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부잣집 아들이 자동차를 무척 갖고 싶었습니다. 그는 아버지에게 좋은 대학에 합격하면 자동차를 사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자동차도 좋지만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고 기도 생활을 하기를 원해서 아들에게 말씀을 읽고 기도 생활을 열심히 하라고 타일렀습니다.
아버지는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에는 자동차뿐 아니라 인생에 필요한 모든 것이 들어 있다고 확실하게 믿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아들이 목표한 대학에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아들은 아버지에게 계속 자동차를 사 달라고 졸랐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대학 입학 선물로 자동차는 사주지 않고 성경책 한 권을 사 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들은 화가 머리 끝까지 났고 성경을 거들떠보지도 않았습니다. 아버지가 사 주신 것이기 때문에 버릴 수는 없어서 책장에 꽂아 놓았지만 결코 보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아버지가 자동차를 사주지 않는 것에 불만이 가득한 아들은 방학이 되어 집에 돌아와서도 아버지에 대한 화를 풀지 않았습니다. 아들의 이런 마음을 눈치 채고 아버지는 아들에게 왜 성경을 읽지 않았느냐고 물었습니다.
아들은 “자동차를 사 달라는 아들의 부탁도 들어주지 않는 아버지의 말씀은 듣고 싶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아버지는 “얘야, 빌립보서 4장 19절을 펴 보아라. 거기에 분명히 자동차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아들은 기숙사로 돌아와서 성경을 펴서 빌립보서 4장 19절을 찾아 보았습니다.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아버지는 그 말씀에 붉은 줄을 쳐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놀라운 것은 거기에 수표 한 장이 있었는데, 차를 살 수 있을 만한 액수였습니다. 아들이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했으면 벌써 차를 가질 수 있었는데 순종하지 않아서 차를 갖지 못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하나님께서도 당신의 말씀에 순종하면 우리에게 모든 것을 풍성하게 주십니다. 30배, 60배, 100배로 축복해 주십니다.
매우 거칠고 많은 것을 요구하는 남자와 결혼한 여성이 있었습니다. 그녀의 남편은 “오늘 이 옷들을 전부 세탁해서 다려 놔”, “매일 내가 퇴근하자마자 저녁을 먹을 수 있게 준비해 둬” 등 수많은 요구로 그녀를 힘들게 했습니다.
아내는 남편의 요구를 들어줬지만 그런 사람과 같이 살아야 하는 자신의 삶을 증오했습니다. 그녀는 남편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25년 동안 그렇게 비참한 결혼 생활을 참아 냈습니다. 그리고 다시는 결혼을 하지 않으리라 맹세했습니다. 그러나 2년 뒤 그녀는 아주 친절한 사람을 만나 재혼했습니다.
두 번째 남편은 자신의 요구대로 따르라고 강요하지 않고 오히려 그녀를 사랑해 주었습니다. 그녀는 처음으로 행복을 느꼈습니다.
어느 날 그녀는 집안 청소를 하다가 전 남편의 요구 사항들이 적힌 쪽지를 발견하고 그 내용들을 다시 읽다가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습니다. 그 요구들은 모두 그녀가 지금의 남편을 위해 하는 일들이었고 오히려 그녀는 지금 더 많은 일을 하고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예전에는 의무감으로 일했지만 지금은 즐겁게 일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모범적인 순종은 강요나 협박을 받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마음속 열망에 반응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인의 참된 순종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새로운 성품을 가지고 주께서 원하시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께서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여 인류를 구원하시고 영광의 자리에 가시게 되었다는 진리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 속에 나타난 예수의 순종을 묵상하면서 우리도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이 되어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축복 가운데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예수께서는 당신의 삶이 하나님께 순종하여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십자가의 대속의 죽음으로써 세상 만민을 구원하라는 사명을 받고 이 땅에 태어나셨습니다. 그러기에 예수께서는 그 사명을 위해서 최후의 죽음까지도 각오하고 생활하셨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6-8).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본체로서 이 땅에 내려 오시기 전에 하나님과 동등한 영광을 누리셨습니다.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니다”(요17:24).
이 예수께서는 이 땅에 내려오셔도 본성은 변함없이 그대로 하나님이셨습니다. 하지만 인류의 죄를 그 몸에 짊어지시기 위해서 기꺼이 하나님으로서의 권세와 영광을 내려 놓으시고 사람의 모양으로 자신을 낮추셔서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으로서의 권세와 영광을 가지고 계셨지만 자신이 원하는 바대로 하지 아니하시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만 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특권이 있으면서도 만민을 구원하라는 책임이 수반되었습니다. 예수께서는 만민 구원이라는 책임을 십자가를 지고 감당하셨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1:12).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할 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가 주어지면서 동시에 복음을 전파해 만민을 구원하라는 책임이 주어집니다.
도슨 트로트맨은 고등학교만을 졸업한 사람인데 예수를 영접하고 난 후 영적인 비전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28:19-20).
그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복음을 증거하고 싶은 강한 충동을 느껴 모든 족속이 주님께 돌아오는 엄청난 비전을 품었습니다.
