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스가랴 13:2-9
포로기 이후 예언자들이 전한 희망의 메시지와 새로운 나라의 구상은 절망 가운데 있는 백성들에게 새로운 힘을 불어 넣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꿈은 현실로 돌아오지는 않았습니다. 백성들은 급격히 실망하기 시작했고 예언자에 대한 비판이 일어났습니다. 예언은 쇠퇴하고 사람들에게 잊혀지게 되었습니다.
학개와 스가랴가 포로에서 귀환하여 실제로 성전을 건축하는 힘을 모아내는데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 예언은 급격하게 소멸됩니다. 왜 그 이후 예언이 이렇게 급격하게 소멸하게 되었을까요?
페르시아 시대가 계속되는 동안 이스라엘은 정치 활동에 참여할 수 없었습니다. 나라가 어떠니, 시대가 어떠니, 우리의 미래가 어떠니 하는 논의는 실현 가능성이 없었기에 너무 현실과 거리가 먼 이야기였습니다. 그런 꿈은 오히려 백성들에게 피곤함을 가중시켜 줄 뿐이었습니다. 당장에 먹고사는 문제도 해결이 되지 않는 상황에서 예언자의 예언은 백성들이 혐오하는 것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날이 오면, 내가 이 땅에서 우상의 이름을 지워서, 아무도, 다시는 그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도록 하겠다. 나 만군의 주가 하는 말이다. 나는 또 예언자들과 더러운 영을 이 땅에서 없애겠다. 그런데도 누가 예언을 하겠다고 고집하면, 그를 낳은 아버지와 어머니가 그 자식에게 말하기를 '네가 주의 이름을 팔아서 거짓말을 하였으니, 너는 살지 못한다' 한 다음에, 그를 낳은 아버지와 어머니는, 아들이 예언하는 그 자리에서 그 아들을 찔러 죽일 것이다. 그 날이 오면, 어느 예언자라도, 자기가 예언자 행세를 하거나 계시를 본 것을 자랑하지 못할 것이다. 사람들에게 예언자처럼 보이려고 걸치는, 그 거친 털옷도 걸치지 않을 것이다. 그러고는 기껏 한다는 소리가 '나는 예언자가 아니다. 나는 농부다. 젊어서부터 남의 머슴살이를 해왔다' 할 것이다. 어떤 사람이 그에게 '가슴이 온통 상처투성이인데, 어찌 된 일이오?' 하고 물으면, 그는 '친구들의 집에서 입은 상처요' 하고 대답할 것이다(스가랴 13:2-6).
누군가가 계속해서 자기가 예언자임을 고집한다면 그의 부모가 그를 죽일 수도 있다고 합니다. 어느 누구도 당시 예언자 집단이 엘리야의 흉내를 내며 상징처럼 입었던 털옷을 입지 못할 것입니다. 그 때까지 예언자가 되려고 애썼던 자들은 이제 자신이 예언자임을 부인하고 농부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예언자임을 증거하는 표시로 황홀경 상태에서 만든 상처들에 대해서도 부인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이스라엘은 예언자들이 자취를 감춘 후 처음 맛보는 무서운 압박을 받게 되었다.”(마카베오상 9:27)
성경본문
어느 시대이건 신적 영감을 받았다고 하는 카리스마적인 인물은 사라진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라면 예언은 결코 종결된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시대가 요구하는 권위있는 목소리가 필요했지만 그런 목소리를 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는 말일 것입니다.
