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경동]한독에큐메니컬 예배

2010년 5월 9일 부활절 여섯째주일 설교자 박종화 목사

성경본문

출애굽기 32:7-14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어서 내려가 보아라. 네가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낸 너의 백성이 타락하였다.
그들은, 내가 그들에게 명한 길을 이렇게 빨리 벗어나서, 그들 스스로 수송아지 모양을 만들어 놓고서 절하고, 제사를 드리며 `이스라엘아! 이 신이 너희를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낸 너희의 신이다` 하고 외치고 있다." 주님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나는 이 백성을 살펴 보았다. 이 얼마나 고집이 센 백성이냐? 이제 너는 나를 말리지 말아라. 내가 노하였다. 내가 그들을 쳐서 완전히 없애 버리겠다. 그러나 너는, 내가 큰 민족으로 만들어 주겠다." 모세는 주 하나님께 애원하였다. "주님, 어찌하여 주님께서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내주신 주님의 백성에게 이와 같이 노하십니까? 어찌하여 이집트 사람이 `그들의 주가 자기 백성에게 재앙을 내리려고, 그들을 이끌어 내어, 산에서 죽게 하고, 땅 위에서 완전히 없애 버렸구나` 하고 말하게 하려 하십니까? 제발, 진노를 거두시고, 뜻을 돌이키시어, 주님의 백성에게서 이 재앙을 거두어 주십시오. 주님의 종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을 기억하여 주십시오. 주님께서 그들에게 맹세하시며 이르시기를 `내가 너희의 자손을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하고, 내가 약속한 이 모든 땅을 너희 자손에게 주어서, 영원한 유산으로 삼게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모세가 이렇게 간구하니, 주님께서는 뜻을 돌이키시고, 주님의 백성에게 내리시겠다던 재앙을 거두셨다. 아멘

골로새서 4:2-6
기도에 힘을 쓰십시오.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면서, 깨어 있으십시오. 또 하나님께서 전도의 문을 우리에게 열어 주셔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할 수 있도록, 우리를 위해서도 기도하여 주십시오. 나는 이 비밀을 전하는 일로 매여 있습니다. 그러니 내가 마땅히 해야 할 말로 이 비밀을 나타낼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외부 사람들에게는 지혜롭게 대하고, 기회를 선용하십시오. 여러분의 말은 소금으로 맛을 내어 언제나 은혜가 넘쳐야 합니다. 여러분은 각 사람에게 어떻게 대답해야 마땅한지를 알아야 합니다. 아멘

누가복음서 11:5-13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 가운데 누구에게 친구가 있다고 하자. 그가 밤중에 그 친구에게 찾아가서 그에게 말하기를 `여보게, 내게 빵 세 개를 꾸어 주게. 내 친구가 여행 중에 내게 왔는데, 그에게 내놓을 것이 없어서 그러네!` 할 때에, 그 사람이 안에서 대답하기를 `나를 괴롭히지 말게. 문은 이미 닫혔고, 아이들과 나는 잠자리에 누웠네. 내가 지금 일어나서, 자네의 청을 들어줄 수 없네` 하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사람의 친구라는 이유로는, 그가 일어나서 청을 들어주지 않을지라도, 그가 졸라대는 것 때문에는, 일어나서 필요한 만큼 줄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구하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그리하면 찾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어 주실 것이다. 구하는 사람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사람마다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는 사람에게 열어 주실 것이다. 너희 가운데 아버지가 된 사람으로서 아들이 생선을 달라고 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줄 사람이 어디 있으며, 달걀을 달라고 하는데 전갈을 줄 사람이 어디에 있겠느냐? 너희가 악할지라도 너희 자녀에게 좋은 것들을 줄 줄 알거든, 하물며 7)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구하는 사람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아멘

