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린]깊은 영성을 찾아서
열상 19장 1-12절 루가 5장 1-11
오늘 본문으로 선택한 두 말씀 엘리야 선지자가 절망 가운데서 ‘자신을 죽여 달라고’ 기도하는 장면이나 예수께서 베드로를 부르실 때에 베드로가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저를 떠나가십시오.’라는 고백의 이야기는 잘 알려진 성서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여러 질문이 떠오르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엘리야 선지가가 자신을 죽여 달라고 기도하는 이 전의 장면을 보면 엘리야가 그렇게 나약한 인간도 아니었고, 자신의 죽음에 연연해하는 사람으로 보이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성서는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악한 왕으로 묘사되는 아합 왕과 그의 부인 이방민족 출신인 이세벨 왕후와 정면 대결을 벌인 가장 용감한 예언자로 말하고 있습니다. 악한 일을 저지르는 절대 권력에 맞서 하느님의 이름으로 3년간의 가뭄을 선포하고 이후 가르멜 산 정상에서 모든 백성들이 보는 가운데 홀로 이방 사제 850명과 대결하여 승리하는 등 엘리야는 승승장구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자신을 따르던 바알과 아세라의 사제들이 모두 살해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왕후 이세벨이 엘리야를 반드시 죽이고야 말겠다고 하는 얘기를 듣자 엘리야는 갑작스레 태도를 바꾸어 죽음이 두려워 도망을 치기 시작합니다. 죽음을 넘어서는 용맹함에서 비겁함으로 바뀌는 이 급격한 변화에 대해 성서는 그 이유를 설명하지 않고 있습니다. 저는 오늘 그 이유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두 번째 본문 또한 의문이 이는 말씀입니다. 어느 날 갈릴래아 호수가에 예수가 등장하고 백성들은 그가 전하는 하늘 말씀을 듣습니다. 그때 예수께서는 그물을 씻고 있는 배 두 척을 보았고, 그 위에 올라가서 말씀을 전하십니다. 말씀을 마치시고 나서 그 배 한척의 주인인 시몬 베드로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쳐 고기를 잡아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예수와 베드로 두 사람은 처음 만난 듯이 보이지만 앞장에서 베드로의 장모님이 열병으로 누워 있는 것을 고쳐주시는 것을 보았을 때, 이 두 사람은 그간 만남이 계속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대체로 베드로가 예수보다 몇 살 정도 나이가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여기서 베드로는 보통은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선생님, 선생님은 말씀에는 강할지 모르지만, 여기 고기떼에 관해서는 제가 당신보다는 훨씬 많이 알고 있지요. 이미 밤새도록 여기저기 그물 수십 번 수백 번도 더 던져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 뜨거운 낮에는 고기떼들이 모두 흩어져 얕은 곳으로 나와 먹이를 먹을 때인데, 깊은 곳에 그물을 던지라니요? 이거는 어부들에게는 기초에 해당합니다.’ 대강 이렇게 반응이 나왔겠지요. 그런데 예수의 요청 속에 다른 무엇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래 그물을 던졌더니 그물이 찢어질만큼, 배가 가라앉을 정도로 고기가 엄청 잡힙니다. 그러자 이에 놀란 시몬 베드로가 예수의 발 앞에 엎드려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라고 말합니다. 이 경우에도 상식선에서 생각해 보면, 고기가 엄청 잡혔을 때, 베드로가 할 수 있는 얘기는 “아니 선생은 말씀만 잘 아시는가 했더니 고기떼의 흐름도 간파하고 계시는군요. 저하고 동업 한번 해 보시지 않겠습니까? 그래 한번 사업을 크게 일으켜서 나도 돈을 벌고, 당신도 하늘나라 사업을 크게 벌려 보십시다.” 그런데 엎드려서 ‘저는 죄인입니다. 떠나가 주세요.’라고 했다는 얘기는 이미 예수가 그간 부단히 베드로를 자신의 일에 함께 하도록 설득하고 있었다는 반증이 되는 것입니다.
