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한국인의 영성과 한국 교회의 성령운동

홍순원 목사 ㅣ 한국기독교장로회 제공

하나님을 찾는 겨레

배달겨레의 영성을 생각해 봅니다. 배달겨레는 밝은 겨레입니다. 함석헌 선생은「뜻으로 본 한국역사」에서 우리의 조상은 해가 뜨는 곳을 향해서 동으로, 동으로, 이동해서 이 땅에 정착했다고 합니다. 로마의 건국신화는 늑대 젖을 먹고 자란 로물로스 형제가 로마를 세웠다고 합니다. 생각해 보면 세상의 나라들은 야생적이고 포악한 늑대에서부터 기원했습니다. 부족 국가들이 생기면서부터 인류는 전쟁과 약탈이라는 동물 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여기에 비교해서 해 뜨는 곳을 찾아와서 삶을 일구었다는 우리의 뿌리 이야기는 감동적입니다. 사슴이 목말라 물을 찾듯이 하나님을 찾은 겨레가 우리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향한 순례가 우리 삶의 본 모습입니다. 해/하나님/밝음을 찾는 겨레! 이 영성을 회복하는 것이야말로 한국 교회 성령운동의 과제입니다.

뜨거움과 고요함의 통일

한 민족의 영성의 특징을 알려면 그 예술을 보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 겨레의 예술을 살펴보면 놀라울 뿐입니다. 불과 물의 양극입니다. 뜨거운 신바람(불)이 한 쪽에 있고, 반대쪽에는 고요한 정신(물)이 있습니다.

우리 문화에서 가장 우리다운 것을 꼽으라면 단연 사물놀이입니다. 다른 예술이 뛰어나지 않아서가 아니라 사물놀이가 우리의 영적 기질을 제일 잘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김덕수 사물놀이패 공연은 다른 나라에서도 열광합니다. 사물놀이는 신바람을 일으킵니다. 이렇게 힘차고 신날 수가 없습니다. 우주가 폭발하며 한순간에 팽창하는 최초의 장면을 재연하는 것이 사물놀이입니다.
더 상상력을 가지고 들으면 천지창조입니다. 하나님의 힘찬 명령에 수천 수억의 생명이 튀어나와 이 세계를 순식간에 뒤덮는 광경입니다. 이 사물놀이를 들으며 함께 휘몰아치는 신바람에 휘말리면, 온몸에서 생기가 돋습니다. 이처럼 사물놀이나 농악을 통해서 우리 겨레의 엄청난 역동성인 뜨거운 신바람을 보게 됩니다.
이와는 아주 반대되는 우리 예술이 있습니다. 용산 국립 박물관에 갔을 때, 통일신라시대의 금동미륵반가사유상 앞에서 발걸음도 시간도 멈추고 말았습니다. 앉아서 한 손을 뺨이나 턱에 댄 자세는 생각하는 인간의 전형입니다.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이 서양의 정신을 나타낸다면 반가사유상은 동양의 정신을 나타냅니다.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은 역시 세련되질 않았습니다. 몸의 울퉁불퉁한 근육질이 생각하는 바보를 연상하게 합니다. 그러나 금동미륵반가사유상은 아주 매끄럽고 날씬합니다. 그 얼굴 표정은 그야말로 모든 표정을 초월한 표정입니다. 조금의 움직임도 없는 절대 고요의 세계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인도나 중국에도 반가사유상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것처럼 이렇게 완벽한 탈속脫俗의 정신을 표현한 것은 없습니다.

이처럼 우리 예술의 한 끝에는 가장 역동적인 사물놀이가 있고, 그 반대 끝에는 가장 고요한 정신의 반가사유상이 있습니다. 이 둘은 세계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경우입니다. 오늘 우리의 삶에서도 종종 이 두 면이 나타나곤 합니다. 2002년 월드컵 때, 온 국민이 펼쳐보였던 응원은 전 세계를 놀라게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 스스로도 용광로 같은 뜨거움을 맛보고 신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우리가 음식을 먹을 때도 이 뜨거운 기질을 볼 수 있습니다. 삼복더위에 입 안을 데는 뜨거운 음식을 뜨거운 땀을 비처럼 쏟으며 먹어야 우리는 시원함을 느끼고 속이 풀어집니다.

