 간간히 훈련과정에서 비행기와 초계함의 폭발로 20대의 청년들이 자신들의 꿈은 펴보지도 못한 채, 연기 속으로 사라지고 있습니다. 과학적인 근거는 물론이고 상식적으로도 있을 수 없는 북의 공격으로 폭발했다는 거짓 기사가, 실수라고 하지만, TV 화면에 떠도 국민들은 그러려니, 아니 내심 그러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폭력으로 물든 우리네 마음의 진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예입니다.

 
[이 시대가 겪는 밤 노래들]

 
꼭 총과 칼을 들어야만 폭력인가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성폭력도 폭력이고 언어폭력도 폭력이고 미움으로 남이 죽기를 바라는 마음 또한 폭력입니다. 권력남용 이 또한 폭력입니다. 여당 대표가 바른 소리를 하는 봉은사 주지 명진 스님을 내어좇기 위해 좌파로 몰아 권력행사를 하는 것 그것 또한 분명 폭력입니다. 이 사람이 한때는 박종철군 의문사를 밝혀낸 정의로운 검사였다는데, 이를 기화로 정치판에 들어가더니 누구보다 더한 정치모사꾼이 되어버렸습니다. MB 정부가 정치계 법계 학계 언론계를 다 잡고 나니까 이제는 마지막 남은 종교계마저 장악하고자 덤벼들고 있습니다. 종교와 정치는 분리됨이 마땅하지만, 그 대상이 같다보니 겉으로는 분리를 말하지만 속으로는 불가분리의 관계를 형성합니다. 그래 로마도 예루살렘 성전 대제사장은 자기 입맛에 맞는 사람을 임명했고 히틀러 또한 목사들에게도 ‘하일! 히틀러!’의 충성 맹세를 외치도록 강제를 했고, 박정희 또한 청와대 조찬기도회를 만들어 자신의 입김을 불어넣었으며 자기에 반대하는 목사들을 국가보안법에 걸어 감옥에 넣었습니다.

 
권력의 독재를 꾀하는 정치인들은 어떤 식으로든 종교를 잠재우려고 하고 우민화정책을 감행합니다. 저는 기독교의 보수 지도자들만이 현 이명박정권의 탄생을 위해 애를 썼는가 했더니 현 총무원장을 비롯하여 불교계에서도 열심을 냈더군요. 겉으로는 기독교정권이라고 욕하면서도 속으로는 한패였던 그 깊은 속을 그 누가 알았겠습니까? 종교든 정치든 권력은 다 통하는 법입니다. 그래 예수님을 죽이는 일에도 종교계의 제사장들이나 바리새인들 그리고 정치계의 사두개인들이나 헤롯당원들이 하나된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사람이 자기 한계를 알아야 하듯이 정권 또한 자기 한계를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삼권분립을 주장하는 것이고 백성들이 정치와 행정에 대해 자유롭게 발언하도록 하는 참여 민주제도는 필수적입니다. 그러나 독재는 자기 편의를 위해 이러저러한 제어장치를 없애고 제 입맛에 맞는 사람을 세우기 마련인데, 이렇게 되면 결국은 제 꾀에 제가 스스로 넘어가게 되어 있는데 그건 역사가 가르치는 일입니다. 히틀러가 그러했고 박정희가 그러했습니다.

 
[두 개의 서로 다른 입성 행진]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생애 마지막 주간에 새끼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시는데, 그때 연도에 모여선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었다 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그래 오늘부터 시작하는 마지막 주간을 고난주간이라고 부릅니다만, 그 고난주간을 시작하는 첫날이 백성들이 환호하는 종려주일이다 보니 상반된 두 감정이 우리 안에 동시에 있습니다. 물론 그 실상을 보면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만, 고난이 주는 고뇌와 우울함으로 시작해야 할 첫날이 환호와 웃음으로 덮여버린 셈이지요.

