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강 살리기 금식기도 보고]
지난 목요일 오후 3시부터 금요일 오후3시까지 생명의 강 살리기 100일 금식기도회에 참석했습니다. 안식년 기간 동안 한반도를 중심으로 일어난 여러 가지 일에 촉각을 곤두세우면서 마음의 빚으로 여긴 일들이 많았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4대강 살리기였습니다. 서울에 돌아가서 꼭 해야지 하고 맘을 먹었던 두 가지가 있었는데, 먼저는 광주항쟁 30주년은 광주를 방문하는 일, 다른 하나는 찢겨져 가는 4대강 유역 순례였습니다. 광주에서는 개신교 연합예배가 열린다고 하여 비행기 일정을 거기에 맞춰 두었는데, 그만 일정이 한 주 당겨서 진행되는 바람에 참석하지 못했고, 4대강 유역 순례는 오자마자 생긴 주변 사정들로 인해 가지 못했었습니다. 그러다 마침 6월8일부터 기장에서 주관하는 금식기도회가 다시금 시작된다고 하여 날 하루를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요 며칠 비가 오긴 했지만, 그래도 한창 추울 때 기도처에 올라갔던 분들에 비하면 수월하게 하루를 보낸 것 같습니다. 저는 사실 잠은 어디서나 잘 수 있는 체질입니다. 자리가 바뀌어도 머리와 등을 대고 누우면 크게 어려움 없이 금새 잠을 잘 수 있거든요.
기도처에 도착한 후, 전날 금식을 하셨던 한신대 신학대학원 학생회의 4분 전도사님들, 그리고 용진교회 장로님, 저, 그리고 함께 간 조력자들과 함께 기도회를 한 후, 몇 가지 유의사항을 들은 후, 사다리를 타고 기도처에 올라갔습니다.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예상보다 기도처가 깔끔하기도 했고, 편하게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기도처는 텐트 안이었는데, 주변에는 바람을 막아줄 비닐막이 있었습니다. 해가 지면 불이 없으니 촛불을 켜야 하나, 아니면 그저 어둠 속에서 기도하고, 날이 밝아오면 성서읽기, 책읽기, 글쓰기 등을 해야지 했는데, 책상용 스텐드가 있었어요. 작지만 더위를 피할 수 있도록 작은 선풍기도 있었고, 밤에 추워지거나, 안이 너무 눅눅해지면 전기장판을 쓸 수도 있었습니다.
성서를 읽고, 기도 하고, 글을 쓰고, 책 읽고, 밤새 세 시간 좀 넘게 잠도 잘 자면서 24시간을 보냈습니다. 24시간 동안 물만 먹고 기도해야 한다는 얘기에 눈을 동그랗게 뜨던 아이들을 비롯해서 단식이라는 것을 제가 잘 견뎌낼지에 대해 많은 분들이 걱정을 했습니다.
저는 원래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측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며 자랐습니다. 그래서 청소년부 때부터 철야기도회, 금식기도회 등등에 단련이 되어 있는 편입니다. 침묵을 하면서 3박4일 하루 종일 성서만 읽거나, 그야말로 기도원 뒷산에서 큰 나무 하나 붙들고 밤샘 기도를 하기도 했고, 릴레이 금식이나 40일 새벽기도회 등은 자주 한 편이었습니다.
단지, 어느 틈엔가, 이러한 순수한 신앙열정들에 대한 길잡이로 제시되는 것들이 제가 갖고 있는 모든 물음에 대한 답이 되지 못했습니다. 특히 1987년 6월 항쟁과 1989년 문익환 목사님 방북 사건 때, 강단을 비롯하여 교회 내에서 선포되고 가르쳐지는 내용들은 제 답답증을 극에 달하게 했습니다. 그 답답증은 분노가 되기도 했고, 허탈감으로 되돌아오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바뀔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잃지 않고 버텨내었습니다. 그러다 몇몇 고개를 넘어 한신대학교 신학대학원에 진학을 하였습니다. 그 때 입학 동기서를 쓰면서 정의와 평화를 일구어내는 사회 운동과 함께 말씀의 빛에 비추어 기도하며 스스로를 성찰하는 일에도 게으르지 않는 영성 훈련 등 양쪽을 아우르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때는 양쪽을 흑백이라는 색깔로 표현하고 두 가지가 어우러진 것을 회색으로 표현한 것으로 기억합니다. 돌이켜 보면 회색이라는 것이 회색분자 등 뭔가 입장이 불분명한, 부정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는 것에 개의치 않은 채, 회색이란 색에 나름의 의미를 두었던 것 같습니다.