주전 2세기 문헌들을 보면 예언자들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랫동안 예언이 종결된 침묵과 자포자기의 시간이 지나고 한참 후에야 새로운 대안적 움직임들이 나왔습니다. 그것은 오랜 고통과 뒤틀림의 뒤끝에서 나온 쓴 나물과 같은 것들이었습니다. 두가지 방향의 대안들이 나왔습니다. 세상의 진보에 대한 기대를 접고 자기들끼리의 종교적인 대안적인 공동체로 은둔해버리는 흐름입니다. 사해 동굴근처에 자기들만의 세상을 만들어 자족했던 에세네 파 같은 은둔주의 유형이 그 한 흐름이고, 또 한 흐름은 그와는 아주 대조적으로 정치적으로 해결책을 찾는 것입니다. 종교적으로 도덕적이니 폭력적이니 사랑이니 뭐니 하고 따지는 것들 때문에 나라의 회복이 늦어진다고 생각했을까요? 이들은 칼을 들고 로마관리들이나 그 자녀들을 암살하는 자객으로 또는 메시아를 자처하며 정치적 반란의 주동자로 나서는 열심당과 같은 유형의 흐름입니다. 이런 양극화의 사상 근저에는 예언의 시대가 종결된 후에 대안문학으로 자리잡은 묵시문학적 상상력이 그 근저에 있습니다.
예언이 포기되고 정죄받는 위치에 있게 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그들은 더 이상 새로운 정신을 추구하지도 않고, 시대를 꿰뚫는 통찰이나 대안을 추구하지도 않는 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더 이상 존경할 사람도 없고 목자도 없는 상태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언을 저버리고 희망을 포기한 민족은 “내 목자를 쳐라!”라며 그들의 지도자를 내어 쫒습니다. 목자를 치니 그 다음은 양떼가 흩어집니다. 정신적으로 아무런 중심점을 가지지 못한 민족은 우왕좌왕하며 갈피를 잡지 못합니다. 결국 백성의 2/3가 멸망하여 죽고 1/3만이 살아남습니다.
10년전 어느 가을날 제가 존경하던 스승 안병무 선생님께서 돌아가셨습니다. 돌아가신다고 급한 연락이 와서 병실로 달려갔습니다. 몇 차례 돌아가신다고 했다가 다시 부활하시곤 해서 그날도 다시 일어나실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가슴에 연결한 심전도기가 간헐적으로 파동을 치다가 어느 순간 쭉 일자로 평탄하게 뻗어나가자 당직 의사가 운명하셨다며 몸에서 기기를 떼었습니다. 그 시간 저는 임종예배를 인도하면서 마치 제가 기대고 서있는 든든한 받침목이나 기둥을 누가 툭 쳐서 빼 놓은 것 같은 흔들림을 심하게 느꼈습니다. 선생님이 안계시다는 것은 저의 큰 정신적 기둥이 무너지는 일이었습니다. 그동안 그냥 선생님께서 하시는 대로 따라서 하면 되었습니다. 선생님께서 이름을 내시는 곳에 제 이름도 내고, 선생님께서 참석하시는 모임에 저도 따라 가고, 선생님께서 하시는 활동을 저도 따라하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내가 스스로 모든 것을 판단해서 해야 하는 구나’하는 불안이 아마도 제 몸과 마음을 흔든 것 같습니다.
아무도 존경할 수 없는 사회, 존경할 사람이 없는 사회, 스승이 없는 사회는 얼마나 불행하고 삭막합니까?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도 스스로 목자를 쳤지만 그 결과는 자기 자신들에게 돌아왔습니다. 그들도 방향을 잃고 죽음에 내몰리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예언이 무너진 사회는 당장의 즐거움과 편하게 먹고 사는 것 외에는 아무런 삶의 방향이 없는 세상을 말합니다. 세상이 나아갈 발 바를 꿈꾸지 아니하고, 삶의 방향을 논하는 것이 거부되고 정죄되는 세상은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나라가 없어지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
이스라엘 이란 나라가 없어지기는 사실 오래전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주전 721년에 망했고, 유다는 주전 587년에 망했습니다. 그 때 주변에 있던 나라들 페니키아, 블레셋, 시리아, 모압, 에돔 등이 함께 망했지만 그들은 나라가 망한 즉시 그들의 문화와 종교 모든 것이 함께 소멸되고 없어졌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나라가 망한 후에도 오랫동안 존속할 수 있었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현재까지도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그 옛날 다윗 왕국의 영광을 재현하고자 하는 후손들에 의해 존속하고 있으니 그 끈질김은 대단합니다.
