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경동]풍성한 은혜 속의 메마름

2010년 7월 18일 경동교회 박종화 목사 설교

성경본문

출애굽기 16:11-18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이스라엘 자손이 원망하는 소리를 들었다. 너는 그들에게 `너희가 저녁이 되면 고기를 먹고, 아침에는 빵을 배불리 먹을 것이다. 그렇게 될 때에 너희는 나 주가 너희의 하나님임을 알게 될 것이다` 하고 말하여라." 그 날 저녁에 메추라기가 날아와서 진 친 곳을 뒤덮었고, 다음날 아침에는 진 친 곳 둘레에 안개가 자욱하였다.

14 안개가 걷히고 나니, 이럴 수가, 광야 지면에, 마치 땅 위의 서리처럼 보이는, 가는 싸라기 같은 것이 덮여 있는 것이 아닌가! 이스라엘 자손이 그것을 보고, 그것이 무엇인지 몰라서, 서로 2)"이게 무엇이냐?" 하고 물었다. 모세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이것은 주님께서 당신들에게 먹으라고 주신 양식입니다. 주님께서 당신들에게 명하시기를, 당신들은 각자 먹을 만큼씩만 거두라고 하셨습니다. 당신들 각 사람은, 자기 장막 안에 있는 식구 수대로, 식구 한 명에 한 오멜씩 거두라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그대로 하니, 많이 거두는 사람도 있고, 적게 거두는 사람도 있었으나, 오멜로 되어 보면, 많이 거둔 사람도 남지 않고, 적게 거둔 사람도 모자라지 않았다. 그들은 제각기 먹을 만큼씩 거두어들인 것이다.

빌립보서 2:1-4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에게 무슨 격려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무슨 동정심과 자비가 있거든, 여러분은 같은 생각을 품고,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여 한 마음이 되어서, 내 기쁨이 넘치게 해 주십시오. 무슨 일을 하든지, 경쟁심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겸손한 마음으로 하고, 자기보다 서로 남을 낫게 여기십시오. 또한 여러분은 자기 일만 돌보지 말고, 서로 다른 사람들의 일도 돌보아 주십시오.

누가복음서 9:10-17

사도들이 돌아와서, 자기들이 한 모든 일을 예수께 이야기하였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데리고, 따로 벳새다라고 하는 고을로 물러가셨다. 그러나 무리가 그것을 알고서, 그를 따라갔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맞이하셔서, 하나님 나라를 말씀해 주시고, 또 병 고침을 받아야 할 사람들을 고쳐 주셨다. 그런데 날이 저물기 시작하니, 열두 제자가 다가와서, 예수께 말씀드렸다. "무리를 헤쳐 보내어, 주위의 마을과 농가로 찾아가서 잠자리도 구하고 먹을 것도 구하게 하십시오. 우리가 있는 여기는 빈 들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그들이 말하였다. "우리에게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나가서, 이 모든 사람이 다 먹을 수 있을 만큼 먹을 것을 사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거기에는 남자만도 약 오천 명이 있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사람들을 한 오십 명씩 떼를 지어서 앉게 하여라." 제자들이 그대로 하여, 모두 다 앉게 하였다. 예수께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쳐다보시고 그것들을 축복하신 다음에, 떼어서 제자들에게 주시고, 무리 앞에 놓게 하셨다. 그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부스러기를 주워 모으니, 열두 광주리나 되었다.
 

설교문

13년 전입니다. 1997년, 아프리카에 짐바브웨라는 큰 나라지만 가난한 나라가 있습니다. 수도인 하라레에서 그 다음해에 치러질 WCC 세계 총회를 준비하러 갔다 온 적이 있습니다. 토의하는 중에 이런 성서 연구 테마가 떠올랐습니다. “오늘날의 기적은 무엇인가? 누가 그 기적을 누릴 수 있는가?” 이 테마를 성서연구 겸 분과토의 테마로 삼기로 결정을 했습니다.

