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이사야서 12:1-5
그 날이 오면, 너는 이렇게 찬송할 것이다. "주님, 전에는 주님께서 나에게 진노하셨으나, 이제는 주님의 진노를 거두시고, 나를 위로하여 주시니,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다. 나는 주님을 의지한다. 나에게 두려움 없다. 주 하나님은 나의 힘, 나의 노래, 나의 구원이시다." 너희가 구원의 우물에서 기쁨으로 물을 길을 것이다. 그 날이 오면, 너희는 또 이렇게 찬송할 것이다. "주님께 감사하여라. 그의 이름을 불러라. 그가 하신 일을 만민에게 알리며, 그의 높은 이름을 선포하여라. 주님께서 영광스러운 일을 하셨으니, 주님을 찬송하여라. 이것을 온 세계에 알려라. 아멘
빌립보서 3:7-11
[그러나] 나는 내게 이로웠던 것은 무엇이든지 그리스도 때문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귀하므로, 나는 그 밖의 모든 것을 해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고, 그 모든 것을 오물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얻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으로 인정받으려고 합니다. 나는 율법에서 생기는 나 스스로의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오는 의 곧 믿음에 근거하여, 하나님에게서 오는 의를 얻으려고 합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분의 고난에 동참하여, 그분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는 부활에 이르고 싶습니다. 아멘
마태복음서 13:44-48
"하늘 나라는, 밭에 숨겨 놓은 보물과 같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발견하면, 제자리에 숨겨 두고, 기뻐하며 집에 돌아가서는,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그 밭을 산다." "또 하늘 나라는, 좋은 진주를 구하는 상인과 같다. 그가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하면, 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그것을 산다." "또 하늘 나라는, 바다에 그물을 던져서 온갖 고기를 잡아 올리는 것과 같다. 그물이 가득 차면, 해변에 끌어올려 놓고 앉아서, 좋은 것들은 그릇에 담고, 나쁜 것들은 내버린다. 아멘
설교문
<왜 그리스도인가>
우리가 찬양을 할 때, 기도할 때, 공동으로 기도할 때, 꼭 생각해야 할 게 있습니다. 짜여진 틀에 따라서 아무 생각 없이 인쇄되었기 때문에, 곡이 있기 때문에, 제도가 있기 때문에, 거기에 따라서 기도하시고 찬송하고 노래부르면 그냥 부를 수 있고 좋습니다만 오늘 말씀대로 하면 기쁨이 없습니다.
같이 하지만 참여하는 사람이 각자 가장 깊은 곳에서 샘솟는 의욕과 자율과 결단과 자기 결심이 없는 소리는 그것이 함께 하는 소리라 해도 노래하는 사람, 듣는 사람, 기도를 듣는 사람이 아멘, 하고 나도 동감이 가고 응답을 해야 하는데 그렇게 응답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진실로 함께 하면 아름답지만 모든 사람이 자율적으로 자유로 자기가 선택해서 마음 깊은 곳에서 결단해서 참여할 때만이 함께 하는 노래가 아름답습니다. 성가대 들을 때나 공동기도 하실 때, 찬송 부를 때도 저는 그런 느낌을 받습니다.
이 이야기를 드리는 이유는 오늘 사도바울 선생이 우리한테 이런 고백을 합니다. “나는 지금까지 모범적 신앙인으로 살아왔고 날 때부터 하나님이 택하신 선민의 한 사람으로 축복 속에 살아왔고 공부도 연구도 많이 해서 당대가 인정하는 최고의 지성인, 요즘말로 말하면 철학자, 신학자, 사상가, 집도 부자였습니다. 좋은 집에서 가문도 좋은 그런 집에서 살아왔습니다.”
사도바울의 머릿속에는 이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 축복의 백성입니다. 나도 축복받은 자 중에 하나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살면서 회당에 모여서 또는 성전에 모여서 예배드리고 감사할 때 우리는 각자 생각없이 주어진대로 태초부터 계신 하나님이 우리 민족을 택하시고 유대백성을 만드시고 율법을 주셔서 이대로만 지키면 구원 받습니다.”