 
흔히 예수께서 새끼 나귀를 타고 입성하신 일을 겸손이라는 개인적 신앙 차원으로 혹은 평화의 왕으로 그래서 로마정권을 현실 지배로 인정하는 식으로 설명하고 있지만, 이는 당시의 역사성을 완전히 무시하는 매우 잘못된 해석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새끼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이 사건과 이어서 일어난 성전 숙청 사건을 함께 묶어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할 때만이 예수님의 하느님 나라 운동의 본질과 핵심이 되살아납니다. 새끼 나귀를 타신 일이 당시 세계를 지배하는 로마 제국과 황제를 풍자하는 민중의 정치적 대결이라는 종교적 상징성을 간과하게 되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개인의 값싼 은혜로 전락하게 됩니다.

 
서기 33년 어느 따스한 봄날 유대인들의 최대 명절인 과월절 이틀째 같은 시간 예루살렘 성에는 각기 다른 두 행렬이 있었습니다. 서문에는 빌라도 총독을 앞장 세운 위풍당당하고 질서정연하게 행진하는 로마군대의 행렬이 들어오고 있었고, 동문에는 예수를 앞세운 왁작지껄 웃고 떠들며 들어오는 유대 사람들의 행렬이 있었습니다. 말을 타고 긴 창과 칼을 들고 들어오는 군대 행진은 자주 볼 수 있는 장면이었을 뿐더러 로마 군대가 절기 때마다 성에 주둔하는 것은 하나의 관행이었습니다. 그것은 순례자들로 인해 평소의 열배이상 사람이 모여 치안문제가 생기기 때문이고 더구나 과월절은 유대민족이 애굽의 노예생활로부터 해방된 날을 기념하는 절기이기 때문에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날 염려가 농후하였기 때문이고 실제로 그런 만세운동이 자주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이 행렬에는 예루살렘의 권세자들과 부자들이 참석했으며 그들은 로마여 영원하라는 Pax Romana!를 외치며 황제의 만수무강을 빌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쪽에는 해방과 독립을 꿈꾸고 다윗 왕국의 재건을 염원하는 가난한 식민지 백성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 야훼 하느님을 찬송하였습니다. 이 행렬 또한 일종의 관행이었습니다. 정부입장에서 볼 때, 이는 일종의 바보들의 축제였고 이를 통해 민중들의 과격한 열기를 뽑아낼 수 있어 이를 방관하였습니다.

 
우리는 복음서의 예루살렘 입성 기사에서 한편에는 나귀를 중심으로 한 예수 일행 그리고 다른 한편에는 말을 탄 빌라도 총독과 그 일행을 함께 떠올릴 때만이 진정 그 뜻을 바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마르코복음에 따르면 예수님 주위에는 언제나 오흘로스라고 불리우는 억압받고 천대받는 가난한 민중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이 갈릴래아 민중들은 예수를 따라 예루살렘까지 왔고 오늘 예수와 함께 예루살렘 성을 들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엄격하게 말하면 로마 제국과 예루살렘 성전지배체제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대결의 장면이지 그 먼 길을 여행 삼아 온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그 대결은 단순한 힘의 대결이 아니라는데, 우리의 인식의 한계가 놓여 있습니다. 양반제도가 엄격했던 조선시대 하층 민중들은 어떻게 저희들의 울분을 토로했는가요? 보통은 탈춤과 판소리의 해학을 통해 사대부의 비리와 허위를 폭로하고 비웃었으며, 탐관오리의 행위가 지나치면 때로 이는 민중항쟁으로 번지곤 했습니다. 이를 역사에서는 ‘난리’라고 규정했습니다. 홍경래의 난, 임꺽정의 난 등등.