[말씀이해의 원칙]
자 여기서 우리는 이 루가복음의 5장 말씀의 분석을 통해서 성서 해석의 기본 원칙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보통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합니까? ‘예수를 잘 믿어 예수의 말씀에 순종하면 그물이 찢어질 만큼 복을 받아 인생 대통하게 된다.’ 보통 이렇게 이해합니다. 그런데 성서 해석에 있어 이건 뭐에요? 제가 항상 하는 얘기입니다만, 이건 손가락이에요? 달이에요? 이건 손가락입니다. 독자들에게 던지는 미끼입니다. 이런 미끼에 매여 있으면 그 사람은 예수 믿어도 맨 날 거기서 거기입니다. 미끼만 먹다 애만 태우는 신앙인이 되고 맙니다. 손가락에 매이지 말고 손가락이 가리키는 달을 보아야 합니다. 달은 이 얘기의 결론에 있습니다. “그들은 배를 끌어다 호숫가에 대어 놓은 다음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따라 갔다.” 제자도에 관한 말씀 이것이 바로 손가락이 가리키는 달입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너는 이제부터 사람을 낚을 것이다.’ 여기서 두려워하지 말라는 표현도 ’베드로를 비롯한 어부들이 너무나 많은 고기가 잡힌 것을 보고 겁을 먹었기에‘ 말씀하신 것으로 설명했지만, 그 실상인 즉 “나를 따라오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깊은 곳에 그물을 던지라‘는 말씀의 의미도 분명해집니다. 그건 고기잡이에 대한 명령이 아니라 인생의 근본을 생각하라는 명령입니다.
‘저는 죄인입니다. 저를 떠나가 주십시오.’라는 고백은 베드로의 자기 이해, 곧 인간본성에 대한 깊은 성찰을 하였다는 말이고 예수에게서 거룩한 하느님의 현존을 경험하였다는 것을 말합니다. 곧 예수를 만나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깊은 깨달음, 각(覺)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고백입니다. 하늘의 깊은 뜻을 이해하고 나니 자신은 그럴 만한 그릇이 되지 못함을 고백한 것입니다. ‘그물이 찢어질만큼’이라는 표현이나 ‘배가 가라앉을 정도’의 표현도 실은 자신으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큰 깨달음과 인생의 밑바닥이 송두리째 뒤집히는 위기 곧 카이로스의 순간을 표현한 말입니다. 그래 감당하기 힘드니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라고 말을 했던 것이고, 이에 예수께서는 “두려워하지 말라. 너는 이제부터 사람들을 낚을 것이다”라고 새로운 인생의 길을 제시한 것입니다.
사람마다 다 자기 그릇이 있습니다. 자기됨을 아는 사람만큼 행복한 사람이 없고, 성공한 사람은 없습니다. 대부분은 그릇은 작은데, 그릇 키울 생각은 않고 큰 내용물만 얻으려고 애쓰다 불만과 불평 속에 세월을 허비합니다. 또 반대로 자기 그릇이 큰데 이를 깨닫지 못하고 작은 일에 매달려 세월을 보내는 경우도 많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는 향린교회에 들어 올 정도면 그 사람의 그릇은 큰 그릇이니 그렇게 알고 크게 사시기를 바랍니다. 인생은 크게 살 필요가 있고, 깊게 살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 말씀을 빌려 말씀을 드리자면 세상살이에 대한 걱정을 한다고 해서 그 세상살이가 나아지는 것은 하나도 없으니 여러분들은 세상살이에 대한 걱정일랑 그만두고, 하느님의 나라와 그 의로움을 찾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의 필요를 다 아시는 하느님께서는 그걸 다 채워주실 것입니다. 그날의 염려는 그날로 족하니, 얕은 물가에서 짤랑거리는 물결에 겁먹지 말고, 바지 끝 허리춤까지 바짝 올려 부치고 깊은 곳에 그물을 던지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잘 아는 괴테의 파우스트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악마, 메피스토펠레스는 파우스트에게 거래를 제안합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알려주는 대신 한 가지를 요구합니다. 그건 바로 파우스트의 영혼입니다. 우리는 여기에 자신의 영혼을 판 파우스트를 비난합니 다. 그런데 그 작품을 읽어가다 보면 바로 우리 자신이 파우스트임을 발견합니다. 성공이라는 탐욕스런 목표를 향해 이미 눈이 멀어버린 자신을 발견합니다. 사실 천재라고 불리는 사람들 성공했다고 하는 사람들은 별다른 사람이 아닙니다. 끝까지 자신의 영혼을 포기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미끼에 한 눈 팔지 않고 계속 깊은 곳을 파내려간 사람들입니다. 사막과 같은 인생에서 신기루에 현혹되지 않고 오아시스의 근원을 계속 파내려간 사람들입니다.
