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형[아들]은 눈을 부릅뜬 채 입을 벌리고 그 무엇을 부르짖다가 그 무엇을 노려보다가 쓰러졌음이 분명했다. 내가 근형의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 볼 때 옆에 있던 의사 한진섭씨는 근형의 부릅뜬 눈을 감기면서 기도를 올렸다. ‘당신의 거룩한 피는 역사에 길이 빛날 것이며 민족의 가슴에 오래 살 것입니다. 고이고이 잠드소서’ ‘민주주의 만세! 이근형군 만세!’라고. 그러나 나는 울지 않았다. 거룩한 내 아들 아니 대한의 아들이 과감히 죽어 가는데 왜 울어야 하는가! 장하다. 내 아들. 어미는 울지 않으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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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신대 이덕주 교수 ⓒ베리타스 DB |
한국복음주의협의회(회장 김명혁 목사) 4월 월례발표회에서 발제를 맡은 이덕주 교수가 4.19 학생운동 당시 독재 정권에 항거하다 장렬히 죽음을 맞은 이근형 군의 어머니 이계단 여사의 수기를 읽어 내려갔다.
기독학생 이 군의 부릅뜬 눈이 향하는 곳은 어디였을까? 그곳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이 군이 몸을 담았던 “한국교회”였다는게 이덕주 교수의 해석이었다. 이승만 정권이 해방직후 12년 동안 강압적인 독재 정치를 할 수 있었던 데에는 한국교회의 힘이 컸다.
이 교수에 따르면, 19세기 말 선교를 시작한 기독교는 한말 일제의 침략으로 인한 위기 상황, 그리고 일제시대 일제의 식민통치로 인한 민족적 수난 상황에서 민족의 근대화와 자주독립이라는 민족적 과제에 나름대로 부응해 ‘민족과 함께 하는 교회’의 면모를 구축했다. 그러나 해방직후 그 면모는 그림자처럼 사라졌다.
이 교수는 "해방직후 분단 시대에 한국교회는 신학적, 정치적 이해관계로 인한 교회 안의 갈등을 극복하지 못하고 지속적인 분열을 연출했으며 민족의 화해와 일치, 그리고 그것을 통한 평화정착이라는 민족적 과제에 충실하지 못했다"며 "오히려 해방 후 한국교회는 분단구조 속에서 배태된 1인 혹은 1당 독재 그리고 그로 인한 정치 사회적 부패구조와 현실에 침묵하거나 방조함으로 사회악을 고발하고 경계해야 할 ‘예언자적’ 기능을 상실한 종교집단의 모습을 보여줬다"고 주장했다. 기독교는 자유당 정권의 부패와 타락에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는 얘기다.
따라서 4.19는 부패하고 타락한 정치권에 대한 심판에 그치지 않았다. 이 교수는 "그런 정치권력의 부패와 타락에 침묵하였을 뿐 아니라 동조 내지 방조한 교회에 대한 심판이기도 했다"며 "4.19는 정치권력에 밀착해 이권과 편의를 추구하려는 종교단체의 집단 이기주의에 대한 엄중한 심판이었다"고 말했다,
앞서 이 교수는 자유당 정권에 협조했던 기독교의 부끄러운 모습들을 담은 생생한 에피소드를 들려주기도 했다. 그 중에서도 ‘기독교계의 자유당 선거지원’에 관한 이야기는 큰 충격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의 ‘장기집권’ 야욕은 1954년 11월. 3선 개헌안의 무리한 추진에서 드러났는데 당시 기독교계 일반 대중지로 널리 읽히고 있던 <낙원>에서는 이승만에게 ‘경천애인의 민족적 지도자’란 칭호를 붙인 후 그를 ‘다윗’과 비교해 인간적인 실수까지 덮어주자는 논지를 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기독교계 지도급 인사들은 1956년 5월 실시될 정·부통령 선고를 앞두고는 ‘정․부통령선거추진 기독교도중앙위원회’를 조직해 자유당 선거를 지원하고 나섰다. 자유당을 지지하는 친여 기독교계 인사들로 조직된 기독교도중앙위원회에서는 선거를 한 달 앞두고 ‘남북통일과 도의건국을 완수하기 위하여 장로 이승만 박사를 대통령으로!! 이대통령이 지명한 진실한 보필자이며 양심적인 정치가 권사(집사) 이기붕 선생을 부통령으로!’라는 제목의 호소문을 전국 기독교도들에게 발표했다.
이 같은 한국교회 앞에 4.19는 회개를 촉구하는 광야의 외침이었으며 하나님의 심판이었다. 이 교수는 "썩은 정치와 함께 기생하며 살던 기독교인들에 대한 심판이었다"며 "예언자적 삶을 살지 못한 교회와 교인들에 대한 징계였다"고 말했다.
그러나 4.19를 계기로 잘못된 역사를 청산하고 새로운 역사를 창출해 나가는 과정에서 한국교회는 정확한 진상 규명은 물론이고, 책임자들의 진정 어린 반성도 없었다.
"하다가만 치료가 병을 더 악화시킨다"며 이 교수는 "그 때 하다가 만 회개와 반성은 한국교회의 고질적인 병, 권력지향적인 정교유착(政敎癒着)과 사회적 양심에 둔감한 도덕적 불감증을 더욱 심화시켰다"라고 말했다. 그렇다보니 교회의 대 사회적, 정치적 ‘예언자’ 기능이 약화되고, 교회 자체도 그 존재와 사역의 기본근거가 되어야 할 신앙의 자리를 떠나 물질적 관심과 세속적 방법으로 교회 일을 해결하고 추진해 왔다고 이 교수는 분석했다.
이에 덧붙여, 이 교수는 "한국교회는 급속한 물량적 성장을 이룩해 거대한 몸집을 갖추기는 했으나 그 영적 권위와 사회적 지도력에서는 50년 전의 그것에 훨씬 미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라며 "결국 한국교회는 시간적으로 21세기 글로벌시대를 살면서도 정신적으로는 여전히 ‘자유당 시대’에 살고 있는 셈"이라고 평가했다.
이 교수는 끝으로 한국교회가 부끄러운 과거를 청산하고, 새로 태어나려면 일대 ‘혁명’의 전기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 교수가 말하는 ‘혁명’이란 ‘뒤집어엎는 운동’이자 ‘제 자리를 찾아가는 운동’이었다.
그는 "(혁명은)비정상적인 것을 뒤집어 정상적인 것으로 만드는, 제자리를 떠나 있던 것을 끌어다 제자리로 돌려놓는 운동이다"라며 "교실에 있어야 할 학생과 공장에 있어 할 노동자, 부대에 있어야 할 군인, 성전에서 있어야 할 목회자가 거리로 나온 것은 거꾸로 된 세상을 바로 잡아 놓기 위함인데 뒤집어 바로 잡은 다음 그들은 떠나왔던 자기 자리로 돌아가야만 한다"고 했다. 뒤집은 다음 돌아가지 않으면 그것은 또 다른 혁명의 대상이 된다는 이유였다.
9일 오전 7시 새문안교회에서 열린 이날 발표회에는 ‘‘4·19 학생혁명’ 50주년의 역사 신학적 의미’를 주제로 한 이 교수의 발제에 이어 김요한 CMI 국제대표, 박성민 한국대학생선교회 대표, 손봉호 서울대 명예교수의 발제도 있었다. 마지막에는 이현정 UBF 대표가 발표 내용을 종합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