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사랑의교회 옥한흠 원로목사 |
1978년 서울 강남에 은평교회를 설립한 옥 목사는 1981년 교회명을 사랑의교회로 바꾸고, 교회 개척 초기부터 잠들어 있는 평신도를 깨우는 일에 집중했다. 당시 교회로서는 획기적인 시도인 ‘제자 훈련’ 프로그램을 도입한 것. 그래서 옥 목사는 단순히 ‘믿음으로 구원’만이 아닌 ‘앎에서 성숙한 신앙’으로 평신도들을 인도했다.
평신도들과의 끊임없는 교제는 교회를 갈수록 성장시켰고, 급기야 2003년 옥 목사가 은퇴하던 시기에 사랑의교회는 교인이 4만 여명에 이르는 대형교회로 성장해 있었다.
옥 목사는 안으로는 평신도 양성, 밖으로는 교회 갱신을 외친 개혁주의 목회자였다. 교회 연합 운동에 관심을 갖고 있던 그는 1986년 설립된 교회갱신을위한목회자협의회의 대표회장을 역임한 바 있고, 1998년에는 교단 연합 기구인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를 설립하고, 상임회장으로 있으며 목회자들의 영적 성숙을 위한 다양한 교육을 실시하며 노력을 기울여 왔다. 목회자들부터 성숙해져야 한국교회에 희망이 있다는 게 그의 목회 철학이요 신념이었다.
특히 그는 교회 세습 문제로 한국교회가 대사회적인 비판을 넘어 지탄을 받게 된 2003년 당시 70세 정년을 5년이나 남겨두고, 조기 은퇴를 선언해 대사회적으로는 교회의 위상을 높였고, 교회 내부적으로는 큰 충격을 던져줬다. 교회 갱신을 구호로만 외치지 않았던 옥 목사의 한 단면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옥 목사는 또 교회 갱신 뿐 아닌 일치와 화해를 추구한 지도자였다. 2003년 은퇴 이후로 교회 연합과 일치 운동에 뛰어 든 그는 진보 기독교 지도자들과 진솔한 대화를 나누며 진보와 보수, 그 경계선에 서기도 했다. 2004년 당시 평화포럼 이사장 강원용 원로목사를 사랑의교회 안성수양관에 초대해 진보, 보수 목회자들 앞에서 공개 대담을 연 것은 그의 화해와 일치 운동의 일환이었다.
옥 목사의 빈소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3층. 유족으로는 아내 김영순 사모, 아들 성호, 승훈, 성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