3주 전 저는 예수를 따랐던 우리의 영성가 이세종님의 일생에 대해 말하면서 그가 제자들에게 강조하였던 말을 전했습니다. “파라, 파라, 깊이 파라 얕게 파면 너 죽는다. 뿌리도 깊이 팔수록 좁다. 좁은 길이다. 깊이 파고 깊이 깨닫고 깊이 믿으라. 어설프게 파면 의심밖에 남는 것이 없다.”
제가 좋아하는 [사막의 성찰]이라는 제목의 시가 있습니다.
[사막의 성찰]
사막에서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것은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보다 빠를 것입니다.
당황하지 하지 마십시오. 모래폭풍에 이성을 잃지 마십시오.
물이 나올 때까지 모래를 파십시오.
여러분이 기대했던 것 보다 샘 옆에서 더 오래 기다려야 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샘을 발견해야만 합니다.
용기를 잃지 말고, 신기루에 속지 마십시오.
샘을 계속 찾으십시오; 더 깊이 계속 파십시오.
사막에는 또한 샘이 있습니다. 사막에는 또한 물이 있습니다.
사막은 또한 생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첫 번째 물방울을 발견하게 되면,
여러분은 곧 작은 시내를 발견하게 될 것이고,
그리고 강을 찾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사막은 잊혀질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에게 그 길을 보여주신 분에게
감사드리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그분은 물을 발견하도록 도와주셨고, 여러분에게 생수를 주셨고,
그래서 여러분이 마실 수 있게 되었고, 여러분이 살 수 있었고,
여러분이 더 이상 목마르지 않게 되었습니다.
샘으로 가는 길은 사막을 가로 질러 가야만 합니다.
사막은 때때로 여러분을 슬프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잊지 마십시오. 사막에 샘이 숨어 있습니다.
그것이 약속의 땅으로 이끌어갑니다.
[지도자의 교만과 탈진]
엘리야 선지자의 인생 후반부의 얘기가 바로 이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는 하느님의 명령을 따라 위대한 일을 이루었습니다. 아합 왕과 이세벨 왕후와 그들을 따르는 수백 명의 예언자들과 그리고 중간에 눈치를 보고 있는 백성들 전체를 상대로 엄청난 싸움을 벌였고 승리했습니다. 성서는 그 이후의 엘리야의 심정을 설명하고 있지 않지만, 아마 우쭐했을 것입니다. 순간적으로 자만심이 생겼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순간 하느님의 영이 그를 떠납니다. 그래 그는 이세벨이 자신을 죽이겠다고 하자 겁이 나 체면이고 뭐고 도망을 칩니다. 도망에 지치고 두려움에 지친 나머지 싸리나무 덤불 속으로 들어가 기도합니다. 살려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죽여달라고 기도합니다. 낙심할대로 낙심한 모습입니다.
