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기획연재- 이장식의 교회 역사 이야기(29)

아르메니아 교회, 인도 도마스교회

본지는 한신대 이장식 명예교수의 교회 역사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이 교수는 얼마 전 본지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예수는 평신도였고, 초대교회 예수 운동을 이끈 무리들 역시 평신도들이었다"며 교회사에 큰 기여를 한 무명의 평신도 그리스도인들을 조명했습니다. 앞으로 연재되는 글이 평신도들의 신앙 생활 함에 있어 좋은 길잡이가 되어 줄 것으로 기대합니다. -편집자주 


5. 아르메니아 교회

지정학적으로나 수난의 역사로나 그리고 민족성으로나 제2의 유대인으로 일컬음을 받을만한 아르메니아(Armenia) 백성은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313년에 그리스도교를 자유케 한 밀라노칙서보다 10년 앞서서 지구상에서 최초의 그리스도교 왕국을 세웠다. 그들은 자기 나라의 위치가 창세기 2장 10절에 기록된 에덴동산 지역이며, 에덴에서 흘러나오는 강이 동산으로 흘러 들어가서 네 줄기로 갈라졌는데 그 네 줄기가 유프라테스강이 되어 아르메니아 땅 가운데로 흐르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아르메니아는 카스피해 서편에 위치하고 남쪽으로 흑해를 바라보며 시리아와 이어져 있는데 아르메니아 심장부에 있는 아라라트(Ararat)산이 노아의 방주가 홍수 때 머문 산이라고 주장한다. 아르메니아는 로마와 페르시아 사이에, 그리고 터키와 페르시아 사이에 끼어 있는 작은 나라여서 언제나 강대국 사이에서 고난을 받았다.

아르메니아 교회는 사도의 전승을 이은 교회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사도 바돌로매와 다대오가 아르메니아에 복음을 먼저 전하였다고 아르메니아 교회는 주장한다. 그 두 사도가 AD 44~60년에 이곳에 와서 전도하다가 순교하였다고 믿고 있다. 2세기에 쓰인 아르메니아 교회에 관한 기록에는 아르타즈(Artaz) 교구의 계승자 감독 일곱 명의 이름이 있고 순교자의 명단에는 두 사도와 함께 1000명의 순교자 이름이 적혀 있다.

200년경에는 아르메니아에 많은 교회가 있었고 알렉산드리아 교회의 감독 디오니시우스(Dionysius)가 아르메니아 교회의 감독 메루자네스(Meruzanes)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인내’에 대하여 말하였다고 한다.

로마제국의 동방을 통치하고 있던 가이사 리키니우스가 아르메니아 지역을 침략해갔을 때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였는데 이때의 순교자 명단에 40인의 이름이 적혀있다. 아르메니아는 에뎃사에서 멀지 않은 곳이어서 에뎃사 교회와 늘 소통할 수 있었고, 시리아 지방의 상인들 중 그리스도인들도 아르메니아에 수시로 왔으므로 서로 힘이 되었다.

아르메니아의 왕이 그리스도교로 개종하게 된 것은 그레고리(Gregory, the Illuminator, )라는 한 그리스도인의 전도로 되었다. 그레고리는 아르메니아의 한 귀족가문에서 태어나 카파도키아의 가이사랴로 붙들려 가서 거기서 희랍어를 쓰던 한 그리스도인의 영향으로 그리스도교 신앙과 생활을 배우고 세례를 받았다. 그는 귀국하여 열심히 그리스도교를 전파하였으나 이교도였던 왕이 여러가지 죄명으로 그레고리를 정죄하여 15년간 산 속 구덩이에 가뒀다. 이때 어떤 과부의 도움으로 연명하였는데, 어느 날 왕이 중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고 있을 때 그의 누이가 간청하여 그레고리를 불러와서 기도하게 하였더니 왕의 병이 나았다. 그리하여 왕이 회심하고 그리스도교 신자가 되고 자기가 믿던 종교를 버리고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정하였다. 그리하여 아르메니아가 최초로 그리스도교 국가가 되었다. 로마제국에서 테오도시우스 1세가 그리스도교를 정식으로 국교로 만든 것은 4세기 말이었다. 그 전에는 그리스도교가 국교처럼 보였을 뿐이다.