금동미륵반가사유상의 모습도 오늘 우리 안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올림픽 종목에 양궁이 있습니다. 이 양궁은 우리나라가 모조리 휩씁니다. 언젠가는 우리 선수들이 양궁과녁의 한 가운데 있는 좁쌀만 한 렌즈를 맞추어서 보는 사람들의 탄성을 자아냈습니다. 양궁은 힘으로 하는 경기가 아닙니다. 숨을 조절해서 몸과 마음에 흔들림이 없어야 합니다. 절대 평정의 자세가 아니면 화살은 비켜갑니다. 양궁을 잘하는 것은 우리의 집단 무의식 안에 절대 고요의 요소가 있는 까닭입니다. 이것을 시위문화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언제부터인지 촛불시위가 등장했습니다. 촛불시위에는 무슨 큰 함성이나 격렬한 몸부림은 없습니다. 정당한 주장을 목에 걸고 다만 촛불을 밝히는 것입니다. 오늘도 내일도 고요히 불을 밝힙니다. 그리고 이 촛불이 진실일 때, 그 촛불에 촛불들이 더해지며, 광장 전체가 촛불 바다가 됩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 촛불 시위를 당국자들이 더 무서워하는 것입니다. 이 고요한 시위 또한 금동미륵반가사유상의 표현입니다.

그렇습니다. 대극성對極姓의 통일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오천 년 역사를 이어온 수수께끼입니다. 만일 뜨거운 신바람만 있었다면 어려움이 닥쳤을 때, 인내와 슬기로서 차근차근 이겨내지 못하고 팔짝거리기다가 우리는 재가 되어 사라졌을 것입니다. 반대로 고요한 정신만 가지고 있었다면, 국난이 닥쳤을 때, 우리는 초월의 세계로 도망가서, 이 땅에서의 삶은 이어가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어갔다 해도 빛나는 문화를 창조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뜨거운 신바람과 고요한 정신이 함께 아주 잘 통합되어 있었기에 역사의 무서운 위기도 넘기고, 때마다 기적같이 새 삶을 일구어 낼 수 있었습니다. 일제 지배를 견뎌내고, 6.25의 폐허를 딛고, 불과 얼마 지나지 않아 세계와 어깨를 견줄 만큼 발전을 이룩한 한강의 기적이 그것입니다.

우리 영의 기원

그러면 우리의 이 뜨거운 신바람과 고요한 정신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요?  유동식 박사는 우리 민족의 밑바닥을 이루는 종교는 무교라고 했습니다. 단군시대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일관되어 온 한국 종교가 있다면 그것은 무교이며, 무교적 의식구조가 주체가 되어서 외래의 고등종교들을 받아들이고, 거기에서 종교적인 영양소들을 흡수해서 무교는 자신의 활력을 삼았다고 합니다. 유동식은 「한국종교와 기독교」, 「한국 무교의 역사와 구조」같은 책에서 대부분 원시종교로 깎아내리는 우리의 무교를 높이 평가합니다. 우리의 무교는 외래 종교들과 혼합하여 자기를 지켜 냈을 뿐더러, 이 모든 것을 포섭하고 초월하는 풍류風流의 ‘한 멋진 삶’의 원형을 가졌다고 합니다.

나는 무교라는 종교적인 차원보다는 ‘무巫끼’라고 하는 기질의 면을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우리의 무교가 가진 창조적인 면과 함께 어두운 면도 봅니다. 항상 어떤 것이 가진 아름다움의 깊은 속에는 그림자도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세계에서 제일 성격이 급합니다. 그리고 뜨겁습니다. “빨리빨리”는 우리 한국인을 일컫는 대명사처럼 되었습니다. 이 주체할 수 없는 뜨거움과 급박함은 무끼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 때문에 신바람이 타락하여 온갖 그릇된 바람을 일으키곤 합니다. 한탕주의, 업적이나 결과주의, 온갖 투기바람 따위를 일으킵니다. 우리 안에 밝음을 찾아 순례한 높은 뜻 대신 성공이 삶의 목적으로 들어섭니다. 우리는 성공을 단박에 이루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한강의 기적 뒤에는 온갖 어둠의 그늘이 있습니다. 우리의 즐거운 놀이는 이 뜨거운 기질 때문에 늘 난장판이 되고, 그 난장의 시간이 지나면 쓰레기로 가득해집니다. 이 때문에 우리의 역사가 앞으로 나아가질 못하고 늘 도루묵이 되고 맙니다.