심리학자들은 이 엘리야의 장면을 큰일을 하던 사람들에게 쉽게 찾아오는 일종의 탈진 현상(burn out syndrome)으로 설명합니다. 신앙적으로 보면 교만이요 심리적으로 보면 탈진을 겪는 것은 인간 누구나 경험하는 일입니다. 일반적으로는 50대의 중년세대들이 자주 겪지만, 특히 지도자들이 자주 겪는 현상입니다. 많은 경우 지도자들은 이런 탈진 현상이 나타났을 때, 이를 감추려 듭니다. 인간의 약함을 드러내는 것은 지도력 약화를 불러오기 때문에 이를 감추려고만 합니다. 최근 MB대통령이 공식적인 자리를 피하는 것은 바로 자신의 약한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이유입니다. 자신의 약한 면을 드러내는 것이 오히려 인간적으로 돋보여 국민들의 신뢰를 얻고 지도력을 키워나가게 되지만, 삶에 자신이 없는 사람은 이를 감추기에 급급합니다. 물론 이분도 3년 전 청와대 뒷산에 올라 수십만 촛불의 모습을 보고 눈물을 흘리면서 뉘우쳤습니다. 그런데 상황이 바뀌자 이제는 촛불을 보고 뉘우치라고 호통을 쳤습니다. 이는 자신에 대한 배반일 뿐만 아니라 국민들의 등에 칼을 꽂은 비겁한 행위입니다. 그래 국민들은 그의 이러한 행동에 실망한 나머지 선거의 표로 응수를 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자신의 잘못은 모르고 계속 밑의 직원들에게 책임을 뒤집어 씌워 개각으로 상황을 바꿔보려고 하는데, 이는 오히려 상태를 악화시킬 따름입니다.
저는 그분이 장로님이기에 오늘 엘리야에 관련한 말씀들을 묵상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왜냐하면 그분이 잘 되는 일은 곧 나라가 잘 되는 일이요, 온 백성이 평안해지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 위대한 엘리야도 낙심해서 죽여 달라고 기도했고, 베드로도 그러했고. 바울도 자신 안에는 선한 일을 행하고자 하는 성령과 악한 일을 하고자하는 악령이 끊임없이 싸우고 있다고 하였고 심지어 자신은 괴수의 두목이라고 까지 고백을 했습니다. 자신의 약함이 곧 하느님의 강함을 말하기에 자신의 약점 드러내는 일을 결코 수치로 여기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신의 아들인 예수님마저 십자가 죽음을 오래전부터 알고 계셨고 이를 준비해 오셨지만, 막상 때가 임하자 ‘아버지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해 주십시오.’라’고 하는 약한 면을 보이셨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예수님에 대한 신뢰가 약해지지 않습니다.
[안식년은 인간의 본래됨의 회복]
제가 다음주부터 6개월의 안식년을 갖습니다. 안식년은 현재 교수들과 소수의 목사들만에게 주어지는 일종의 혜택입니다. 교수들은 이를 안식년이라 하지 않고 연구년이라 하여 새로운 학문을 공부하는 해로 여기고 있으며, 목사들 또한 이 기간에 공부를 많이 합니다. 그런데 교수와 달리 목사들에게는 공부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목사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대변하는 직분을 맡다보니 자신도 모르게 하느님의 위치에 올라가는 착각이 일고 몇몇 철모르는 교인들이 하느님의 종이니 어쩌니 하여 옆에서 부치기다 보니 정말 그러한가 하는 착시 현상을 갖게 됩니다. 제가 그렇다는 말이 아니라 주위의 목사들을 보면 그렇다는 말입니다. 사실 저는 목회하면서 반대로 권위를 세우라는 권고를 더 많이 받았습니다. 직업상 목사들은 자신을 약점을 감추는 일에 익숙해집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약함을 드러내는 일은 곧 하느님의 약함을 드러내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왜 목사의 자녀들이 비뚤어지는 경향이 많은가? 그건 아버지의 교회에서의 모습과 가정 안에서의 모습이 너무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목사에게 안식년은 본래의 인간의 모습으로 되돌아가는 시간이요 자신의 모습으로 낮아지는 시간입니다.
