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기독여성들의 민족과 세계 연대 이야기
-일제시대(1910-45년) 기독교 에큐메니칼 여성운동의 흐름-
이덕주(감신대 교수/ 한국교회사)
송죽형제회: 에큐메니칼 여성 민족운동의 효시
일제의 무단통치가 도를 더해가던 1913년, 기독교 여성들이 ‘겁 없이 민족운동 단체를 결성하고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나섰다. 이름하여 송죽형제회(松竹兄弟會). ‘송죽결사대로도 불렸던 이 단체는 평양에 있던 숭의여학교 교사와 학생, 졸업생들로 조직된 비밀결사였다. 이 학교 졸업생으로 모교 교사로 봉직하고 있던 김경희 · 황애덕 · 이효덕 등은 105인사건에 자극을 받고 ‘죽음을 무릅쓰고 나라를 위해 헌신할 동지들을 규합하였다. 이들은 우선 가르치고 있는 제자들 중에 믿을 수 있는 학생들을 포섭하여 상급반 중에서 박현숙 · 송복신 · 최자혜 · 박경애 · 김옥석 · 황성도 · 홍마태 · 홍마리아 · 서매물 등을 얻었다. 숭의 출신으로 ‘돈 많은 과부였던 남산현교회의 안정석도 합류했다. 이들 졸업생과 상급반 학생들은 숭의여학교 기숙사에서 남성들이 조직했던 신민회와 비슷한 비밀결사를 조직했다. 그리고 그 이름을 ‘송형제회라 하였다. 절개와 지조를 상징하던 우리나라 소나무를 모임의 상징으로 삼았다. 송형제회 회원들은 모일 때마다 ‘사육신 성삼문의 시를 낭송했다.
이 몸이 죽어가서 무엇이 될 고 하니
봉래산 제일봉에 낙락장송 되었다가
백설이 만건곤할 제 독야청청하리라.
그들은 모일 때 마다 봉래산(금강산) ‘낙락장송(落落長松)이 되기를 다짐했다.
오래지 않아 숭의여학교 하급반 학생들 가운데도 모임이 결성되었다. 이들을 ‘죽형제회라 불렀다. 죽형제회 회원들은 고려 말 충신 정몽주의 시를 애송했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여학생들은 선죽교(善竹橋)에서 피를 흘린 정몽주의 절의(節義)를 마음속으로 다졌다. 죽형제회는 송형제회 회원 각자가 후배들을 포섭하여 철저하게 피라미드형 세포 조직으로 운영되었다. 그래서 죽형제회 회원들은 자신들을 지도하는 송형제회 선배만 알 뿐 다른 송형제나 다른 죽형제회 조직은 알 수 없었다. 송형제회는 회장 없이 집단지도체제로 운영되었고 따라서 이 두 형제회를 합쳐 부른 ‘송죽형제회의 정확한 회원 규모나 조직은 파악할 수 없었다. 송형제회의 지도급 인물들은 본명대신 암호명을 사용했으니, ‘원죽(原竹)은 황애덕을, ‘청해(靑海)는 박현숙을 각각 지칭하였다. 일제가 끝까지 이 조직을 파악하지 못한 것은 회원들이 철저한 비밀주의 원칙을 지켰기 때문이었다.
송죽형제회 회원들은 생일잔치를 위장하여 월 1회 회원 집을 돌아가며 모였다. 모일 때마다 태극기를 펴놓고 기도회를 가진 후 매월 30전씩 회비를 거두어 국외로 망명한 독립운동가들을 지원하였다. 당시 학교에 내는 월사금이 50전이었던 점을 감안할 때 결코 적지 않은 회비를 마련하기 위해 회원들은 베갯모, 타래버선, 수조끼, 수돌띠, 털 조끼, 성경책 주머니, 회중시계집, 도장집 등을 만들어 팔았고 떡 장수를 하는 경우도 있었다. 어떤 지회에서는 ‘여자상회라는 위장 상점을 차리고 회원들이 만든 수공예품을 팔아 자금을 모으기도 했다.
그리고 1916년 무렵, 이들 송죽형제회 회원들이 학교를 졸업하고 결혼하거나 기독교 학교 교사가 되어 지방으로 흩어지면서 교회 여성들을 중심한 지방 조직도 만들어지게 되었다. 전주에 박현숙, 평양에 황신덕, 황주에 채광덕, 목포에 최자혜, 사리원에 박경애, 부산에 서매물, 강서에 이마대, 선천에 황성도, 제주에 홍마리아 등이 조직을 만들었다. 그리고 이 같은 송죽형제회 비밀조직은 3 · 1운동 때 여성 만세시위의 연락망이 되었으며 3 · 1운동 직후 조직된 비밀결사 애국부인회의 근거가 되었다.
이처럼 송죽형제회는 한말 이후 남성들의 전유물처럼 인식되었던 민족 독립운동에 여성들이 적극 참여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 그 이전에도 이화학당의 ‘구국기도회, 교회여성들의 국채보상운동 참여, 간호학교 학생들의 의병 부상자 치료 등 여성들의 민족운동 참여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소극적이거나 남성 민족운동의 보조 역할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한일합병 이후, 일제의 무단 통치가 더욱 강화되어 공개적인 민족운동이 불가능하던 때, 더욱이 105사건으로 그동안 민족운동을 이끌던 남성 민족운동가들이 해외로 망명하거나 지하로 몸을 숨긴 ‘민족운동의 공백기에 여성들이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고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는 등 적극적인 독립운동을 추진하였다는 점에서 송죽형제회가 차지하는 비중이 적지 않다. 송죽형제회는 독립운동에 남녀가 없다는 점을 웅변으로 보여주었던 것이다.
