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홍 박사 ⓒ베리타스DB |
9일 오후 4시 경동교회 본당에서 기독교사상 600호 기념강좌가 열렸다. 이날 강사로 나선 정진홍 박사(이화여대 석좌교수)는 ‘혼란의 시대: 종교, 무엇을 할 것인가?’란 주제로 강의하며 기독교가 종교적, 사회적 혼란에 대한 책임을 시인하고, 각성할 것을 제언했다.
정진홍 박사는 “혼란 속에 있는 모든 실재가 혼란의 책임주체이고 혼란자체이듯이, 그래서 그 안에 있는 모든 종교들이 또한 그러하듯이, 기독교도 그러하다”며 “기독교는 오늘 여기의 혼란의 책임주체이며 혼란자체”라고 했다. 기독교 오늘날 사회 혼란의 중심에 서 있다는 얘기다. 만일 기독교가 책임이 없다고 한다면?
정진홍 박사는 “이 혼란의 원인에 아무런 책임도 없다면, 기독교는 치유와 주체이기 이전에 혼란을 방치한 책임을 져야 마땅하다”며 “기독교는 혼란을 예방하지 못했고, 혼란 속에 혼란의 주체였다”고 말했다.
앞서 정 박사는 오늘날 사회적 혼란의 가시적 현상으로 ▲낯선 것의 등장 ▲준거의 소실 ▲구조의 해체 등을 들었으며 이로 인해 인간은 편하지 않고, 불안한 삶을 살게 됐다고 했다. 이밖에도 ▲무기력 ▲자기 절대화 ▲유목적 규범과 환각적 실천 그리고 사람들에게 일종의 착시현상을 일으켰던 종교의 행태 등을 지적하기도 했다.
정 박사는 이런 혼란의 중심에 기독교가 있었고, 이런 혼란을 예방하지 못했던 부분에 책임의식이 없다면 기독교의 미래가 결코 밝을 수 없다고 밝혔다.
그는 이어 “만약 기독교가 스스로 이 혼란의 일부였다는 것을 승인하고, 그 혼란의 책임 주체였다는 것을 고백한다면, 기독교는 혼란 속에서 스스로 저지른 과오가 무엇인지를 정직하게 드러내면서 용서를 간구해야 하고, 그렇게 해서 용서를 받아야 한다”고 했다. 기독교가 혼란한 세상을 향해 해야 할 일로 ‘용서를 받아야 한다’는 길을 제시한 것.
“신학은 친절해야 하는데... 물음을 향해 열어놔야”
정 박사는 특히 기독교가 용서 받아야 할 일 중 첫째로 신학을 꼽았다. 그는 “신학은 친절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며 “물음을 향해 열어 놓기 보다 이미 자신이 마련한 해답을 전하기 위한 물음만을 가르친다”고 했다.
그는 또 “그렇게 되면 사람들은, 공동체는, 문화는, 역사는, 신학 앞에서 정직하게 자신을 드러낼 수 없다”며 “오늘 신학은 그렇게 있다. 자연을 이야기하고, 정의를 이야기하고, 평화를 이야기하고, 새 영성을 이야기하지만 그 이야기들이 담고 있는 이러한 주제들에 대한 신학적인 반향은 지금 여기에서 제기된 물음에서 비롯한 것이라기 보다 이미 이루어진 응축된 해답을 지금 여기의 물음상황에 맞추어 변용하고 있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주장했다. 이런 신학의 기본 토양은 진보·보수 신학에도 별반 차이가 없다고 정 교수는 지적했다.
그는 “비록 진보라든지 보수라든지 하는 신학의 경향성이 논의되고, 이런저런 주제에 따라서 전혀 다른 여러 신학들이 오늘 우리의 문제들을 충분하게 반영하고 있다할지라도 그 모든 것은 구조적으로 근본주의의 다양한 표상일 뿐 조금도 서로 다르지 않다”고 했다. 정 박사에 따르면, 오늘날 신학의 한계는 삶과 더불어 있지 않은 데서 기인했다.
그는 “(신학에서)삶을 고뇌한다고 하지만 그 모습을 확인할 수 없다”며 “그곳에서는 단정적인 규범만이 넘치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따라서 신학의 마당에는 신학자나 신학을 동경하는 소수 이외의 누구도 머물 수가 없다는 것이다.
정 박사는 “신학은 근본적으로 오만하고 결과적으로 기만적인 구조 안에서 자신을 지탱하고 있다”며 “그렇다고 하는 것에 대한 정직한 승인을 통해 이 오만과 기만의 구조를 용서받아야 한다”고 했다.