물론 대다수의 교인들은 목사가 교회를 떠나는 일을 싫어합니다. 저도 교인이라면 별로 달갑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목사는 지도자로서 일반교인들이 알지 못하는 여러 가지 격무에 시달리고 있고, 저 또한 최근 들어 요구되는 교회 안팎의 여러 일로 조금 지켜 있는 형편입니다. 물론 제가 있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제게는 내가 없어도 세상은 제대로 돌아간다는 겸손의 깨달음이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도 모르게 메피스토펠리스에게 내 영혼을 파는 거래를 하기 쉽고 그렇게 되면 결국은 더 큰 실패를 낳아 자신의 실패를 넘어 교회에까지 큰 상처를 남기기 때문입니다. 이런 일들은 우리들 주위의 교회들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일입니다. 50대 후반의 쉼 없이 달려온 저의 목회 동료들이 암으로 쓰러지거나 갑작스레 교회를 사임하는 일을 종종 경험합니다.
엘리야의 이야기는 바로 큰 일을 이루 지도자가 겪는 실패를 보여주고 이 실패를 어떻게 극복해 나갈 것인가를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그가 탈진하여 죽기를 간청하자 하느님은 그에게 천사를 보내 먹을 것을 주어 힘을 내도록 합니다. 그래 40일을 밤낮으로 걸어 하느님의 산 호렙에 이릅니다. 여러분 여기서 40일을 문자로 읽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스라엘 땅은 우리나라 남한 땅보다 작은 곳입니다. 그저 일주일이면 다 닿을 수 있는 거리에 있습니다. 이는 하느님과 함께 하는 성찰과 훈련의 기간을 상징으로 말해주는 숫자입니다.
[작고 여린 소리 속에 현존하신 하느님]
그는 동굴 속에 머뭅니다. 이는 세속과의 단절을 통한 하느님을 경험하고자 하는 영성의 시간을 말합니다. 그때 하느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엘리야야 네가 여기에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 ”저는 야훼를 생각하여 가슴에 불이 붙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백성들은 당신의 제단을 헐고 당신의 예언자들을 칼로 쳐죽였습니다. 이제 예언자라고는 저 혼자 남았습니다. 이제 저마저 죽이려고 하고 있습니다.’ 나중에 보게 됩니다만, 이는 그가 얼마나 극한 고통과 공포 속에 처해 있는 것을 말해줍니다. 하느님은 극도의 공포 속에 있는 그에게 이제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어 그의 신앙을 회복시키고자 하십니다. “엘리야야! 동굴 밖으로 나와 저 높은 산 위에 서거라.” 그래 엘리야는 산꼭대기에 서서 하느님의 현존을 기다립니다. 갑자기 크고 강한 바람이 불자 산이 흔들리고 바위가 깨져나갑니다. 그런데 엘리야의 마음에 거룩함의 감동이 밀려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거기에 하느님이 계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어 땅이 흔들리는 큰 지진이 일어납니다. 또 하늘에서 엄청난 불길이 내려와 온 주위가 불로 휩싸입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에 기쁨과 확신이 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거기에 하느님이 함께 하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후에 조용하고 여린 소리가 들립니다. 여기서 엘리야는 이 소리를 들었고, 손으로 얼굴을 가립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을 눈으로 보는 것은 죽음을 의미했기 때문입니다. 엘리야는 크고 놀라운 현상이 아닌 작고 여린 소리, 보통의 마음으로는 깨닫지 못하는 작은 것에서 하느님을 경험합니다.