왕국으로서의 유다와 이스라엘은 오래전에 없어졌으나 그들은 예언자들의 비판과 희망을 통해서 존속할 수 있었습니다. 예언자들의 비판은 아주 혹독한 것이었지만 그것은 그 만큼 그 나라를 사랑하는데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름의 대안이 있으니 그에 어긋나는 것을 비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언자들의 비판과 희망은 같은 것입니다. 왕국은 사라졌지만 그들의 끊임없는 비판과 희망 속에 이스라엘 공동체는 유지되고 지켜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을 신앙적으로 모아주던 예언자들이 사라졌으니 동시에 그들에게는 하나님도 사라지고 미래도 사라진 것입니다. 외형적으로 그들을 한데 모아주던 나라나 민족은 없어졌지만 그들의 마음을 한데 모아주고 모두에게 동일한 방향을 제시하는 것은 야훼 신앙이었습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우리 삶의 방향을 결정하는 것을 성서는 회개한다(히, 슈브)라고 합니다. 이 말은 turn이란 뜻입니다. 우리가 회개하고 할 때 “과거의 일을 울고불고 가슴아파하는 것”을 회개라고 하지 않습니다. 통회하고 자복하며 눈물이나 콧물을 흘려야만 회개가 아닙니다. 회개라는 것은 방향을 의미합니다. 그 방향을 돌이키는 것, turn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회개는 과거에 대한 회개가 아닙니다. 회개는 미래에 대한 회개여야 합니다. 우리의 삶의 전폭을 하나님을 향하여 turn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돌이킨다, 온전히 하나님만을 향하게 한다는 의미가 회개입니다.
만약 사람이 몇 분 후에 일을 알 수 있다면 그는 떼돈을 벌수도 있고 엄청난 존경을 받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 앞에 벌어질 한치 앞을 알 수 없습니다.
일분 앞에 일을 모르고 한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자신이 내 삶의 주인이라고 할 때, 이는 안개로 인해 앞이 전혀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밤길을 달려 나가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이런 차를 지금 우리가 몰고 있다면 얼마나 진땀이 나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우리 자신이 주인인 삶은 얼마나 막연하고 불안합니까? 우리 자신이 우리의 삶을 운전해 나갈 수도 있겠으나 그것은 끊임없는 방황과 초조함 속에 자신을 던지는 것입니다. 차는 브레이크라도 있으나 우리 인생은 멈출 수도 세울 수도 없이 일정한 속도로 달려갑니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실 뿐 아니라 우리 하나하나를 직접 빚어 이 세상에 보내시고 당신의 뜻을 이루도록 우리를 불러 주셨습니다. 우리를 지으신 주인을 알고 그분의 보내신 뜻을 알고 그 안에 살게 될 때, 우리들은 비로소 삶의 방향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나 자신이 주인인 막연한 인생, 어디로 튀어나갈지 모르는 불안한 인생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 계신 주님께서 우리의 방향이 되어 주시며 우리 삶의 주인이 되어 우리를 이끌어 주십니다.
그러나 그렇게 시대가 진리를 외면하고 어둡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자신의 역사를 위해 남은 자를 예비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남은 자 7천명을 말씀하셨지만 스가랴에게는 삼분의 일은 남은 자가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 삼분의 일은 내가 불속에 집어넣어서 은을 단련하듯이 단련하고 금을 시험하듯이 시험하겠다. 그들은 내 이름을 부르고 나는 그들에게 응답할 것이다. 나는 그들을 “내 백성”이라 부르고 그들은 나 주를 ‘우리 하나님’이라고 부를 것이다(슥 13:9).
하나님께서 남기신 삼분의 일은 불속에 집어넣어서 은을 단련하듯이 단련하고 금을 시험하듯이 시험하겠다고 하십니다. 우리 들꽃향린공동체는 삼분의 일의 남은 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방향도 없고 길도 없고 목자도 없는 사회 속에 하나님을 향한 방향잡이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모두가 눈 앞의 이익을 쫒고, 간편하고 편함을 쫒아서 가는 이 세상에서 깨어있는 남은 자가 되시길 바랍니다. 단련한 금과 같이 하나님을 지키고 의를 지켜 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