이런 우리의 뜨거움을 다스릴 고요한 정신은 어디서 왔을까요? 나는 이 땅에 들어온 생명 종교들에서 왔다고 생각합니다. 방울과 칼자루를 잡고 팔짝팔짝 뛰는 무녀도의 무기질이 우리의 것이라면, 저 절대 경지의 고요한 정신을 표현한 신라의 반가사유상은 불교의 것입니다. 나는 불교나 유교를 아주 고맙게 생각합니다. 아무리 우리의 무교에 창조적인 것이 있다 해도 무교는 드높은 정신이 있지는 못합니다. 정령신앙이나 혼령 신앙은 어린이 정신 수준의 종교입니다. 그런데 불교가 들어와서 명상을 가르치고, 깊은 정신의 세계를 열어주었습니다. 우리에게 민족의식이 생기고 통일의식이 생긴 것은 이 불교의 깊고 높은 정신세계를 통해서 우리의 원시적인 의식이 높은 얼로 자랐기 때문입니다. 이 불교가 창조적인 기능을 잃어버리자 이번에는 유교가 들어왔습니다. 유교는 우리에게 예절과 질서, 드높은 윤리 의식을 주었습니다. 분출하는 욕망대로 행동하지 않고, 남을 생각해보고, 옳음을 따져보게 한 것입니다.

명상(불교)과 예(유교)가 같지는 않지만, 우리의 고요한 정신을 훈련했다는 점에서는 같은 기능을 했다고 봅니다. 불교의 선禪그림이나 조선시대의 백자나, 선비들이 그린 그림을 보면, 둘이 형식은 다르지만, 둘 다 자유롭고 여유로운 정신과 삶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급박한 무끼와는 다른 고요한 세계를 가지는 것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뜨거운 성정性情과 가장 완벽한 절대 고요가 어떻게 우리 안에서 통일과 조화를 이루었을까요? 이 수수께끼 또한 우리의 생활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세계인에게 알려진 우리의 대표 음식이 비빔밥과 김치입니다. 서로 다른 것들을 한데 넣고 비비거나 곰 삭혀서 새로운 맛을 낸 음식들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우리가 타고난 능력입니다. 유동식은 우리 무교는 혼합하여 새 문화를 창조하는 능력이 있다고 보았습니다. 버무리고 삭이는 이 기질이 무교에서 왔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서로 다르면서도 하나 안에 받아들이고, 하나이면서도 다름을 간직하고, 때로는 다른 것을 끌어안고 씨름하며 삭혀서 새로움을 만드는 이 타고난 슬기가 있기에, 우리 안에서 무의 신바람과 고요한 정신이 통일을 이룰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교와 고요한 정신       

불교도 유교도 이 땅에 와서 무교에 흡수되고, 정치적이 되고 율법적이 되면서 그 생명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리고 근대를 맞으며 기독교가 이 땅에 들어왔습니다. 기독교는 이 겨레의 마음에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요?

무끼는 우리가 타고난 것입니다. 무끼의 망아경이나 뜨거운 신바람은 원초적인 생명의 표현입니다. 그 반대의 고요한 정신은 우리가 훈련받아야 할 내용입니다. 이 고요한 정신이야말로 이 땅에 들어온 생명종교가 주어야 합니다. 이 고요한 정신을 길러주지 못할 때, 우리의 심성은 뜨거움으로만 치달아 병이 나게 됩니다. 불교도, 유교도 고요한 정신을 주는 제 몫을 했습니다.
기독교가 이 땅에 들어오자. 우리의 영은 신바람이 났습니다. 기독교는 우리에게 고요한 정신을 길러주었음에도 그동안 불교와 유교가 주지 못한 만인 평등과 해방의식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기독교는 우리 겨레가 무심코 부른 하늘님인 하나님에 대한 뜨거운 믿음이 있었습니다. 굿을 하며 마음의 응어리가 풀어지듯이, 기독교가 들어오자 우리 겨레는 삶이라는 정치행동 영역에서 해방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기독교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근대의식이나 정치의식을 갖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이제 신바람이 굿판이 아니라 역사 안에서 불게 되었습니다. 개화운동, 독립운동, 경제발전이 힘차게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기독교가 그만 무교에 너무 쉽게 항복한 것입니다. 형식 면에서는 무교를 미신으로 절멸시켰지만, 기독교는 그 내용 면에서는 기복과 성공을 추구하는 무교의 그것과 다르지 않게 되었습니다. 심지어는 부흥회에서 부는 뜨거운 성령운동은 무교의 신바람과 구분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하비 콕스에 따르면 한국의 이 성령운동은 기업의 경영기법과 절묘하게 혼합되어서 놀라운 교회의 성장을 가져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한국교회의 뜨거운 부흥예배가 기독교적인지에 대해서는 고개를 저었습니다.