설교문

오늘은 어머니 주일, 아버지 주일입니다. 그런데 연합예배를 드리다보니 어버이주일을 찬양으로 기도로 함께 할 수 없어서 유감입니다만 모든 성경말씀이 사실은 예배드리고 생활하면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생각한다면 오늘 어머니 아버지 되시는 분들은 오늘 주신 말씀을 우리의 말씀으로 알고 참고합시다. 오늘 한독예배를 드리게 되고 2부에는 독일 목사님이 오셔서 말씀을 전하시는데 이분들이 교회와 교회음악 세미나를 하고 그 결산예배를 여기서 드립니다.
2부에 오셔서 설교하실 분은 요한 세바스찬 바흐가 오르가니스트로 평생을 봉직했던 독일 라이프치히 시에 있는 교회 목사님이고 음악도 아주 잘 하시는데 이분이 이런 보고를 하셨습니다. 발표 중 마지막 대목인데 설교 없는 예배는 그냥 받아들일 수 있겠는데 음악이 없는 예배는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합니다. 그 교회의 볼프 목사가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서 하는 이야기가 음악을 찬송으로 바꾸어 말해보자면, 찬송은 신앙의 언어인데 원조라고 할 수 있는 언어가 찬송입니다.
장충동 족발집에 가면 원조가 하도 많아서 어느 게 원조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우리 찬송은 어느 게 원조냐고 물으면 요즘은 고전찬송도 있고 현대 찬송도 있고 종류가 많아서 원조 따지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찬송은, 음악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 중에 가장 큰 선물이고 우리가 부를 수 있는 찬송이나 음악은 하나님이 베푸신 가장 큰 은혜다, 그렇게 생각하면 참 좋겠습니다. 우리가 하는 노래는, 찬양은, 찬송은 우리 신앙을 고백하고 신앙을 살기로 한 사람의 아주 원초적인 언어입니다.

오늘 성경말씀과 비교하여 같이 생각해 보겠습니다. 음악이 신앙표현의 원조와 같은 언어라고 한다면 기도는 뭡니까? 기도는 신앙 호흡에 하나님과의 대화에 사람과 사람끼리 같이 어울려 사는 것이 원조와 같은 언어입니다. 말을 못하는 사람은 얼마나 말하고 싶습니까? 벙어리로 살아가며 말을 못하는 사람의 심정 아십니까? 말을 못하는 사람을 돌보는 사람이 뭔가 알아듣고 싶은데 입을 열지 못해서 표현하지 못할 때 말 못하는 사람의 심정이나 그 심정을 가슴에 끌어안고 들어야 하는 사람의 심정과 같습니다.
말을 못하는 것, 기도를 못하는 것, 기도에 곡을 붙여서 찬양을 못하는 것은 신앙생활을 표출할 수가 없습니다. 말은, 제가 하는 말은, 여러분이 하는 말은, 일단 입에서 나가면 반드시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무슨 말이 됐든지 좋은 말은 사람을 기분좋게 하고 행복하게 하지만 나쁜말은 사람의 가슴을 후빕니다. 세미나 하다가 이분들의 얘기를 들으니까 음악은 말과 달리 나쁜 게 없나봅니다. 음악을 들으면 진보도 보수도 노인도 어린이도 국적을 초월하여 모두가 일단 음악을 듣습니다. 일단 찬양을 듣습니다. 그 음악 속에 그 찬송 속에 하나님이 주신 메시지를 크게 담을 수 있으면 그것보다 더 큰 축복이 어디 있겠습니까. 평소에 아는 이야기지만 다시 세미나를 들으며 저는 감동을 받았습니다. 노래는 찬양은 음악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맺어 놓는 열린 공간이고 매체다. 노래의 원전은 노래의 텍스트는 곡의 가장 기본적인 내용은 그런데 성경말씀을 보면 기도 그 자체였습니다. 모든 선곡은 모든 찬송은 은혜를 받고 감동적으로 하나님께 감사하고 싶은 사람들이 적어놓은 가사와 그 가사를 음으로 표현한 것이 합쳐진 감동의 작품입니다. 그래서 찬송을 들으면 은혜를 받습니다. 찬송을 해도 은혜를 받습니다. 그 찬송 속에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귀한 음이 합쳐져서 오늘 우리에게 중요한 은혜의 도구가 되고 우리 스스로 감동을 받습니다. 이런 것이 세미나의 중요한 내용이었다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오늘 설교를 하실 분은 본래 서독사람이었지만 동독 땅에 가서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통일된지 20년이 지났는데 동독 전체에 신자율이 얼마냐 했더니 통계는 20가 안 된다고 합니다. 독일 전체가 기독교국가이고 서독은 아무리 교회를 안 나와도 신자율이 85-90가 되는데 동독은 4,50년 떨어져 있다가 통일 됐는데도 20가 안됩니다.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했던 곳이 동독입니다. 라이프치히 시는 동독에서 제일 큰 도시인데 그 중 개신교는 12, 천주교는 4밖에 안 됩니다.
이 분 말씀은 기독교전통을 갖고 있는 나라에서 통일된 지 20년이 지났고 이제는 모든 차별이 없어졌지만 바흐가 음악을 작곡하고 교회음악의 아버지로 숭상받는 그 교회에서조차 바흐 음악회가 열리면 많이 모이겠지만 예배하러 찬송하러 모입시다, 하면 라이프치히 시 인구 전체의 12만 온다는 것입니다. 2부 때 전할 이 분의 설교는 이런 상황에서 살아있는 기도가 무엇일까, 하는 것입니다. 이 분의 설교를 잠깐 전달하고 제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이분은 이런 자기 라이프치히 시와 동독 상황을 보면서 이런 이야기로 설교를 시작합니다. 14살된 두 학생이 방과 후에 집으로 돌아옵니다. 교회 다니는 학생들에게 견신례교육을 하면서 직접 들은 증언인 것 같습니다. 대화내용은 기도인데 한 아이가 묻습니다. "너희도 밥먹을 때 식사기도하니?" "아니, 우리엄마는 하도 요리를 잘 해서 기도가 필요없어." 이들에게 식사기도는 엄마가 요리를 맛있게 못했을 때 보충하는 또 하나의 영적 음식이 기도입니다. 이렇게 아이들이 배우고 있습니다.
요리를 잘해서 맛있게 음식을 준비했으면 식사기도 필요없는 것입니다. 식사기도는 대용품으로 필요한 것이지 기도가 꼭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 찔리는 사람도 있을 테고 뭐 그런 이야기를 하느냐 할 텐데 이것이 일상생활에서 현실입니다. 밥상 차려놓고 기도합시다. 기도도 짧습니다. 기도는 보충 재료이고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습니다.
아프면 의사 선생님한테 가면 되는 것이지 왜 기도해 달라고 합니까. 그래서 건강한 사람에게는 기도가 필요없습니다. 나는 건강하고 행복한데 내 행복함으로 왜 찬송을 불러야 하느냐, 언제 찬송을 불러야 하느냐고 합니다. 이렇게 힘들고 마음이 싱숭생숭 하거나 마음이 아플때, 찬송과 기도는 이렇게 대용품으로만 필요한 세상이 되었습니다.
이 분 말씀은, 세속화는 모든 것을 인간이 할 수 있고 인간이 문명을 지배할 수 있는 것인데 그렇게 생각하지 말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기도가 대용품으로 인정받을 수밖에 없는 사회, 그 사회 그 마음씨를 세속화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필요하십니까? 필요없으시면 그런 경우는 세속신앙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어려울 때 필요하십니까? 하나님이 기쁠 때도 필요하십니까?