그는 샌디에고에 있는 미 해군 함대에서 근무하는 몇몇 군인들과 함께 제자 훈련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삭막했던 군인 사회에 하나님의 말씀의 감격이 있는 제자훈련의 붐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트로트맨은 미국 지도를 짚어가면서 “예수의 제자들이 벌 떼처럼 일어나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했고, 또 세계 지도를 펴 놓고 똑같이 예수의 제자들이 일어나도록 기도했습니다.
그가 이렇게 해서 조직한 선교 단체가 ‘네비게이토’입니다. 일대일 제자 훈련을 중심으로 전도와 선교를 하는 네비게이토는 세계로 퍼져 나가 그리스도의 생명의 말씀을 증거하였습니다.
이런 복음 선교의 비전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세계 만국에 복음을 전하는 것은 ‘우리’의 꿈이 아니라 ‘하나님’의 비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 주실 정도로 간절히 소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런 복음 전도와 선교의 소원을 품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야 합니다. 우리를 향해 꿈꾸는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꿈을 발견하고 그 꿈을 향해 달려가야 합니다. 내 마음속에 살아 꿈틀거리고 있는 세상의 헛된 야망을 버리고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향해 달려가야 합니다.
2. 예수는 언제나 십자가와 영광을 함께 생각하셨습니다.
우리나라의 축구 선수 가운데 세계적으로 유명한 박지성 선수를 ‘산소탱크’라고 합니다. 그는 많은 운동과 연습을 통해서 강인한 체력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90분 동안 공격과 수비를 동시에 감당하며 축구장을 종횡무진 뛰어도 지치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브닝 스탠더드(Evening Standard)라는 영국의 한 일간지는 “박지성의 성공은 중노동에 가까운 끊임없는 연습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며 “박지성이 자신의 성공 비결에 대해 `매일 같이 지겨운 날의 연속이지만 내 경기의 모든 면을 완벽하게 만들기 위해 온 몸을 던져 연습하고 또 연습했다`고 말했다”고 전하고서 “타고난 재능은 물론 부단한 연습이 오늘날 박지성을 가능케 했다”고 써서 박지성이 연습벌레임을 보여 주었습니다.
이브닝 스탠더드는 이어 연습을 등한시하는 일부 영국 프리미어리거들을 `우리의 멍청이들`(some of our own idiots)이라고 부르면서 박지성은 이들과 완벽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고 지적한 뒤 “우리의 일부 멍청이는 평생 한 발만 사용한다”며 “이들은 너무 어리석거나 게으른 나머지 타고난 능력 이외의 것에 대해선 배우려고 시도하지 않는다”고 비판했습니다.
그의 강인한 체력은 연습이라는 대가를 지불한 결과입니다. 세계적인 스포츠 스타들은 다 그만한 연습을 했기 때문에 영광을 얻은 것입니다.
세상의 그 어떤 분야에서든 땀을 흘리지 않고는 영광을 얻을 수 없습니다. 땀을 흘리지 않고, 노력하지 않고 무엇을 이루려는 심보는 도둑놈 심보입니다.
공부도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이 시험에 합격할 수 있습니다. 값진 것일수록 얻기기 힘이 듭니다. 이 세상에는 자신이 처한 조건을 바꿀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해 자포자기하는 마음에서 땀을 흘리지 않아 자신의 길을 잃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 누구라도 안이한 길을 택하고 영광으로 들어간 사람은 없습니다. 이와는 반대로 피땀 흘려 노력하고 영광을 보지 못한 사람도 없습니다.
이번 남아공 월드컵에 아르헨티나 대표로 나온 리오넬 메시라는 세계적인 축구 선수가 있습니다. 그는 11살 때 성장호르몬 장애판정을 받고 한 달에 1,000달러가 들어가는 치료비용을 감당하지 못해 축구를 포기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메시의 잠재력을 발견한 바르셀로나에서 치료비를 대신 지불해2000년, 메시는 치료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13살 140cm 이하였던 키는 169cm까지 성장하였으며 18세에 조국인 아르헨티나를 세계 청소년 선수권 대회 우승을 이끌었습니다.
그리고 2009년 FIFA의 올해의 선수상을 받으며 바야흐로 메시의 전성시대를 열고 있습니다. 그의 눈부신 성공 뒤에는 어린 시절부터 겪어야만 했던 아픔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픔을 견뎌내고 이제 그는 “처음에는 나쁘고 부정적으로 보이는 것이 많은 노력과 고난을 겪은 뒤에는 좋은 결과로 바뀔 수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길이 고난의 길이라는 것을 잊어 본 적이 없었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12:24).
예수님도 죽어야 다시 산다는 것을 선포하셨기 때문에 당신의 삶에도 언젠가는 죽을 때가 온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하나님께서는 죽음 가운데에서도 결코 자신을 버리지 않으신다는 것을 확신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예수께서는 그 고난이 아무리 큰 고난이라도 순종하실 수 있었습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12:2).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자 했을 때 외부로부터 받는 고난은 일시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고난으로 인해 하나님이 받으시는 영광은 영원한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고난을 바라보지 말고, 그 고난을 통해 이루어지는 구원의 역사를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 또 우리의 고난을 통해 드러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도 그 영광을 바라보면서 모든 고난을 이기셨습니다.