사도바울은 애국심도 강했습니다. 지적인 아름다움이 모든 사람의 칭송을 받을 정도였습니다. 아무 두려움이 없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즐기는대로, 비록 로마 식민지 치하에 있었지만 유대백성이 된 것이 고마웠습니다. 자부심을 느꼈습니다.
그런데 유대 땅에 한 가지 사건이 생겼습니다. 예수라고 하는 어떤 사람이 나오더니 백성을 현혹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 앞에서 하나님을 제대로 믿어야 한다고 유대교를 비판합니다. 날 때 팔일 만에 남자 아이들이 할례를 받아야 구원의 표적이 된다고 하는 것에 대해서 이 사람이 나와서 할례가 필요 없다며 육신이 할례 받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자기 결단이 세례를 받아야 옳다고 반대 주장을 합니다.
사람이 선한 일을 하면 구원을 받는다고 알고 살아왔는데 이분 하는 말씀이 사람이 아무리 선한 일 한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하나님나라에 가는 게 아니라 하나님을 마음속으로부터 믿고 자기 결단을 하고 하늘을 믿어야 가는 것이지 하늘 믿음과 상관없이 자기 자신의 선한 믿음만 가지고 하늘나라에 가는 표는 사지 못한다고 설교를 합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없어야 되겠다는 것이 유대사회에 공감대를 이루었습니다. 누구나가 다 성전에 모이면 의회인 산헤드린의 모두가 ‘예수는 백성을 현혹하는 자이므로 죽여야 마땅하다. 죽이자. 이 사람을 따라다니는 사람도 잡아다가 감옥에 넣고 죽이자.’ 했으며 백성들에게, 유대 전체에 공감대가 형성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는 하나님을 훼방하는 사람이므로 벌 받아 마땅하다며 당대 최고의 지성, 최고 가문의 출신, 그리고 신앙열성에 돈독한 애국자, 애신자인 바울이 예수를 잡아들이겠다고 자원을 합니다. “내가 돌격대를 만들어서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들이고 예수를 잡는 일까지 하겠다.”며 돌격대를 이끌고 갔습니다.
가다가 다메섹(지금의 시리아의 수도-다마스쿠스)이라는 동네의 길을 가다가 어디인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어느 지경에 왔을 때 갑자기 사도바울의 인생이 변합니다. 길 위에서 사도바울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빛을 받고 쓰러집니다. 3일 동안 눈이 멀게 되었고 생각도 바뀌었습니다. 거기서 정반대의 환상을 봅니다.
자기가 죽이고 싶었던 예수가 환상 속에 나타나서 묻습니다. 그 때는 이름이 아직 사울입니다. “사울아, 어디 가느냐?” “예수 믿는 사람 죽이러 갑니다.” “그들의 주인이 누구인줄 아느냐?” “예수죠.” “내가 누구인줄 아느냐? 내가 바로 네가 죽이고 싶어하는 예수다.” 그 때 보인 모습이 십자가에 달리신 모습대로, 창에 찔린 모습대로, 피 흘리는 모습대로, 예수가 나타났습니다. “왜 네가 나를 핍박하느냐? 차라리 네가 이제부터 나를 믿고 전파하는 선교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예수님이 부탁하십니다.
사도바울은 자신이 거꾸러졌다며 고백을 합니다. 예수를 만나고부터 내가 그동안 믿었던 모든 것을 다 버리더라도 나는 예수 한 사람을 붙잡겠습니다. 첫 번째 이유는 이 예수가 나 때문에 죽었고 나의 구원 때문에 죽었고 피를 흘렸고 그런 종교인, 그런 사람을 내가 못 만났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을 내가 환상 속에 만났습니다.
예수는 나를 위해서 죽은 십자가의 주인이십니다. 유대교 역사상 내가 수많은 율법을 배웠지만 하나님이 나 대신 죽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습니다. 신학, 철학, 희랍신화를 많이 공부했습니다만 희랍신화의 신 중에 인류를 위해서 죽었다는 신 이야기는 없었습니다. 희랍신화가 로마로 바로 이어져서 로마 신화나 희랍신화나 내용은 같습니다. 이름만 헬라어에서 로마어로 바꾸는 것뿐 입니다.