오늘 이 사람 말에 의하면 하나님은 눈물을 흘리는 사람에게만 고통이 있는 사람에게만 아픔이 있는 사람에게만 필요할 뿐 찬송도 기도도 그럴뿐 더 이상 효과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들의 일반적인 상식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분은 말씀하십니다.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기도는 사람을 깨어나게 하고 깨어나서 자기가 살아가야 할 인생의 목표를 보게 하고 깨어나서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도 보게 하고 기도는 깨어나게 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의 예수를 예로 듭니다. 예수는 십자가 사건을 앞두고 눈물을 흘리면서 기도하는데 제자들은 옆에서 졸고 있었습니다. 기도는 깨어서 하는 기도가 제대로 된 기도지 졸면서 하는 것은 기도가 아닙니다. 졸면 눈을 감았고, 마음을 감았고 세상이 어떻게 되든 상관없습니다. 기도는 깨어서 보고 느끼고 그렇게 해서 간구하는 겁니다. 우리가 필요한 기도가 그런 겁니다. 기도를 하면 비밀로 하는 게 아니고 하나님 앞에 내놓고 공개적으로 하는 것이고 자기 마음을 닫아놓고 하는 기도가 아니라 자기 마음을 열고 누구나 볼 수 있도록 하는 기도입니다. 이 기도를 우리가 필요로 합니다.
기도하면 우리가 눌린 것에서 해방됩니다. 사도바울이 고린도교회에 편지를 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해방받기를 바라는데 저를 위해서 기도해 주십시오. 정말 해방받고 나가서 자유롭게 기도하고 싶습니다. 감옥에서 기도할 수가 없습니다. 너무 눌려있고 묶여 있습니다. 제가 나올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여러분이 스스로 묶은 쇠사슬에 묶여 있거나 다른 무언가가 여러분을 묶어 놓았거나, 여러분이 묶여서 살고 있다고 느끼십니까? 기도하십시오. 기도는 쇠사슬을 풀어줍니다. 기도는 해방입니다. 이 분이 라이프치히 시 교회를 향해서 하는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도는 여러분을 해방시켜 줍니다. 해방받으면 마음도 지성도 다 열고 하나님께 간구할 수 있고 우리 서로 간구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오늘 골로새서에 보면 외부인들에게 친절하고 기회를 주라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 분 말씀이 `외부인`이란 교회 안 다니는 사람이 아니라 교회 다닐 수 있는데 아직은 결정을 못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에게 교회를 열자고 말씀합니다. 신자율이 12 밖에 안 되면 나머지 88 사람들이 교회 밖에 서 있습니다. 어떻게 하시렵니까? 우리는 이 분들에게 새로운 메시지를 줍시다. 그 메시지는 소금과 같은 메시지일 것 같습니다. 소금으로 맛을 내면 88가 12의 소금 때문에 하나님의 물에 들어올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기도하고 싶어하는, 기도해야 할 우리들의 신앙고백입니다. 이런 내용이 오늘 설교입니다.
저는 이런 사실을 보면서 먼저 믿었던 사람들, 나중에 믿는 사람들 상관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진실로 우리는 기도하고 살고 있습니까? 기도하기 참 힘드시죠? 저도 고백합니다. 기도가 쉽지 않더라고요. 그런데 열지 못하면 어렵습니다. 깨어있지 못하면 어렵습니다. 무엇을 찾아야 할지 무엇을 구해야 할지 어느 문을 두드려야 할지 모르면 참 어렵습니다.
어느 문을 두드려야 할지 모르면서 어떻게 기도하라고 하십니까? 오늘 성경말씀에 예수께서 "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기도는 구하는 기도입니다. 뭘 구할지 분명치 않으면서 어떻게 기도합니까? "찾아라. 잃은 것이 뭔지 찾아라." 잃은 것이 뭔지 분명해야 합니다. "문을 두드려라." 하나님의 어느 마음을 두드려야 합니까?
오늘 예수님 말씀은 기도를 하되 기도는 살아있어야 하고 졸면서 하는 기도는 중언부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진실로 구할 것을 분명히 하는 기도, 잃어버린 것을 이야기하고 꼭 찾고 싶은 것을 기도하고, 가서 구원을 청하고 싶은 사람의 문을 두드려야 하는데 무슨 문을 두드려야 하는지 분명히 하나님께 말씀하십시오. 그러면 찾아집니다. 못 구하면 어떻게 됩니까? 못 구하면 하나님께 다시 간구하십시오. 그리고 성령이 오시기를 간구하십시오.
