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WCC 세계인 위한 공동기도문 발표…멕시코 外

세계교회협의회(WCC)가 7월 셋째주 세계인을 위한 공동기도문을 발표했다. 기도대상국은 벨리즈, 과테말라, 온두라스, 멕시코 등이다.

벨리즈는 중앙아메리카에서 두 번째로 작고 인구밀도가 가장 낮은 나라이다. 동쪽으로 카리브해, 남쪽과 서쪽으로 과테말라, 북서쪽과 북쪽으로 멕시코와 접하고 있다. 이 나라에 남아있는 수많은 유적들은 250년부터 900년 사이에 절정을 이루었던, 백만 명 이상의 마야 인디언들이 모여 살며 수백 년에 걸쳐 이룩한 문명의 발달상을 보여준다. 오늘날 적은 수의 후손들이 벨리즈에 살고 있다. 이들은 특별히 최남단에 위치한 톨레도(Toledo) 지역에 밀집되어 있다.

1638년, 베이맨(Baymen)으로 알려진 영국인 목재업자들이 이 지역에 처음 정착한 유럽인들로 알려지고 있다. 베이맨들은 마야 인디언들을 사로잡아 로그우드(logwood)를 벌목하는 노예로 부렸다. 로그우드는 보라색과 붉은색 염료를 만드는 재료로 사용되었다. 이들 초기 정착민들은 그 후 150년간 주변 나라들에 정착한 스페인 정착민들의 공격 목표가 되었다. 1763년 파리조약으로 베이맨들이 귀국하는 길이 열렸으나, 스페인 정착민들은 계속하여 공격하였다. 1798년 영국 해군의 지원을 받은 베이맨들이 큰 승리를 거두면서 스페인 정착민들과의 전투가 종결되었다.

영국은 이 지역에 대한 지배력을 서서히 확대시켜갔고 1840년 영국령 온두라스를 건설하였다. 그 후 벨리즈는 이웃한 과테말라의 끊임없는 간섭으로 갈등을 빚다가 1981년에서야 독립국이 되었다. 과테말라는 벨리즈는 자국의 영토로 간주해왔다. 오늘날 벨리즈는 영국 연방의 일원이며 미주기구(Organization of American States, OAS)의 회원국이다.

벨리즈는 적은 인구수와 관광산업의 잠재력으로 인하여 일찍부터 이 지역의 다른 나라들에 비하여 높은 수준의 생활을 해왔고, 다른 나라들에 비하여 카리브해 국가들과 보다 많은 공통점을 공유해왔다. 인권은 헌법상의 권리로 보장되고, 법적으로 권장되고 있다. 공식적으로 여성부(Women"s Bureau)가 설치되어 여성들의 권리 신장을 위하여 일하고 있다.

1848년 멕시코에서 인디언들의 폭동이 일어나자 멕시코의 로마가톨릭교회 선교사들이 벨리즈로 건너온 것이 처음 기독교가 전래된 계기가 되었다. 오늘날 로마가톨릭교회는 벨리즈에서 가장 큰 기독교이다. 1825년 영국의 감리교회가 선교를 시작하였고, 그 뒤를 성공회가 뒤따랐고, 이들이 현재 벨리즈에서 두 번째, 세 번째 큰 교세를 가진 교회가 되었다.

과테말라는 동쪽으로 카리브해, 남서쪽으로 온두라스와 엘살바도르, 북쪽으로 멕시코와 벨리즈와 접하고 있다. 중앙아메리카에서 세 번째로 큰 영토를 가진 나라이며, 인구의 55% 이상이 마야 인디언으로, 대부분 농촌지역의 고산지대나 알티플라노(Altiplano) 고원에 살고 있다. 라디노스(Ladinos, 혼혈후손들이나 백인들)들은 과테말라시티와 해안지역, 그리고 동쪽의 저지대에 살고 있다.

과테말라는 15세기까지 마야 문명의 중심지였다. 대부분의 중앙아메리카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과테말라도 1523년부터 스페인의 통치를 받기 시작하여, 1821년에 독립국이 되었다. 그 후 국내적으로 계속된 야만적인 군사독재자들의 폭정으로 고통을 받았다. 두 차례의 평화로운 시기가 있었는데, 아레발(Areval) 대통령 재임기(1945-51)와 아르벤스(Arbenz) 대통령 재임기였다. 이 시기에 봉건제를 폐지하고 농민들을 지원하는 법안들이 만들어졌다. 아르벤스 대통령이 제정한 토지개혁법은 과테말라 경제의 십분의 일을 차지하면서 1901년부터 면세품목으로 분류되어 특혜를 누려오던 바나나 농장을 소유한 미국인 농장주들을 격분하게 만들었다. 아르벤스 대통령이 과테말라 정부에 세금을 낼 것을 요구했을 때, 과테말라에 55만 에이커의 바나나 농장을 가지고 있던 미국 과일회사(United Fruit Company)는 당시 미국 국무장관 존 포스터 둘레즈(John Poster Dulles)와 그의 동생이었던 미 중앙정보국(CIA) 국장 알렌 둘레즈(Allen Dulles)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1954년 6월, 미 중앙정보국은 아르벤스가 공산주의라고 선전하면서 과테말라 반정부군을 지원하였다. 아르벤스는 대통력직에서 물러나야 했고, 그 후 미국 바나나 회사의 이익을 위하여 일하는 대통령들과 독재자들, 장군들이 이 나라를 이끌어왔다. 인디언들과 민주화 운동세력에 대한 억압이 시작되어 20세기 말에 가서야 약화되었다.