어느 로마신도 백성을 위해서 신이 자기 스스로 목숨을 내 놓았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예수라는 사람은 나를 위해서 자기가 죽었다고 하면서 앞으로도 죽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사고의 반전, 전혀 다른 상황이 계속됩니다. 그래서 이 예수를 붙들기로 했습니다.
두 번째는 이 예수 말씀이, “내가 사울아, 너를 위해서 내가 죽었을 뿐만 아니라 너의 앞으로의 인생인 영원한 생명까지도 보장해야 하겠다.” 영원한 생명을 보장한다는 말을 오늘 성경말씀은 “내가 너를 위해서 죽고, 죽은 죽음을 죽이고, 내가 부활하여 다시는 죽음이 없게 하겠다. 바울아, 너를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어 주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부활해야 하겠고 부활했고 너는 부활에 동참하면 된다.”
사도바울이 본 신의 이야기는 나를 위해 죽어준 신, 나를 위해서 부활해서 영원한 생명까지 담보한다는 신인데 그 하나님의 이야기를 아무데서도 본 적이 없었습니다. 배움 속에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생각합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회개하고 반전하고 다 바꾼 다음에 “나는 이제부터 이런 분을 모시는 대신 그 외의 모든 것은 다 버려도 괜찮다고 결단하고 이제는 과거의 껍질을 다 벗겠습니다.”
사도바울은 또 이렇게 고백합니다. “여러분, 예수 믿으러 오셨죠? 왜 믿는 줄 아십니까? 예수가 여러분 대신 죽어서 구원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또 부활을 통해서 영원한 생명까지 담보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믿으라는 것이고 믿지만 아무리 예수께서 그렇게 죽으셨어도 여러분 자신이 자기 결단에 의해서 예수를 구세주로 받아들이면 기쁨이 있지만 강제로 예수 믿지는 마십시오. 강제로는 믿을 수가 없습니다.”
갈라디아서나 고린도서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예수를 찾고서 받은 가장 큰 선물이 뭔지 아십니까? 자유입니다. 예수 믿고 나니 나는 자유인이 되었습니다. 나는 울타리에 매여 살아왔고, 관습에 매여 살아왔고, 교리(이데올로기)에 매여 살아왔고, 체제 속에 매여서 나 스스로의 결단과 상관없이 예만 하고 살았는데, 지금 봤더니 그렇게 살지 말고 자유를 줄테니 스스로 결단하여 자율적 결단으로 예수를 믿어봐라. 구원은 덤으로 오는 것이 아니고 스스로 하는 결단, 믿음의 결단을 통해서 오는 것이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유대 백성들이 하나님의 선민인데 그 사람들이 바보가 되어서 예수를 죽였습니까? 유대백성이 나라를 잃고 전 세계에 흩어졌는데 제가 최근 통계를 봤더니 노벨상을 받은 사람 중에서 20가 유태인입니다.
어느 기업가에게 물어봤습니다. 요즘 자원위기로 힘들텐데 반유대적인 태도를 취하는 아랍하고 같이 하는 게 국가이익에도 좋겠네요, 그랬더니 “그 말도 맞긴 맞는데 아랍지역 말고 북미 유럽 전 세계를 돌아 다녀보면 현재 세계의 경제 상당부분을 쥐고 있는 사람이 유태인입니다. 그것을 놓치고 기름 좀 얻겠다고 하는 것도 바보입니다. 그만큼 가치가 있는 겁니다. 놀랄 정도로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유대인들은 그들이 갖고 있는 깊은 신앙으로 현재 출세하고 세계를 지배하고 꿋꿋이 버팁니다. 오늘 성경말씀에서처럼 그런 민족이 전 세계가 믿는 예수그리스도를 왜 죽이려고 했을까요? 그렇게 바보였을까요? 아니, 이렇게 똑똑한 백성이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군중심리가 나빴습니까?