쉬운 이야기같지만 중요한 이야기를 하십니다. 기도가 안되는 분은 왜 안 되느냐고 걱정하지 마시고 성령이 오셔서 제 마음을 열어서 간구할 수 있는 능력을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그 분이 오시면 제가 깨어있는 기도를 할수 있습니다. 성령을 보내주십시오. 성령받기를 원한다고 성령의 은혜를 찾기 원한다고 우리 고백하면 하나님께 먼저 간구하십시다. 성령이 오시면 심한 경우엔 성령은 여러분이 마음은 있으나 간구하지 못할 때 대신 하나님아버지께서 간구하여 주십니다.
저는 성령의 역사를 다시 깨닫게 됩니다. 성령을 바라면 성령은 여러분의 입을 열어주는 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불분명한 것을 분명하게 깨닫게 하는 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닫혔던 마음을 열어주는 것도 성령의 역사입니다. 오늘 사회가 극과 극을 치닫고 있습니다. 닫혔던 마음을 열어주는 것도 성령의 역사입니다. 대화가 안 됩니다. 어떻게 하면 됩니까? 대화가 안되면서 남의 집 문을 노크해봤자 아무런 대답이 없습니다.
그러면 해법이 있습니다. 성령이 오셔서 저한테도 오시고 상대방에도 오셔서 우리의 닫힌 문을 열어주옵소서. 문 열기, 노크하면 문이 열리게 하기, 일상에서 아주 쉽지만 어려운 문제입니다. 문열기 어렵습니다. 자존심 때문에, 힘든 것 때문에, 고집 때문에, 아집 때문에 자기 자신의 문 열기도 어렵습니다. 성령이 오셔서 일단 제 문을 열게 해 주십시오. 나와 같이 살아야 할 남편의 자식의 제자들의 직장 동료들의 이웃들의 문을 열게 해 주십시오. "성령이 오셔서 열어주십시오." 함께 하는 것은 우리 몫이지 성령의 몫은 아닙니다. 성령은 열어주시고 열어준 우리는 문을 열고 대화할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사랑하는 여러분, 아버지 되신 분은 자식이 생선을 달라는데 뱀을 줄 부모가 어디 있습니까? 성령을 간구하는데 악한 영을 줄 아버지가 없습니다." 우리 신자들이, 믿는 우리 성도들이 한국 땅에서 세계를 향해서 살아가면서 우리가 꼭 본받아야 할 것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간구해서 성령을 추구해야 하지만 성령이 아닌 악령이 오면 기도하고 서로 대화를 했는데 더 멀어집니다. 차라리 예수믿지 않는 사람이 쉽게 화해하지 예수믿는 사람들이 한 번 토라지면 하나님이 올 때까지 토라집니다. 저는 그때는 성령이 오신게 아니고 성령이 빙자한 악령이 왔다고 믿습니다.
오늘 말씀에 성령이 오시면 문은 열린다. 그러면 자기 속에 있는 것, 이웃 속에 있는 것이 다 드러납니다. 성령은 반드시 열어주십니다. 성령은 깨닫게 하십니다. 성령은 우리를 눈을 뜨게 하고 감지하게 하고 느끼게 하고 하늘을 향해서 열게 하십니다. 악령은 닫게 합니다. 성령과 악령의 차이는 여기에 있습니다. 악령은 닫게 합니다. 악령은 괴롭게 합니다. 성령은 열어줍니다. 성령은 우리한테 깨닫게 해 주십니다.
오랫동안 우리 믿음으로 살아오고 있습니다. 성령을 아주 바닥에서부터 간구합시다. 열어주옵소서. 내가 찾을 수 있는 것을 구체적으로 찾게 해 주십시오. 그리고 구할 것 명시하게 해 주십시오. 그러면 기도가 잘 될 거라고 믿습니다. 긴 기도가 아니고 짧지만 열린 기도, 짧지만 구체적인 기도, 짧지만 두드려보고 싶은 기도, 누가 나를 두드리면 문을 열어주고 싶은 기도, 하나님이 그런 기도를 원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 출애굽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안 보였습니다. 하나님이 안 보여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역사를 하지 않아서 물이 말랐습니다. 목말랐습니다. 먹을 것이 없어서 배고팠습니다. 사람이 느낄 수 있는 인지상정입니다. 사막에서 물도 없고 먹을 것도 없고 비록 이집트 땅에서는 매여있는 채 노예로 지냈지만 먹을 것 마실 것이 풍부했습니다. 자유를 얻기 위해서 출애굽해서 자유인이 되었는데 자유가 너무 배고팠습니다. 너무 목말랐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자유가 중요합니까? 해방이 중요합니까? 배고프고 목마른데도요?
인간에게 있는 선택의 문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렇게 택했습니다. 자유없는 배부름이 낫다. 돌아가자. 그래서 만든 것이 이집트에 있을때 먹을 것 주시던 신, 마실 것을 주셨다고 믿는 신, 이집트의 신, 그것을 재생해 냈습니다. 그것이 금송아지입니다. 재밌는 것은 그 때 믿었던 신, 풍성했던 신, 그러나 우리를 얽매였던 신, 금송아지를 만들었는데 음식이 오지 않았습니다. 물이 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고민이 생겼습니다. 금송아지를 만들어서 예배는 했지만 돌아갈 수도 없고 물이 나오지도 않고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은 결단합니다. 자유가 그립다고 그렇게 외치던 백성에게 자유를 주었더니 목 좀 마르다고 배가 고프다고 다시 성령대신 악령을 섬기는 백성, 하나님 대신 금송아지를 섬기는 백성에게 진노하십니다. 인내를 잃은 백성에게 진노하십니다. 그래서 멸하기로 결정하십니다.