 
[‘어린 나귀’에 담긴 저항과 평화]

 
그날 아침 예수께서는 한 번도 멍에를 맨 적이 없는 어린 나귀를 탔는데, 어린 나귀가 건장한 30대의 청년을 태웠다면 그 무게로 인해 비틀 비틀거릴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말도 아닌 나귀, 그것도 어린 나귀를 타고 비틀비틀 들어오는 예수님의 모습은 폭소를 자아내게 할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왜 예수는 이런 행동을 했는가? 여기에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가? 오늘의 행동은 구약의 예언자 즈가리야의 예언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수도 예루살렘아, 환성을 올려라. 보아라 네 임금이 너를 찾아오신다. 그는 겸비하여 나귀, 어린 새끼 나귀를 타고 오시어 에브라임의 병거를 없애고 예루살렘의 군마를 없애시리라. 군인들이 메고 있는 활을 꺾어 버리시고 뭇 민족에게 평화를 선포하시리라.” 여기서 말하는 겸비는 어떤 개인의 인격에 근거한 겸손함이 아니라 병거를 없애고 군마를 없애고 무기를 꺾어 버리는 그런 강력한 힘의 근원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이 힘을 겸비라 말하는 것은 칼과 창에 근거한 세상의 힘과는 달리 맨손 곧 민중으로 오기 때문입니다. 이를 신학적으로는 종말론적인 심판이라고 말합니다만, 이 심판에서 인간의 역할을 빼면 피안의 구원으로 넘어가는 것이고, 인간의 역할을 감안하면 차안의 해방이라는 차원으로 넘어갑니다. 여기서 소위 말하는 보수와 진보가 나눠지는 것이지요.

 
지금까지의 얘기를 종합하면, 예수님께서 의도하신 이 나귀의 행렬은 그냥 우연히 일어난 일이 아니라, 성 맞은편에서 일어나고 있는 로마의 행진을 염두에 둔 오래전부터 계획된 반대행진이었던 것임을 알 수 있고, 빌라도의 행진이 무력에 기초한 로마 제국의 평화를 상징한다면, 예수님의 행진은 하느님의 공의에 기초한 새 하늘과 새 땅의 평화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성전 숙청과 그 너머]

 
그리하여 입성 다음날 드디어 일은 벌어집니다. 다음날 아침 예수께서는 성전 뜰 안으로 들어가 환전상들의 탁자와 비둘기 장수들의 의자를 둘러엎고 ‘만민이 기도하는 집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고 호통을 치시며 채찍을 휘두르셔서 그들을 쫓아내셨습니다.

 
당시 유대성인들은 의무적으로 일 년에 세 번 예루살렘 성전에 가서 희생 제사를 드려야 했고 성전세와 십일조를 드려야 했습니다. 희생동물은 제사장들이 흠이 없다고 도장을 받은 것이어야 했고, 성전세나 헌금은 로마황제의 초상이 들어가지 않은 성전용 화폐로 바꾸어서 바쳐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이때 상인들과 환전상들은 성전의 권력을 배경으로 엄청난 폭리를 취하고 있었고 권력자들은 그들로부터 검은 돈을 받고 있어 민중들의 원성이 자자했던 것입니다. 마치 오늘날의 삼성을 비롯한 재벌과 정치권력과의 유착관계를 생각하면 됩니다.

 
예수께서는 이를 뒤집어엎은 것입니다. 단지 탁자만을 뒤집어엎으신 것이 아니라 당시의 지배체제를 뒤집어엎은 것이고, 상인들만 내어 쫓은 것이 아니라 그곳에 제사장들과 성전 종사자들인 레위인들마저 내어 쫓은 것입니다. 16절을 읽어보면 “또 물건들을 나르느라고 성전 뜰을 질러 다니는 것도 금하셨다.” 성전에는 당연히 수백 명의 제사장들이 있었고, 그들을 돕는 레위인들이 있었고, 또 치안을 담당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얼마동안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성전 뜰을 질러 다니는 것조차 금하셨다는 말은 이들을 힘으로 제압하였다는 말입니다. 성전 뜰이라고 하는 것이 단순히 교회 건물 뜰 앞을 말한 것이 아닙니다. 적어도 수백에서 수천명이 모일 수 있는 열려있는 공간을 의미합니다. 물론 이것이 과연 실제로 일어난 사건을 기록한 것이냐? 하는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만약 실제라면 많은 문제를 제기합니다. 예수님께서 잠시 동안이나마 힘을 사용하여 성전을 장악하였다는 말이 되기 때문입니다. 상인들을 쫓아내고 상을 둘러엎고 성전 뜰에 사람들이 다니지 못하도록 하셨다면 이는 분명 폭력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피하고 싶은 진정한 잔]

