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경동] 하늘 양식-땅 그릇

2010년 7월 11일 경동교회 박종화 목사 설교

성경본문

신명기 7:6-13

당신들은 주 당신들의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요,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땅 위의 많은 백성 가운데서 선택하셔서, 자기의 보배로 삼으신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당신들을 사랑하시고 택하신 것은, 당신들이 다른 민족들보다 수가 더 많아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당신들은 모든 민족 가운데서 수가 가장 적은 민족입니다. 그런데도 주님께서는 당신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당신들 조상에게 맹세하신 그 약속을 지키시려고, 강한 손으로 당신들을 이집트 왕 바로의 손에서 건져내시고, 그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내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신들은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시며 신실하신 하나님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에게는, 천 대에 이르기까지 그의 언약을 지키시며, 또 한결같은 사랑을 베푸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주님을 미워하는 사람에게는 당장에 벌을 내려서 그를 멸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자기를 미워하는 사람에게는 징벌을 늦추지 아니하십니다. 그러므로 당신들은 오늘 내가 당신들에게 내리는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잘 지켜야 합니다." "당신들이 이 법도를 듣고 잘 지키면, 주 당신들의 하나님도 당신들의 조상에게 맹세하여 세우신 언약을 지키시고, 한결같은 사랑을 베푸실 것입니다.” 아멘.

고린도전서 10:9-13

그리스도를 시험하지 맙시다. 그들 가운데 얼마는 그리스도를 시험하였고, 뱀에게 물려서 죽었습니다. 그들 가운데 얼마가 불평한 것과 같이 불평하지 마십시오. 그들은 파멸시키는 이에게 멸망을 당하였습니다. 이런 일들이 그들에게 일어난 것은 본보기가 되게 하려는 것이며, 그것들이 기록된 것은 말세를 만난 우리에게 경고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서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여러분은 사람이 흔히 겪는 시련 밖에 다른 시련을 당한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여러분이 감당할 수 있는 능력 이상으로 시련을 겪는 것을 하나님은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시련과 함께 그것을 벗어날 길도 마련해 주셔서, 여러분이 그 시련을 견디어 낼 수 있게 해주십니다. 아멘.

마태복음서 28:16-20

열한 제자가 갈릴리로 가서, 예수께서 일러주신 산에 이르렀다. 그들은 예수를 뵙고, 절을 하였다. 그러나 의심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예수께서 다가와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아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 아멘.
 

설교문  
  
<하늘 양식-땅 그릇>

우리는 공기를 들이 내쉬며 숨 쉬고 호흡하며, 물을 마시고, 햇빛을 받으며 삽니다. 항상 우리가 가지고 있는 건데 잊어버리고 삽니다. 누가 우리에게 공기를 주셨고 물을 주셨고 대지를 주셨고 그리고 빛을 주셨습니까? 혹시 우연히 생긴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저를 구원하신 하나님이 주셨다고 생각하면 주신 분한테 감사하면서 호흡할 수는 없습니까? 물 한 그릇 마시면서 감사하면서 물 마실 수 없습니까? 아주 작은 이야기 같은데 매일같이 우리의 생명과 직결되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신 모든 것을 저희들이 몸이라는 그릇에 담고 호흡도 하고 갈증도 이기고 그렇게 살아갑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하나님이 이런 모든 은혜를 풍성히 부어주시는데, 단 주시는 은혜를 담는 그릇에 따라서, 사람의 몸에 따라서, 받아들이는 사람의 결단에 따라서, 주님의 은혜는 다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공기를 주셔서 우리는 숨 쉬고 살아갑니다. 숨 쉴 수 있는 것을 산다고 하고 숨이 멈추는 것을 죽는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이 땅의 은혜를 누릴 수 있으면 사는 것이고, 은혜와 관련이 없이 숨을 못 쉬면 죽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죽음이 하나님의 은혜를 막을 수 있습니까? 값없이 주시는 모든 은총을 인간의 죽음이, 생명의 중단이 막을 수 있습니까?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은혜는 막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 숨을 쉴 수 있는 그릇이 깨지면 깨지지 않는 그릇을 다른 세계에 마련해 주셔서 하나님이 주신 숨을 계속 쉬게 하십니다. 그것을 우리가 영생의 세계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우리는 신앙으로 고백하고 믿습니다.