한국기독교장로회라는 교단으로 옮기고 목회를 시작하면서 여전히 한 두끼를 단식하는 경우는 종종 있어왔지만, 실로 오랜만에 400ml 정도의 물만으로 24시간을 지냈습니다. 마치고 나니, 4대강을 살려내겠다는 의지를 하루 금식으로 담아내는 것만으로는 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24시간 금식기도 내내 제게 들린 하느님 음성은 “정성을 들여라”였기 때문입니다. 해질 무렵부터 부지런히 집을 짓기 시작하더니 이른 새벽에는 단단한 줄을 쳐놓고 쌕쌕 잠이 들어 있는 거미를 들여다 보면서, 비를 막아주고 있는 비닐막 위로 뚝뚝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으면서도, “정성을 들여야 한다”는 그 소리가 계속 귓가에 맴돌았습니다. 그러면서 죽을 각오를 하고 단식에 돌입하셨던 지율스님이 떠올랐습니다. 무모한 일이다, 그렇게 단식을 하느니 차라리 나가서 싸워라 등등 안타까움과 원망 섞인 많은 말들이 많았음에도 실려 나올 때 까지 천성산 지킴이로서 그 뜻을 굽히지 않았던 지율스님의 굳건한 의지는 이러한 음성 때문이었을까, 부처님께 공양하고자 자신의 몸을 불사르는 소신공양을 드린 문수스님도 같은 음성을 들은 것일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지극정성, 지성이면 감천, 열심단충 등등 온갖 힘을 다하려는 참되고 성실한 마음(精誠)이 모든 일을 할 때 제일 중요하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지만, 어떻게 하는 것이 하늘까지 감동할 만큼의 정성을 들이는 방법인지에 대해서는 우리가 뾰족한 답을 갖고 있진 않습니다.
“삽질을 멈추고 생명의 절규를 들어라!”라는 현수막이 팔당 유기농 농업지역 주변을 흐르고 있는 한강변을 등에 지고 걸려 있습니다. 생명의 절규를 들어야 할 사람은 누구일까? 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공사장 인부들을 ‘빨리빨리!’로 몰아치면서 혹사시키는 공사장 간부들, 그 윗선인 건설회사 임직원들, 그 위, 그 위...결국 청와대에 있는 그 사람. ‘한사람 때문에 우리 모두가 고생이네요’ 하며 열이면 열 인사말을 건네 오는 그 한 사람이 들어야 할까? 뾰족한 답을 갖고 있지 않은 우리이지만, 그래도 이렇게라도 정성을 들이겠노라고 24시간씩 금식을 하면서, 지성이 감천 하도록 하면 그 사람 맘이 돌아서서 이 미친 삽질이 당장이라도 멈추어 질까?
그런데 제 맘에는 생명의 절규를 들어야 하는 사람은 바로 ‘우리’라는 깨달음이 왔습니다. 우리가 금식기도를 통해 생명의 절규를 하늘로 올리고 있지만, 동시에 땅의 사람들인 우리들 스스로 귀를 깊이 기울여야 합니다. 많은 분들이 삼일절 연합예배와 부활절 연합 예배 때는 한강으로, 그리고 생태기행을 위해서 낙동강에도 가보셨으니까 아시겠지요. 눈으로 보고, 귀를 기울이면 만 가지 미사여구를 붙여도 이 사업은 하늘 뜻을 반역하는 일이라는 것을요.
그렇기 때문에 앞에서 길잡이를 하면서 크게 외치는 일을 감당하는 사람도 필요하지만, 동시에 눈앞에 드러나지는 않아도 생명의 절규에 귀를 기울이며 맘과 정성을 드리는 사람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이 사업은 결국 멈춰질 것이라는 확신이 섰습니다.