야훼 하느님은 엘리야에게 자신의 현존을 경험케 하시고 나서 새로운 사명을 맡기십니다. “엘리야야 하자엘을 시리아의 왕으로 예후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기름 부어 세워라.” 여기서 우리는 이전에 예언자들은 왕을 기름부음을 세우는 역할을 담당하고 잘못된 왕이 있을때는 목숨을 걸고 그에 대항하였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시대에 교회는 이러한 예언자의 사회정치적 역할은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이를 회복하는 것이야 말로 하느님의 말씀을 진정 회복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왕을 기름 부으고 새 시대를 준비한 엘리야 선지자는 하느님의 명령에 따라 엘리사를 기름 부어 뒤를 잇게 합니다. 이제 엘리야의 시대는 막을 내리게 됩니다. 그리고나서 하느님은 예언자는 모두 죽고 이제는 자기 혼자 밖에 없다고 하는 엘리야의 항의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서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았던 칠천명을 남겨 두었느니라.” 엘리야는 왜 이 사실을 몰랐던 것일까? 그는 하느님의 현존은 언제나 크고 위대한 것 바람과 지진과 불에서만 찾았기 때문입니다. 작고 여린 소리 가운데에도 함께 하시는 하느님의 현존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외부의 큰 것만 찾았던 그에게 작고 여린 것 속에 보이지 않는 가운데 함께 하시는 하느님의 역사에 눈을 뜨지 못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 주 62지방선거를 통해 민심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았고,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도 않고, 입맞추지도 않았던 칠천명을 남겨두었다는 하느님의 말씀의 의미를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천안함에 속아 넘어가지도 않고 사대강사업에 입맞추지도 않는 사람들이 그렇게도 많았음을 우리는 몰랐던 것입니다. 의인이 없음을 한탄했던 우리들을 부끄럽게 만드셨습니다.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리라]
작고 여린 소리에 하느님이 현존하신다는 말씀이나 깊은 곳에 그물을 던지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일맥상통합니다. 그건 우리의 삶이 겉모습에 매어 달려서는 안 된다는 의미입니다. 사회의 소용돌이치는 이런 저런 뉴스에 마음을 빼앗겨서는 안됩니다. 세상의 종말이 왔다는 소리, 북한이 곧 침범할 것이라는 소리, 주식이 폭등하고 아파트값이 폭락할 것이라는 소리, 월드컵의 함성소리, 소리 소리 소리입니다. 이것들은 모두 새로우 뉴스라는 이름으로 우리의 마음을 빼앗습니다.
사회 개혁과 자신의 내면의 영성이 조화롭게 이루어지는 실천의 삶을 치열하게 추구했던 스코트 니어링은 말합니다.
“나는 세계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해 거의 아는 바가 없지만, 올 가을 내가 비축해 둔 매발톱나무 열매와 밤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합니다. 내가 이웃을 찾아가면, 그는 어제 신문에서 읽은 세상의 최근 뉴스를 정확히 알려 줄 것입니다. 하지만 나는 차라리 오늘 아침 빵을 먹다가 운 나쁘게도 왕겨를 씹은 애기를 하겠습니다. 내게는 그 일이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세상 뉴스들은 듣기 괴로울 뿐 아니라 집주인이 내놓는 진수성찬만큼이나 진정한 대접과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우린 그렇게 잘 먹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런 뉴스는 동전 몇 개면 살 수 있는 것들입니다. 우리는 슬픈 것이든 기쁜 것이든 필요한 뉴스를 원합니다. 이 새로운 날에 꼭 필요하기 때문에 존재하는 그런 뉴스들 말입니다. 즐거운 뉴스에 대해 언론이 북을 치든 장구를 치든 내 버려두십시오. 우울한 뉴스에 대해서 불평하는 것도 그들의 몫입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기분이 나아진다면 말입니다. 만일 말이라는 것이 자신의 의도를 숨기기 위해 발명되었다면, 신문(언론)이란 그런 나쁜 발명이 놀랍도록 발전한 형태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당신의 삶을 신문(언론)이 지배하게 하지 마십시오.”
크고 화려한 것에 있지 않고 작고 여린 소리에 하느님이 계시다는 말씀은 분주하고 복잡하게 살아가는 우리 현대인들에게 많은 점을 시사합니다. 깊은 곳에 그물을 던지라는 예수님의 말씀 또한 우리에게 여러 가지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작고 여린 소리를 알아채고 깊은 곳에 그물을 던지고 작고 여린 소리를 알아채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하던 일을 멈추고 조용하게 앉아 있을 필요가 있습니다.
조용하게 앉으라
그리고 그 안에서 누가
너의 생각을 관찰하고 있는지 찾아보라
주의 깊게 바라보면
네 안에서 또 하나의 너를 발견하게 되리라.
그를 주의 깊게 관찰하고 이해하려 노력한다면
너 자신을 분명히 알게 되리라
그렇게 안을 들여가 보라.
네 안의 또 하나의 너를 찾으라.
그러면 완성이 가까우리라.