사람들이 연구를 하다 보니까 아무리 훌륭한 백성이라도 자기에게 주어진 달란트를 스스로 움켜쥐고 우리끼리만 독점하자고 하고 우리끼리만 선하다고 거룩하다고 하자, 해서 성을 쌓고 담을 쌓으면 모든 결정이 그 안에서 일사천리로 이루어지는 것이 좋을 줄 알지만 그런 백성은, 그런 결단은 망합니다. 요즘에 그런 사고, 집단주의, 집단 이기주의, 아무리 훌륭한 지성이 들어가도 반대할 수 없는 짜여진 틀, 이런 사고방식을 집단 사고, 그룹 씽크(Group Think)라고 하는데 부정적인 의미입니다.
유대백성은 적어도 바울 당시에는 바울을 앞세우고 해서 예수는 나쁘다. 율법만이 옳다. 복음은 안 된다. 정해진 것만이 절대 옳고, 절대 우선이고, 유대백성 누구도 선민일 수 없다는 집단적 이기주의가 고착화된 그룹 씽크에 빠져있었습니다. 그 속에 예수는 죽었습니다.
사도바울을 하나님께서 거꾸러트리신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당시 유대교회를 대표하는 바울아, 바꿔라. 탈출해라. 자유가 없는 곳에서 탈출해서 자유롭게 하나님을 생각해 보아라. 하나님은 자유를 주셨다. 스스로 판단할 힘을 주셨다. 달란트를 주셨다. 그렇게 하나님을 믿어야 온 백성에게 복음이 열리지, 똘똘 뭉친 폐쇄된 사회에서는 하나님을 믿을 수 없다.
그래서 사도바울을 표피를 벗기고 자유인으로 만들어서 스스로 하나님을 찾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 결과는 오늘 우리에게 자유케 하는 복음, 해방시키는 복음, 하나님 앞에서 너무 자유스럽게 하나님을 믿는 것이 감사하여 스스로 찬송할 수 있는 기쁜 찬양의 사람, 기도도 습관으로 하는 게 아니라 정말 기뻐서 하는 기도, 찬양도 너무 기뻐서 하는 찬양, 사는 것도 너무 기뻐서 하나님 앞에서 그렇게 사는 모습, 이런 것을 자유라고 했습니다.
예수 믿으면 그리스도가 구세주가 되면 이런 자유가 있습니다. 사도바울의 복음은, 자유의 복음입니다. 이런 것이 없으면 유대 땅도 망했습니다. 그래서 매여 있던 회당이 오늘 교회가 되었고 꽉 막혀 있는 성곽 같은 성전이 오늘의 교회가 되어서 교회에 오시는 분은 예수를 주로 믿는 사람들은 정말 자유가 얼마나 그립고 아름다운지, 이 자유를 가지고 스스로 결단해서 찬양하고 기도하고 사십시오. 우리 교회는 억눌린 공동체가 아니고 자유케 하는 자들의 공동체입니다. 사도바울에게 이걸 주셨습니다.
우리가 세계에서 재밌는 대통령이라고 생각하는 존F. 케네디가 대통령이었을 때, 취임을 하고 석 달 만에 쿠바의 카스트 정권을 공격하는 한 안을 승인했습니다. 쿠바 남쪽에 있는 만이 있는데 그 만 이름이 돼지를 닮았다고 해서 피그만입니다. 피그만을 공격해서 카스트 전통을 무너뜨리고 사회주의 정권을 무너뜨려서 미국의 안보를 추구하기 위해서 1년 전부터 있었던 계획을 3개월 만에 승인했다고 합니다.
케네디 정권에서 가장 훌륭한 지성인들, 전략가들, 소위 엘리트들이 다 모여서 토의를 했는데 그 결과가 이렇게 되었습니다. 쿠바를 망명해 온 1400명의 쿠바 망명자들을 무장시켜서 피그만에 보냅니다. 여덟 개 함정에 태워서 보내고, B-26 비행기가 호위합니다. 오랜 시간 동안에 갇히기로 했는데 피그만에 가다가 B-26 공군기는 쿠바 공군기에 격추당해서 떨어졌고 8개의 함정은 모두 암초에 걸려서 좌초되었습니다. 100명이 사살 당했습니다. 1113명이 포로로 잡혔습니다.