1960년대 중반부터 미 중앙정보국과 반공위원회(Committee Against Communism)가 7만 여명의 정치적 반대자들에 대한 검거목록을 작성하면서, 대규모 학살이 자행되었다. 수백 명의 반정부 인사들이 암살당했다. 노동조합 집회를 습격하여 2백 명의 노조 지도자들을 살해한 날도 있었다. 1960년 초 과테말라 정부는 미국으로부터 6천 5백만 달러 이상의 군사원조를 받기 시작하였고, 자신들의 군장교들을 파나마에 있는 미군 기지로 보내 미군 교관들에게 군사훈련을 받게 하였다. 저격조 또한 조직되었다. “하얀 손”이라는 뜻의 마노 블랑카(Mano Blanca)는 독재자들과 집권당이 정적들을 제거하기 위하여 재정적으로 지원하고 뒤를 봐주던 열 두 개의 저격조들 중 하나였다. 이들은 언론에 재갈을 물렸고, 사제들과 수녀들, 개신교 목회자들과 일반 기초공동체 구성원들에 대한 공포정치를 전개하였다. 1970년까지 1만 명에 달하는 비무장 민간인들이 반정부인사들에 대한 야만적인 보복 폭력으로 사망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1978년 미국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은 루카스 가르시아(Lucas Garcia)장군이 대통령이 되면서, 노골적인 폭력과 공포정치가 시작되어 1982년까지 계속되었다. 사제들과 노조 지도자들, 지식인들과 언론인들, 법조인들과 학생 지도자들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암살당했으나 가장 많은 피해를 당한 사람들은 인디언들이었다. 1만 명 이상의 인디언들이 루카스 가르시아 재임 중에 살해당했고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지만 수천 명의 인디언들이 알티플라노에서 추방되었다.

가르시아의 뒤를 이어 대통령에 오른 리오스 몬트(Rios Montt) 장군은 거듭난 (born-again) 기독교인이었다. 그는 야만적인 “총알과 콩알”(bullets and beans) 정책으로 2만 명 이상을 살해하였다. 그가 집권한 이후 과테말라는 두 번의 대통령 선거 실패, 두 번의 군사쿠데타, 두 번의 국가비상조치, 두 번의 헌법개정, 11개월의 헌정중단, 네 차례에 걸친 대사면 기간과 네 명의 국가수반이 등장하였는데, 그들 중 세 명이 장군들이었다. 미국의 그린베레 특공대가 과테말라의 군사고문으로 있으면서, 7만 명의 농부들을 수용소에 가두고, 반정부 인사들에 대한 초토화 작전과 전략적인 부락 건설, 민간인 감시단 조직 등을 전수하였다. 대부분의 언론들은 군사독재 기간 내내 침묵을 지키며 이러한 잔학한 실상들은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로마가톨릭교회의 진보적인 신자들과 에큐메니칼 진영의 활동가들이 이러한 참상을 알리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이들은 값비싼 대가를 치러야 했다. 삼십 명 이상의 사제들과 수많은 신자들이 살해당했다.

로마가톨릭교회는 이러한 참상을 고발하기 위하여 폭력사태에 대하여 조사하고 그 결과를 발간하였다. 고문과 체포, 살해 위험에서 살아남은 6천 5백 명의 생존자들과 인터뷰가 “역사적 기억의 회생 계획”(Project to Recover Historic Memory, REMHI)라는 제목으로 진행되었고, 1998년, 과테말라 로마가톨릭 주교인 후안 게라르디 코네데라(Juan Gerardi Conedera)가 동일한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코네데라 주교는 이 보고서가 출판된 지 이틀 후에 암살당했다. 그의 죽음 이후에 이 나라의 정치적 상황이 안정되어가는 듯 했으나 기본적인 전제정치 구조는 여전히 남아있었다. 교회들과 에큐메니칼 단체들을 난민들과 추방된 사람들이 귀향하여 다시 정착하는 것을 돕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고 있으며, 국제연합의 화해 노력이 결실을 맺도록 지원하고 있다.