스와미 묵타난다.(지금 알고 있는 걸 그도 알았더라면 류시화 104쪽)
6개월의 안식년을 맞아 저는 국내와 국외의 여러 곳을 방문하고 때로는 홀로 걸어보고자 합니다. 국내의 동광원 예수원을 비롯하여 독일의 부르더호프공동체, 마리아수도회 불란서의 테제공동체에서 영성의 깊은 곳에 그물을 던져보고자 합니다. 네팔의 히말라야 산맥과 백두대간의 설산과 깊은 자연 속에서 생명의 약동하는 작은 소리와 인간의 탐욕으로 아파하는 여린 소리를 들어보고자 합니다. 휴전선을 따라 걸으면서 민족의 아픔의 소리를 들어 보고자 합니다. 때로는 생각지 아니한 곳에 머물러야 할 때도 있고, 이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당혹스런 순간을 맞이하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6개월동안 멈추지 않고 계속 걸어볼 생각입니다. 육체로만 걸을 뿐만 아니라 정신으로 영혼으로 계속 걸어 끊임없이 성찰하고 배워보고자 합니다.
그래서 남은 임기동안 향린의 목회 위에 안병무 김호식 홍근수목사님의 남기신 귀한 자취들에 한몫을 더해보고자 합니다. 바라기는 향린 영성공동체 실현에 한 몫을 담당하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외국으로 찾아 나설 것이 아니라 바로 가까운 곳에 그런 장소가 만들어져 외국의 신앙인들이 오히려 찾아올 수 있는 그런 장소를 위한 초석을 세웠으면 합니다. 이 땅을 하느님의 나라로 만드는 사회 개혁은 자신 안에 하느님의 나라를 세우는 내면적인 영성과 동시에 이루어져야 합니다.
70년대 독재유신체제 시절 그 요동치던 시기에 안병무선생께서 단상에서 지나가는 말씀으로 하신 한마디가 계속 저의 심장 속에 남아 있습니다. ‘유럽의 어떤 신학교처럼, 한국신학대학의 1,2학년들은 모두 학교 기숙사에서 함께 공동생활을 하면서 그리고 수도복을 입고 다니도록 했으면 좋겠다.’ 오늘의 시대에 수도복 운운하면 시대에 뒤떨어진 발언으로 생각되겠습니다만, 정말 향린교회가 이 땅의 부름 받은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려면 우리들 스스로가 더 신앙으로 알차게 채워지는 일이 영성의 훈련이 함께 있어야 할 줄로 생각합니다. 일주일에 한번 만나 스치고 지나가는 그런 관계가 아닌, 최소한 일 년에 한두주라도 함께 머물면서 때로는 깊은 토론으로 때로는 깊은 침묵으로 자신을 더 깊이 파고 서로를 더 깊이 알아가는 그런 영성 운동이 있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얼렁설렁. 일주일에 한두시간 교회에 머물다 그리고는 다시금 옛 자리로 돌아가는 그런 다람쥐 채바퀴 도는 신앙생활 말고, 인생의 배가 기우뚱거려 침몰할 지경에 이르러, 더 이상 어찌할 수 없어 배를 버려두고 예수를 좇아야만 하는 중대 방향 전환을 해야만 하는 그런 카이로스의 위기를 양산해 낼 수 있는 그런 교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친구들이 당신 도대체 뭐 때문에 삽니까? 인생을 고민하는 청소년 자녀들이 아빠 엄마는 무엇 때문에 살아요 하고 물을 때에 자신 있게 답할 수 있도록, 갓 태어난 아기가 엄마 아빠 그래 살아보니 뭐가 그리 좋습디까? 하고 물을 때에 자신 있게 답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하느님께서 야 이제 때가 다 되었다. 그만 살고 내 곁으로 오거라 했을 때에 네에! 하고 기쁨으로 달려갈 수 있도록 말입니다. 이제는 인생은 양으로 살지 말고 질로 살자고 결단하는 여러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의 잘못된 전통에 도전하고 새로운 하느님의 말씀으로 무장하여 도전하는 그런 청년들을 키워내는 그런 향린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도시 한복판에 있는 이런 예배장소 외에 깊은 영성의 우물을 길러낼 수 있는 새로운 자연의 장소가 필요합니다. 이는 오늘날 새로운 목회로 얘기되고 있는 생명목회 녹색교회의 한 면을 담당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저는 우리의 선배들이 유산으로 남겨준 만평에 달하는 향린동산이 뜻이 거기에 있다고 믿습니다. 실제적인 일은 여러분이 담당하십시오. 다만 저는 여러분에게 하나의 길을 제시할 따름입니다.