오늘 전 세계적으로 보면 모두가 받아들일 만한 경제적, 정치적 기적을 말하라고 하면 두 개의 실례를 들 수 있습니다. 하나는 독일의 ‘라인 강의 기적’, 또 하나는 한국의 ‘한강의 기적’이라고 말을 합니다. 그러면서 두 곳은 모두 분단국가이지만 참혹한 전쟁을 치르고 나서 나라가 발전했다는 공통점이 있고, 또 하나는 기적을 만드는 강이 있다는 것입니다.

아프리카 지도자 한 분에게 제가 아프리카도 기적을 낼 수 있다, 그랬더니 “우리한테는 한강이 없잖아요.” 합니다. 한강이 있으면 기적이 나옵니까? 라인 강의 기적, 우리가 붙인 대명사입니다. 한강의 기적, 그렇게 말하면 무슨 뜻인지 우리는 압니다.

기적은 그 기적을 누릴 수 있는 사람들에게는 좋은 말이지만, 기적이 너무나 먼 남의 이야기 같으면 아무리 기적 이야기를 해도 감동이 없을 겁니다. 한강만 있으면 기적을 만들 수 있습니까? 한강이 없어서 기적이 일어나지 않은 것입니까? 한강의 기적이 중요한 게 아니고 한강 기적 속에 담겨있는 저의 두 가지 고백이 있습니다.

하나는 하늘이 우리에게 무한대의 축복을 내려주었습니다. 땅이 쉬지 않고 땀 흘리고 피 흘리고 몸을 씻으면서 헌신하였습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축복과 땅의 헌신이 합쳐진 것이 한강의 기적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우리 그렇게 해서 한강의 기적을 이룬 게 사실입니다. 라인 강의 기적도 마찬가지입니다.

최근에 와서는 옆에 있는 중국이 엄청난 기적을 이루고 있습니다. 몇 가지 글을 읽어보니까 등소평 때부터 중국도 죽의 장막을 거둬치우고 13억 인구가 넉넉하게 먹고 마시는 사회를 만들자며 열심히 살아왔습니다. 1차로 2020년까지 여유롭게 먹고 마실 수 있는 소강사회를 만드는데 2020년이 되면 1인당 국민소득이 3천불이 되도록 만들자고 했는데 2020년이 아니고 2008년에 이미 3천불이 넘었습니다.

그래서 이분들이 만드는 2050년 이상적 중국식 사회, 대동사회는 1인당 국민소득이 얼마가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미국보다 앞서고 전 세계에서 최첨단 강국이 된다고 누구나 예측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2050년이 아니라 10년이 앞당길지, 20년 앞당길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라인강 기적, 한강의 기적, 양자강 기적, 이렇게 말해도 누가 뭐라고 반론할 수 없을 것입니다.

중요한 사실 하나는 이런 모든 기적을 다 말할 수 있는데 우리가 오늘 한강 기적을 이렇게 살펴보아야 합니다. 한강의 기적을 처음 시작할 때 우리가 연평균 1인당 소득이 100불이 되었는지 지금은 20,000불이라고 하면 250배 증가한 것인데 그것은 피땀 흘린 하늘의 축복이 기적이 우리 땅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여러분 250배만큼 행복하십니까? 기적이 외형적으로 있으면 내실도 그만큼 진실로 행복하십니까? 그 때보다 혹시 자살률은 200배 이상 증가한 것 아닙니까? 그 때보다 훨씬 더 삶의 문제에 관해서 답변은 줄고, 제기하는 질문이 그만큼 많아진 것 아닙니까?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성경이 말씀하시는 기적, 그것이 반드시 내외적인 속과 겉이 다 합친 행복지수만은 아닙니다. 기적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 믿을 수 있고 기적을 일으키신 하나님이 너무 존경스럽고 훌륭하고 제 생각을 뛰어넘는 분이라서 기적의 주인인 하나님 앞에 저는 머리를 숙이고 그렇게 저희들도 믿습니다.