아르메니아 왕의 비서의 기록에 의하면 그레고리는 가이사랴로 가서 그곳 교회의 감독으로부터 신부로 안수를 받고 아르메니아 교회의 감독이 되었다. 이때 국왕의 명령으로 귀족과 고관들은 화려한 행렬을 지었고 무장한 군인들의 보호를 받으면서 국민들의 열렬한 환영 속에 감독으로 취임하였다. 이때 이교의 지도자들도 다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였고 이교 사원들이 다 교회당으로 사용되었고 이교의 막대한 재산이 다 교회의 재산이 되었다. 그리고 이교의 큰 사원 셋을 완전히 헐고 그 자리에 성당을 짓고 그레고리가 가이사랴에서 가져온 세례 요한의 유골을 안치하였다고 한다. 세례 요한의 유골이 어떻게 가이사랴(이곳 가이사랴는 유대나라 남단의 가이사랴가 아니고 빌립보가 있는 지역의 가이사랴)에서 구할 수 있었는지 의문이 간다. 그런데 바울 사도가 에베소에 갔을 때 세례 요한의 세례만 받은 사람들이 있었는데 시리아 지방에 세례 요한의 신도들이 2세기에도 있었다. 그러므로 아르메니아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가이사랴에 세례 요한을 믿는 사람들이 세례 요한의 유골이라 하고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그레고리는 전설 같은 인물이 되었다. 그는 7일 동안 400만명에게 세례를 베풀었고 재임 시에 400명의 감독을 세웠다고 한다. 재래종교의 뿌리가 깊어서 그들을 개종시키는 데 힘이 들어서 그들의 재래의 장례식을 수용하였다고 비잔틴제국의 역사가가 기록하였다. 그의 두 아들 중 한 아들이 그를 이어 감독이 되었는데 그 아들 아리스타케스(Aristakes)가 325년 니케아회의의 참석자 중 한 사람이었다. 로마교회와 비잔틴 동방교회는 9월 30일을 그레고리축제일로 삼고 있다.

아르메니아 교회의 선교열정은 그 나라를 그리스도교의 나라로 만들었고 문화적으로도 공헌하였다. 아르메니아 교회는 아르메니아 문자를 발명하였다. 아르메니아인들은 본래 문자가 없어서 국민 대부분이 문맹이었고 시리아어와 희랍어를 배우기 위해서는 국외로 나와야만 했다. 교회는 국민들이 성서를 읽을 수 있게 하기 위해 먼저 아르메니아 문자를 만들고 그 다음 성서를 아르메니아어로 번역할 계획을 세우고 추진하여 36자모(字母)를 만들었다. 그리고 100인의 번역자를 동원하여 성서번역을 시작하였는데 70인역 희랍어 구약성서와 시리아어 구약성서 페쉬타(Peshitta)를 참고하면서 구약의 완역이 433년에 출간되었다.

그리고 카파도키아의 바실의 예배의식서를 번역하여 교회의 모든 의식을 그대로 본떴고, 본토민 민속음악을 찬송가 곡조에 도입하였고, 교회가 본토민의 문화에 토착되도록 노력하였다.

아르메니아 교회는 니케아 신앙고백을 수용하였고, 431년 에베소회의의 결정을 받아들여서 네스토리우스주의를 배격하는 신학을 수용하였는데 451년 칼케돈회의가 에베소회의의 결정을 무효 또는 수정한 것에 반대하여 결국 단성론파에 편들게 되었다. 그리하여 아르메니아에는 단성론의 야곱파가 우세하였지만 네스토리우스파도 있었다. 야곱파든 네스토리우스파든 로마제국의 가톨릭교회에서 이단시 된 교파는 이렇게 제국 밖으로 떠돌았다.

6. 인도 도마스교회

그리스도교의 복음이 팔레스틴 밖으로 전달되어 교회가 수많은 이교의 땅에서 번영해 간 역사에 대한 기록이 사도들에 관한 것도 바울에 관한 기록밖에는 별로 없을뿐더러 일반 평신도들의 선교기록도 그러하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교의 놀라운 선교 이야기가 전설적인 이야기처럼 들릴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선교사화를 기록이 없다고 해서 전설로만 치부할 수 없다. 이 책의 앞에 나온 여러 선교역사 이야기들은 실로 전설적으로 들리는 것이지만 대개는 다 사실이다. 남인도에 일찍 전파된 복음과 교회의 이야기도 전설적으로 들리는 것이 있지만 사실이다.