또한 송죽형제회는 철저히 교회 여성들로 조직되었을 뿐 아니라 감리교와 장로교 여성들이 초교파적으로 참여하였다는데 특별한 의미가 있다. 송죽형제회 결성의 배경이 된 숭의여학교는 1905년부터 감리교회와 장로교회가 연합으로 운영하던 ‘초교파 기독교 학교였다. 그 결과 감리교 여성과 장로교 여성이 숭의에서 만나 함께 생활하면서 교파와 신조의 장벽을 넘어 서로 이해하며 협력하는 법을 배웠다. 그리고 그런 경험은 나라를 구하자는 민족적 과제 앞에 교파와 종파를 초월해 연대하는 우리 민족의 ‘에큐메니칼 민족운동 전통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된다.
이로써 송죽형제회는 ‘기독교 여성 에큐메니칼 민족운동의 효시가 되었다.
애국부인회 사건: 민족의 십자가를 지는 기독 여성들
남자들이 모두 잡혀갔으니 이젠 우리가 나설 차례지요.
감옥에 갇힌 독립운동가 가족들의 생활이 말이 아닙니다. 우선 그들을 돕는 것부터 합시다.
상해에 임시정부가 조직되었다고 합디다. 그분들께 독립운동 자금을 모아 보냅시다.
만주에서 밀파된 독립운동가들이 밀정에 쫓기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들을 도와주어야 합니다.
이런 식으로 교회 여성들이 뜻을 모으기 시작했다.
3․1운동에 가담했던 독립운동가들의 재판이 한창 진행되던 1919년 6월 중순, 평양 남산현교회에서 감리교 전도부인들과 여선교회 지도자들이 모였다. 3․1운동 직전 상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 초대 의정원 의장이 된 손정도 목사의 어머니 오신도와 딸 손진실, 과거 송죽형제회를 이끌던 안정석과 박현숙, 그리고 남산현교회 여선교회를 이끌던 김세지․이성실․최순덕, 기홀병원 간호사로 있던 박승일 등이 모임을 갖고 돈을 모으기 시작했다. 거의 같은 무렵 만세운동에 가담하고 투옥되었다가 2개월 만에 나온 평양 장대현교회 유치원 보모 한영신을 비롯한 김보원․김용복 등 장로교 여성들도 비슷한 모임을 결성하고 움직이고 있었다. 두 조직은 따로 따로 활동을 하다가 1919년 11월 임시정부에서 밀사로 나온 김정목의 주선으로 오신도를 총재, 안정석을 회장, 한영신을 부회장으로 하는 하나의 조직으로 통합되었다. 그러면서 이름을 ‘대한애국부인회라 하였다. 이어서 은밀하게 지방 조직을 확대시켜 나갔는데 진남포에서 전도부인 양진실과 속장 안애자, 강서에서 전도부인 김성심과 한독신, 함종에서 전도부인 김명덕과 강현실, 증산에서 전도부인 송성겸과 박치은 등 감리교 여선교회 지도자들이 가담하였다. 여기에 진남포와 순천 지역 장로교 여성들도 참여하여 전체 회원은 1백 명이 넘었다.
회원들은 철저하게 점 조직으로 되어 있어 상하 관계만 알았지 수평 관계는 전혀 몰랐다. 회원들은 기존의 감리교 여선교회(보호여회의 후신) 조직을 통해 포섭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전도부인들이 핵심적 역할을 하였다. 전도부인들은 ‘심방을 빙자하여 애국부인회 회원을 포섭하고 지도하였던 것이다. 회원들은 금․은 가락지와 비녀를 뽑았고 머리를 자르거나 뜨개질을 해서 돈을 모았다. 이들이 1년 동안 모금해서 임시정부에 보낸 돈이(후에 경찰 조사에서 밝혀진 것만) 2천 4백 원이 넘었다. 쌀 한 가마니에 2원 정도 하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 조직은 1920년 10월 일경의 비밀 첩보망에 탄로나 핵심 간부 50여 명이 체포되어 그중 간부급 15명이 징역 1년 - 3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서울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3․1운동이 일어난 직후 장선희․오현주․오현관․이정숙․이성완 등 정신여학교 졸업생들이 ‘혈성부인회를 조직하고 돈을 모아 투옥자 가족을 돕기 시작했다. 얼마 후 비슷한 성격의 ‘대조선독립애국부인회가 경하순․김원경․김희열 등에 의해 조직되었다가 임시정부에서 파견 나온 임득산의 중재로 두 조직을 합해 ‘대한민국애국부인회를 결성했다. 그러다가 1919년 10월 19일, 3․1 만세운동을 부르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고 나온 정신여학교 교사 김마리아와 이화여학교 교사 황애덕을 환영하는 비밀 모임이 정신여학교 기숙사에서 열렸다. 이 모임을 계기로 애국부인회 조직을 일신하고 회장 김마리아, 총무부장 황애덕을 세우고 장로교와 감리교 여성들의 초교파적인 독립운동 단체로 발전하였다. 개편된 애국부인회 조직에는 결사부(決死部), 적십자부(赤十字部) 같은 부서를 두어 독립 전쟁까지 염두에 두고 활동하였으며 전국으로 조직을 확대하여 부산, 대구 등지에도 지부를 두었다.
서울 애국부인회에 참여한 감리교 여성들은 이화여학교 교사 황애덕과 박인덕을 위시하여 배화학당 교사 이성완, 동대문부인병원 간호사 김태복, 감리교 부인성경학원(감리교협성여자신학교 전신)의 성경애 등 50여 명에 이르렀다. 이들은 각기 자기가 속한 기관에서 회원들을 포섭하고 지도하는 책임을 지고 있었다. 특히 평양 숭의여학교 출신으로 이화학당 교사로 있던 총무부장 황애덕은 과거 평양에서 송죽형제회를 조직한 경험이 있어 초교파적으로 발이 넓었을 뿐 아니라 평양의 애국부인회 지도자들과도 교분이 깊었다. 그를 매개로 하여 서울과 평양의 애국부인회가 통합된다면 전국 규모의 단일 여성 독립운동단체가 출현하는 셈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일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평양 애국부인회 회원들이 잡혀간지 한 달 만인 1920년 11월 말, 동지의 배반으로 서울 애국부인회 조직도 탄로나 김마리아와 황애덕을 위시한 간부 50여 명이 체포되었기 때문이다. 간부급 대부분이 3․1 만세 시위에 가담해서 재판을 받고 병보석, 혹은 면소 결정으로 잠시 풀려난 상태에서 애국부인회를 조직하였으니 더욱 심한 고문과 악형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대구에서 진행된 재판에서 주모급 김마리아와 황애덕은 징역 3년, 나머지는 1-2년을 선고받았다.