구약시대 기적은 이렇게 일어났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호소하고 하나님이 받아들여서 440여 년간 종살이하던 이집트에서 기적과 같은 방식으로 홍해를 가르고 사막으로 건너왔습니다. 기적을 경험했습니다. 집단적 기적경험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은총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 기적은 누구도 기획도 못했고 생각도 못했습니다.

광야에 왔습니다. 엄청난 기적을 경험한 이스라엘 백성이 단 한 가지 작은 사건에 고개를 숙입니다. 먹을 것이 동이 났습니다. 사막이니까 마실 물이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거대한 민족의 이동을 등에 이고 사막에 왔는데 아침, 점심, 저녁 먹을 일용할 양식이 없다보니 불평이 생겨났습니다. 목마르지만 물을 마시고 싶은데 물이 나지 않아서 불평을 시작했습니다.

“차라리 돌아가자. 빵과 먹을 물을 위해서 우리의 자존심도 버리자. 자유도 다시 돌려주자. 종으로 가서 그냥 먹고 마시는 게 낫겠다.” 거기다가 이런 불평까지 했습니다. “기적을 일으키신 하나님 은혜 덕분에 여기까지 왔지만 하나님은 포기하자. 포기하고 가서 이집트가 섬기는 신, 태양신, 물신, 산신, 그런 우상 섬기면서 살자.”

먹을 것, 입을 것만 있다면, 목적은 이뿐입니다. 인간이 거대한 제국을 이루고 거대한 사상을 만드는 것 같지만 집단적으로 개인적으로 정말 일용할 양식 위기가 부딪히면 자존심도 속도 이념도 신앙도 다 내려놓는 것이 역사적 실증입니다. 저도 그럴 것 같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이런 상황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이 모세 간청에 의해서 죽어 마땅한 죄악을 지은 백성이지만 하나님이 마음을 돌이켜서 만나를 주기로 계획하십니다. 그래서 아침에는 이슬처럼 내린 하얀 빵을 먹었고, 저녁에는 고기로 하늘에서 떨어지는 메추라기를 잡아먹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이게 뭐냐, 하는 말이 감탄사를 내뱉었는데 그게 ‘만나’라는 말입니다. ‘만나’는 감탄사이지만 그 속에 담긴 속뜻이 있습니다. 바로 ‘일용할 양식’입니다. 그래서 ‘만나’의 어원은 그렇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배불리 먹을 수 있는 음식, 그것이 만나입니다. 이 만나 같은 은혜를 오늘 예수님의 시대에는 다른 방식으로 변경하십니다.

오천 명이 모여 있습니다. 그런데 당시 기록의 형식으로 보면 남자 장정만 오천 명이고, 여성은 포함하지 않았습니다. 흔히 이런 집회하면 여성이 더 많이 참석하는데 그냥 가지 않고 애들을 안고 갑니다. 그러면 오천 명이 아니라 수만 명이 모여서 예수님 말씀을 들었을 것입니다.

저녁이 되었습니다. 먹을 게 없습니다. 영의 양식은 충분히 먹었는데 일용할 양식이 떨어졌습니다. 어떻게 합니까? 성경에는 단순하게 기록은 되어 있지만 시끌벅적 소란스러워졌을 겁니다. 도대체가 하늘의 양식을 주신 분이면 땅의 양식도 주어야지, 하면서 말입니다. 제자들도 당황해서 물건을 사러 가야 하는 건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뭔가를 주어야겠다는 생각에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어떻게 먹일까요? 광야에서 이집트로 돌아가던 사람이 있었지만, 오는 사람들은 어떻게 먹일까요?’ 한 아이가 보리떡 다섯 덩이, 물고기 두 마리를 가져옵니다. 그걸 가져다가 예수님께서 하늘을 향해서 축복기도를 하시고 떼어서 나누어 주셨더니 오천 명이, 수만 명이 먹고 남은 것이 열두 광주리입니다. 이 이야기를 우리가 기적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우리 오늘부터 솔직해져야 합니다. 기적은 인간이 만드는 것이 기적이 아니고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 기적입니다. 적어도 하나님이라는 말을 붙이기 싫으면 신, 어느 신인가, 인간인 제가 기획하는 것이 아닌 외부에 있는 절대자가 만든 것이 기적임이 사실입니다.