안디옥의 감독 도로데우스(Dorotheus, 254~?)는 사도 도마스가 시리아 여러 지방에서 선교하다가 인도에 가서 인도 칼라미나에서 순교하였다고 말했다. 그리고 에뎃사의 성당에는 사도 도마스의 유해와 유물이 보존되어 있는데 그것은 그가 인도선교로 존경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도마스의 인도선교 역사를 쓴 「유다 도마스 행전」(Acts of Judas Thomas)이 180년에서 230년 사이에 에뎃사에서 기록되었다.

유다 도마스의 인도선교여행의 이야기가 이 책에 기록되어 있다. 인도의 한 왕국의 왕 군다포러스(Gundaphorus)가 자기 왕궁을 짓기 위하여 목수를 구하라는 명령을 받은 신하가 팔레스틴에서 도마스를 만나 인도로 와서 궁전을 짓게 하였다. 도마스는 거액의 건축비를 왕으로부터 받고 6개월 만에 준공하도록 계약하였으나 계약대로 준공하지 못하여 왕에게 불려가서 문초를 받았다. 도마스는 왕에게 왕이 사후에 하늘에 가서 살 궁전을 지었다고 말하고 그 많은 돈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썼다고 말했다. 왕은 대노하여 도마스를 투옥하였는데 왕의 동생이 꿈에 하늘에서 왕의 화려한 궁전을 보았다고 말하자 왕의 성이 풀리고 다시 많은 돈을 주어서 궁전을 짓게 하였다. 도마스는 그 왕국에서 선교하여 많은 사람을 회심시켰다. 도마스의 선교에는 많은 기적적인 사건이 있었으나 마지막에는 박해를 받아 순교했다.

이 유다 도마스 행전에는 너무 신기한 이적사건이 많이 나와서 믿을 수 없는 것으로 보이는 것이 많다. 그가 팔레스틴을 떠나 인도로 가는 도중의 선교는 마치 예수 그리스도가 겪었던 일과 비슷한 것이다. 즉 기적사건과 박해사건 등이다. 그래서 이 책이 소설 같다며 그 역사성을 부정하는 학자들도 있고 반면에 사실을 과장했을 뿐 역사적 사실이라고 인정하는 학자들이 있다. 그러나 옛날 사람들이 회심하고 예수를 믿게 된 이야기는 후대 사람들의 귀에 전설적인 것 같이 들리는 법이다.

도마스가 선교한 왕국이 어느 때 외침을 받고 멸망하여서 그 역사를 알 길이 없었다가 20세기 초 발굴작업으로 그 왕궁이 지하 약 270피트 깊이에서 발굴되었는데 본래 궁전 터는 성 안에 있었으나 발굴된 궁전은 성 밖에 있었다. 유다 도마 행전에 왕이 도마스에게 성 밖에 새 궁전을 지으라고 명령하였다는 기록이 있을 뿐 그 왕국과 왕에 대한 기록이 인도나 또는 이웃 나라들의 역사문헌에도 없어서 그 왕국의 이야기는 도마스 행전의 기록으로만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국왕 군다포러스의 이름도 회의적이었는데 발굴작업으로 그 왕국의 화폐와 다른 기록들이 햇빛을 보게 되었고 국왕 군다포러스와 그의 동생이 역사적인 인물로 확인되었다. 그리하여 도마스 행전의 기록이 전설적인 것이 아니게 되었다.