이로써 서울과 평양의 애국부인회는 조직 1년 만에 와해되고 말았다. 그러나 애국부인회가 우리 민족운동사와 교회사에 남긴 의미는 적지 않다. 우선, 애국부인회가 3․1운동으로 남성 독립운동가들이 투옥되거나 해외로 망명함으로 독립운동 추진 세력에 공백이 생길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여성들이 그 공백을 메웠다는 점, 지금까지 남성들의 운동을 뒷바라지하는 보조적 수준에 머물던 여성들의 독립운동을 결사 항전을 목적으로 한 본격적인 항일투쟁의 수준으로 끌어올린 점, 처음부터 상해 임시정부와 연대하여 재정적으로 지원하고 밀파된 독립운동가를 지원함으로 국내․외 독립운동의 연결 고리를 마련해 주었다는 점 등을 높이 평가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여성 독립운동 조직이 전도부인과 교회 여성을 중심한 교회 여성단체(여선교회와 여전도회)와 기관(학교와 병원)을 매개로 하여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기독교 민족운동의 실제적인 예를 보여 주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런 민족 독립운동에 교회 여성들이 교파를 초월하여 적극 참여함으로, 나라 사랑에 남․여가 따로 없고, 교파가 따로 없다는 기독교 여성 에큐메니칼 민족운동의 전통을 수립했다는 점에서 한국 교회사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태화여자관: 교회연합 여성 사회사업
3․1운동으로 제일 곤혹스러운 입장에 처한 자들은 ‘친일파였다. 전부터 나라를 팔아먹은 놈이라는 비난과 욕설을 듣고 있던 ‘친일파들은 3․1운동 이후 무장 독립운동가들의 테러 대상이 되었기 때문에 바깥출입도 제대로 못했다. ‘친일파의 상징적 인물인 이완용은 더욱 그러했다. 게다가 3월 1일 민족 대표들이 모여 독립선언식을 거행한 곳이 바로 그의 소유로 되어 있던 태화관의 별관 ‘별유천지 6호실이어서 그의 입장이 더욱 난처해졌다.
태화관(지금 태화빌딩)이 위치한 인사동 194번지 일대는 본래 세조(수양대군)의 조카사위인 능성부원군 구수영의 저택이 있던 곳으로 구수영은 이곳에 연못과 태화정(太和亭)이란 정자를 짓고 풍류를 즐겼다. 그 후 조선시대 여러 왕족과 권신(權臣)들이 이 곳에 들어와 살았는데 광해군 때 반정을 일으킨 인조가 왕이 되기 전 이곳에 살았다해서 ‘잠룡저(潛龍邸)로 불리기도 했다. 조선 말기 헌종 때 귀빈 김씨가 들어와 살면서 ‘순화궁(順和宮)으로 불렸고 1908년 궁내부대신 이윤용의 소유가 되었다가 한일합병 직후(1911년) 그의 형 이완용 소유가 되었다. 이완용은 이 곳에서 2년 동안 살다가 동네 사람들이 밤마다 돌을 던지는 바람에 옥인동에 새 집을 짓고 나갔다. 그 후 한 동안 비어 있다가 황토현에 있다가 화재를 당한 요릿집 명월관(明月館)이 1918년 이 곳을 빌려 ‘태화관(太華館)이란 요릿집을 내면서 유명인사들이 드나드는 곳으로 바뀌었다. 당시 천도교 지도자였던 손병희도 이 요릿집 단골손님 중 하나였고 그런 관계로 독립선언식이 이 곳 태화관에서 거행되었던 것이다.
특히 후원 깊숙한 곳에 위치한 태화관 ‘별유천지 6호실은 3․1운동 이후 ‘명소로 떠올랐다. 호기 있는 술꾼들은 독립선언식을 한 이완용 집에서 한 잔 하자며 태화관으로 몰려 왔다. 음식점 주인으로서는 반가운 일이었지만 소유주 이완용으로서는 곤혹스럽기 짝이 없었다. 결국 이완용은 이 집을 팔기로 했다. 그러나 2천 7백 평 대지에 기와집만 16채나 되는 저택을 살만한 부자가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교회가 나서서 그 집을 샀다. 당시 남감리회 여선교부 선교사로 서울지역 선교를 전담하고 있던 마이어즈(M.D. Myers)는 전부터 부녀자와 아동을 대상으로 복음 전도와 계몽 교육, 사회 복지 사업을 종합적으로 추진할 수 있는 ‘여자사회관(Woman's Social Center)을 건립할 계획을 세우고 그 후보지를 찾고 있었는데 마침 태화관이 매물로 나왔던 것이다. 그는 서울 한 복판에 위치한 태화관이야말로 ‘여성 사업을 하기에 적합한 곳이라 여겼다. 그래서 1년 동안 집주인과 흥정하고 미국 선교 본부 관계자들을 설득하여 마침내 1920년 9월 20일, 20만원에 이완용과 매매 계약을 체결하였다. 그리고 그 해 12월 11일 잔금을 치름으로 파란만장했던 태화관은 교회 소유가 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태화관을 빌려 요릿집을 하던 명월관 주인 안순환이 임대 계약기간이 아직 남았다며 집을 비워주지 않고 버틴 것이다. 음식점으로서는 한창 장사가 잘 되고 있는데 나가달라는 여자 선교사의 요구를 순순히 받아들일 리가 없었다. 마이어스는 기다리다 못해 이숙정․박화정 등 한국인 직원과 함께 짐을 싸들고 태화관에 들어가 방 하나를 차지하고 집을 비워달라며 ‘농성(?)을 시작했다. 이들은 저녁 술 손님이 올 때 쯤 되면 목청껏 찬송가를 불러 제켰다. 교묘한 영업 방해였다. 술 마시러 왔다가 찬송 소리를 듣고 돌아가는 손님들이 늘어났다. 그러자 음식점 측에서는 마이어스 일행이 묵고 있는 옆방에 만취한 손님과 기생들을 들여보내 밤새껏 장구와 가야금을 치며 노래를 부르게 했다. 교묘한 수면 방해였다. 이런 식으로 찬송가와 술타령 노래 대결이 계속되었고 마이어스 일행은 며칠 밤을 꼬박 새웠다.