한국에 들어온 기독교는 뜨거운 성령운동을 강조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가진 무끼의 그 뜨거움과 급박한 성정에 기름을 부어서 우리를 뜨거운 한 면으로 치닫게 했습니다. 한 면으로 치달을 때 큰 탈이 납니다. 신바람을 타고 교회도 폭발하듯이 성장하고, 나라 경제도 세계 수준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복음을 잃고, 기독교의 뜨거운 영은 무끼의 뜨거운 바람과 무교의 현세 기복과 상승작용을 일으켜 우리 영을 맘몬의 노예로 만들었습니다. 이 때문에 다른 종교가 아닌 기독교 안에서 유산 때문에 아버지를 살해한 패륜이 나올 수 있었고, 최근 몇 년 동안 다른 종교가 아닌 기독교를 배경으로 하는 유명 예인들이 인기와 성공의 문제로 자살하여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습니다. 결국, 기독교는 오늘 이 땅에서 높은 정신성과 도덕성을 인정받지 못하고 배타종교, 광신종교, 위선 종교, 물질 종교라고 하는 비판을 받으며 불필요한 외래종교로 취급받게 되었습니다.

성서의 두 성령운동

신약성서에는 두 성격이 다른 성령이 나옵니다.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 성령은 불길 같습니다. 방언을 터뜨리고, 은사를 주고, 술 취한 것처럼 제자들을 사로잡았습니다. 이 오순절의 영은 ‘뜨거운 영’(불)입니다. 반면에 요한복음서 16장에는 파라클레토스 성령이 나옵니다. 잘못을 깨우치고, 진리로 인도하는 영입니다. 이 파라클레토스 영은 ‘고요한 영’(물)입니다.

뜨거운 영과 고요한 영, 이것은 두 영이 아닙니다. 한 영의 두 면입니다. 역시 대극성의 통일입니다. 초대교회 안에, 교회의 역사 안에, 성령의 이 두 면이 조화롭게 있어왔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성령체험 안에는 이 뜨거운 영과 고요한 영 체험이 함께 있어야 합니다. 한 면으로만 치달으면 그 성령운동은 병이 납니다. 뜨거운 영 체험만 강조하면, 성령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로 인도하는 영이 아니라 신비, 황홀, 입신과 같은 원초적인 인간 정신의 자리로 우리를 퇴행시킵니다. 반대로 고요한 영 체험만 강조하면 성령은 우리를 하나님이 성육신하신 이 역사에서 떼어내서, 우리를 몸 없는 마음의 세계로 이끕니다. 이 두 영 체험을 조화롭게 할 때 우리의 믿음도 삶도 건강해집니다. 뜨거운 신바람과 은사는 고요한 영의 비판기능과 인도로 하나님 나라를 향할 수 있게 됩니다. 고요한 영은 뜨거운 신바람을 통해서 탈속脫俗의 수도원이 아니라 세상 한복판에서 하나님의 나라로 움직이게 됩니다.

고요한 성령운동

이제 이 겨레 안에서 한국교회 성령운동의 방향을 찾아보려 합니다. 먼저 고요한 성령운동을 펼쳐 가야 합니다. 물론 우리 안에 고요한 영운동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대체로 가톨릭은 관상을 통해 이 고요의 영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 기독교는 뜨거운 성령 운동을 주로 펼쳐 왔습니다. 요즈음은 가톨릭도 개신교 못지않게 뜨거운 성령운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우리 심성에 고요한 정신을 일깨우고 격려해서 우리로 하여금 무끼가 가진 뜨거운 신바람과 통일과 균형을 이루도록 기능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러지를 못했습니다. 우리 기독교의 성령운동 안에는 오순절의 뜨거운 영과 파라클레토스 고요한 영이 다 있지만, 우리는 뜨거움을 체질로 타고났기 때문에 기독교는 우리에게 그 반대의 것, 곧 고요한 영의 체험을 더 많이 주어야 합니다.