오늘날 전체 인구의 75% 이상이 로마가톨릭교회 교인들이며, 가톨릭교회는 국교 차원으로 인정받고 있다. 그러나 신자들 대부분은 인디언들인데 반해 교회의 지도력은 대부분이 외국인들이기 때문에 오는 날카로운 긴장이 로마가톨릭교회 내부적으로 자주 일어난다. 또한 계급적인 독재체제를 지지했던 교인들과 가난한 사람들의 권리를 지키는 편에 섰던 많은 교인들 사이에도 긴장이 존재하고 있다.

지난 이십년간 오순절 운동이 크게 일어났다. 하나님의 성회는 현재 과테말라에서 두 번째로 큰 기독교회가 되었다. 과테말라의 교회들은 국민들을 위하여 건강보험 제도와 문맹퇴치 운동, 지도자 양성 프로그램 등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온두라스는 북쪽과 동쪽으로 카리브해, 남쪽으로 니카라과, 남서쪽으로 태평양, 서쪽으로 엘살바도르와 과테말라와 접하고 있다. 과테말라와 그 밖의 중앙아메리카 국가들과 같이 한때 신세계에 건설된 스페인 제국의 일부였던 온두라스는 마야문명의 자랑스러운 중심이었다. 1524년 스페인의 식민지가 되었고, 1821년에 독립하였다.

독립 후에 1978년까지 온두라스를 통치한 독재자들은 초기에는 관대한 정책을 시행하였으나 점차 독선적이고 군사적으로 정부를 운영하였다. 1982년, 온두라스는 새로운 헌법을 제정하고 다당제 공화국으로 다시 출발하였다. 온두라스는 미국의 과일회사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어왔다. 1980년대 미국의 지원을 받는 콘트라 반군이 니카라과의 산디니스타 정부를 전복하려고 전투를 벌일 때 이 지역을 배후기지로 삼았다. 미국 역시 온두라스를 군사적 필요에 따라 사용하였고, 이 지역에서 저강도 전쟁을 계속 수행하기 위하여 온두라스와 엘살바도르 군대를 훈련시키는 기지들을 건설하였다. 이러한 미국의 지원과 관심에도 불구하고 온두라스는 언제나 중앙아메리카에서 가장 가난한 국가였으며, 때때로 엘살바도르와 니카라과와 전쟁을 벌였다. 이 때문에 수십 년 동안 폭력을 피해 조국을 떠난 수천 명의 난민들이 찾아들었다.

또한 이 지역은 잦은 홍수와 태풍, 가뭄으로 많은 피해가 발생하는 곳이다. 1998년, 허리케인 미치(Mitch)가 강타하여 1만3천 명 가량이 목숨을 잃었고, 2백만 명이 집을 잃었고, 미화 50억 달러 이상의 재산피해가 발생하였다. 당시 온두라스는 높은 실업률과 인플레이션, 수십 년간 계속되어 온 독재정권의 부정부패와 실정으로 인한 경제와 정치적 위기가 계속되면서 항상 불안정한 상태였다. 2000년에 찾아온 가뭄은 더욱 비참한 상황을 초래하였다. 결국 최악의 상황에서 경제개혁과 정부 혁신의 필요성이 제기되고, 시작되었다. 그러나 국민생활에 기본적으로 필요한 요소들(쉼터와 식수, 위생 등)이 절대적으로 부족하여 국가의 활력을 찾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다른 중앙아메리카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스페인 사람들에 의하여 로마가톨릭교회가 전래되었고, 오늘까지 온두라스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종교로 남아있다. 1860년 개신교회 선교사로는 처음으로 감리교인들이 찾아왔으나, 현재 온두라스에서 가장 큰 개신교회 세력은 독립교회들이고, 그 중에서도 오순절 계통의 교회들이다. 1881년부터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었고, 교회는 때때로 중요한 사회적 문제에 대하여 발언하고 있으며, 특별히 교육과 의료제도 개선을 위하여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멕시코는 세계에서 스페인어를 사용하는 가장 큰 나라이다. 이 지역에 인류가 처음 거주하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2만1천 년 전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올멕(Olmec), 마야(Maya), 톨텍(Toltec)의 고대 문명의 발상지로 알려져 있다. 특히 오늘날 수도 멕시코시티가 자리하고 있는 테노크티틀란(Tenochtitlan)에서 발상한 아즈텍 문명은 군사력과 예술, 철학이 발달한 사회였다. 1519년 스페인의 코르테스(Hernan Cortes)가 침략하여 아즈텍과 멕시코를 스페인의 식민지로 만들었다. 1810년 멕시코의 독립을 위한 봉기에서 승리하였고, 1821년 독립을 성취하였다.