신학의 용서에 이어 둘째로는 교회의 용서를 꼽았다. 정 박사는 “사랑을 실천해야 할 교회에서는 어린아이 같은 다툼이 없어야 한다”며 “자신이 얼마나 유치한지를 얼마나 성숙하지 못한지를 교회는 용서받아야 한다”고 했다.
유치한 모습은 힘의 과시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고 말한 정 박사는 “사랑은 힘을 자랑하지 않는다”며 “모든 것을 자신에게 예속시키려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욕심이다. 사랑은 소유를 의도하는 행위가 아니다. 상호 의존하는 삶은 불가피 하지만 의존은 책임주체 간에 이루어지는 일이며 사랑은 그러한 주체 간의 일”이라고 했다.
셋째로는 신도의 용서를 꼽았다. 정 박사는 “신도는 돈독한 믿음을 가져야 한다”며 “돈독한 믿음을 지닌다는 것은 삶의 양태를 부정적인 데서 긍정적인 데로 옮겨 놓는다는 것을 뜻한다”고 밝혔다.
“믿음 중요하지만, 이윤 추구를 목적으로 하는 믿음은 경계해야”
그러나 맹목적인 믿음 그리고 이윤추구를 목적으로 하는 믿음은 경계의 대상으로 지적했다. 정 박사는 “어딘가에 몰입만을 의도하는 믿음은 삶의 현실 속에서 반지성적이고, 반인간적일 수 있다는 사실을 살피지 못한다”며 “결국 피안에의 탈출로 귀결하는 믿음은 자기를 기만하는 일과 다르지 않다”고 했다.
또 온갖 문제를 신에게 호소해 해결하는 태도에서 나타날 수 있는 자신의 희구의 성취를 위한 믿음에 대해서도 정 박사는 일침을 가했다. 그는 “(신에게 호소함에 있어)때론 신을 자신의 희구의 성취를 위해 도구화하려는 불순한 의지가 드러나기도 한다”며 “다시 말하면 이윤을 추구하기 위한 가장 효율적인 투자대상이라는 의식이 신 이해의 실상”이라고 비판했다.
정 박사는 “신을 관리하고 경영하려는 이러한 태도는 믿음이 아니라 편리한 환상”이라며 “문제는 이러한 편리한 환상을 믿음이라고 일컫는다는 사실”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이것은 돈독한 믿음이라고 일컫는 현상이 구조적으로 자신 안에 담고 있는 오만과 다르지 않다”고 했다.
정 박사는 끝으로 “기독교가 정직하게 스스로 승인하면서 용서를 빌어야 할 것은 친절하기에는 너무 독단적인 근본주의 신학, 사랑하기에는 너무 모자란 유치한 교회, 그리고 돈독한 믿음이라기에는 너무 경망하고 편리한 환상에의 몰입”이라고 재차 강조했다.
이날 <기독교사상> 지령 600호 발행 기념식 및 강연회엔 손인웅 목사(기독교사상 편집위원장)가 사회를, 최희범 목사(기독교사상 편집위원), 정지강 목사(기독교사상 발행인)가 각각 기도와 인사를, 박형규 목사(남북평화재단 이사장), 함세웅 신부(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 권오성 목사(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총무) 등이 격려사 및 축사를 전했다.
발행인 정지강 목사는 “앞으로 <기독교사상>은 한국교회와 목회자, 신앙인이 당면하고 있는 현안을 성서적으로 신학적으로 바른 것인지를 짚어 보려고 한다”며 “다수가 생각하고 대세를 이루는 방식을 점검하면서 그러한 각도의 논의가 정말 올바른 논의인지 그리고 그러한 여론조성이 한국교회의 미래를 위해 절실하게 요구되는 것인지 등의 질문을 제기하고, 한국사회와 관련된 신학적 담론과 한국교회를 새롭게 하기 위한 신앙적 담론을 깊이 있게 다루도록 노력하겠다”며 지령 포부를 밝혔다.
1957년 창간된 ‘기독교사상’은 당시 ‘사상계’와 필자를 공유해 교회의 사회적 책임과 사회참여 의식을 높였다. 또 ‘기독교사상’은 개신교계 초교파 정기 간행물로는 가장 오래된 출판물로 한 때 소수신학으로 분류됐던 △ 민중신학 △ 해방신학 △ 여성신학 △ 생태신학 등을 소개, 기독 지성인들의 관심을 모은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