 
바로 이러한 나귀타심과 성전숙청이라는 예루살렘의 지배체제에 대한 예수님의 대결을 이해할 때 비로소 게쎄마니 동산에서의 예수님의 기도가 바르게 이해가 됩니다. 우리가 익히 아는 대로 예수님은 체포되기 직전 게쎄마니 동산에서 땀이 피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십니다. ‘아버지여 이 잔을 나에게서 거두어 주소서.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피하시고 싶은 잔을 십자가 죽음으로 이해합니다. 그런데 이런 이해는 예수님을 너무 과소평가한 것은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간 여러 차례 자신의 죽음을 예견해왔고, 베드로가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고 했을 때에 그를 향해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사람의 일만 생각하고 하느님의 일은 생각지 않는구나.’ 하며 호통을 치셨던 주님께서 막상 죽을 때가 다가오자 죽기가 싫어 이를 피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저는 예수님을 그런 나약한 청년으로 보고 싶지는 않습니다. 대부분은 자신들이 나약하니까 예수님 또한 그러했을 것이라고 이해하면서 자신의 나약함에 대한 변명으로 잔을 십자가 죽으로 이해하고자 합니다만, 이는 분명 잘못된 이해입니다.

 
보통 사람들도 의로운 일에 뜻을 세우면 죽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법인데, 설마하니 하느님의 아들이자 메시야인 예수께서 죽음을 두려워하셨다. 저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저는 예수께서 피하게 해달라고 한 잔은 자신의 목숨이 아닌 ‘민중혁명’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자기를 따라온 제자들과 군중들은 실제 그런 생각을 품고 있었고, 이미 한때 성전을 장악한 적도 있었으니까 이는 결코 실현불가능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이 마지막 주간에 일어난 예수의 행적을 살펴보면 예루살렘의 제사장이나 바리사이파 사두가이파들과 계속 대결을 하면서 예수를 죽이고자 하는데 그때마다 군중들이 무서워서 예수를 어쩌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군중은 예수의 편에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루가복음 22장 26절의 “칼이 없는 사람은 겉옷을 팔아서라도 칼을 사 가지고 가거라.”는 말씀의 배경을 다소나마 이해하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무력 민중혁명은 당장에는 성공하겠지만, 이는 결국 엄청난 피의 대가로 끝날 일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건 이미 애굽 아시리아 바빌론 페르시아 그리스 로마라는 여러 제국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익히 겪어왔던 일입니다. 동네 어른들이 생생하게 전해준 마카베우스 형제들의 독립전쟁 이야기 적들을 쳐부수는 통쾌한 승리의 이야기였지만, 그 결과가 어찌했던 것은 굳이 듣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피를 부르는 살육뿐입니다.

 
여기서 예수는 고민했던 것입니다. 피땀을 흘리며 기도했던 고민의 진실은 여기에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가리옷 사람 유다가 예수를 배반했다는 성서의 기사도 ‘그놈 나쁜 놈!’하고 한마디로 내뱉을 것이 아니라 잠시 그 사건의 전후를 유심히 들여다 볼 필요가 있습니다. 유다는 예수 일행의 재정을 관리했던 사람입니다. 매사에 분명한 사람이었고, 모든 이로부터 신뢰를 받았다는 증거입니다. 그런데 그가 3년이나 함께 했던 스승 예수를 당시 노예 한 명의 값어치에 해당하는 은전 30냥에 팔았다는 기록은 그가 단지 돈의 유혹에 넘어간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는 성서가 말하지 않는 보다 깊은 의미가 숨겨 있습니다. 그건 민중혁명을 피한 스승 예수에 대한 실망과 분노의 표시로 보아야 합니다. 게다가 가리옷이라는 그의 별명은 당시 자객단이었던 (이스)가리옷파 출신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가리=단검, 라틴)

