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기도문은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지의 정수이며 그의 메시지의 요약이라고 하겠습니다. 누가복음의 병행구절을 보면, 제자들이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세례자 요한이 요한의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었던 것 같습니다. 요한이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었듯이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께 어떻게 기도하여야 하는지 가르쳐 달라고 합니다. 주가 가르쳐 준 기도는 제자들, 따르는 자들, 즉, inner circle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의 지상에서의 메시지의 중심을 차지한 것은 분명합니다. 주의 기도는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서 이루고자 했던 모든 내용들이 잘 요약되어 있습니다. 주기도문은 크게 둘 혹은 셋으로 나누어집니다. 첫째는 하나님에 관한 것이고 그 다음 둘째 부분은 인간세상에 관한 기도입니다. 첫 부분에는 하늘, 아버지, 당신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심, 당신의 나라, 당신의 뜻 등 하나님과 관련된 것, 즉 위를 향한 기도이며, 둘째 부분은 아래를 향한 기도, 즉 일용할 양식, 용서, 유혹, 악의 위협 등에 관한 기도입니다. 마치 십계명의 첫 부분이 하나님과 관련되었고, 둘째 부분이 인간에 관련된 계명인 것과 비슷합니다. 주기도문의 마지막 부분은 다시 하나님에게 드리는 장엄한 기도입니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당신께 영원히 있사옵니다.”
주기도문은 유대의 모세 전통, 계약전통, 십계명 전통을 잘 요약하였을 뿐 아니라 그 기본 정신을 한층 높게 끌어올렸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에서 “우리”라는 말에 관심을 가져 봅시다. 나의 아버지가 아니라, 우리 아버지라는 말씀은 나만을 위한 분이 아니라, 우리 모두를 위한 분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라는 말은 자주 나옵니다. 주기도문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는 “우리”입니다. 우리에게, 우리가 우리에게 등등.. 주기도문은 개인을 위한 기도가 아닙니다. 신앙은 개인적인 것이지만,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신앙은 사회적인 차원을 가집니다. 한국 교회는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부릅니다. 나만 보호하는 하나님. 나만 잘되게 하는 하나님을 부르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달라는 것은 사회적인 차원을 가집니다. 먹는 문제는 사회적인 것이지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모두가 먹게 되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죄지은 자라고 하는 데에서, 집단적인 죄의 모습이 보입니다. 죄를 사해 주는 것도 사회적인 것입니다. 우리의 죄. 우리가 집단으로 짓고 있는 죄를 사회적 죄라고 부릅니다. 주기도문은 개인의 죄만을 강조하는 오늘의 잘못된 죄 이해를 바로잡아줍니다. 우리를 유혹에 끌어들이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신자유주의 체제 같은 거 아닌가? 나만 잘 살면 된다는 유혹은 우리에게 온갖 부정과 비리에 빠지게 합니다. 그리하여 시험에 빠지고 악에 빠집니다. 이것이 오늘날의 우리 사회의 모습이며, 우리들의 내면의 모습입니다. 이러할 때 우리가 부르짖는 기도는 “악에서 구하옵소서”이다.
나만 잘 살면 된다는 세상 속에서 주기도문은 무색하여 집니다. 이러한 세상을 조장하는 데에 가장 큰 역할을 하는 곳은 개인주의 신앙을 복음으로 오해하고 있는 한국의 개신교회라고 보여집니다. 이와같이 주기도문은 우리로 시작해서 우리로 이어집니다. 즉 사회적인 내용을 갖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최종적으로는 하나님으로 끝납니다. 당신께 모든 것을 돌리는 것으로 끝난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기도를 말합니다. 주기도문의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하나님의 나라라고 보여집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뜻을 정치적으로 표현한 말이라고 보여집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이 말씀은 예수의 기도의 가장 특별한 부분이다. 십계명도 전반부분에서는 하나님과 관련되어 하나님을 섬기라고 되어있지만,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지는 않았습니다. 나라가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는 기도는 예수의 특별한 첨가요, 이것이 예수를 예수되게 만든 부분이라고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정의의 주권이 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동안 이 땅의 교회들은 하나님의 정의를 이 땅에 실현시키는 일을 소홀히 하여 왔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은 하나님의 정의가 이 땅에서 회복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많은 교회들이 하늘의 일과 땅의 일을 분리시켜왔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와 예배와 이 땅에서의 정의의 문제가 분리되었고, 서로 연결되지 않고 있습니다. 이런 모습은 한국의 개신교회에서 잘 보여지고 있습니다. 이 땅에 정의와 평화를 세우는 일은 교회의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것들을 교회에 끌고 들어오면 잘못이라고 합니다. 