이 땅에 우주 공간에 사는 동안 인간은 숨을 쉬며 살고 생명을 유지해 갑니다. 우주공간을 떠난 또 다른 하나님의 공간에 가서는 영원히 숨 멎음이 없는 그런 세상을 삽니다. 이렇게 우리가 신앙을 고백하고 사는데 이 땅에 있는 동안 온 우주와 천체가 생명의 산물이요 그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과 자연과 풍토와 모든 것이 다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그 구원의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우리는 그렇게 고백할 수 있습니다. 학문적으로 말하면 그 그리스도는 우주적 그리스도라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인간과 숨 쉬고 살아가는 모든 천지 만물이 다 구원을 받아야 하고, 사람구원과 자연구원과 우주구원도 받아야 하고, 그 구원을 위해서 처음부터 작정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우주적 그리스도, 우주적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셨지만 받는 그릇이 다르면 다르게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바람 이야기, 공기 이야기를 했지만 하나님이 주신 은혜는 그것만이 아닙니다. 우리는 각자 받은 달란트가 다 있습니다. 그런데 달란트가 다 다른 이유는, 하나님은 모든 달란트를 인간들에게 다 주셨지만 받는 인간이 음악 달란트를 받은 사람이 있고, 체육 달란트를 받은 사람이 있고, 사업하는 달란트를 받은 사람이 있고, 다 다릅니다.

자기는 그런 달란트만 받은 게 아니라 자기 그릇이 본래 그런 그릇입니다. 그 그릇 속에 하나님은 모든 인간, 삼라만상에 은혜를 거리낌 없이 다 부어주셨습니다. 믿는 자에게도 주시고 믿지 않는 자에게도 주셨습니다. 믿는 자가 받는 그릇은 “예수 그리스도가 내 주님이십니다. 그 분이 만드신 그릇이라고 믿습니다.” 하는 고백으로 받으면 신앙이 됩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선민으로 인도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이렇게 전합니다.
“사랑하는 백성 여러분, 우주 공간에 사는 모든 민족이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받고 삽니다. 그런데 특별히 당신네들을 선민이라고 택한 이유가 있습니다. 우주 공간의 역사는 똑같지만 자연의 섭리는 똑같지만 그 중에서도 하나님과 함께 구체적인 역사를 이루어가라는 특별한 사명을 지닌 민족으로 당신들을 택했습니다.”

“공평하신 하나님이시지만 이를 위해서 한 민족을 택했는데 여러분 자만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수로 보면 작은 민족에 불과 합니다. 능력이 뛰어난 것도 아닙니다. 제가 속한 우리 민족이지만 이유는 여러분의 뜻과 상관없이 하나님이 특별히 사랑을 베푸셔서 여러분을 택했습니다. 택한 목적은 여러분 홀로 하나님 백성이라고 교만하게 살라는 게 아니고 여러분이 받은 은총을 감사하며 살고 복되게 살고 진지하게 살면 너무 감사하여 여러분이 믿는 하나님을 다른 민족에게도 전파하라는 사명을 띠고 여러분을 택했습니다.”

우리 교회에 재능 가지신 분이 참 많은데 그 재능들을 혼자 즐기라고 받았다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나 홀로 잘났다고 그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다른 사람에게 베풀고 들려주고 이야기하고 그래서 서로 감동받고 박수치고 격려하고 그렇게 사는 거 아닙니까? 제가 열성이 있어서 사랑을 많이 하더라도 사람이 사람을 사랑해야지 저 혼자 사랑할 수 없지 않습니까?

저한테 특별히 은총을 주신 것은 이 은총을 감사하고 즐거이 여기면서 그 은총을 나누어 주라고 저한테 준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식으로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모세가 말합니다. “사랑하는 이스라엘 백성 여러분, 한 가지만 지키세요. 나누어 주세요. 나누어 주기 전에 먼저 하나님께 감사하세요.”

감사하세요. 그것이 하나님이 만드신 법입니다. 나누어 주세요. 그것이 하나님이 만드신 규례입니다. 법과 규례를 지키면 수천 대에 이르러서 하나님이 함께 약속을 지키실 것이고 규례를 어기면 반드시 보복합니다. 감사, 나눔, 구약성경 전체를 보면 하나님의 뜻은 그런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시니 택함에 감사하십시오. 그러나 감사하고 안 하고는 여러분의 결단입니다. 자유를 주셨습니다. 자유를 속된 욕망의 척도로 쓰지 마시고 자유를 나눔과 섬김으로 써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주신 규례입니다. 여러분, 모세가 말한 규례를 법망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감사하세요. 나누어 서로 즐기세요.