1836년, 멕시코로부터 텍사스가 독립을 선언하였다. 그 후 멕시코와 미국의 전쟁(1846-48)의 결과로 멕시코의 영토의 절반가량을 미국에게 넘겨주었다. 1857년, 새로운 헌법을 제정하여 로마가톨릭교회가 소유하고 있던 교육시설들을 환수하였고, 주교들이 가지고 있던 광대한 토지들을 매각하도록 압력을 가하였다. 이러한 조치로 인하여 내전이 발발하였고, 전투는 4년간 계속되었다.

19세기 말까지 계속된 독재정권의 실정에 실망한 국민들의 분노가 1910년 멕시코 혁명으로 폭발하여 7년간 혼란이 계속되었고, 1917년 개헌 작업을 시작하면서 종식되었다. 그 후 20세기 남은 기간 동안 멕시코는 명목상으로 민주주의 국가였지만 실제로는 부정부패와 민중들의 항거에 대한 경찰의 폭력적인 진압이 계속되었다. 1929년, 제도혁명당(Institutional Revolutionary Party, RPI)이 결성되었고, 선거에서 승리하였다. 그 후 이들은 한번도 정권을 내주지 않고 계속하여 70년간 집권하면서 점차 부패하고 독재적인 정부가 되었다. 1938년, 멕시코 역사상 국민들에게 가장 많은 사랑을 받았던 라자로 까르데나스(Lazaro Cardenas) 대통령이 멕시코의 정유산업을 국유화하였다. 이는 미국을 격노하게 한 사건이었다. 또한 국민들의 열망을 만족시키는 정책들을 시행하여, 노동조합의 권한을 강화하고, 수백만 에이커에 달하는 토지를 지주들에게서 취하여 가난한 농부들에게 재분배하였다.

1990년대 사이에 멕시코는 정치적, 경제적 혼란기를 겪었고, 특별히 남부의 치파스(Chipas) 지역에서 폭력사태가 발생하였다. 수많은 과테말라 난민들이 자국의 폭력을 피하기 위하여, 그리고 막강한 지주들의 착취에서 탈출하기 위하여 몰려들었던 것이다. 1994년, 사파티스타스(Zapatistas)라는 인디언 무장단체가 몇몇 마을을 점령하고 정치경제적 개혁을 요구하였다. 같은 해 말에는 대통령 후보와 고위 정치인들이 잇달아 암살을 당했다. 1996년, 또 다른 반정부 단체인 인민혁명군(Popular Revolutionary Army, PRA)은 추모예배 장소와 경찰서 등을 습격하였다. 멕시코 정부는 국민들의 개혁에 대한 요구에 응답하여 1999년, 처음으로 민주적인 예비 선거를 실시하였고, 이 선거에서 제도혁명당은 10년 만에 처음으로 패배하였다.

멕시코의 도시 지역에 사는 소수의 부자들이 미국과 유럽에 버금가는 높은 생활수준을 누리고 있는 반면에 대부분의 국민들은 광대하고 인구밀도가 높은 빈민굴에서 생활하고 있다. 농촌 지역의 생활은 1910년 혁명기에 비하여 겨우 조금 나아졌을 뿐이다. 시민연합으로 불리는 제도화된 혜택을 보장하는 발달된 사회보장제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국민들이 실업과 영향실조, 기아에 고통을 당하고 있다. 1970년대 새로운 유전이 발견되면서 일시적인 경제적 호황을 누렸지만, 1980년대 국제유가가 급락하면서 경제가 다시 후퇴하였다. 1985년 대규모 지진이 발생하여 멕시코시티의 여러 지역을 파괴하였다. 급속한 도시화와 인구과밀화가 가져온 심각한 공기와 토양, 수질 오염은 멕시코가 직면하고 있는 또 다른 사회문제들이다.

헌법 상 국교가 없는 세속국가이지만, 멕시코는 거의 대부분의 국민들이 로마가톨릭교인들이다. 이들 중에는 영세를 받은 아메리카 인디언들도 포함이 되는데, 이들은 민속 가톨릭교(folk-Catholicism 가톨릭교와 전통적인 아메리카 인디언 종교가 혼합된)에 따라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기존교단이나 독립적인 많은 개신교회 선교 활동이 있었지만, 오늘날 여전히 적은 비율이고, 몰몬교와 여호와의 증인도 멕시코에서 활동하고 있다. 라틴 아메리카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오순절 계통의 교회들이 급속하게 성장하면서 로마가톨릭 교인들을 흡수하고 있다. 교회의 내적인 구조와 사회적 기능에 관한 규정과 제한을 둔 법령도 만들어져 있다. 그러나 반-성직자적인 법령들이 적용되는 경우는 드물고, 국가와 로마가톨릭교회는 평화적으로 공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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