오늘 신이 기적을 만드셨습니다. 왜 만드는지 아십니까? 제가 요청해서 만드는 게 아닙니다. 구약의 하나님은, 자기가 사랑하는 백성을 복음화의 선두주자로 선택하셨고, 죄악을 질 때는 벌을 하시지만 그래도 하나님은 자기 하늘나라를 이루어야 하는 선두주자로 선택하시고 뽑으신 목적 때문에 인간의 죄악과 타락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자기 목적을 이루셔야 합니다.

기적을 일으키면 사람들이 믿었습니다. 기적을 일으킨 이유는 인간의 욕구가 아니라 하나님이 필요해서 만들었습니다. 만나의 기적, 굶어 죽을 수도 있었지만 하나님은 기적을 통해서라도 자기의 뜻을 관철해야 했습니다.

오천 명이 모인 오늘 예수님의 설교현장, 예수께서는 하늘을 향해서 축사하시고 하는 말씀은 하나님은 이 사람들을 먹여서 영적으로 먹인 양식과 지금 육적으로 먹일 일용한 양식을 주어서 하나님은 자기 구원의 세계를 이루어야 했습니다.

우리가 믿는 기적은, 하늘과 땅이 합치되었다고 믿는 기적은, 하나님이 필요로 해서 주신 것입니다. 제가 요청해서 기적이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면 로또 복권은 우연의 결과입니다. 그러나 성경에 기록된 기적은 우연이 아니고 하나님이 필요하고 하나님이 인정하셔서 기적이 있어야 믿겠으면 기적을 통해서 역사하십니다.

우리는 기적을 바랍니다. 하지만 우리가 바란다고 기적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마음을 결정하셔야 합니다. 기적도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방식 중의 하나입니다. 놀라우시면 감사하면 되고, 기적이 반드시 나한테 의미가 있어야 하는데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구원의 역사로 저한테 임해야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데 로또 복권에 당첨된 사람이 전 세계를 막론하고 한 사람도 행복한 사람이 없다고 합니다. 다 불행해졌다는데 왜 그랬다고 생각하십니까? 기적은 축복입니다. 축복은, 하늘이 허락하고 땅에 있는 제가 허락의 감사로 저도 땀 흘리고 힘을 내고 헌신해서 하늘이 준 축복을 받는 땀과 은혜에 응축되는 것이 축복이지, 땀 흘리지 않고 받는 것은 축복이 아니고 멸망입니다. 그래서 아마 로또 당첨자들이 그렇게 쉽게 실족하는 것 같습니다.

한강의 기적, 하늘이 주셨습니다. 하늘이 도와주셨습니다. 우리는 무수한 땀을 흘렸습니다. 헌신했습니다. 눈물도 흘렸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 속에 하나님을 향해서 축사하셨다는 말은 ‘하나님, 이 음식 속에 하늘의 영을 좀 담아주십시오. 하나님의 영을 좀 담아주십시오.’ 하늘이 육신의 몸을 입고 오신 것이 예수님이듯이 기도할 때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육의 몸을 입고 오셨듯이 빵 속에, 물고기 속에 나눠지게 한 것이 기적입니다.

하나님이 빵 속에, 떡 속에, 물고기 속에 들어온 것은 잠깐 지나가다 들르신 게 아니라 하나님의 자기 결단입니다. “내가 세상 속에 들어가서, 일용할 양식에 들어가서 무수하게 나누어 줄 수 있는 기적의 은혜를 베풀어야겠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하나님의 자기 분신이 된 빵입니다. 그렇지 않고는 오천 명을 먹일 수가 없습니다. 그 속에 하나님의 진실이 숨어 있었습니다.