얼마 전에 인천대교에서 사고가 났습니다. 차를 운전하면서 늘 느끼는 점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무한대의 자유가 있기 때문에 차를 타고 얼마든지 운전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교통 규칙이라는 게 있습니다. 차를 잘 움직이는 사람의 잣대 중에 중요한 것은 속도를 누가 잘 내고 열심히 가느냐 하는 것보다 누가 제 때 브레이크를 잘 밟는지, 어느 차가 브레이크 밟으면 잘 서느냐가 중요합니다. 속도 많이 내는 차가 좋은 차가 아닙니다. 비싼 차일수록 브레이크 성능이 좋다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브레이크는 왜 있고 왜 서야 합니까? 우리가 만든 질서입니다. 서로 질서를 지켜야 차가 유용하고 사람이 다치지 않으며 안전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규정을 지키지 않아서 사고가 많이 납니다. 자동차 탓할 거 없고 규정을 안 지키면 그렇습니다. 속도를 많이 내라고 규정하지 않았습니다. 설 때는 서고 갈 때는 가고 자유롭게 결정하지만 규범을 지키십시오.

규범을 지키는 것이 속박입니까? 아니면 자유입니까? 인간에게 자유가 뭐냐고 물어보면 답변이 여러 가지인데 저에게 자유란 이웃 앞에서의 자유입니다. 교통 신호로 비유해서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내가 갖고 있는 운전자의 자유는 신호등 앞에서의 자유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신호등은 규제가 아니라 우리가 함께 살기로 약속한 우리의 약속입니다.

신호등 앞에서의 자유입니다. 파란불 앞에서는 가는 자유가 있고 빨간불 앞에서는 서는 자유가 있습니다. 그것을 속박이 아니라 자유라고 생각하면 저는 편하게 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유를 자기의 목적으로 쓸 수도 있습니다. 위반하는 것도 여러분의 자유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축복을 마음껏 자기 은혜의 그릇에, 달란트 그릇에 담으십시오. 마음대로 드십시오. 단 한 가지 제안할 게 있습니다. 당신들이 믿는 하나님, 그 하나님은 나 여호와 한 분이라고만 생각하고 은혜를 받으십시오. 나 하나님을 당신이 쉽게 만들고 당신 멋대로 제작할 수 있는 우상이라고 하는 신과 나를 동일시하지 마십시오.

우상을 섬기려면 스스로 섬기지 나를 우상화시키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편리하게 만든 그 우상, 신학적, 교리적, 윤리적, 교조적, 사고방식, 모든 것이 만드는 편리한 신을 만들어 놓고 그 신이 우주 만물을 지배하고 당신에게 은혜를 주시는 여호와라고 그렇게 생각하지는 마십시오. 나는 그것은 싫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유일한 규정은 그것입니다. 우상 숭배하지 마십시오. 나하고 우상을 동일시하지 마십시오. 그러면 나는 이 은혜 주는 것을 중단합니다. 이것만 지키시면 여러분은 평생토록 아주 자유한 가운데서 마음대로 누릴 수 있습니다.

저는 살아가면서 우리가 여러 가지 합의한 것들, 이것이 즐거우면 지키고 즐겁지 않으면 바꾸면 됩니다. 신학의 교리적인 것들도 항상 가변적입니다. 모두 바꿀 수 있는데 단 한 가지만 안 된다는 겁니다. “하나님을 우상화하지 마십시오.” 내가 원하는 우상을 하나님으로 둔갑시키지 마십시오.

이 말씀을 오늘 고린도전서에 보면 사도 바울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규정을 총괄하여 과거에는 문서에 쓴 율법으로 규정을 주었지만 이제 하나님은 규정을 사람으로 만들었습니다. 몸으로 만들었습니다. 혼으로 만들었습니다. 영혼으로 만들었습니다.

이 모든 것을 합친 구체적인 규정이 있습니다. 당신들을 사랑하고 당신들 때문에 죽은 예수그리스도가 규범입니다. 이 규범만은 적어도 예수를 믿는 사람이 테스트 하지 마십시오. 우상 섬김 하나만을 여러분이 하지 말듯이 예수그리스도가 여러분의 구세주인 것만은 시험하지 마시고 그분과 함께 살기로 하고 그 외에 모든 것은 자유롭게 지내십시오.

예수를 믿는다는 말은 예수 자신이 우리의 저의 구세주임을 믿는 것입니다. 그 믿음이 깨지면 예수 믿는다는 말은 안 하는 게 좋습니다. 차라리 그게 진실한 거 아닙니까? 믿는 사람을 우상화하거나 믿는 사람에 대해서 시험을 하면 믿음을 주는 사람이 어떻게 여러분과 동행할 수 있습니까?