모세를 불렀습니다. "모세야, 너와 너의 가족만은 살려서 대대로 약속을 지키겠지만 이 백성은 완악해서 내가 쓸어버리겠다." 모세가 간구합니다. 모세의 기도입니다. "하나님, 제가 눈뜨고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이 하신 약속을 고스란히 반복하고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출애굽한 다음에 이 백성을 대대자손 다 일으켜서 바다의 모래처럼 하나님이 쓰시겠다고 하시고 출애굽하면 하나님이 알아서 하시기로 했지 않습니까?" 모세는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늘어졌습니다. "하나님이 책임지십시오."
이 때 하나님이 "내가 마음을 돌이켜서 본래 약속대로 이 백성에게 축복을 주마. 모세야, 금송아지는 치워라." 오늘 이스라엘 백성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살았다고 자부하고 삽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조금 어렵다고 힘들다고 괴롭다고 분통이 난다고 분노할 수는 있으나 그 분노가 신에게까지 미치면 하나님은 정말 진노하십니다. 열고 보십니다.
그래서 오늘 사도바울을 통해서 이런 말씀을 다시 하십니다. 여러분, 예배하면서 사십시오. 노래하면서 사십시오. 기도하면서 사십시오. 열고 사십시오. 노크하면서 사십시오. 그러나 살기는 살되 맛있게 사십시오. 기도를 그냥 하지 말고 맛있게 하십시오. 사는 것, 적당히 살지 말고 맛있게 살아봅시다. 사랑도 맛있게 합시다. 맛있게 살지 않는 삶은 거죽이지 내용이 없는 겁니다.
여러분 음식 잡수시지요? 배고프면 큰일나니까 먹는 때가 많은데 그런 음식을 왜 먹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어느 때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는 먹는 저도 기분좋고 음식도 맛있고 음식을 만든 이에게 칭찬이 갑니다. 그 때 제가 노래하고 기도합니다. 음식을 맛있게 하십시오. 어떻게 하면 맛있습니까? 오늘 그 맛을 총괄해서 소금맛이라고 합니다. 예수님도 소금과 빛 이야기를 많이 하셨습니다.
제가 오늘 어버이주일을 향해서 고백같은 이야기를 나눕니다. 맛내기 위해서 소금맛이 필요합니다. 예배도 소금맛나는 예배, 사랑도 소금맛이 있는 사랑, 음식도 소금맛이 들어간 음식, 소금은 뭡니까? 예수님 자신이 소금이십니다. 예수님은 어떤 소금이셨습니까? 예수님은 스스로 몸과 영혼을 다 바친 스스로 희생한 소금이었습니다. 소금은 녹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십자가에서 녹았습니다. 그랬더니 인간의 삶이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 맛있는 소금을 구원이라 이름합니다. 우리의 구원은 맛있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소금이셨습니다. 소금맛 나는 예수, 예수를 맛 삼아 삶의 바탕으로 삼으십시다.
두 번째는 그렇게 스스로 녹아있는 소금은 우리 모든 배추를 김장을 썩지않게 만들어주니다. 생명을 줍니다. 생명이 뭡니까? 십자가라는 자기 희생으로 우리한테 맛을 주신 예수님 소금이 우리를 썩지 않게 부활생명을 주었습니다. 우리에게 부활을 주었습니다. 그것이 소금맛입니다.
오늘 어버이주일입니다. 제가 아버지, 어머니, 우리 조상들 생각하며서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우리 모든 사람 가운데서 제일 소금맛에 부합하는 사람이 어머니입니다. 제 어머니가 여러분의 어머니가 인생 중에서 가장 훌륭한 소금입니다. 자기 스스로를 희생하고 스스로 녹여나지만 결국 자신을 영생의 복음으로 생명의 복음으로 이끌기 위해서 그것이 어머니의 사랑이고 어버이의 사랑이고, 그래서 어버이날이 있지 않습니까? 어버이 되시는 분은 이렇게 결단하십시다. 날보고 소금이라고 하는데 진짜 맛있는 소금되자. 진짜 맛좋은 소금되자.
맛잃은 소금 말고 이렇게 우리 어버이들은 결단하시고, 자식들은 우리 부모님이 저희를 위한 소금이셨고 지금도 소금임을 깨닫길 바랍니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통해서 소금으로 녹으시고 소금이 들어가서 부활의 영광에 동참하여 썩지 않게 해주시는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 소금맛을 보며 살아갑시다. 어머니, 아버지, 소금이 되십시오. 맛있는 소금됩시다. 썩지 않는 소금이 됩시다. 아멘.