 
정의와 평화는 하느님 나라의 핵심 사상입니다. 진정한 평화는 정의 실현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정의는 악한 것을 없애는 것을 말합니다. 사랑으로 폭력을 행하는 사람의 인격 변화를 통해서든 아니면 폭력의 수단이 되는 칼과 창 따위의 무기를 근절하든 방식이든 방법은 상황에 따라 다를 것입니다. 그러나 때로 갑작스레 밀려오는 폭력 앞에서 자신의 가족과 자신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혹은 더 큰 폭력을 막기 위한 정당방위로서의 폭력 사용은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어디까지 사용할 것인가? 폭력은 폭력을 부른다는 의미에서 그 한계를 정하는 일에 있어 고민이 있고, 여기에 정의와 평화의 하느님 나라 운동을 하는 신앙인들의 고민이 있습니다.

 
[본훼퍼목사의 종교/정치적 저항]

 
본훼퍼목사는 히틀러독재정권 하에서 정권에 저항하는 소수의 고백교회를 이끌고 간 저명한 신학자였습니다. 그는 21세에 신학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24세에 교수자격을 획득한 천재신학자였습니다. 뉴욕 유니온신학대학에서 초빙교수로 있을 당시 히틀러의 독재가 강화되자 친구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조국으로 돌아가 십자가 고난의 길을 걷게 됩니다. 처음에는 이들을 피해 은둔 수도 공동체를 운영하지만, 이 또한 철저히 파괴되고 맙니다. 그는 결국 중앙정보부원이었던 매형에 동조하여 히틀러 암살단에 들어갑니다. 그가 구체적으로 폭력을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그는 그 일원으로 국외 관계를 만들어갑니다. 그는 말합니다. ‘미치광이 버스 운전수가 승객을 태우고 인도로 질주할 때에는 인명피해를 막기 위해 강제로나마 그 운전수를 끌어내리고 버스를 세워야만 한다.’ 그러나 암살시도는 실패를 하여 39세의 나이에 불과 독일 패망 2개월을 앞두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집니다. 그러나 옥중서신을 비롯한 그의 여러 저작은 지금도 많은 신학자들에게 깊은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그가 계속 살아 있었다면 현대 신학계는 크게 달라졌을 것입니다. 신학이 달라진다는 것은 목사가 달라진다는 것을 말하고 목사가 달라진다면 교회가 달라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는 말합니다. “값싼 은혜는 우리 교회의 치명적인 적이다. 오늘 우리의 싸움은 값비싼 은혜를 얻기 위한 싸움이다. 값싼 은혜는 싸구려의 용서, 싸구려의 위로, 싸구려의 성만찬을 양산한다. 그것은 대가나 값을 치르지 않고 받은 은혜다. 죄를 뉘우치지도 않고 죄에서 벗어나기를 바라지도 않으면서, 세상은 자신의 죄를 덮어 줄 싸구려 덮개를 싸구려 교회에서 얻는다. 값싼 은혜는 죄인을 의롭다 함이 아니라 죄를 의롭다 함이다. 은혜가 홀로 모든 것을 알아서 처리해 줄테니 모든 것이 케케묵은 상태로 있어도 된다는 말이다. 값싼 은혜는 우리가 스스로 취한 은혜에 불과하다. 싸구려 은혜는 그리스도를 본받음이 없는 은혜, 십자가 없는 은혜,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 곧 사람이 되신 (비움의) 예수 그리스도를 무시하는 은혜에 불과하다.” <디히트리히 본훼퍼> 에버하르트 베트게 김순현옮김 복있는 사람, 231-232쪽 () 필자 첨가