마이어스는 여러 사람에게 지혜를 구했다. 그 때 종교교회 양주삼 목사가 꾀를 냈다.
음식점 깃발을 내립시다.
그 때 태화관 정문에는 명월관 깃발이 걸려 있었는데 깃발을 내리면 음식점이 폐업한 것으로 알고 손님이 오지 않을 것이라 여긴 것이다. 마이어스는 태화관과 담 하나 사이에 있던 중앙교회 청년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교회 청년들은 대낮 한가한 틈을 타서 명월관 깃발을 내렸다. 음식점 주인이 마이어스에게 깃발을 도로 빼앗아 올 수 없었던 것은 마이어스가 총독부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외국인이기 때문이었다. 음식점에서는 새로 깃발을 만들어 꽂았다. 그러자 마이어스측에서 다시 내렸다. 깃발을 올리는 족족 내렸다. 그러기를 다섯 차례, 방법을 바꾸었다.
이번엔 미국 국기를 올립시다.
마이어스는 명월관 깃발을 내리면서 그 자리에 미국 국기인 성조기(星條旗)를 꽂았다. 그러자 음식점측이 새 깃발을 올리지 못했다. 감히 미국 국기를 뽑을 용기가 없었던 것이다. 이것으로 ‘기(旗) 싸움이 끝났다. 명월관 주인 안순환은 명동 입구에 식도원이란 새 음식점을 차리고 그리로 옮겨 갔다. 마이어스는 태화관에서 그 해 성탄절 예배를 드릴 수 있었다.
이로써 조선시대엔 명문대가(名門大家), 권문세도(權門勢道) 양반 귀족이 살던 ‘대감집이자 왕이 등극하기 전에 살았던 ‘잠룡저였고 일제시대엔 친일파 이완용 가족이 살다가 장안 제일의 요릿집이 되어 3․1운동 때 독립선언식이 거행된 ‘민족 성지가 된 태화관이 교회 소유가 되었다. 마이어스는 서둘러 집을 수리한 후 1921년 4월 1일 ‘태화여자관(泰和女子館, 지금의 태화기독교사회복지관)이란 이름으로 문을 열었다. 이 때부터 이 곳에서 주기적으로 여성과 학생․청년을 대상으로 전도 집회와 성경 교육이 실시되었고 학령기를 놓친 부녀자와 직업여성을 위한 교육, 가정주부를 위한 요리와 재봉 교육, 여성 위생과 아동 보건 사업, 유치원과 탁아 사업, 직업과 연령에 따른 다양한 친교(구락부) 활동, 무산아동을 위한 야학과 우유 급식 사업 등 다양한 내용의 여성 사회복지 사업이 전개되었다. 마이어스는 요릿집으로 사용하던 집들을 대부분 그대로 사업장으로 사용하였는데 특히 독립선언식이 거행되었던 ‘별유천지 6호실은 그대로 보존하여 유치원 교사로 사용하였다. 그 결과 요릿집 시절, 남성 술꾼들의 성적 노리개로 전락한 기생들의 한 맺힌 노랫가락이 울려 나오던 곳에서 복음의 은혜에 감격한 부인들의 찬송 소리와 다양한 프로그램에 참여하며 새로운 자아를 발견한 여인과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마이어스가 여자사회관을 내면서 그 이름을 이곳에 있던 건물의 옛 이름 ‘태화관(太華館)에서 그대로 따오면서도 한문으로 ‘泰和로 바꾼 이유가 여기 있었다. 마이어스는 태화여자관을 시작하면서 봉건시대 남성 중심의 사회 구조 속에서 억압과 멸시를 받아온 한국 여인들이 이곳에서 기독교 복음을 받아들임으로 큰 평화를 누리고 봉건 사회에서는 함께 할 수 없었던 양반과 천민, 부자와 가난한 자, 어른과 아이, 남자와 여자가 이 곳에서 함께 만나고, 나누고, 도와줌으로 하나님 나라의 큰 조화가 이루어지기를 꿈꾸었던 것이다.
이처럼 서울에서 태화여자관을 설립한 남감리회 여선교부는 같은 목적으로 지방에서도 여자관을 설립하였는데 개성의 고려여자관, 원산의 보혜여자관, 춘천의 춘천여자관, 철원의 철원여자관 등이 그것이다.
상록수 최용신: 기독교 여성 농촌운동
신학생들이 졸업하고 농촌에 가려하질 않으니 와서 그들을 계몽시켜 주시오.