그런데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것이라는 말씀을 듣고 근심에 빠졌습니다. 그 근심에 사로 잡혀 그들은 그 뒤 예수께서 부활하신다는 말씀을 놓쳐버렸습니다.
그 결과 예수가 십자가 위에서 고난을 받을 때 그만 제자들은 다 흩어졌습니다. 스승을 배신해 버렸습니다. 그들은 십자가의 고난 후에 부활의 영광이 있을 것을 도무지 짐작조차 못했습니다. 예수께서 고난 후에 부활이 있을 것을 알렸음에도 도무지 그들은 깨닫지 못했습니다.
신자는 고난 뒤에 영광이 있는 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성경 구절이 빌립보서 4장 13절이라고 합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인생을 살아가면서 경험하게 되는 모든 어려운 문제를 다 해결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사고’로서 이 성경 구절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바울의 이 말씀은 그 구절의 앞 절, 즉 12절을 잘 알아야 합니다.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빌4:12).
이것은 세상의 모든 욕망을 버렸을 때 주님의 능력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의 고난 후에 반드시 부활의 영광이 있을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 어떤 고난도 이겨나갈 수가 있었습니다. 우리들도 주님처럼 복음을 위하여 겪는 고난은 결국 영광으로 가는 길임을 알고 고생스럽더라도 충성스럽게 감당해야 합니다.
3. 예수의 십자가는 자발적인 것이었습니다.
세계 제 1차 대전 때에 증상을 입은 프랑스 병사가 있었습니다. 그의 한 쪽 팔은 몹시 부러져서 절단해 버려야 했습니다. 그는 정말 멋지게 생긴 사람이었습니다.
외과 의사는 이 멋진 청년이 일생을 불구의 몸으로 살 것을 생각하자 마음이 몹시 아팠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청년이 의식을 회복했을 때 그 슬픈 소식을 알려주려고 침대 옆에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청년이 눈을 뜨자 의사는 말했습니다.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기는 하나 자네는 팔을 잃었네.” 그 때 청년은 “선생님, 저는 팔을 잃은 것이 아니라 저는 팔을 바친 것입니다. 우리 조국 프랑스를 위해서 말입니다”고 대답했습니다.
예수께서는 어쩔 수 없이 아버지 하나님의 명령인 십자가를 지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께서 물 위를 걸으시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신 것처럼 신적인 능력으로 십자가에 못 박는 로마군과 헤롯 정권과 성전의 지배층을 다 쳐부술 수도 있었고 자기 생명을 구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죽고 싶지 않았는데, 로마 병사에 의해 억지로 죽임을 당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우리를 사랑하사 십자가의 죽음을 택하셨습니다. 스스로 그 죽음을 담대히 받아 드렸습니다.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통해 계획하신 구원의 역사를 완성시키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에 뜻에 자발적으로 순종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자발적으로 죽음을 맞이하기를 원하셨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당신을 잡으러 온 병사들과 일전을 치루기 위해서 칼을 빼서 친 시몬에게 검을 칼집에 꽂으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도 주님의 말씀에 자발적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복음 전도에 자발적으로 나서야 합니다. 여기에 신자의 자발적인 순종으로 인해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1980년대 루마니아 차우세스쿠 정권은 국민들을 억압하는 독재정치를 하였습니다. 독재에 견디다 못한 데모대 20만 명이 수도 부큐레슈티 광장에 모여 독재권력에 항의하고 있었습니다.
항거하던 군중 100여명이 경찰의 총칼에 맞아 죽었습니다. 이에 성난 군중은 돌멩이로 대항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시민의 존경을 받는 라스즐로 토케스(Laszlo Tokes) 목사가 맨 앞에서 “이 시간 살아계신 하나님께 주기도문으로 기도드립시다”라고 외쳤습니다. 그러자 모든 사람이 토케스 목사와 함께 무릎을 꿇고 기도드렸습니다.
그 때부터 유혈사태는 끝났고, 민주혁명이 성공해 루마니아의 차우세스쿠 독재는 무너졌습니다.
처음에 토케스 목사는 독재에 협력하는 교회의 목사로 부임했습니다. 그래서 그 교회 강단에는 공산당 별이 붙어 있었고, 성도는 40여명이었습니다.
그러나 토케스 목사가 목회하면서 그 교회는 5천명이 모이는 큰 교회로 성장하였고, 정부는 이 교회에 위협을 느끼고 박해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후로 그 교회는 루마니아의 민주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토케스 목사가 목사로서 하나님의 말씀에 자발적으로 순종한 결과였습니다.
교회는 그 시대의 등불로 서야 합니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주님의 가르침에 신실하며 예수의 증언대로 진리와 양심으로 우뚝 서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면서도 우리 인간을 사랑하사 하나님의 영광과 특권을 버리시고 인간으로 태어나셔서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여 십자가의 죽음의 길로 가셨습니다.
우리도 이런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을 내려 놓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생명을 살리는 구원의 역사에 모두 순종함으로 동참하여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일구어 나가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