 
본훼퍼목사님의 싸구려 은혜에 대한 비판은 생활과 유리된 신앙, 사회와 유리된 교회를 비판하는 말입니다. 유대인들이 죽음의 수용소로 끌려가는 상황에서 독일교회가 침묵하는 일에 대해 비판하는 광야의 외침이었습니다. “까마귀처럼 우리는 싸구려 은혜라는 시체 주위에 모여 시체의 독을 받아마셨다. 그 결과 예수를 본받는 삶이 우리에게서 사라지고 말았다. 은혜에 관한 교리가 비할데 없이 신격화되어, 그 교리가 하느님 자체, 은혜 자체가 되어 버렸다.” 이는 사회 부조리와 악에 대해서는 눈 감으면서 하느님의 은혜와 축복만을 남발하는 오늘의 남한 교회를 비판하는 소리와 하나 다름이 없습니다. 용산참사나 사대강사업에 대해 침묵하는 교회를 향한 엄한 경고입니다.

 
그의 그리스도 이해는 교회가 아닌 세상을 위해 죽으셨다는 매우 당연한 사실에서 출발합니다. ‘그리스도는 세상 한 가운데서만 그리스도일수 있다’, “인간은 하느님 없는 세계 곧 이 세계의 하느님 상실을 종교적으로 은폐하거나 미화해서는 안된다. 인간은 세속적으로 살되 그 속에서 타인을 위한 하느님의 고난에 동참하도록 부름을 받고 있다.” 옥중편지에 나타난 그의 신학은 안타깝게 더 이상 전개되지 못했습니다.

 
[안중근의사의 종교/정치적 저항]

 
지난 금요일은 안중근의사 서거 100주년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작년 10월 26일 그가 이또 히로부미를 처단한 날이 군대나 국가적으로는 더 큰 의미가 있건만, 웬지 총을 쏜 날이 아닌 죽은 날에서야 국가나 군대가 나서서 호들갑을 떠는 이유를 알 수가 없습니다.(주2) 저는 오늘의 하늘뜻펴기를 오래 전부터 계획하고 있었지만, 정부와 군대가 안중근의사를 앞세우고 그를 장군으로 추앙하자는 운동이 일고 있는 상황에서 그를 ‘작은 예수’라 부르는 일이 약간 곤혹스러운 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글을 읽어본 저로서 그의 총을 든 행동은 군인 이전에 분명 예수를 따르는 신앙인의 행동이었음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안중근의사를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투사로만 알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 이토의 처단도 ‘암살’이라고 알고 있는 이들도 많습니다. 이것은 정확한 평가가 아닙니다. 안의사는 청년기에 이미 선각적인 교육가였고, 고도의 지성을 겸비한 지식이었으며, 스스로 의병부대를 편성하여 항일 의병전쟁을 감행한 의병대장이었습니다. 그는 천주교에 입교한 청년기에 이미 대학 교육을 시행해야한다고 판단하고, 대학교 설립안을 만들어 뮈텔 주교에게 제출한 적이 있었으며, 을사늑약 다음해인 1906년 27세에 자기 재산을 모두 털어 진남포에 ‘삼흥학교’와 ‘돈의학교’를 설립하여 교장으로서 신교육 구국운동을 전개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해 1907년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났을 때에는 관서지방 지부장이 되어 부인의 패물까지 헌납하면서 나라의 경제적 독립을 위해 헌신적으로 분투하였으며, 일제가 군사무력으로 조국을 병탄하려는 것이 명백해지자 노령 연해주로 건너가서 동포 청년들을 모아 군사훈련을 시켜 1908년 4월, 약 300명의 의병부대를 지휘하여 두만강을 건너 국내 진입작전을 전개하였습니다. 안의사는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 재무대신과 만주 분할지배를 협의하려고 1909년 10월 만주를 방문하게 되자, 자기의 활동 지역에 들어온 적 수괴에 대한 의병 작전의 일환으로 이토를 공격하여 처단하였습니다. 안의사는 이토를 처단한 것은 암살이 아니라 의병 참모중장의 자격으로 독립전쟁의 일환으로 의병활동을 한 것이라고 당당히 밝히고 있습니다.