팔당 유기농 지역 만해도 전해 듣기로는 행정대집행 절차를 밟으려고 박차를 가하고 있어서 40-50일 사이에는 판가름이 난다고 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곳에서 그래도 제일 가까운 한강을 지켜내기 위해서 우리의 정성을 어떻게 모아야 할까요? 여러분에게 지금 떠오르는 생각들을 예배 후, 1층에 가셔서 [생명의 강을 살리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곳에 써주시기 바랍니다. 그 내용을 놓고 사회부와 함께 머리를 맞대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4대강에 보가 20개 설치된다고 하지요. 원래 16개로 발표가 되었는데 4개가 더 추가되었답니다. 원래 보(洑)라는 것은 논에 물을 대기 위한 수리 시설인데, 둑을 쌓아서 흐르는 냇물을 막고 그 물을 담아 두는 곳을 말 합니다. 국토해양부의 발표에는 이 ‘보’는 물의 높낮이를 조절하는 용도로 쓰인다고 해요. 그리고 보에 수문을 달아서 홍수를 대비한다고 하지요. 그렇게 하면 오염되어 있는 하천이 깨끗해지고, 그 하천들 주변은 생활, 여가, 관광, 문화, 녹색성장 등이 어우러진 친환경적 복합공간으로 활용할 수 있다는 것인데, 과연 이 4대강이 정말 오염되어 있어서 정화해야할 때인가? 라는 물음에는 시각차가 큽니다. 수질오염을 개선시켜서 깨끗한 물이 흐를 수 있게 하여 물 부족 국가인 우리가 안심하고 쓸 수 있는 깨끗한 물을 확보해야 한다는 것이 찬성 측과 추진 주체 측의 주장이기 때문입니다.
자갈과 모래톱으로 자정능력을 발휘할 수 있고, 수질오염에 민감한 물고기들이 살고 있는 하천에 발암물질이 포함되어 있는 유해물질로 널리 알려져 있는 석면이 포함되어 있는 석재를 갖다 쓰면서 깨끗하게 정화 하겠다 라는 말은 누가 들어도 설득력이 없는 말입니다. 친환경이라는 말도 상당히 어색하지요.
[깨끗한 것과 부정한 것]
어떤 기준으로 깨끗하고 더러운 것을 구분할 수 있겠습니까?
성서를 보면, 창세기 7장, 노아의 방주에 탈 수 있었던 짐승들도 깨끗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으로 나뉩니다. 깨끗한 짐승은 완벽의 숫자 7쌍, 부정한 짐승은 2쌍씩 들어갑니다. 레위기 11장에는 먹을 수 있는 동물과 부정하고 더러워서 먹어서는 안되는 동물들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나옵니다. 등장하는 리스트 중에 먹어도 된다고 하는 귀뚜라미는 먹여준다고 해도 안 먹겠다고 할 사람이 상당수이겠지만, 웅담, 도룡탕, 미꾸라지탕 등등 정력에 좋다고 하여 기독교인들도 상당히 즐겨먹는 음식들이 부정한 동물 리스트에 담겨 있습니다. 상당히 복잡하고도 까다롭게 되어 있는 이 부분은 문자주의로 성서를 읽는 근본주의자들에게 반문할 때 곧잘 예로 드는 본문이기도 합니다.
지역에 따라서 즐겨먹는 음식이 다르고, 금지되어 있는 음식 또한 다른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아프리카 친구들은 애벌레를 즐겨먹는지라, 파티 때 이 음식을 해놓고서는 이것을 먹느냐 안 먹느냐에 따라 일종의 애정 테스트를 하는 바람에 아주 애를 먹은 적이 있습니다. 성서에 희생제를 드리는 깨끗한 동물로 등장하는 양이 이집트에 가면 혐오감을 일으키는 동물이 되고, 거의 모든 셈족에게 ‘돼지’는 대표적인 부정한 동물에 속합니다.
족발, 머릿고기, 삼겹살, 보쌈, 장조림, 순대, 그리고 오키나와에서는 돼지 귀도 얇게 저며서 반찬으로 먹는데, 이리도 많은 사람들이 즐겨 먹는 돼지고기를 왜 성서에서는 금하고 있는 것일까요?