이런 이유로 한국의 교회는 고요한 성령 운동을 고요히 펼쳐 가야 합니다. 예수님 발치에 앉아서 다만 말씀을 듣는 마리아(눅10:39)와 무화과나무 아래 앉아 있는 나다나엘(요1:47,48)은 명상형의 제자들입니다. 이들의 고요한 영이 교회 전통 안에서, 특히 수도원을 통하여 면면히 이어져 왔습니다. 이제 개신교는 그동안 잃어버린 관상의 영성이나 정교회의 헤시카즘hesychasm의 영성을 교회의 신앙훈련과 생활에 깊이 안내 해야 합니다. 뜨거운 은사 집회나 방언기도 같은 열광적인 신앙보다는 관상기도, 예수기도, 거룩한 독서, 침묵수련과 같은 고요한 기도의 삶들이 기독교인의 일상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이렇게 한국교회가 고요한 성령 안에 있을 때, 우리 겨레는 근대화를 거치며 잃어버린 고요한 정신을 다시 훈련받고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영에 방향 주기     

나는 한동안 고요한 성령운동만이 이 겨레를 구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몇 년 전에 아내와 금강산에 갔습니다. 저 전라도 끝에서 노인들이 효도관광을 금강산으로 왔습니다. 젊은 사람들도 힘들게 올라가는 만물상을 팔십 넘은 할머니들이 올라가는 것이었습니다. 올라가는 모습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가방에 가득 팩 소주를 넣고 와서는, 끊임없이 그것을 마시며, 엉금엉금 기면서 끝까지 오르는 것이었습니다. 이 노인들은 왜 오르는지, 만물상의 경치가 어떤지도 모릅니다. 그저 어떤 기운에 잡혀서 오르는 것뿐입니다. 얼마 전 우연히 마사회에서 주최한 전국 여성문화센터 공연에 갔습니다. 젊은 주부들에서부터 칠십 할머니에 이르기까지 수천 명이 전국에서 올라와 노래며 춤이며 다양한 것들을 발표했습니다. 인기 연예인들이 나와 노래를 불렀습니다. 너나 할 것 없이 일어나 춤추며 소리치는데, 광란 그 자체였습니다. 그 난장의 시간이 끝나자 여기저기서 아직도 풀지 못한 뜨거움 때문에 갑갑해서 가슴을 쓸어내렸습니다. 이것이 우리 겨레 어머니들입니다. 이 어찌할 수 없는 뜨거운 바람! 이것은 내가 대결해서 이겨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광경들을 보면서 나는 영에 ‘방향 주기’를 생각했습니다. 우리의 영에게 ‘하나님 나라’라고 하는 방향을 주자는 것입니다. 2002년 월드컵 때 온 나라에서 일어난 신바람 응원을 지금도 기억합니다. 너무나 뜨거운 용광로였습니다. 그러나 멋진 뜻과 목표를 갖자 그 뜨거운 바람이 놀랍게도 난장으로 흐르지 않았습니다. 질서가 있었고, 쓰레기를 너도나도 치웠고, 잠시나마 온 국민이 하나가 되었습니다.

뜨거운 신바람에 방향을 주면 신바람은 놀라운 힘을 발휘합니다. 한국교회는 뜨거운 성령운동에다 하나님 나라라고 하는 분명한 방향을 주어야 합니다. 그러면 뜨거운 열정과 은사들이 정의와 평화, 사랑과 생명의 공동체를 이루는 창조의 힘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영의 방향을 주는 것은 고요한 영운동에도 필요하다고 봅니다. 요즈음 주변에서 꽤 고요한 영운동이 불고 있습니다. 개신교 목회자와 교인들도 침묵수련이나 기도를 많이 합니다. 그런데 이런 기도가 때로 삼매三昧나, 명상, 요가나 단丹과 혼돈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는 반드시 우리를 지으시고 구원하신 하나님과 그 나라와 관계된 것입니다. 그 이름과 나라와 관계가 없으면 그것은 마음수련일 뿐 기도가 아닙니다. 또한, 고요한 영이 하나님 나라를 향해 가지 않으면 그것은 피안의 영일 뿐입니다. 영지주의 영일뿐입니다. 그래서 뜨거운 영과 고요한 영 둘 모두에게 하나님 나라라는 분명한 방향을 주어야 합니다.