 
[총을 든 생명 사랑의 사람]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보여주는 생생한 일화가 있습니다. 300명을 끌고 두만강을 건너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던 의병시절 모든 면에 중과부족인지라 거의 참패를 당했습니다. 그러나 그 와중에 일본군 포로 몇 명을 잡았습니다. 그의 동료와 부하들은 처형을 주장했고 그 또한 많은 부하를 잃었고 쫓기는 입장에 있었으니 얼마든지 처단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말하기를 "만국공법에 사로잡은 적병을 죽이라는 법은 없다. ...적들이 그렇게 폭행을 자행하는 것은 하느님과 사람을 다함께 분노케 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마저 저들과 같은 야만적인 행동을 해야만 하겠는가? 또 그대들은 일본의 4천만 인구를 모두 죽인 다음에 국권을 회복하려고 하는가?"라며 동료들의 항의를 잠재우고 포로를 석방 시킵니다. 이는 아무나 취할 수 있는 태도가 아닙니다. 전투에서 승리했다면 모르지만, 본인들도 언제 죽을지 모르는 쫓기는 위기 속에서 포로를 풀어주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모든 이들이 반대할 때, 그리고 풀어주면 분명 다시금 자신들을 향해 총을 들이 대밀 것이 분명한 상황 속에서 총까지 돌려주며 그들을 풀어주는 일은 하느님의 공의와 인류 평화에 대한 굳은 신념이 없이는 불가능한 행동입니다. 이로 인해 자신들의 위치가 폭로되어 곤경에 빠지고 안중근 또한 독립군 내에서의 위치도 불편해지긴 했지만, 그는 확고한 평화의 원칙, 하느님의 의의 원칙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이점에서 저는 그를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적을 사살함으로 승리를 목적으로 하는 군인보다는 적의 생명까지도 존중하는 한명의 신앙인으로 보는 것이고 그래서 약간의 오해와 문제를 무릅쓰고 그를 작은 예수라 부르는 것입니다. 그는 결코 사람을 죽이기 위해 총을 든 것이 아니라 평화를 세우기 위해 총을 들었던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느님 신앙과 민족 사랑]

 
안의사는 결단을 하기 전에도 그러했지만, 뤼순감옥에서 순국하는 날까지 매일 아침 기도를 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초기 신앙에 대해 자서전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성경을 받고 교리 토론 등을 하면서 여러 달이 지나자, 신덕이 차츰 굳어지고 독실히 믿어 의심치 않게 되었다. 천주 예수 그리스도를 숭배하며 지내는 사이에 날이 가고 달이 가서 몇 년이 지나갔다. 교회의 사무를 확장하기 위하여 나는 빌렘 신부와 함께 여러 곳을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에게 권면하고 전도도 하였다.” 그리고 그가 한 신앙 연설 또한 기록해 놓았습니다.

 
일부를 보면 “무릇 하늘과 땅 사이의 만물 가운데 사람이 가장 귀하다고 하는 까닭은 사람만이 영혼이 있기 때문입니다. 혼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생혼인데, 이것은 초목으로 생장하는 혼입니다. 둘째는 각혼인데 이것은 짐승의 혼으로 지각하는 혼입니다. 셋째는 영혼인데 이것은 사람의 혼으로 생장하고, 지각하고, 옳고 그름을 분별하고, 도리를 토론하고, 만물을 맡아 다스릴 수 있는 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이 가장 귀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영혼을 통해 인간은 하느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안중근, 하얼빈의 11일> 재인용 180쪽)

 
오늘날로 보면 별 주장이 아닌 것 같지만, 백년 전 선교 초기에, 그것도 20대의 청년 시절에 이런 얘기를 하며 돌아다닌 사실은 그의 깊은 신앙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개신교와 달리 가톨릭은 위계 질서가 분명하고 순명을 생명으로 합니다. 그는 한때 민족독립은 민족교육과 함께 병행해야 한다는 믿음을 갖고 뮈텔주교에게 대학을 세울 것을 요청합니다. 이에 뮈텔 주교는 ‘학문을 배우게 되면 신앙심이 약해질 우려가 있다면서 거절합니다.’ 그때 안의사는 조선인을 무시하는 이 처사에 분노하여 교는 믿을지언정, 외국인의 마음은 믿지 않겠다고 맹세를 하고 프랑스어 공부도 중단합니다.