1928년, 당시 서울 충정로에 있던 협성여자신학교 교장 채핀(A.B. Chaffin) 부인이 미국 뉴욕의 컬럼비아대학에 있던 황애덕(黃愛德, Esther Whang)에게 보낸 편지 내용이다. 빨리 돌아와 한국 신학생들에게 ‘농촌 사업의 중요성을 일깨워 달라는 부탁이었다. 3․1운동 때 대한애국부인회 사건으로 옥고를 치르고 나온 황애덕은 민족 독립을 성취하기 위해서 우선 실력을 키워야 한다.는 생각에서 1925년 미국 유학길에 올랐고 컬럼비아대학에서 ‘농촌 문제로 교육학 석사를 받았다. 그는 일제 수탈정책의 최대 피해자로 지목되는 한국 농촌이 처한 현실을 안타까워하며 한국 경제의 기반이 되는 농촌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한국 민족과 사회의 자주적 독립은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다. 3․1운동 이전 40% 수준이던 소작농 비율이 3․1운동 이후 80%로 급증하였는데 이는 한국에 진출한 일본인 자본가와 일본에 우호적인 토착 지주 중심으로 경제 정책을 펼친 결과였다. 결국 대대로 농사를 짓던 땅을 빼앗기고 농사지을 땅도 얻지 못한 농부들은 도시로, 만주로 이주하였다. 이 같은 ‘이농(離農) 현상으로 농촌 인구는 급격히 감소되었고 그래서 농촌은 신학교 졸업생에게 기피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황애덕은 농촌 교역자 양성을 도와 달라는 채핀 교장의 부탁을 받고 즉시 귀국하여 협성여자신학교 교수로 취임, 신학교 안에 ‘농촌사업지도교육과를 신설하고 전문 ‘농촌 운동가를 양성하기 시작했다. 이런 그의 취지에 동감하여 평생을 농촌 목회에 투신하기로 결심하고 황애덕 교수의 지도를 받은 대표적 인물이 김노득(金路得)과 최용신(崔容信)이다. 황애덕 교수는 1929년 여름방학 때 두 학생을 황해도 수안군 천곡면 용현리 산골에 파송하였다. 이들은 3개월간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가르치는 농촌 봉사활동을 하였는데 김노득은 이 때 맺은 농촌 아이들과의 인연 때문에 1년만 더 공부하면 졸업인 신학교 과정을 중단하고 아예 수안에 ‘삶의 자리를 마련하고 ‘시골 전도사가 되었다. 1935년 <감리회보>는 그의 활약상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경성 기독교조선감리회 신학교에 적을 둔 김노득양은 사리원 지방 수안 구역 내 용현교회에서 낮에는 80여 명의 무산 아동을 모아서 문맹퇴치에 열중하고 밤에는 주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하야 2, 30리를 도보로 다니면서 전도하는바 캄캄 밤에 등도 없이 다니다가 광야와 산간에서 실로(失路)를 하고 방황하기를 한 두 번이 아니며 그는 매일 밤 새로 2시 경까지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 일과를 삼는 고로 평균 하루에 4시간 이상을 자본 적이 없으며 그리하야 쥬의 복음의 빛과 교육이 관민간(官民間)에 찬송하기를 마지아니한다더라.
김노득은 해방되기까지 16년 동안 용현리를 떠나지 않았다. 주변에선 가난과 고난의 길을 고집하는 그를 보고 어리석다 하였으나 그는 자신이 선택한 ‘농촌 운동과 ‘농촌 목회를 후회하지 않았다. 황애덕 교수는 자신이 미국 유학하던 시절 알게 된 미국인 친구들이 조직한 ‘에스더 후원회(Esther Circle)에서 보내오는 선교비를 김노득에게 보내 그의 ‘농촌 헌신을 지원하였다.
황애덕의 또 다른 제자 최용신도 마찬가지였다. 1928년 여름의 ‘수안 경험을 통해 ‘농촌 헌신을 결심하게 된 그는 1931년 10월, 경기도 수원군 반월면(지금 안산시 본오동) 천곡리, 속칭 ‘샘골로 내려갔다. 그곳 천곡교회엔 협성여자신학교 선배 장명덕 전도사가 시무하고 있었다. 최용신은 졸업반이던 그해(1931년) 6월, 학생들의 ‘선교사 교수 배척 휴학동맹사건에 주동자로 가담하였고 그 때문에 학교 당국으로부터 ‘휴학 처분을 받은 상태였다. 그러지 않아도 그는 김노득처럼 농촌 상황이 학업을 마치고 내려가도 될 만큼 여유롭지 못하다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복학을 기다리지 않고 이내 농촌으로 들어갔다. 그도 황애덕 교수의 주선으로 기독교여자청년회(YWCA)로부터 재정 지원을 받으며 샘골에서 학교를 설립하고 부녀자와 아동을 대상으로 주․야간으로 ‘민족 계몽 교육을 실시하였다. 그 때문에 그의 학교와 사업은 경찰 당국의 끊임없는 감시와 간섭을 받아야 했다.
최용신은 1934년 3월, 일본 유학길이 열려 코오베여자신학교에 입학하였으나 6개월 만에 각기병에 걸려 유학의 꿈을 접고 ‘병든 몸으로 샘골에 돌아왔다. 이후 3개월은 질병과 가난 외에 학교를 폐쇄하려는 일제 당국의 위협과 싸워야 했던 ‘극난(克難)의 시간이었다. 이 무렵 그가 <여론>(女論)이란 여성 잡지에 기고한 농민의 하소연이란 글이 있는데 ‘도시인을 향한 분노의 함성과 눈물의 애원을 동시에 들을 수 있다.
도시의 여러분이시여! 당신들의 생활은 얼마나 행복스럽고 얼마나 안락하십니까. 여러분 중에는 하루 저녁 오락비와 한 벌 옷값으로 몇 백 원을 쓰신다 하옵거든 우리 농촌의 어린이들은 자라기에 배가 고프고 배움에 목이 마릅니다. 여러분이시여! 곡식을 심으면 1년의 계(計)가 되고 사람을 기르면 백년의 계가 된다고 하엿거든 이 강산을 개척하고 이 겨레를 발전시킬 농촌의 어린이를 길러 주소서. 뜻 있는 이여 우리 농촌의 아이들과 딸의 눈물을 씻쳐 주소서.
결국 최용신은 병에서 회복하지 못하고 1935년 1월 23일, 수원 도립병원에서 27세 ‘미혼의 나이로 별세하여 샘골 동산에 묻혔다. 그의 장례식 날, 일본에 유학중이던 약혼자 김학준이 귀국해서 자기 외투로 관을 덮었다고 한다. 김학준은 최용신과 같은 교향(원산시 두남리) 출신으로 최용신과 약혼한지 10년이 지났건만 학업과 농촌 사업 때문에 결혼식을 올리지 못한 ‘최장기 약혼자였다(김학준은 일본 전수대학에서 경제학을 공부하고 귀국하여 함흥 영생여고 교사를 거쳐 해방후 조선대학교 교수를 역임하였고 1975년 별세하여 샘골 최용신 곁에 묻혔다).