은혜스럽지 못하고, 정치적이고 세상적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기도는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이 세상 구석구석에서도 이루어질 것을 간구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나라가 임할 수 있도록 구체적으로 활동해야 합니다.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말라.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정의를 구하여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다하여 주실 것이다”는 이 말씀이 우리의 삶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의 태도는 어리석은 자의 모습일지 모릅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후반부에 가서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여기에서 예수의 메시지는 정치적인 영역, 사회적인 영역, 경제적인 영역 모두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러한 영역에서 실현되고 일어나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종교나 교회의 영역에서만 국한되는 것이 아닙니다. 온 세상, 자연환경과 정치, 사회, 경제, 문화 영역 등 전체로 확장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진 상태는 과연 무엇인가? 저는 그 다음의 기도문에서 그 해답의 단서를 찾을 수 있다고 봅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죄를 사하여 주시고, 시험에 들지 말고 다만 악에서 구하여 달라는 기도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뜻이 이루어진 상태의 일면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사용할 일용품과 양식을 구하는 일에 지장이 없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나 오늘날과 같은 경쟁 구조 속에서 가난한 약자들이 생존해 나가기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약자들은 이 사회에 하나님의 정의가 이루어져 일용할 양식을 얻는데 어려움이 없게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우리의 죄를 사하여 달라는 말씀은 이제 우리가 더 이상 죄책에 시달려서 아무 일을 못 하는 용기없는 자가 되지 말고, 그 죄책감을 훌훌 떨쳐 버리고 하나님의 일을 하는 일에 동참하게 해달라는 기도일 것입니다. 그런데 죄라는 단어의 또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영어 주기도문에는 죄지은 자를 채무자(debtor)로, 그리고 죄를 빚, 채무(debt)로 번역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1:4에 의하면 죄는 빚을 의미합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빚은 고생의 원인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채무에 시달립니다. 평생 죽을 때까지 이들을 옭아매어 놓습니다. 이 빚 때문에 기 한번 펴보지 못합니다. 예수 시절에 가난한 소작인들을 비롯한 약자들이 예수 주위에 많이 모였습니다. 예수는 이들의 삶을 억압하고 있는 현실적인 원인이 빚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가 가르친 주기도는 약자들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더 이상 빚을 지거나 지우는 일이 없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정신은 희년 정신에서 나왔습니다. 예수는 빚을 탕감하는 희년 정신을 기도문 속에 포함시켰던 것입니다.
우리 시대의 악은 전쟁, 실업, 가난, 재앙 등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지만 그 근본적인 원인은 불의(injustice)입니다. 악은 정의의 부재(不在)에서 옵니다. 공의(公義)와 정의는 성서에서 가장 중심된 관심입니다. 악으로부터 해방되려면 정의가 바로 서야 합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나라가 오게 하며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게 하기 위하여 우리가 일해야 하는데 우리는 힘도 없고 지혜도 없고 돈도 없고, 그렇다고 숫자도 없습니다. 그러한 일을 하려고 해도 사람들이 외면합니다. 그러한 일을 하려고 해도 우리 마음이 움직여지지 않습니다. 용기를 내어 하나님의 일을 하기에는 우리가 역부족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이 너무 악하기 때문입니다. 그냥 악하다기보다는 너무 교묘하게 악하다는 것이 저의 경험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심지어 선하게 보이기까지 합니다. 우리 사회와 세상이 합리적이고 정상적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악이 가득차 있습니다. 그것도 교묘하게 악합니다. 잘 되고 있다, 아무 걱정하지 마라라, 잘되고 있으니, 이런 말들이 들려오고 있지만, 그러나 사실은 썩어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상층부라고 할 수 있는 사법부가 부패한 것을 비롯하여, 심지어 민중들의 모임이라고 할 노동조합까지도 부패하였습니다. 이 세상 어느 구석도 깨끗하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집단적 이기주의가 판을 치고 있습니다. 그것이 공공적인 선과 배치된다고 해도 자기들에게 유리하면 선한 것이 됩니다. 결국 모든 사람들에게 해가 되어 돌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모두가 집단적인 이해관계로 뭉쳐지고 모여 있습니다. 오늘날의 “우리”는 집단적이기주의를 표상합니다. 주기도문에서의 우리는 공공적인 것이고 정의로운 것이라면, 오늘날의 “우리”주의는 이것과 거리가 멉니다. 집단적 이기주의는 약자를 소외시키고 사회 전체를 멸망으로 이끕니다. 부동산 투기로 동네마다 담합하고, 대운하도 집값, 땅값이 올라가는 동네는 무조건 찬성하는 집단적 이기주의 시대에, 요즘엔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에서 더 중요하게는, 어디에서 어떻게 살까가 추가되고 있습니다.