 
이때부터 그는 기독교 신앙을 견지하면서도 천주교의 체제를 떠나 독립운동에 나섭니다. 이로 인한 그와 그의 가족들이 겪는 아픔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만 이는 그만이 당하는 고난이 아니었으니 그 얘기는 하지 않겠고, 여러분이 직접 읽어보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끝내 그는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하는 의거를 행하고 당당한 자세로 재판에 임해 일본인 검사는 물론 일본 간수들에게 까지 큰 감화를 끼칩니다. 사형 언도를 받자 그는 상소를 포기하고 한달간의 말미를 요청하고 <자서전>과 <동양평화론>을 씁니다. <동양평화론>은 미완의 글로, ‘대저 합하면 성공하고 흩어지면 패망한다는 것은 만고에 분명히 정해진 이치이다.’로 시작하여 ‘슬프다, 자연의 형세를 돌아보지 않고 같은 인종, 이웃 나라를 해치는 자는 독부의 환난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로 그칩니다. 그리고 사형날짜가 가까워오자 그때가 고난주간이어 예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성금요일에 처형해달라고 요청을 합니다. 그러나 하루 연기되어 1910년 3월 26일 32세의 나이로 그 생을 마감합니다.

 
물론 그의 생명은 거사 한해 전 11명의 동지와 함께 새끼 손가락를 끊어 ‘대한독립’이라는 혈서를 쓰는 단지동맹을 맺었을 때, 이미 그 자신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사형 직전 찾아온 두 동생에게 말합니다. “사람은 반드시 한 번은 죽는 것이므로 죽음을 두려워할 것이 아니다. 인생은 꿈과 같고 죽음은 영원한 것이니 슬퍼하지 말라.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 두었다가,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해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마땅히 우리나라의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동포들에게 각각 모두 나라의 책임을 지고 국민 된 의무를 다하여, 마음을 같이하고 힘을 합하여 공로를 세우고 업을 이루도록 일러다오. 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물론 지금도 그의 유해는 만주 땅 어딘가에 묻혀 있고 아직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정작 찾아야 할 것은 그의 유해가 아닌 하느님의 공의와 평화를 위한 그의 자유하는 정신이 아닌가 합니다. 오늘은 종려주일 단순히 종려나무 가지를 흔드는 날이 아닌 예수의 평화와 공의 실천의 정신을 이어가는 주일이어야 하고, 십자가 죽임을 뚫고 일어서는 부활을 바라보고 오늘 우리 각자의 고난을 뚫고 나아나는 한 주일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보냄의 말]

 
-동포에게 고함-

 
내가 조선의 독립을 회복하고

동양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3년 동안을 해외에서 풍찬노숙하다가

마침내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이곳에서 죽는다.

우리들 2000만 형제자매는 각각 스스로 분발하여

학문에 힘쓰고 실업을 진흥하며 나의 끼친 뜻을 이어

자유 독립을 회복한다면 죽는 자로서 유한이 없을 것이다.

 
-이 ‘자유 독립’이라는 말은 ‘평화 통일’이라는 말로 바꿔질 수 있을 것입니다.-

 
--------------

 
주1. (세 사람의 하늘뜻펴기 속에 이 표현이 직접 나오지는 않는다. 다만 지금의 청년세대는 이전 세대가 경험하지 못한 어려운 상황, 특히 대학생활이나 취직에 있어 경쟁이 치열하다는 얘기에 근거해서 필자가 재해석한 말이다.)

 
주2. (국사를 담당하는 어느 고등학교 교사의 증언에 의하면 안중근의사에 관한 특별교육을 실시하라는 지침이 갑작스레 하달이 되었다고 한다. 필자는 그 이유를 최근 다시금 사회적 문제로 떠오른 요미우리 신문에 발표된 이명박대통령의 독도발언과 관련되어 이를 희석하기 위한 작업이 아닌가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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