뜨거운 힘을 조절하기

무끼와 성서의 영을 아우르는 말은 신바람입니다. 신바람은 숨, 바람, 기운 등 여러 말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이 신바람은 영과 물질이 통합되어 있습니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물리적 힘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숨/기운(루아하)이 스치면 만물이 살고, 떠나면 죽는 것입니다. 이 신바람을 김으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물이 끓을 때 주전자에서 솟아오르는 김은 신바람의 물질특성을 잘 드러내 주고 있습니다.
김은 이용하기 나름입니다. 김을 이용하는 방법은 김을 잘 조절하는 것입니다. 김은 뜨거울 때 나오는데, 이 김을 모아서 한순간에 내보내면 큰 힘을 냅니다. 이것으로 증기기관을 만들어서 기차를 운행하고, 배를 띄우고, 산업을 일으켰습니다. 그러나 이 힘을 조절하지 못하면 김은 다 날아가서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또 김을 모으기만 하고 제대로 분출하지 않으면 폭발하여 모든 것을 날려버립니다.

뜨거운 신바람/기운/김을 조절하는 힘을 기르면 언제나 우리의 뜨거움을 창조적으로 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무엇으로 우리의 이 뜨거운 기질을 다스릴 수 있을까요? 그것은 우리의 성품性品입니다. 성품은 김을 담는 기관입니다. 필요 없을 때는 안전하게 다 내보냅니다. 필요할 때는 가득 모았다가 내보내는 방법으로 일합니다. 이런 조절장치, 안전장치가 달린 그릇이 성품입니다. 이 성품을 성품聖品으로 만드는 것이 성령운동의 훈련적인 차원입니다.

갈라디아서에 성령의 열매가 있습니다.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인내와 친절과 선함과 온유와 절제”(갈5:22-24)는 주님의 성품이기도 하고, 성령 안에서 사는 생활이기도 하며, 그리스도인들의 성품 훈련 덕목이기도 합니다. 이런 성령의 성품이 우리 인격과 삶에 굳건히 자리 잡으면 우리는 욕망을 만족하게 하는 것(갈5:13)으로 언제든 변질할 수 있는, 자유롭게 분출하는 뜨거운 바람을 조절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고요한 아침의 나라

어둔 밤 마음에 잠겨 역사에 어둠이 짙었을 때에
계명성 동쪽에 밝아 이 나라 여명이 왔다.
고요한 아침의 나라 빛 속에 새롭다.
이 빛 삶 속에 얽혀 이 땅에 생명 탑 놓아간다.

김재준 목사님이 쓰신 찬송가의 가사입니다. 어둠(고난/위기/혼란)이 왔을 때 한 줄기 밝은 빛(구원)이 왔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의 빛, 하나님 나라의 빛입니다. 우리 겨레는 결코 고요하지 않습니다. 뜨거운 신바람인 급박한 무끼를 타고 났습니다. 그러나 김재준 목사님은 고요한 아침의 나라를 복음 안에서 생각했습니다. 이 겨레에게 고요하게 맞는 아침을 선물하고 싶었습니다. 이 고요한 빛, 고요한 정신이 이 겨레의 삶에 얽히면 생명 탑(새 역사 창조)이 생긴다고 믿었습니다. 놀랍고도 정확한 통찰입니다.

김재준 목사님은 실제로 고요한 분이셨다고 합니다. 그러나 나는 내 핏속에 흐르는 이 뜨거운 기질을 이겨낼 수 없습니다. 그래서 고요한 영운동과 함께, 이 뜨거운 성정을 인정하며, 거기에 하나님 나라라고 하는 방향을 주고, 뜨거움을 조절하는 힘인 성품 훈련을 해가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한국교회의 성령운동을 통하여 이 겨레의 신바람은 승화되어서 생명 탑을 만들 것이라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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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가 쇠퇴하고 신학생 줄어드는 것은 당연하고 필요하다"

한신대 김경재 명예교수의 신학 여정을 다룬 '한신인터뷰'가 15일 공개됐습니다. 한신인터뷰 플러스(Hanshin-In-Terview +)는 한신과 기장 각 분야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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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과 선에 쏠려 있는 개신교 전통에서 미(美)는 간과돼"

「기독교사상」 최신호의 '이달의 추천글'에 신사빈 박사(이화여대)의 글이 소개돼 눈길을 끌고 있습니다. '키에르케고어와 리쾨르를 거쳐 찾아가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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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봉사를 개교회 성장 도구로 삼아온 경우 많았다"

이승열 목사가 「기독교사상」 최근호(3월)에 기고한 '사회복지선교와 디아코니아'란 제목의 글에서 대부분의 교단 총회 직영 신학대학교의 교과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