홀로 자연 속에 들어가 새로운 인생에 도전했던 사상가 헨리 데이빗 소로우는 그의 책 월든에서 ‘나는 인생을 깊게 살기를, 인생의 모든 골수를 빼먹기를 원했으며 강인하게 스파르타인처럼 살아, 삶이 아닌 것은 모두 때려 없기를 원했다. 수풀을 풀 넓게 잘라내고 잡초들을 베어내어 인생을 구석으로 몰고 간 다음에, 그것을 가장 기본적인 요소로 압축시켜서 그 결과 인생이 비천한 것으로 드러나면 그 비천성의 적나라한 전부를 확인하여 있는 그대로 세상에 알리며, 만약 인생이 숭고한 것이라면 그 숭고성을 스스로 체험하여 다음다음번의 여행 때 그에 대한 참다운 보고를 하고 싶었던 것이다. 내가 보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생이 악마의 것인지 또는 신의 것인지 이상하게도 확신을 갖지 못하고 있으며, 사람이 사는 주요 목적은 ’하느님을 찬미하고 하느님으로부터 영원한 기쁨을 얻는 것‘이라고 다소 성급하게 결론을 내리고 있는 것 같다.
다른 누군가의 기대를 충족시켜 주기 위해 그대는 이곳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도 어머니의 기대도 아닙니다. 성공이라고 말하는 세상의 기대는 더 더욱 아닙니다. 신의 이름으로 목사나 교회가 가르치는 규율도 아닙니다. 스스로 존재하시는 야훼 하느님은 그 어느 것도 아닌 당신 스스로의 의해 그 가치가 인정받는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러기 위해 자신의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리세요. 그리고 거기에 순종하세요. 그것이 바로 종교의 모든 것이고 우리가 하느님의 형상을 따라 만들어졌다는 의미입니다. 어느 누구도 추종하지 마십시오. 물론 처음에는 넘어질 것입니다. 무릎 팎이 깨지고 피가 날 것입니다. 그러나 거기서 포기하지 마십시오. 그동안 공들어 쌓아 올린 많은 투자가 물거품이 될 것이고 어쩌면 가진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할 것입니다. 부모도 자식도 명예도 부도 건강도 말입니다. 구도의 의미가 바로 그것입니다. 헛된 투자를 포기하는 것. 그것이 바로 종교가 갖는 진정한 목적입니다. 오직 자신의 진정한 존재 참 얼에 귀를 기우리고 홀로 서십시오.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보냄의 말]
-지금 이 순간-
당신은 지금 이 순간을 싸워 이겨야 할 장애물처럼 대하는가? 아니면 이 순간보다 좀 더 중요한 미래의 순간이 있어 거기 도달해야 한다고 느끼는가? 지금 이 순간으로부터 도망칠 수 없다면 지금 이 순간을 두 팔을 벌려 맞아들이고 친구로 삼는 게 어떠한가? 건강하든 병들었든 성공했든 실패했든 기뻐하든 고뇌하든. 지금 당신의 몸속에 흐르는 생명의 느낌을 만끽하라. 그것을 통해 지금 이 순간에 닻을 내려라. 지금에 감사하고 지금에 경의를 표하라. 지금의 나를 용서하고 품에 안으라. 지금이 삶의 근본이 되고 중요한 구심점이 될 때 삶은 여유롭게 풀리기 시작한다. 나의 생각과 감정과 지각과 경험은 내가 아니다. 내가 이룩해 놓은 삶의 내용물이 내가 아니다. 나는 생명이다. 약동하는 생명이다. 자유하는 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