배설물을 먹고 더러운 진흙탕에 몸을 씻고 기생충이 있고, 여튼 위생학적으로 더럽다 라는 전혀 과학적이지 않는 이유에서부터 특권층만 먹을 수 있는 고기였기 때문에 일반인들에게 제한하고 금기시하도록 하기 위해서 이다, 이방인들이 선호하는 동물이어서 이다, 고대 중동지역은 원래 돼지를 사육하기 적합하지 않은 환경이기 때문에 생태학적이고, 경제학적인 요인을 기반으로 금기되었다 등등 설득력이 있는 이유에 이르기까지 다양합니다. 그리스가 지배하던 기원전 2세기, 안티오쿠스 4세는 예루살렘 성전을 헬라 성전으로 만들고 제단에는 유대인들이 금기로 여기는 돼지를 죽여 바치도록 하는 등 유대인들에게는 신성모독이 되는 일들을 서슴치 않았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현재는 이 율법을 어떻게 이어가고 있을까요?
이스라엘이 독립한 1948년 이후, 1957년 예루살렘시는 ‘예루살렘 조례 : 돼지와 돼지고기’라는 이름으로 돼지 사육과 보유, 가공품 판매를 제한하고 금지하는 조례를 제정하기도 했지만, 1990년대 구 소련에서 돌아온 유대인들 중에는 유대교인이 아니라고 밝힌 사람이 30%에 달하는 것에서 볼 수 있듯이 돼지에 대한 혐오감이 젊은 세대에서는 상당히 약화되어 있습니다.
1990년 이스라엘의 종교정당들이 앞서 말한 조례와 비슷한 법안을 제출했음에도, 결국은 통과되지 못하고 실패합니다. 예루살렘 포스트에 의하면 매일 200kg에 달하는 돼지 약 30마리가 정육점에 놓여 진다고 하고, 2004년에는 이스라엘 대법원에서 돼지고기 판매를 허락하는 판결이 내려졌다고 하니, 율법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돼지고기 금기와 같은 법도 여러 시대상황을 거치다가 오랜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결국은 깨질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게리 윌스가 쓴 ‘예수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라는 책에는 ‘여전히 부정한 사람들이 있는가’ 라는 소제목 아래 재미있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하느님의 계율을 가르치기 위해 애쓰는 기독교인에게 보내는 이 편지에는 조언이 필요하다면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합니다.
- 이웃 중에 안식일에도 일을 하겠다고 고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출애굽기 35장 2절에 그런 사람은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명시되어 있는데, 내가 그를 죽여야만 합니까? 아니면 대신 경찰에게 해달라고 요청해야 합니까?
- 레위기 21장 20절에는 몸에 흠이 있으면 하느님 제단에 가까이 갈 수 없다고 하는데 시력에 문제가 있다면 안경을 쓸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아야 하는지, 교정 시력이 2.0은 되어야 하는 것인지 알고 싶습니다.
- 레위기 1장 9절에는 희생제물로 제단에서 소를 태우면 주님이 즐겨 흠향하신다고 하는데 이웃들은 그 냄새가 싫다합니다. 그들을 두들겨 패야 합니까?
유독 성서를 들이대면서, 성서에 금기되어 있다, 성서에 씌여진 대로 지켜야 한다 라고 목소리를 드높이는 사람들을 자주 만날 수 있습니다. 사회적인 장벽과 금기를 강조하는 사람들, 깨끗하지 못하고 더럽고, 부정하다고, 그래서 내가 깨끗하게 해야만 한다고 우기는 사람들을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지금, 부정하다고 차별받는 사람들]
오늘 함께 읽은 하늘말씀에서 그 답을 찾아보고자 합니다.