최용신이 별세한 후 그가 설립했던 천곡학원은 일제의 탄압을 견뎌내지 못하고 1939년 폐쇄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의 이야기는 심 훈의 <상록수>란 단편 소설(1935년)로 부활하여 젊은이들의 가슴을 뜨겁게 하였고 1990년대 들어 안산에 전철이 들어오면서 그가 활동했던 마을엔 ‘상록수역이 생겨 아파트촌으로 변한 샘골 마을에서 있었던 60년 전 한 처녀 교인의 ‘농촌 사랑 이야기를 기억나게 한다.
절제운동: 기독여성 사회운동
금수강산 내 동포여 술을 입에 대지마라
건강지력 손상하니 천치 될까 늘 두렵다
아 마시지 말라 그 술 아 보지도 말라 그 술
조선 사회 복 받기는 금주함에 있나니라.
1963년 개편 찬송가가 나오면서 삭제되어 더 이상 부를 수 없게 되었지만 1950년대까지만 해도 종종 부르던 찬송가 ‘금주가(禁酒歌)이다. 1920년대 이화여전에서 음악을 가르치던 임배세가 작사 작곡한 찬송가로 1931년 새로 편찬한 신정 찬송가에 수록된 이후 주일 예배는 물론이고 부흥회나 사경회 같은 연합 집회 때 자주 불렸다. 이 찬송의 주제는 물론 술은 일체 입에도 대지 말라는 ‘금주이지만 내용은 금주해서 남은 돈으로 학교 세워 자녀 교육에 쓰자, 술로 몸을 망치지 말고 건강하여 나라 위해 몸 바치자는 것으로 다분히 ‘민족주의 계몽운동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1930-40년대 교인들은 이 찬송을 ‘독립운동가처럼 생각하고 목청껏 불렀으며 그 때문에 일제말기(1942년) 이 찬송은 남궁억의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과 함께 불러서는 안 될 금지곡으로 찬송가에서 삭제되기도 했다. 그만큼 일제는 1930년대 한국 교회의 ‘금주 운동을 불순한(?) 운동으로 보았다. 더욱이 당시 담배와 마찬가지로 술은 전매 사업이라 그 수익금은 총독부 재정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기에 금주운동은 일제에 대한 경제적 저항운동의 성격도 갖고 있었다.
‘금주와 ‘금연(혹은 단연)을 내용으로 하는 ‘절제운동(節制運動, Temperance movement)은 1920-30년대 한국 교회의 대표적인 민족주의 사회운동이었다. 이 운동은 3․1운동 직후 변화된 정치․사회 상황에서 이해해야 한다. 일제는 1910년 ‘합병 이후 소위 ‘무단통치로 불리는 무력적 민족 탄압정책을 펼쳤으나 한민족의 ‘거족적인 저항운동으로 일어난 3․1운동을 겪으면서 그 한계와 문제점을 인식하게 되었고 이에 ‘문화 통치로 통치 개념을 바꾸었다. 이는 외견상으로 한민족에게 어느 정도 언론․출판․집회의 자유를 허용하여 강압 통치로 인한 불만을 해소시키면서 내부적으로는 보다 철저한 방법으로 한민족의 민족정신과 독립 의지를 말살하려는 ‘문화적 침략 정책을 사용하였다.
그런 맥락에서 총독부는 일본인 역사 학자를 동원하여 ‘일선동조동근론(日鮮同祖同根論, 일본과 조선 역사의 뿌리가 같고 조상은 하나라는 논리) 같은 ‘식민지 사관에 입각하여 우리 민족의 역사와 문화 전통을 일본 것보다 열등한 것으로 왜곡하거나 소멸시키는 한편 일본 문화를 적극 도입하여 궁극적으로는 한민족의 문화적 일본화를 추구하였다. 이 같은 문화 통치 원리가 1930년대 들어서 ‘황민화(皇民化)로 표현되는 일본 동화정책으로 연결되었다. 이런 맥락에서 1920년대 들어 일본의 ‘왜색 퇴폐문화가 물밀 듯이 들어왔고 많은 청년․학생들이 그 문화에 오염되어 우리 민족의 문화적 전통은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 중에도 술과 담배, 아편, 성 매매 같은 퇴폐 소비문화의 폐해가 심했다.
이런 상황에서 의식 있는 교회 지도자들이 금주와 단연, 아편 금지와 공창 폐지를 내용으로 한 절제 운동을 전개하고 나섰다. 그 중에 핵심은 금주 운동이었다. 한국 교회가 금주 운동을 전개한 것은 1910년대 일로서 세계기독교여자절제회(WCTU) 회원이었던 이화학당의 커틀러 등 선교사 부인들이 개인적인 차원에서 금주 홍보 운동을 펼치다가 1923년 5월 세계기독교여자절제회에서 파견한 순회 강사 틴링(C.I. Tinling)이 내한해서 전국을 돌며 기독교 학교에서 ‘금주 강연회를 개최한 것을 계기로 조직적인 금주운동을 벌이게 되었다. 즉 이화학당 교사로 틴링의 통역이 되어 금주 강연회에 동행했던 손메레는 틴링 강연회를 계기로 한국에서도 절제운동을 적극 추진하기로 결심하고 장로교와 감리교 교회 여성 지도자들을 규합하여 1924년 8월 조선여자기독교절제회를 창설하였다. 이것이 지금도 활동하고 있는 대한여자기독교절제회의 출발이다.