나도 이 “우리”주의에 함께 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저도 회개하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끼리 잘 지내자는 것도 우리주의가 아닐까 합니다. 이 작은 우리의 테두리를 부수는 것이 하나님 나라 상징이 주는 메시지라고 봅니다. 우리 사회에서는 그리고 우리 주위에서는 진정한 연대가 보이지 않습니다. 더 높은 가치를 중심으로 모이지 않습니다. 오늘의 말씀처럼, 하나님의 나라라고 하는 공동의 선, 우리 모두가 함께 할 수 있는 가치를 향해 자신을 희생하고 투신하는 모습을 거의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의가 아니라 자기의 의를 부르짖습니다.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 자기의 이익이 중요합니다. 우리들의 이러한 모습에서 썩은 냄새가 나는 느낌이 듭니다. 그런 면에서 저를 비롯하여 우리 모두는 죄인이라고 자복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기도문 앞에서 우리는 죄인임을 자복해야 합니다. 당신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라는 기도를 드릴 때 우리는 죄인임을 자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기도를 드리는 우리는 먼저 용서와 죄사함을 구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살지 못할 때, 예수님은 이미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해서 그리고 당신의 나라가 임하고 당신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도록 하는 삶을 살았음을 볼 때 우리는 저절로 고개를 숙이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들의 이익을 위해서 우리들의 안위와 평안을 위해서 마음을 썼지 예수님의 말씀처럼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일에는 마음을 쓰지 못했다는 것을 자복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우리의 모습과 삶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을 왜곡해 왔던 것은 아닌가 자문해 봐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우리와 우리 교회들을 마주하고 서 계십니다. 우리가 예수 앞에서 무어라 변명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주기도문의 중요한 취지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골고루 널리 확산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은 가장 먼저 가난한 자들, 억눌리고 갇힌 자들에게 가장 먼저 도달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장 간절하게 기다리고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서 하루 속히 이루어지이다고 기도드리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우리 교회의 기본 방향도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는 것이고, 특히 사회적 약자들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보이며 그들과 연대하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일이 새길 교회가 붙들고 있는 가치라는 사실은 자꾸자꾸 확인되어야 하며, 잊어서는 안 될 것이라고 봅니다. 우리가 주기도문을 새길교회의 신앙고백과 함께 드리는 것은 우리의 기본 정신을 매주 항상 확인시켜주고 있다고 믿습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고,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져 결국 하나님의 의가 이 땅에 서게 되는 그 길을 걸으셨습니다. 십자가의 길은 바로 그것입니다. 그는 죽기까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헌신하셨습니다. 나머지는 모두 하나님에게 맡겼던 것입니다. 죽음을 무릅쓴 헌신은 예수님의 몫이었습니다. 그를 다시 생명으로 일으키신 분은 하나님이었습니다. 지금 역사하고 계시는 성령님은 예수님이 하신 일을 이 땅에서 계속하도록 격려하시고 힘주시는 분입니다. 성령님은 우리가 예수의 뒤를 따르게 하시는 분입니다. 성령님은 예수가 영적으로 살아계신 분이라고 믿습니다.
얼마전 인간극장이라는 프로그램에서 가수 김장훈의 이야기가 소개되어 봤습니다. 김장훈이 40세가 되었는데도 결혼도 하지 않고 그야말로 충심으로 사회봉사와 기부활동하는 모습을 보면서 많은 것을 느끼고 생각하며, 또 제 자신이 부끄럽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살면 저렇게 사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 대해 그가 문득문득 대답하는 말을 들어보면, 그가 죽을 뻔한 경험을 여러번 했다는 얘기였습니다. 죽음과 고난의 경험은 우리에게 특별한 은사를 주는 것같습니다. 그러한 경험들은 새로운 삶을 살게 해 주는 능력을 가진 것으로 보입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일도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보았습니다.
어떤 면에서 삶은 어리석게 사는 것이 맞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무식하고 어리석게 살았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삶을 본 사도 바울은 오늘 우리가 예배 처음에 “경배의 말씀”에서 서로 교독한 것처럼, “우리의 어리석은 선포로 구원하시는” (고전 1:21) 분이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의 달리시기까지 복종하심은 세상 사람들에게는 어리석음일지 모르지만, 그것이 바로 생명을 살리는 구원의 길임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우리들도 이러한 깨달음에 동참해야 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리하여 오직 우리의 모든 것을 바쳐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하늘에서 이룬 것처럼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를 외치며 그 거룩한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는 삶을 살아야하겠습니다.
* 약력
권진관 교수
서울대 사회복지학과
대한예수교장로회 선교교육원 졸업
피츠버그 신학대학 석사
두류대학 Ph.D
현 성공회대 조직신학교수
현 (사)새길기독사회문화원 원장
현 KSCF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