먼저, 여러분께 묻습니다. 나도 모르게 ‘에이, 더러워’라는 말이 튀어나오는 상황이 있습니까? 그 상황이나 대상을 한번 떠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싫어하고 미워하는 감정을 표현할 때 흔히 “혐오”라는 한자말을 씁니다. 특히 불결함과 공포 때문에 기피하는 이 감정은 혐오시설, 자기혐오, 외국인 혐오, 동성애 혐오, 혐오 범죄, 혐오 식품 등으로 곧잘 쓰입니다. 지난 주중 향린에 둥지를 튼 이주 노동자들이 한공간에서 생활하고 있습니다만, 근래 남한에서도 외국인 혐오를 바탕으로 한 범죄가 심심찮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2009년 통계로 보면 남한에 있는 외국인 이주민(미등록자 포함)은 100만명이 넘습니다. 결혼한 지 8일만에 정신병을 앓고 있던 남편에게 살해를 당한 베트남 여성 탓티황옥 님 사건으로 인해 남한의 국제결혼은 이미 국제적 인신매매에 수준에 와있다고 개탄하는 소리가 높습니다.
1년 전에는 더럽다, 냄새 난다면서 젊은 인도인 성공회대 연구교수에게 차별적인 발언을 하며 모욕을 준 사람이 얼마 전 100만원 벌금형을 받은 일이 있습니다. 조사 과정에서도 이 20대 후반의 젊은 인도인 교수에게는 반말을, 함께 있었던 남한 사람에게는 어쩌다 이 사람과 같이 있게 되었냐는 식의 발언 등으로 경찰 조차도 차별적인 언동을 서슴치 않았다는 보도를 보면서 분노하였습니다.
그런가 하면, 국민체육진흥공단이 관리하는 올림픽 공원 내에 있는 소마 미술관에 열릴 예정이었던 동성애자 인권 옹호 행사가 국가기관으로서의 이미지 관리를 이유로 불허통보를 받기도 했습니다.
사람들은 혐오의 감정을, 비난, 손가락질, 모함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이유 없이 괴롭히고, 고통주고, 손해를 입히고, 쫓아내고, 최후에는 죽이는 것으로 드러냅니다. 혐오의 대상이 되는 사람은 당연히 공포심을 갖게 되고, 멀리하고 피하려 들게 되겠지요. 마치 벽장문을 열고 그 속에 들어가는 것과 같게 됩니다.
이러한 혐오, 배척, 배제 등은 자신과 대립되는 또 다른 사람으로부터 자신의 정체성을 지켜내고자 하는, 다시 말해 자기에게 유익이 있는 것을 놓치고 싶지 않은 심리에 그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성결법, 하느님과의 관계를 인위적으로 갈라놓는 법인가?]
1세기 팔레스타인에서 살고 있으면서 ‘죄인’이라고 배척받은 사람들은 요즘같이 ‘죄인이로소이다’하며 주관적인 죄책감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사람들이었다기 보다는, 사회적으로 추방된, 특히나 성결법에 저촉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죄인’들은 무거운 짐을 꾸려 남의 어깨에 메워 주고 자기들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 하지 않고 남에게 보이기 위해 말만 하는 사람들(마태오 23:4)에 의해 성결법이라는 단단한 줄로 묶여 있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부정한 것은 전염되고, 오염된다고 여겼기 때문에 고립되었습니다.
앞부분에서 레위기 11장 이야기를 했지만, 레위기를 비롯해서 성서 곳곳에는 성결법에 대한 규정이 나와 있습니다. 부정한 동물들에 이어, 산모도 부정하고, 오늘날엔 한센병이라고 불리는 문둥병, 여성의 월경 등을 부정한 것으로 규정하고, 거룩한 백성이 되기 위해 어떻게 부정을 벗어야 하는지를 세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더 읽다보면, 성관계, 이교도 풍습을 어떻게 해야 할지, 그러다가 안식년법과 야웨께 바칠 예물 등등을 다루면서 끝을 맺습니다. 이러한 율법정신이 살아있고 더 촘촘히 세분화 되어 있던 시대에 등장한 예수는 갖가지 사회적, 종교적 금기를 위반합니다.