상동교회 출신으로 이화학당을 졸업한 후 모교 교사로 활약하고 있던 손메례는 절제운동에 전념하기 위해 이화학당 교사직을 사임하고 절제회 초대 총무가 되어 전국을 순회하며 금주 강연회를 실시하였다. 그의 금주 강연은 논리적이고 과학적이었다. 그는 청중 들이 보는 앞에서 생 달걀에 알코올을 부어 그것이 익는 광경을 보여줌으로 술의 독함을 증명하였고 당시 한국인 가구당 1년 소득이 360원도 안되던 때에 주세로 1년에 총독부에 들어가는 돈이 1년에 8천 4백만 원이나 된다는 정부 통계 수치를 들어 청중들의 ‘민족 감정을 자극했다. 실제로 그는 절제운동을 민족운동의 하나로 해석하였다.
술은 사실 탄환 없는 대포와 갓흔데 도로혀 용기를 준다구 밋게하엿다. 여러 해 연구한 결과 그 비밀을 알엇다. 그러니 우리는 금주하고 금주운동을 철저히 하야 조선을 살니자. 조선의 금주운동은 모든 운동 중에 가장 큰 운동이다. 육을 살니고 영을 살니는 운동이며 죽어가는 조선을 살니는 운동이다. 여러분은 때때로 왜 이 금주운동을 니저버리는가?
지방을 순회하며 절제운동을 죽어가는 조선을 살리는 운동이라고 역설하는 손메레의 강연이 경찰 당국의 감시와 방해를 받을 것은 당연했다. 손메레의 절제 강연회장에는 경찰이 임석하여 강연 내용을 점검하였고 강연 중단 명령을 받거나 강연 후 지역 경찰서에 연행되어 조사를 받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는 경찰 당국의 집중 감시를 받았던 ‘요시찰 인물 이었다. 그러다 결국 절제회 운동이 정점에 달하는 1929년 돌연 손메레는 총무직을 사임하였다.
손메레가 절제회 총무직을 사임한 이유는 분명치 않지만 그가 1927년 결성된 사회주의․민족주의 연합 여성 민족운동 단체인 근우회(槿友會) 발기위원으로 참석하는 등 보다 적극적인 의미의 민족운동에 가담하게 되면서 일제 당국으로부터 사임 압력을 받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로써 손메레는 절제운동 현장에서 떠났지만 그 후임으로 3․1운동 투옥 경험이 있는 이효덕이 절제회 총무가 되어 일제말기 절제회가 해산되기까지 절제운동의 맥을 계속 이었다.
신간회와 근우회: 좌우합작운동
1920년대 중반 국내외에서 민족주의와 공산주의, 기독교와 사회주의 운동 세력들 사이에 갈등과 마찰을 빚고 있을 때 ‘적전 분열(敵前分裂)을 우려하는 민족주의․사회주의 ‘민족 운동 지도자들이 이념과 신념을 초월하여 단일 민족운동 연합 전선을 결성하려는 움직임이 일기 시작하였다. 이는 3․1운동 때 신분과 계급, 지역과 종파 장벽을 극복하고 전개된 ‘거족적 항일 독립운동의 맥을 이으려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시도는 사회주의 경향을 취하고 있던 <조선일보> 기자들과 기독교청년회(YMCA) 지도자들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새로 결성될 조직의 지도자는 민족주의와 공산주의, 기독교와 타종파 세력을 아우를 수 있는 상징적인 인물이어야 했는데 기독교청년회 총무를 역임한 원로 지도자 이상재(李商在)가 거론되었다. 당시 이상재는 78세 고령으로 항일 투쟁을 추구하는 사회단체 전면에 나서기에는 어려운 형편이었고 그래서 처음엔 사양하였으나 <조선일보> 기자 신석우가 찾아와 선생님이 안 나오시면 학생들이 뒤따르지 않을 것입니다. 회장 하시는 것이 그렇게 두렵습니까?라고 하자 두 말 않고 그럼 나가지하고 회장직을 맡기로 했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단체가 신간회(新幹會)다. 1927년 2월 창설되었는데 모임 이름을 신간회로 한 것은 뿌리나 가지는 여럿일 수 있지만 줄기는 하나라는 의미로 그동안 있었던 민족운동 단체들 간의 반목과 갈등을 접고 하나로 뭉쳐 민족의 자주 독립을 추구하자는 취지였다. 그렇다고 아무 단체나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신간회는 좌표를 ‘반제국주의(反帝國主義), ‘반식민주의(反植民主義), ‘반봉건주의(反封建主義) 민족운동으로 설정하였다. 여기에 사회주의 계열과 민족주의 좌파 세력(총독부 정책에 타협하는 개량주의적 우파 세력과 달리 이들은 총독부나 일제 정책에 비타협적 조선을 취하였다)이 참여하였다. 사회주의 계열은 처음에 민족주의나 기독교에 대해 비판적이었으나 1926년 1월 1차 조선공산당 사건을 겪으면서 상당 부분 조직이 와해되어 합법적인 대외 활동 조직이 필요했고 1차 공산당사건 이후 사회주의 운동에서 주도권을 장악한 화요회 계열의 정우회가 1926년 11월 계급주의 노선을 철회하고 민족주의 좌파 세력과 연대할 수 있다는 타협적 자세를 취함으로 신간회 참여가 가능하게 되었다.
그리고 기독교 민족운동가들도 민족주의 좌파 계열 몫으로 신간회에 대거 참여하였는데 회장으로 선출된 이상재를 비롯하여 연희전문학교 교수 출신인 조병옥이 적극 참여하였고 이외에 3․1운동에 참여했던 박동완․이갑성․정춘수․이동욱과 김활란․김영섭 등이 중앙위원회 간사로 참여하였다. 이갑성을 제외하곤 모두 감리교 출신인 것이 눈에 띈다. 이는 그만큼 당시 감리교회가 사회와 민족 문제에 적극적인 자세를 취하였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특히 기독교측 핵심 지도자로 활약했던 조병옥은 미국 유학 시절 경제학이 전공이지만 신학에서 라우센부쉬의 ‘사회복음주의 (Social Gospel) 신학을 공부하고 돌아와 기독교와 사회주의 대화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는데 그 때문에 선교사들의 눈 밖에 나 연희전문학교 교수직에서 밀려나 기독교청년회 청년부 간사로 근무하고 있었다. 그는 후(1929년)에 진보적 기독교 지도자들을
신간회의 자매 기구격인 근우회(槿友會)는 신간회보다 3개월 늦은 1927년 5월에 창설되었다. 무궁화 친구라는 단체명에서 느낄 수 있듯 근우회 역시 민족운동을 지향하였다. 반제국주의, 반식민주의, 반봉건주의 민족운동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신간회와 같지만 여기에 ‘여자 해방이라는 시대적 과제를 하나 더 추가한 것이 다르다. 근우회는 선언문에서 이 점을 분명히 밝혔다.