쿠바 카스트로가 케네디한테 몸값을 요구했습니다. 1113명 풀어주는 대신 5300만 달러를 벌금으로 지급하고 해방이 됐는데 당시에 5300만 달러면 지금으로는 엄청난 액수입니다. 그 때 미국 최고의 지성, 재능, 전술, 전략이 다 모여서 피그만을 침공하기로 결의할 때 이야기입니다만, 어느 누구도 열의와 열성이 놀라워서 그런 결정은 옳지 않습니다, 하고 반대의견은 말할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당시 고문으로 있던 아서 슐레진저의 기록은 다음과 같습니다. 미친 짓인 줄 알았지만 대통령으로부터 모든 사람들이 미국 최고의 엘리트들이 피그만 침공이 옳고 가능하다고 믿는 통에 자기도 바보같은 것인 줄 알았지만 아무도 한마디 말을 못했습니다. 그룹 씽크의 전형이었습니다.
그래서 요즘 여러 사람들이 분석을 하면서 21세기에도 바보같은 그룹 씽크가 존재할 수 있다며 사람을 잡아놓고 틀린 것도 옳다고 하면 옳은 것이고, 아니라고도 못하는 현상이 지금도 곳곳마다 계속되고 있다고 합니다. 사회, 정치, 군사, 안보, 모든 영역에서 이와 같은 것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 이후에 보고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1962년, 미사일 설치 위기 때 지난 해에 잘못을 되돌리고 여러 의견을 조합하고 자유토론을 거쳐서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21세기에도 부정적인 의미의 그룹싱크가 사람의 자율적 결단을 억압하는 그냥 주어지는 대로의 앵무새 같은 결정이 잘못이지만 2000년 전에도 똑같았습니다.
예수를 믿는 복음이 뭐냐고 물으면 사도바울이 말합니다. 예수를 믿으면 완전히 자유합니다. 누가 속박한들 무너지지 않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그분만을 자유케 하시는데 하나님 앞에서 기뻐하라고, 세상 사람들 앞에서 행복하라고, 진실로 사랑하라고, 억압이 아닌 사랑이 아니라 진실로 사랑하고 기뻐하라고, 그렇게 저를 해방시켜 주셔서 진실로 기뻐하며 찬송부르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 오늘과 같은 교회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모여서 사는 곳이 가정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모인 곳이 사회이고 우리나라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저를 보고 진실로 자유한 사람들이 자율적 결단에 의해서 감사하고 기뻐하는 감격으로 모여서 같은 일을 하라고 합니다. 나라도 지키라고 합니다. 가정도 지키라고 합니다. 이것이 제가 받은 복음입니다. 그래서 저는 제 육의 생명과 영의 생명까지 담보해주신 하나님이 고마워서 그 외의 모든 속박은 버리기로 했습니다. 제가 그리스도를 잡았더니 저는 지금부터 진실로 모세 때부터 주신 하나님의 율법이 속박이 아니라 자유의 복음이 되었습니다. 내 미래는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영생의 복음까지 담보 받았습니다.
사도바울은 “그 예수가 저는 너무 기뻐서 제가 보물을 찾은 것 같습니다.” 라고 말합니다. 보물을 잡으세요. 그리고 그 보물을 통해서 생의 설계를 다시 하십시다. 세상이 각박하시죠? 힘드시죠? 엄청난 위력 앞에 어찌할 바를 모르시죠? 그래도 하늘 앞에서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두는 자유 결단할 수 있고 자유인으로 부름 받았습니다. 그러면서 자유인들이 모여서 찬양하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향해서 기쁨으로 찬양하라고 합니다. 강요된 기쁨 말고 진실로 우러나오는 기쁨, 그것이 신앙의 본질이고 진수입니다.
사도 바울의 말입니다. “제가 그 진수를 찾도록 노력했는데 다메섹 도상에서 피 흘린 예수를 보고 부활을 약속하신 그 분의 옷자락을 잡고 이제 제가 진실로 행복할 수 있습니다. 저는 자유한 사람입니다. 자유했더니 자유가 만드는 공동체, 자유가 꾸려가는 질서, 자유가 합의하는 결정, 너무 아름답습니다.” 그 모양이 교회고, 우리 신앙의 공동체입니다. 여러분 자신이 자유의 선물되시기 바랍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