기적을 보고 믿는 사람은 기적의 외형을 보고 믿는 것이 아니라 기적을 만드신 분이 왜 기적을 행하시는지 그걸 찾아야 합니다. 저희한테 왜 먹을 것을 주었는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했다는 사실을 알아야 은혜가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적을 꼭 믿고 싶으시면 기적을 땀과 눈물로 받으시면 됩니다. 그것 없이는 기적을 누릴 수도 없고, 받을 수도 없습니다.

1840년은 영국이 중국에서 아편전쟁을 일으켜서 중국이 완전히 굴복한 해입니다. 그 때 기독교가 중심이던 서양에서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중국은 끝났다. 중국의 문화가 완전히 아편 속에 잠식되어 버렸다. 중국이라는 대륙은 없다. 아시아도 없다.’ 모두가 자만했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든 안 계시든 우리는 문명을 누리고, 권력을 잡고, 경제도 발전하고, 부도 축적하고, 문화도 발전했고, 이 모든 것이 다 우리의 작품이다. 신의 작품이 아니고 나의 작품이고 우리 인간의 작품이다.’ 그래서 당시에 보면, 1800년대 중반에 경제계, 정계, 문화계 모든 곳에서 인간의 오만과 자만과 타락이 곳곳에서 융성했습니다.

모든 것을 한 쪽에서는 신의 이름으로, 무수한 사람들이 나타나서 “신을 모욕하지 마라. 착취하는 정당화한 수단으로 신의 이름을 도용하지 마라. 권력을 도용해서 그렇게 무자비하게 폭력하며 누르면서 신의 이름을 내놓지 마라. 그런 신은 죽었다.” 1800년대에 신은 죽었다는 말이 수많은 철학자들의 입에서 나왔습니다.

당시 기독교의 역사를 보면 가장 심하게 얻어맞은 비판자가 있었습니다. 무지무지하게 우릴 때린, 정말 존경할 수밖에 없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비판이 있었습니다. 1884년에 나온 공산당 선언입니다. 마르크스를 중심한 사람들이 “도대체가 신의 이름으로 전쟁하고 착취하고 누르는 모든 인간 군상들아, 신은 죽었다. 그게 아니라 신은 없다.” 아예 무신론을 들고 나왔고 그런 신을 믿는 종교는 썩었으며 인민의 아편이라고 외쳤습니다.

아마 이 비판이 우리 기독교 문명, 서구 문명이 받은 최대의 비판이었을 것입니다. 너무나 비판이 아파서 기독교인의 상당한 자가 반성과 자기갱신의 운동이 생겼습니다. 저는 지금도 생각에 당시에 마르크스주의를 통해서 썩어 들어간 기독교를 비판시킨 것을 감사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참 잘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참 못한 게 하나 있습니다. 우리가 이름을 하나님이라고 하건 신이라 하건 인간이 내가 신이 아닌 이상, 저한테는 제가 관여할 수 없는 절대적 가치가 있는 분이 꼭 있습니다. 내가 신으로 승격하지 않은 이상, 저의 모든 생활을 관여하고 계신 제가 믿는 절대가치, 절대자가 항상 누군가는 있습니다.

우리가 신, 절대자라고 하는 그분 없이 인간은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그런 절대자, 신을 육신의 몸을 입은 예수의 아버지인 하나님이라고 부르고 그분을 믿는 것뿐입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기독교 타락을 공격하는 것까지는 옳았는데, 신이 없다고 그러면서 신을 하나 만들었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이름을 어떻게 말하든지 신을 부정하는 사람은, 자기가 믿는 신을 부정하는 사람은 자신이 신이든가 자기 생각이 신이든가 뭔가로 신의 대용품을 삼게 마련입니다. 마르크스주의자는 이렇게 신의 대용품을 삼았습니다. “너희들이 믿는 성경이 말하는 신은 없다. 또 다른 구원의 신이 있는데 그 신은 우리같이 혁명을 주장하는 사람들인데 우리가 뭉치면 그것을 당이라고 한다.” 소위 공산당이 신격화된 것입니다.