일반적으로 금기를 위반한다는 것은 공동체 질서를 파괴하는 것으로 여겨져서 혹독한 형벌이 가해집니다. 금기가 굳건하다는 것은 그 법을 집행하는 사람들이 권력을 갖고 있고, 따라서 통제를 철저히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돼지고기 금기에서도 알 수 있듯이 금기에는 다양한 이유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결 즉, 거룩하고 부정한 것으로 구분 지어 사회질서를 유지하고자 하는데는 공동체성을 운운함과 동시에 죄책감을 강화시킴으로, 손쉽게 통제하고자 하는 목적이 담겨있습니다. 공동체성을 말하지만, 사실은 그들만의 리그인 셈이지요. 복음서에 등장하는 예수와 여성이 만나는 장면을 살펴보면 당시의 사회적 금기를 계속 위반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예를 들어 사마리아 여인과 이야기를 나눈다던지, 향유를 부어가면서 발을 머리칼로 쓰다듬는 여성을 내버려 둔다던지, 돌을 던져 그 자리에서 죽여도 된다고 하는 간음한 여인을 그냥 되돌려 보낸다던지 등등 입니다.
오늘 하늘말씀을 통해 만난 12년이나 하혈증을 앓고 있는 이 여성은 공동체성을 유지한다는 명목으로 그 공동체에서 완전히 배제된 채, 가산까지 탕진하고 몸은 더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습니다. 이 여성도 그랬습니다. 성결법, 즉 사회적 금기를 어겼습니다. 다시 레위기로 돌아가보면, 생리를 한 여성은 7일간 부정합니다. 생리가 아닌데 하혈을 할 경우에는 내도록 부정했습니다. 잠자리, 걸터앉았던 자리, 만졌던 물건, 또 하혈하는 사람과 닿은 사람 모두 부정해집니다. 일종의 피에 대한 혐오증이 만연해 있었습니다. 현재도 이 피에 대한 혐오증이 이어져 내려와 여성은 목사도 될 수 없고, 장로도 될 수 없다는 율법 아닌 율법의 근거가 되고 있기는 합니다만, 아마 이 레위기의 성결법을 문자 그대로 지켜야 한다면 이곳에 앉아계신 분들 대부분이 오늘 해지기 전에 옷을 빨아 입고 목욕을 하셔야 할 것입니다.
이 법대로라면 사람들이 없는 곳에서 혼자 웅크리고 있어야 할 사람이 예수의 소문을 듣고서는 군중 속에 섞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를 둘러싸고 밀어 대며 따라 갔다고 했으니, 그 인파 속에 있는 이 여성도 주변 사람들을 밀어대며 즉, 사람들과의 신체접촉이 있는 상태에서 따라갔을 것입니다. 12년 동안이나 앓았다고 하니, 주변의 왠만한 사람들은 이 여성이 어떤 상태라는 것을 알 법도 하지만, 그렇다고 제지하는 사람이 있던 것도 아닙니다. 주변 사람들 모두를 부정하게 만들었는데도 말입니다. 어찌 보면 하혈하는 여성에 대한 혐오감을 갖고 있었던 사람은 종교적인 권위를 갖고 있는 사제들, 율법학자들, 즉 당대의 남성 엘리트들이 아니었겠나 싶습니다.
이 여성의 주변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을 수도 있지만 정작 ‘부정하다 아니다’ 를 가름하는 사제는 누가 말로 알려주기 전에, 혹은 눈으로 직접 보기 전에는 알 수 없는 사실입니다. 내가 다 안다, 나만이 할 수 있다! 내가 해결책이다 라며 스스로 의로운 채 하는 사람들을 완전히 우습게 만든 사건이지요. 이 여성이 당면해 있는 어려움은 7개의 분사로 묘사 되어 있습니다. 7개. 그렇습니다. 완전히, 정말, 너무도 힘든 상황이었습니다.
사람과 스쳐서도 안되고 남의 몸의 손을 대서도 안되고, 더군다나 남성에게 손을 대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금지사항이었지만, 어겼습니다. 그만큼 절실했습니다. 사람대접을 받고 싶었고, 공동체 안에 들어가고 싶었습니다.
그 절실함이 “그 옷에 손을 대기만 해도 병이 나으리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라는 구절에 담겨 있습니다. 성결법을 어김으로 순식간에 수많은 사람을 부정하게 만든 이 여성이 ‘무죄’라는 것에 마르코 저자들 또한 동의한다는 표현입니다.
