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지는 한신대 이장식 명예교수의 교회 역사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이 교수는 얼마 전 본지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예수는 평신도였고, 초대교회 예수 운동을 이끈 무리들 역시 평신도들이었다"며 교회사에 큰 기여를 한 무명의 평신도 그리스도인들을 조명했습니다. 앞으로 연재되는 글이 평신도들의 신앙 생활 함에 있어 좋은 길잡이가 되어 줄 것으로 기대합니다. -편집자주
2. 이교의 몰락
수도원 운동의 발전이 로마제국의 재래종교들의 몰락을 가속화시켰다. 이미 콘스탄티누스 1세 황제의 종교자유정책 이후로 황제의 영향과 함께 그리스도교의 급격한 교세 확장으로 인하여 재래종교들의 힘이 기울어지게 되었지만 쉽게 그 뿌리가 뽑히지 않았다. 콘스탄티누스 1세가 로마 원로원에 있던 승리의 제단을 철거시켰으나 율리아누스 황제가 그것을 복구시켰고 얼마 후 그라티아누스 황제가 382년에 완전히 철거하였다.
테오도시우스 1세 황제가 이교사원들을 파괴하거나 용도 변경하고 재래의 미신적인 의식을 금지하였다. 그런데 유명한 만신전이 오랫동안 남아 있었는데 밀라노의 감독 암브로즈(Ambrose)가 원로원 의원이며 마니교의 신자인 시마쿠스(Symachus)와 격론을 벌인 끝에 613년에 폐지되었다. 그 후 원로원 의원 600명이 탄압을 받은 일이 없는데도 그리스도교로 왔다.
그러나 지방에서는 이교도들의 폭력적인 저항이 많았다. 알렉산드리아에서는 데오필로스 감독이 이교사원에서 미신적인 물건을 들고 나와 시내 거리에서 사람들에게 조소하면서 보였을 때 이교도들이 분노해서 이교 성직자들과 합세하여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잡아 죽이고 괴롭혔다. 시리아의 한 곳에서는 이교사원을 헐기 위하여 감독이 군인과 검투사를 거느리고 이교사원에 돌진해갔는데, 이에 대항하여 이교도들이 싸우며 그리스도인 감독을 산 채로 불사르기도 했다. 그러나 이교는 결국 몰락해갔고 이교의 미신이 남아 돌았다.
3. 암브로즈
암브로즈는 로마제국의 한 지사의 귀족가문에서 태어나 고등교육을 받았고 밀라노 지방의 행정관이 되었다. 밀라노의 아리우스파의 감독이 죽고 후임 감독을 물색 중일 때 어떤 어린 아이의 소리가 들리기를 ‘암브로즈를 감독으로’라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무리를 이루고 있던 교인들이 일제히 암브로즈를 감독으로 삼자고 외쳐서 이때 아직 세례도 받지 않았던 그가 감독에 추천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세례를 받고 373년에 밀라노교회의 감독이 되었다. 그는 개인 교수를 채용해서 성경공부를 하고 오리게네스와 바실의 저서들을 가지고 교리와 신학공부를 하였고 그들의 사상이 서방교회에서 뻗어가게 만들었다. 바실은 삼위 하나님이 같은 신성을 가졌으며 삼위는 각각 독자적인 품격 또는 특질(hypostasis)을 가졌다고 정의하였다. 암브로즈는 수도원의 발달을 돕고 성모 동정녀 마리아를 수녀들의 모범으로 삼도록 하였다.
암브로즈는 서방 로마제국의 수도와 같이 된 밀라노의 감독으로서 정치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그가 아리우스파의 감독을 교회에서 축출하였을 때 발렌티니아누스 1세 황제의 미망인 유스티나의 반대를 물리치고 말하기를 궁전은 황제에게 속하고 교회는 감독에게 속한다고 말하였다. 암브로즈는 어린 그라티아누스 황제에게 신앙에 관한 편지를 써 보내고 아리우스주의를 경계하도록 진언하고 이교를 억압하는 정책을 촉구하였다. 이교를 몰락시킨 일에 있어서 암브로즈의 공이 가장 컸었다.
그라티아누스 황제가 살해되고 발렌티니아누스 2세가 황제가 되어서 승리의 제단의 제식을 회복시키려는 것을 암브로즈가 반대하여 저지시켰다. 그리고 그에게 말하기를 황제는 교회 안에 있고 교회 위에 있지 않다고 하여 황제가 교회 일에 간섭 못하게 하였다. 황제의 권세가 교회를 지배하려는 것을 그는 결사코 저지하는 한편 교회의 감독의 권위를 보존하는 데 힘썼다.
테오도시우스 1세 황제가 로마제국의 단독 지배자에 오른 후 부활절 주일에 암브로즈의 교회에 예배 드리러 갔는데 교회 문간에서부터 입당을 저지당하였다. 그 까닭은 황제가 데살로니가 지방의 소동을 진압하러 가서 무차별적으로 양민을 학살하였는데 참회의 고백 없이는 부활절 예배와 성만찬에 참여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 후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참회하였다.
암브로즈는 위대한 교회행정가로서 밖으로는 황제들의 월권을 막아내었고 안으로는 아리우스파를 물리치고 니케아 신앙고백을 교회가 믿고 따르게 만들었다. 그는 훌륭한 신학자는 아니었으나 저서 중 가장 유명한 「목회직」에서 성례전 신학과 그리스도교 윤리를 확립시켜 서방의 라틴교회에 토착시켰다. 그리고 그의 설교는 그가 남긴 최대의 공헌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는 유능한 연설가였고 그의 설교에는 권위가 있어서 그리스도교로 개종하는 문제로 고심하고 있던 젊은 어거스틴의 마음을 사로잡아 그의 회심과 개종을 도왔다. 수사학의 선생이었던 어거스틴은 암브로즈의 설교가 수사학적으로나 논법적으로 참으로 감탄할만하다고 극찬하였다. 암브로즈는 밀라노의 어느 교회에 신도들을 미리 많이 보내어 교회당을 채우고 찬송가를 부르면서 교회당을 점령하기 위하여 군인을 동원한 아리우스파 신도들이 교회에 들이닥쳤을 때 겁내지 않고 교회당을 지켜낸 일이 있었다. 이때 그의 신도들이 찬송가 소절을 번갈아 불렀던 것이 찬송가의 교창법의 시작이었다고 한다. 암브로즈는 찬송가의 작사자로서도 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