그러나 나 예수는, 나 하나님은, 모든 분에게 공평할 수 있고 다 여러분을 끌어드리겠습니다. 여러분에게 재능도 드리고 재능을 발산시키겠습니다. 나를 우상화하지 마십시오. 나를 물건처럼 창조하지 마십시오.

이 사실을 오늘 예수께서 주시면서 이런 부탁을 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를 구세주로 믿고 구원을 받은 감격이 있으면 시험하는 능력보다 나를 전파하는 능력을 받으십시오. 감격하면 서로 나누어야 될 것 아닙니까? 세상 끝날 까지 가서 여러분이 받은 이 구원의 기쁨을 좀 전파해 주십시오. 그것이 삶의 진실일 겁니다. 그것이 진리일 겁니다.

저는 이걸 읽으면서 여러분이 양화진에 가보시라고 권면합니다. 양화진에 가면 외국인 선교사들이 묻혀 있는 무덤들이 있습니다. 무덤수가 415개인데 그 중에는 초대 선교사가 왔을 당시에 군인들도 와서 묻혀있어서 순수 선교사 무덤은 144개입니다. 열여섯 나라에서 온 초기 선교사들입니다. 저는 그걸 보고 거기 묻힌 사람들의 묘비에 쓰인 글자를 보았습니다. 이분들이 어떻게 예수를 믿고 전파했는지 몇 분 소개해 보겠습니다.

고종의 밀사로 화란의 헤이그에 가서 우리 조선독립을 위해서 일한 사람이 이준 열사입니다. 그 때 이준 열사가 어학에 능통한 것도 아니고 세계 물정을 다 아는 것도 아니었는데 세계에 우리나라를 알렸습니다. 그리고 고종의 밀사로 간 사람인데 헐버트라는 외국 선교사입니다. 그는 선교사 중에 지성미가 넘치는 사람이라고 이름이 난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고종의 밀사로 헤이그에 파견되어 한반도의 독립 이야기를 전 세계에 자기나라 언어로 알린 사람입니다. 제가 생각해봤습니다. 해외에 우리나라 사람들도 선교사로 많이 가는데 가서 고통당하고 아픔당하는 그 나라를 위해서 예수그리스도의 복음도 전할 수 있고, 그 나라의 민생과 해방과 독립을 위해서 목숨을 내 놓을 수 있는 선교사가 몇 명이나 될까?

지난 이야기입니다만 그냥 역사적인 사실로만 받아들이시면 안 됩니다. ‘한국 땅은 식인종의 나라다.’ 이것이 100년 전 미국을 포함한 서양 선교부에 있던 한반도에 관한 안내 책자에 나와 있습니다. 가면 먹혀 죽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를 전하러 왔는데 와 봤더니 이 나라가 일본의 식민지에 묻혀서 죽게 되었던 것입니다. 독립하는 것이 옳다고 판단하고 하나님의 복음을 그렇게 전해야겠다며 ‘나도 밀사가 되어서 헤이그로 가겠습니다.’

요즘 말하면 간첩이요, 국사범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 사람이 헐버트라는 선교사입니다. 이 분은 감리교 선교사입니다만 한국 문화도 많이 배웠고 한국을 많이 소개한 분입니다. 이분의 묘지에는 이렇게 씌어있습니다.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히기보다 한국에 묻히기를 원하노라. 나를 이 땅에 묻어주시오.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한 이 사람, 그리고 한국을 사랑한 이 사람, 저는 존경합니다. 우리 이런 분의 노력 때문에 오늘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 중에는 일본 식민지와 짝해서 적당히 생존 유지하는 사람도 많았고 나라를 배반하는 사람도 있었고 뭐라고 표현하든지 교회를 위해서 선교가 쉬면 안 되니까 이런 목적이 있었지만 우리가 보기에 미덥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복음 때문에 열심히 노력해 준 선교사들도 있었습니다.

여러분이 아는 선교사 중에서 언더우드 목사님, 아펜젤러 목사님이 있을 것입니다. 장로교를 세우신 언더우드 목사님은 자기가 예수 믿고 예수를 구세주로 받은 경험을 우리 민족들한테 전해주면서 하는 성경구절을 인용하는 것이 있습니다. 이 묘비에 쓰여 있는 성경구절을 읽으며 다시 성경말씀이 새로워졌습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우리 민족에게 주고 싶은 메시지의 전부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오늘 말씀과 결부시켜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은총을 주시고 하늘 양식을 풍성히 주셨습니다. 기뻐 받으세요. 쉬지 말고 기도하세요. 감사하세요. 범사에 감사하세요. 찬양하세요. 그 이외에 다른 자유가 뭐가 있습니까? 저는 우리에게 주신 자유는 기뻐할 자유, 쉬지 말고 기도할 수 있는 자유, 감사할 수 있는 자유가 그렇지 않은 억압보다 훨씬 강합니다.