인도선교에 관한 역사적인 기록은 345년에 시리아 교회의 그리스도인 이민단이 서남인도 말라바 오늘날의 케랄라 지역의 왕국의 왕 샤쿤(Sharkun)의 허락을 받고 정착하여 선교한 기록이다. 이 무렵 사산 왕 샤푸르 2세의 그리스도교 박해가 심했는데 에뎃사 교회의 총대주교가 예루살렘의 가나의 도마(Thomas of Cana)를 지도자로 삼고 그리스도인 가족들을 거느린 이민단 선교를 명령하였다. 그들이 인도에 와서 왕으로부터 여러가지 특혜를 얻어 선교하는 한편 그 왕국의 교육과 상업과 문화일반의 발전에 크게 공헌하였다. 이때 인도는 페르시아 지역의 박해 받던 그리스도인들의 피난지도 되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왕국의 왕으로부터 받은 특혜에 관하여 동판에 새긴 헌장을 가지고 있었는데 포르투갈 식민정부가 1600년경에 이 동판에 대한 기록을 공개했다. 그 동판의 길이는 15인치 폭 4인치인데 아직도 남아있다.

인도 교회는 시리아 교회와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시리아 교회의 후원을 받고 있었고, 인도 교회의 감독과 사제들을 시리아 교회가 임명하였다. 인도 교회의 두 번째 감독이 요한(John)이었고 그가 325년에 니케아회의에 참석하여 ‘대인도 교회와 페르시아의 감독’이라고 서명하였다.

사도 도마스가 인도에 와서 선교하였다면 그것은 AD 50년경일 것이다. 그리고 가나의 도마가 이민단장이 되어 말라바의 왕국에 들어왔을 때 그리스도인들의 환영을 받았다고 하는데 그들이 오기 전에 이미 이 지역에 그리스도인들이 살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아무튼 아득한 옛날의 그리스도교 선교와 확장의 이야기는 오늘날 우리들에게는 신화와도 같고 전설처럼 들리지만 그리스도교 선교가 기적적이었던 것만은 사실이다.

시리아의 제2차 그리스도인 인도이민단이 774년 인도에 왔던 때는 이슬람교의 박해시대였다. 역시 도마스라는 단장의 인솔로 인도의 크랑카노아 지방에 와서 차크라바티(Chakravarti)라는 왕의 환영을 받았는데 그 사실이 그 당시의 동판에 타밀어로 새겨져 있다. 그리스도인 코르탄(Korttan)에게 상업발달의 공헌을 치하하여 수여한 헌장이었다고 한다.

제3차 시리아 그리스도인 이민단이 822년에 사브리쇼와 프로드라는 두 사제와 동반하였다. 이들이 인도의 퀼론(Quilon)에 와서 본토민 왕과 백성의 환영과 후대를 받았다. 이때의 사정이 동패에 새겨져 있다. 이 동패는 824년에 제작되어 현존하며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자유와 함께 사회적 특권이 새겨져 있다. 그 내용은 그리스도인들이 노비를 쓸 수 있고, 종전에는 왕의 소관이었던 저울과 저울의 추와 인장을 그리스도인들이 관장하게 하고, 교회가 모종의 과세로 수입을 얻을 수 있으며, 정부관리와 협력해서 상업의 통제권을 갖게 하는 것 등 모두 72종이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실제로 귀족의 계급에 해당되는 계급이었다는 말이다. 최고 귀족 바라문과 그리스도인들이 비슷한 계급이었다.

당시 시리아와 페르시아의 문명은 인도의 문명보다 훨씬 앞서 있었고 그리스도인들은 이교도 시리아인이나 페르시아인보다 교육수준이 훨씬 높았다.

인도의 시리아 그리스도교(동양교회)가 인도에서 자유와 특권을 누리면서 지낸 500년간은 그리스도교회의 동면시대라는 비판을 받는다. 선교열이 식어지고 교회기강이 해이해지고 예배와 모든 의식이 완만해져서 복음의 힘과 빛이 사라져갔다.

그 까닭은 여러가지다. 교회는 귀족계급과 융화하고 타협하여 인도인의 토속문화를 모방하였고 계급제도 사회에서 낮고 천한 계급과의 교제와 상종을 할 수 없게 되어서 복음을 전할 수 없었다. 또한 바라문의 교리를 비판하거나 그들을 개종시킬 수도 없었다. 그리스도인 중에는 나라의 정부수반이 된 사람도 있었다.

시리아의 그리스도인 이민들 중에는 거부와 부유한 상인들이 많았고 그들이 인도에 와서 역시 상업에 종사하였다. 그들은 발달된 경제지식을 가지고 인도사회에 공헌도 하고 또 스스로 치부(致富)도 하여 나라의 상권을 장악할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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