한독 에큐메니칼 예배(설교: C. Wolff)

Zwei Schüler sind auf dem Heimweg. Fragt der eine „Sag mal, betet ihr zu Hause vor dem Essen?“ Antwortet der andere: „Nein, meine Eltern können beide ganz gut kochen.“
So wurde und so wird das Beten immer schon dargestellt: als billiger Ersatz für das menschliche Tun. Kochen die Eltern gut genug, erübrigt sich das Tischgebet. Bete ich aber, dann ist das Ausdruck davon, dass ich offensichtlich nicht in der Lage bin, für die Familie etwas Anständiges auf den Tisch zu bringen. Bin ich gesund, brauche ich nicht um Heilung zu bitten. Bin ich krank, gehe ich eben zum Arzt. Warum da noch beten?

Ja, warum beten? Warum benutzen in der Thomaskirche zahllose Menschen das Gebetskreuz, um dort ihre Bitten, Hoffnungen, Sehnsüchte anzuheften? Warum sagt mir ein Vierzehnjähriger, der das Beten zu Hause nicht gelernt hat: das Entscheidende sei für ihn, dass er zu Gott beten könne – vor allem dann, wenn er mit den Eltern oder in der Schule Stress hat. Warum pflegen wir im Gottesdienst die Fürbitte und beziehen dort Menschen ein, die wir nicht kennen, und Ereignisse, von denen wir nicht betroffen sind?