아펜젤러 목사님은 나는 여러분한테 섬김 받으러 온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을 섬기러 왔습니다. 저는 우리가 받고 싶은, 감사하고 싶은, 찬양하고 싶은, 우리 100년 전의 선교사들의 입을 통해서 예수께서 파송하신 말씀, 만 천하에 가서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라. 그리고 예수 믿는 사람들이 늘게 하여라. 이 말씀대로 살아온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섬기러 왔습니다. 우리나라는 이제 선교사를 파송하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가서 한국을 전하고 복음을 전하는 거 좋지만 그 나라에 묻히기를 원하는 사람, 그 나라를 섬기고 싶어하는 사람, 그 나라 사람들보고 함께 감사하고 기뻐하자고, 쉬지 말고 기도하며 살자고, 몸으로 혼으로 전할 수 있는 사람, 이런 선교사가 많아야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합니다. 가서 내가 믿은 예수를 있는 그대로 전달하는 것이 중요한 전달입니다. 가서 하나님은 우리를 배신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에게 우리의 은사를 주신 은사에 감사하고 전합니다.

한 가지 이런 생각을 하면서 오늘 우리가 결단할 게 있습니다. 지금은 선교사라는 이름을 잘 안 씁니다만 이국땅에서 우리나라의 선교사는 아니지만 한 가정의 배필로 오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 결혼 못한 노총각들에게 조금 못살기는 하지만 캄보디아나 베트남, 필리핀에서 배필로 오는데 남편 입장에서는 그 사람들이 천사와 같은 선교사입니다.

그분이 와서 나는 당신과 결혼하고 싶습니다. 가정 이루고 싶습니다. 만대 축복을 전하고 싶습니다. 희생하고 싶습니다. 섬기고 싶습니다. 사랑하고 싶습니다. 그렇게 올 거 아닙니까? 와서 소위 우리가 말하는 다문화의 가정을 만들고 있습니다. 일본처럼 다문화 가정은 백인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다문화가정이라는 정책은 없어서 모르나 저희들은 조금 배불리 살게 되었고 힘도 축적해서 우리보다 조금 못하는 나라에서 사람들이 옵니다.

이분들이 있어야 할, 은혜 받은 사람들이 있어야 할 장소는, 그릇은 큽니까? 그분들은 오셔서 사랑도 느끼고 자유도 만끽합니까? 그분들을 바라보는 눈은 사랑스럽습니까? 멸시합니까, 받아들입니까? 과거에는 예수이름만 들고 오는 선교사가 있었지만 지금은 가정을 살리러 몸으로 와서 섬기는 선교사가 있습니다. 헌신하겠다고 오는 선교사도 있습니다.

그 선교사를 받을 만한 입장이 되어서 우리나라를 하나님이 택해 주셨습니다. 많은 백성이 와서 섞여 살고. 그런데 지금 우리는 섞여 사는 그런 문화에 별로 익숙하지 않아서 소위 다문화라고 하는 사람들이 고난을 당하고 있습니다. 문화도 다양하고 생김새도 다양하고 그릇이 다양한데 같이 와서 이 땅에 하늘이 주시는 풍성한 양식을 함께 담아서 먹고 마시며 아까 이야기대로 기뻐하십시다. 감사하십시다. 그리고 전하십시다.

저는 우리나라가 하나님이 택한 나라라고 믿습니다. 하나님의 법도는 하나님이 주시는 사랑을 있는 그대로 먹고 마시고 즐기고 그 다음에 나누어 주는 것입니다. 그래야 축복이 수천 대까지 이른다고 생각합니다. 나라뿐이 아니고 우리 자신도 그렇게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백 년 전 이 땅에 온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앞으로 백년을 수놓을 우리의 선교는 교회로 가정으로 사회로 각양각색 분야에서 세계에 전하고 세계를 받아들이고 그렇게 살라고 오늘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렇게 기쁜 복음을 전하고 사는 사람에게 나는 항상 사랑으로 함께 동행하겠다.” 여러분,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우리와 동행하는 하나님을 우리 하나님으로 받읍시다. 그것이 수천 대까지 이르는 하나님의 축복의 길입니다. 여러분을 찾으십니다. 응답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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