그리고 이 여성은 예수의 사죄 선언이 있기 전에, 이미 자신의 몸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알았습니다. 공동체 밖에 내쳐졌던 사람이 그리도 절실히 소망했던, 공동체 내부의 사람이 되는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동시에 예수를 통해 ‘dugater' 즉 공동번역 상의 여인아 가 아니라 ‘딸아’라는 호칭을 듣습니다. 누가 네 어머니이고, 자매며 형제이냐? 라는 예수의 질문과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자매요 형제요 어머니다 라는 답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손을 대기만 해도 나을 것이라는 그 믿음에 기댈 수 밖에 없던 너무나 고립된 상황, 그리고 절실한 마음에서 우러나온 용기 있는 행동이 하느님과 그 여성을 인위적으로 갈라놓았던 관계를 회복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마치 재확인이라도 해야 한다는 듯이 또다시 용기를 내야 하는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많았을텐데 ‘나’였노라고 밝혀야만 했습니다. 누가 누군지 모르는 상황에서 굳이 누구냐? 찾는 것은 이 여성에게 정확한 선언이 필요했기 때문 일 것입니다. 여성 자신은 알았지만, 주변 사람에게 밝혀둘 확증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맘과 영을 짓눌렀던 것에서 평안이 가라’, 그리고 ‘몸을 짓눌렀던 것에서 벗어나 건강해라.’ 예수의 선언은 비둘기 두 마리를 갖고 사제에게 가서 부정이 벗겨졌다고 듣는 선언보다 간결하고도 실질적이고 명쾌했습니다. “율법을 완성하려 왔다”(마태오 5:17)라는 예수의 말 그대로입니다. 성결법, 즉 율법은 오늘의 제1성서의 말씀대로 ‘너희로 하여금 고개를 들고 다니게’하기 위한 법이지 그 누군가에게 멍에를 지우기 위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금기를 넘어서는 용기]
여러분께 앞서 더럽다고 여기는 것들을 머리 속에 떠올려 보시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경험을 통해 얻어진 산물입니까? 아니면 관례나 그저 인습적으로 전래되어 온 것 입니까?
여러분이 넘어서는 안 된다고 여기는 금지선은 어디쯤에 그어져 있습니까?
해서는 된다, 안 된다의 경계선이 되는 것은 정의, 사랑 그리고 평화에 뿌리를 박고 있습니까? 아니면 배제와 편견에 뿌리를 박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한사람이라도 더 하느님 나라에 초대하기를 원하십니까? 아니면 한사람이라도 더 빼놓고 가야 속이 시원하겠습니까?
믿음은 금기하는 것들을 넘어서는 용기를 갖을 때 얻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유익을 얻고자 할 때 특히 요즘과 같은 시대에는 경제적인 이득을 얻어 내기 위해 법망을 요리조리 피하는 비겁함을 용기로 아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생명이 아닌 죽음을 향해 발걸음을 내딛는 것인데도 말입니다. 정작 생명을 지키기 위해 금기를 어기고 무죄를 선언하는 일에는 두려움으로 인해 주춤거립니다.
4대강은 강을 깨끗하게 하는 사업이라고 거짓말하는 사람들을 폭로하고, 진실을 알리기 위해 정성을 쏟을 때 그 폭력은 멈춰질 수 있습니다.
혐오에 기반을 둔 각종 차별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손을 뻗어 내밀면서, ‘그건 차별이고 편견이야. 그것 때문에 내가 이렇게 고통 받고 있어’ 라고 명확히 드러내는 용기를 낼 때 억압의 굴레를 벗을 수 있습니다.
예수의 치유 사건에는 그저 종교적인 선언이 아닌, 내 존재를 하느님 나라에 불러 세우는 참 복음이 담겨 있습니다.
용기를 냄으로 얻을 수 있는 그 믿음이 당신을 살리고 우리를 살릴 것입니다.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파송사]
편안히 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가장 낮을 곳을 택하여 갑시다.
가장 더러운 것을 싸안고 갑시다.
우리를 천하다고 해도,
우리를 더럽다 해도,
우리가 지나간 어느 기슭에 몰래 손을 씻는 사람들이 있으리니,
그들보다 낮은 곳을 택하여
유유히 흐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