Offensichtlich reichen das kochen Können, die ärztliche Kunst, das menschliche Vermögen, der jugendliche Sturm und Drang nicht aus, um Leben sinnvoll zu gestalten, um Krisen zu bewältigen. Offensichtlich besteht unser Leben nicht nur aus Sachzwängen und Notwendigkeiten. Offensichtlich drängt es uns Menschen immer wieder, das eigene Leben unter einer neuen Perspektive zu sehen. Und offensichtlich veranlasst das Menschen zu beten – unabhängig davon, ob sie sich nun als fromme Christen oder eher als kirchenferne Beobachter verstehen. In diesem Sinn ist Beten keine Ersatzhandlung, sondern ein notwendiger Zusatz – ein mehr an Hoffnung, an Vertrauen, an Lebensperspektive.

Von diesem notwendigen Zusatz handelt auch der Predigttext für den Sonntag Rogate. Es ist ein Abschnitt aus dem Brief des Apostel Paulus an die Gemeinde in Kolossä. Kolossä war eine relativ kleine Stadt, die im Gebiet der heutigen Westtürkei lag. Paulus wendet sich mit seinem Brief an die Christenmenschen in der dortigen Gemeinde, um diese zur Fürbitte für ihn selbst und für seine Arbeit aufzufordern.
2 Lasst nicht nach im Beten, werdet nicht müde darin und tut es immer mit Dank! 3 Betet dabei auch für uns, dass Gott uns eine Tür öffnet für seine Botschaft. Wir sollen ja das Geheimnis bekannt machen, das in Christus beschlossen ist. Als Verkünder dieses Geheimnisses sitze ich hier im Gefängnis. 4 Bittet Gott darum, dass ich es weiterhin offenbar machen kann, wie es mein Auftrag ist. 5 Im Blick auf die, die nicht zur Gemeinde gehören, und im Unterschied zu ihnen sollt ihr leben wie Menschen, die wissen, worauf es ankommt. Nutzt die Zeit, die euch noch verbleibt, gut aus. 6 Wenn ihr Außenstehenden über euren Glauben Auskunft gebt, so tut es immer freundlich und mit Salz gewürzt. Bemüht euch, für jeden und jede die treffende Antwort zu finden.
Kolosser 4,2-6 – Übersetzung nach „Gute Nachricht Bibel“

Paulus sitzt im Gefängnis. Wo genau, wissen wir nicht. Aber wir kennen den Grund seiner Gefangenschaft: er ist wegen seines Glaubens verhaftet worden. Und nun wendet er sich an die, die draußen leben – in Freiheit. Vier mahnende Gedanken formuliert Paulus – zwei im Blick auf das Gebet, zwei in Richtung der Gemeinde:
1. Paulus unterstreicht den Zusammenhang von Beten und Wachen.
2. Für Paulus dient das Gebet der Befreiung und ist ein Dienst an der Öffentlichkeit.
3. Paulus geht davon aus, dass die Gemeinde wissen muss, worauf es ankommt.
4. Verkündigung bewegt sich in den Augen des Paulus zwischen Ja und Nein, Charme und Schärfe.

