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호 목사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
김진호 목사(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가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이하 대부흥운동)을 비판적으로 재조명했다. 대부흥운동은 한국 개신교회의 20세기 대부흥의 초석을 놓았다고 평가 받는 사건으로서 2007년에는 100주년을 맞아 대대적인 기념행사가 열리기도 했다. 이 대부흥운동을 최근 발표한 글 <한국개신교, 자리잡기와 자리찾기>에서 정면 비판했다.
김진호 목사는 러일전쟁을 대부흥운동의 주요한 배경의 하나로 꼽았다. 그는 러일전쟁이 “평양대부흥운동을 이야기하는 데 있어 반드시 짚어두어야 하는 사건임에도 거의 주목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1904년에 발발한 러일전쟁의 폭력을 피해 많은 사람들이 교회로 피신했는데, 교회는 일본군대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안전한 공간이기 때문이었다. 또한 교회는 신자들에게 쌀을 배급해주기도 했다. 교회에는 사람이 몰렸다.
한편 교회는 갑작스런 교인의 증가를 받아들일 준비가 돼있지 않았다. 무엇보다 교회 지도자들은 “전쟁의 상흔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다.” 불과 10년 전에 발발한 청일전쟁의 기억과 러일전쟁의 경험이 중첩돼, 사람들은 폭력에 대한 고통과 증오로 자신을 폐허로 만들고 서로를 할퀴었으나 “교회 지도자들은 이러한 상처를 치료하는 데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고 김 목사는 말했다.
그 대신 그들은 “골방으로 들어가 기도회를 가졌다. 기도는 절절했고 어느 순간 불일 듯이 마음이 뜨거워지며 회개운동이 일어나 이른바 ‘성령체험’이 기도회 참석자들을 감쌌다. 곧이어 공동체 전체를 아우르는 도덕 각성이 일어났는데, 이것이 바로 평양대부흥운동이다.”
김 목사는 대부흥운동의 뜨거운 열기가 “사람들의 다양한 상처를 봉합하기에 충분했다”고 비판조로 말했다. 또 사람들을 괴롭혔던 폭력과 갈등은 적절하게 치유되기보다 ‘악의 형상’으로 이해되었고, 이러한 죄의식은 자기 비하로 이어져 사람들은 ‘조선인의 삶’이라는 자기 존재의 터에 대한 증오를 갖게 되었다고 말했다.
또한 이러한 자기 비하의 반대편에는 ‘미국’과 ‘미국 선교사’들에 대한 선망이 자리잡아 미국주의적인 신앙이 한국 개신교회에서 하나의 미덕처럼 여겨지는 부작용이 초래되었다고 밝혔다.
결국 대부흥운동 사건은 “자기 비하와 타자 곧 미국에 대한 선망을 내재화하는 원형적 사건”으로 자리잡았다고 김 목사는 평했다.
이 밖에도 김진호 목사는 대부흥운동이 ▲물리적인 성공주의를 동반하는 체험적 사건 ▲다양한 이질성을 하나로 통합하는 배타적 사건 ▲자기 및 자기 문화에 대한 배타성을 신앙으로 해석하게 된 사건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