사실은 신을 바꾸어 놓은 것이 아니라, 신 때문에 비판 받은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이 잘못해서 비판 받은 것입니다. 그걸 치우더니 또 다른 인간 조직을 놓고 신격화했습니다. 그것이 오늘날 어떻게 된 운명인지 모든 역사를 통해서 신은 이름이 무엇이든 인간이 불완전한 이상, 신은 우리 앞에 있고 그분을 우리는 모시고 싶어합니다.

그분이 우리의 생각과 계산을 뛰어넘는 구원의 기적을 일으키심을 믿습니다. 그분을 우리는 예수의 아버지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비판 기능을 행사할 수 있는 공헌이 있는가 하면 마르크스주의처럼 대안기능에는 실패해서 오늘 수많은 사람이 고통당하고 있습니다.

혹시 우리 사이에 기적을 바라고 기적을 만든다고 하면서 제가 자기 갱신도 없이 신을 대체하려고 하면 저는 망할 겁니다. 하나님은 저를 위해서도 저의 행복을 위해서도 필요하신 분입니다. 그분은 오병이어로 오천 명도 먹일 수 있고 세상도 바꿔줄 수 있습니다. 기적 속에 담긴 그 분의 뜻이 뭡니까?

성경말씀을 읽으실 때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두 안경을 끼고 읽으면 가장 정확합니다. 기적 중의 기적이 무엇인줄 아십니까? 부활입니다. ‘죽은 자도 살린다.’ 그것이 기적입니다. 빵 먹는 것도 기적이지만 죽어서 끝났다, 끝난 사람을 다시 살려서 영원히 살려둔다, 이것이 부활입니다. 그 기적이 입증되지 않으면 예수의 아버지 하나님을 믿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분을 믿는 이상 부활이 최고의 기적입니다.

어떻게 부활했습니까, 부활이라는 기적을 어떻게 만들어냈습니까?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우리의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에서 매 맞았습니다. 피까지 흘렸습니다. 창에 찔렸습니다. 매 맞고 찔리고 죽임을 당했습니다. 죽임 당하고 자신을 헌신하는 방식으로 우리한테 기적을 낳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기적은 영웅심과 사행심으로 된 게 아닙니다. 하나님 자신의 눈물과 피와 아픔으로 새 생명의 기적을 만들어냈습니다. 그리고 하시는 말씀이, “나와 함께 눈물 흘리자. 나와 함께 울자. 나와 함께 끌어안고 눈물로 피로 땀으로 노력으로 부지런함으로 기적을 같이 만들고 즐기자.”

기적을 바라는 사람들이 여행으로 하는 기적은 성경의 기적도 아니고 우리한테 유익한 기적도 아닙니다. 살고 싶으세요? 죽어도 살고 싶으세요? 그럼 죽어야 합니다. 정당한 일을 위해서 죽으면 하나님이 함께 오셔서 함께 죽고 다시 살아서 기적을 만들어 주십니다. 기적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오천 명을 먹인 기적에 중요한 단서가 있습니다.

“열두 광주리가 남았다. 당시 오천 명의 기적으로 하나님을 판단하지 마라. 열두 광주리를 가지고 전 세계에 흩어지면 오천 명을 먹이는 기적이 또 생겨야 한다. 기적은 계속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계속 우셔야 한다. 하나님은 계속 웃음을 선사해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까지 여기서 포기하면 안 된다.”

오늘 시대에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시대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변화, 갱신하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완전히 이룰 때까지 계속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동안 우리는 함께 울고 함께 웃어야 합니다. 이것이 행복 아닙니까?

하나님이 만드신 기적은 옛날도 가능하고 지금도 가능합니다. 여러분 기적을 원하시면 눈물과 땀으로 같이 하나님의 뜻을 받으십시다. 그러면 하나님이 기꺼이 오셔서 이 땅을 여러분을 안고 우리가 말하는 기적을 이루어주십니다. 그 안에서 진실로 행복해 보십시다. 진실로 기도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이것이 기적과 같은 삶이고 이 삶은 지금도 계속됩니다. 광주리가 많습니다. 가지고 가시지요. 광주리를 하나씩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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