1. Wachen und Beten
Beten ist nur möglich, wenn ich wach durchs Leben gehe. Ja, das Gebet selbst hat die Funktion eines Weckrufes – der allerdings wie ein Wecker auch überhört werden kann. Denken wir an die nächtliche Szene im Garten Gethsemane, als Jesus im Gebet mit Gott gerungen hat und auf die wache Anteilnahme der Jünger hoffte - die schliefen aber ein. Sie hatten weder die Kraft zum Beten noch zum Wachen. Daraus können wir den Schluss ziehen: wo nicht gebetet wird, wird geschlafen, wird das Leben verschlafen, bekommen wir gar nicht mehr mit, was um uns herum geschieht, gehen wir gedankenlos durchs Leben und durch diese Welt. Dass unsere Gesellschaft so viel Ermüdungserscheinungen, so viel Selbstbezogenheit aufweist, hat auch etwas damit zu tun, dass zu wenig gebetet wird – zu wenig gedankt und gedacht, zu wenig geklagt, zu wenig gehofft, zu wenig Gottvertrauen gelebt wird. Und umgekehrt gilt auch: dass in Krisen des persönlichen und des gesellschaftlichen Lebens Menschen sich an die Kirchen wenden mit der Bitte um das gottesdienstliche Gebet, ist nur möglich, wenn wir uns in jedem Gottesdienst aufwecken, in die Verantwortung rufen lassen, damit wir im entscheidenden Moment für das beten können, was Paulus von den Christen in Kolossä erwartet: die Befreiung. Also ist es unsere bleibende Aufgabe, eine wache, eine betende Kirche zu sein, die Anteil nimmt an den Sorgen und Nöten der Menschen und die sich dem verpflichtet sieht, was Paulus als zweiten mahnenden Gedanken formuliert:

2 Befreiung und Öffentlichkeit
Paulus fordert die Christen auf, für seine Befreiung zu beten. Die Gefängnistür möchte sich öffnen, damit er in Freiheit, aber auch öffentlich, ohne sich zu verstecken, seiner Aufgabe nachgehen kann. Gleichzeitig beinhaltet die Bitte des Paulus, dass sich die Türen, die Herzen, die Köpfe bei den Menschen öffnen möchten, denen er die Gute Nachricht von Jesus Christus vermitteln will. Damit wird deutlich: Freiheit und Öffentlichkeit sind wesentliche Bedingungen für den christlichen Glauben. Wer es mit dem christlichen Glauben zu tun bekommt, begegnet keiner Geheimbotschaft, sondern einer Lebensbotschaft, die öffentlich und jedermann zugänglich verkündigt werden soll. Darum ist jeder eingeladen, den christlichen Gottesdienst zu besuchen. Darum kontrollieren wir am Eingang nicht die Gesinnung. Darum wird die Fürbitte nicht davon abhängig gemacht, ob einer der Kirche angehört oder nicht. Darum sind uns die von Paulus als „Außenstehende“ bezeichneten Menschen, also Nichtchristen, herzlich willkommen. Darum ist das gesprochene Wort, die Predigt, immer öffentlich und somit auch der Kritik und Kontrolle preisgegeben. Nur so können wir

3 Wissen, worauf es ankommt
Im Blick auf die, die nicht zur Gemeinde gehören, ... sollt ihr leben wie Menschen, die wissen, worauf es ankommt. Nutzt die Zeit, die euch noch verbleibt, gut aus.
Wissen wir, worauf es ankommt – und worauf kommt es derzeit an? Ich möchte auf ein paar Punkte hinweisen:

Aber nun weiß ich genau: wer offen und öffentlich ausspricht, dass er weiß, worauf es ankommt, der bewegt sich immer zwischen Ja und Nein, der wird angreifbar und setzt sich Missverständnissen aus. Und damit sind wir beim vierten mahnenden Gedanken:

4 Zwischen Ja und Nein, Charme und Schärfe
Wenn ihr Außenstehenden über euren Glauben Auskunft gebt, so tut es immer freundlich und mit Salz gewürzt. Bemüht euch, für jeden und jede die treffende Antwort zu finden.
Freundlich sollen wir sein, ja, aber nicht langweilig und unkenntlich. Deswegen sagt Paulus ausdrücklich: lasst euer Reden und Tun mit Salz gewürzt sein. Findet das treffende Wort – aber bedenkt, dass dieses auch trifft, zutrifft und deswegen auch auf Abwehr stoßen kann. Als Kirche ist es immer eine Gratwanderung, vom Glauben zu reden: auf der einen Seite wollen wir verstanden, auch anerkannt werden und passen uns gerne dem Mainstream an. Auf der anderen Seite hat es wenig Sinn, wenn wir nicht mehr von unseren zentralen Glaubensinhalten sprechen: von der Auferstehung, von der Vergebung der Sünden und der Rechtfertigung des Menschen aus Gnade, vom Reich Gottes und dem Leben nach dem Tod. Darum sollte gelten: Wir müssen fundamental und elementar vom Glauben reden, ohne fundamentalistisch und banal zu werden. Die Gute Nachricht von Jesus Christus ist eine rettende, aufrichtende, befreiende Botschaft für jeden, die uns heraustreten lässt aus unseren Gefängniszellen. Diese Befreiung beginnt mit dem Gebet – über das sich nur dann zu streiten lohnt, wenn wir es auch praktizier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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