여자는 벌써 약자가 아니다. 여성 스스로 해방하는 날, 세계가 해방할 것이다
그리고 구체적인 내용에서 여성 차별 법령 철폐, 조혼 금지와 결혼의 자유, 여성 노동자 임금 차별 철폐, 농촌 여성 경제생활 개선 등 적극적인 의미의 여성 권익 향상 운동을 추진하였다.
근우회도 사회주의 계열인 여성동우회와 기독교여자청년회(YMCA)를 중심한 기독교 여성운동가들이 대거 참여하였는데 초대 회장으로 선출된 김 선을 비롯하여 차사백․방신영․유각경․황신덕․김영순․김활란․이현경․홍에스더 등이 중앙위원으로 참여하였고 차미리사․양매륜․손메레․최활란․이효덕․신알벨토․김영순 등이 발기위원으로 참여하였다. 숫자로 보면 여성동우회측 인사보다 기독교 인사들이 배 이상 많았으며 그 중에 감리교 여성이 반 이상을 차지하였다. 기독교 여성들은 3․1운동 당시 애국부인회 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룬 인사들과 3․1운동 후 조직된 기독교여자청년회, 기독교여자절제회 등 초교파 여성운동 단체에 참여했던 인사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단일 민족운동전선 신간회나 근우회 에 참여한 단체나 개인은 물론이고 이를 보는 일반 사회도 큰 기대를 걸었다. 그러나 두 단체의 운명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우선 일제 경찰 당국은 단일 민족저항운동 세력의 확산을 경계하였다. 1927년 신간회와 근우회가 창설될 때는 묵인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던 경찰 당국은 1928년 제 2차 조선공산당 사건을 일으켜 재차 국내 공산당원들을 체포하였는데 조사 결과 공산당원의 40%가 신간회 혹은 근우회 회원인 것을 알고 이후 두 단체의 집회를 일체 금지시켰다. 그리고 1929년 11월 광주학생사건이 일어나고 이것을 계기로 신간회와 근우회 회원들이 전국적인 민중 시위를 계획하고 있음을 알고 두 단체 지휘부를 검거하였다. 이것을 계기로 신간회나 근우회는 사실상 와해 상태에 들어갔다.
여기에다 신간회나 근우회에 참여하였던 사회주의 계열의 입장 변화도 두 단체 와해를 촉진하였다. 신간회나 근우회는 1927년 처음 출발할 때 민족주의자, 혹은 기독교인들이 전면에 나서 운동을 이끌었으나 1년 만에 주도권은 사회주의 쪽으로 넘어갔다. 신간회는 창립 1개월 만에 회장으로 추대되었던 이상재가 별세하였고 그 후임으로 사회주의 계열인 허헌이 회장이 되면서 운동 노선과 방법론이 보다 폭력적인 내용으로 바뀌었고 그 때문에 기독교측 인사들이 대거 신간회를 떠났다. 근우회 역시 처음엔 기독교인들이 주도하였지만 1928년 지방 조직화 과정에서 사회주의 계열이 대거 참여함으로 밀리기 시작하다가 1929년 7월 전국대회에서 허 헌의 딸인 허정숙이 집행위원장이 되면서 근우회도 사회주의 노선을 적극 취하였고 이것을 계기로 기독교측 인사들은 대부분 근우회를 떠났다.
결국 신간회나 근우회는 창설 2년 만에 사회주의자들이 주도하는 ‘좌파 성향으로 바뀌면서 기독교와 민족주의 세력들이 대거 이탈하였고 게다가 2차 조선공산당 사건과 광주학생사건을 겪으면서 사회주의 지도부가 투옥되자 더 이상 활동이 어렵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국제 사회주의(공산주의) 운동을 지휘하고 있던 모스크바의 코민테른은 신간회나 근우회를 ‘소부르조아적 정치운동 집단으로 그 운동의 한계를 지적하면서 신간회를 해소(解消)하고 지하운동을 전개하라는 지령을 내렸다. 그에 따라 신간회는 1931년 5월 해체되었고 근우회는 이보다 앞선 1930년 말에 해체되었다.
비록 4년 단명으로 끝났지만 신간회와 근우회는 한국 근대사에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무엇보다 신간회와 근우회는 3․1운동 직후 일제의 간교한 민족 내분 정책에 의해 민족운동 내부의 갈등과 분열이 심화되고 있던 상황에서 다시 한 번 이념과 종파를 초월하여 사회주의와 기독교, 민족주의 운동 세력들이 단일 민족운동 전선을 구축하였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1907년의 신민회 운동이나 3․1운동에서 확인되었던 바, 민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종파나 이념을 초월하여 연대한다는 민족의식이 신간회와 근우회를 통해 재확인된 것이다. 그리고 한국 교회사에서 신간회와 근우회는 민족의 자주 독립을 ‘시대적 명제로 인식한 그리스도인들이 이념이 다른 사회주의자들과 연대하였던 ‘공동 투쟁 공간이었다는 점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사회주의와는 갈등과 증오, 반목과 대결 구도 속에 80년 세월을 지내온 한국 기독교 역사에서 기독교인과 사회주의자가 우호적인 관계에서 손을 잡았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신간회와 근우회 ‘4년 역사는 오늘 우리에게 존재 이상의 의미를 던져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