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아모스서 5:4-7, 14
"나 주가 이스라엘 가문에 선고한다. 너희는 나를 찾아라. 그러면 산다. 너희는 베델을 찾지 말고, 길갈로 들어가지 말고, 브엘세바로 넘어가지 말아라. 길갈 주민들은 반드시 사로잡혀 가고, 베델은 폐허가 될 것이다." 너희는 주님을 찾아라. 그러면 산다. 그렇지 않으면, 주님께서 요셉의 집에 불같이 달려드시어 베델을 살라버리실 것이니, 그 때에는 아무도 그 불을 끄지 못할 것이다. 너희는 공의를 쓰디쓴 소태처럼 만들며, 정의를 땅바닥에 팽개치는 자들이다.
너희가 살려면, 선을 구하고, 악을 구하지 말아라. 너희 말대로 주 만군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와 함께 계실 것이다. 아멘.
요한1서 4:7-12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나님에게서 난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다 하나님에게서 났고, 하나님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드러났으니, 곧 하나님이 자기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그로 말미암아 살게 해주신 것입니다. 사랑은 이 사실에 있으니, 곧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기 아들을 보내어 우리의 죄를 위하여 화목제물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이렇게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계시고, 또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가운데서 완성된 것입니다. 아멘.
누가복음서 10:25-37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서, 예수를 시험하여 말하였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율법에 무엇이라고 기록하였으며, 너는 그것을 어떻게 읽고 있느냐?" 그가 대답하였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여라` 하였고, 또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 하였습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 대답이 옳다. 그대로 행하여라. 그리하면 살 것이다." 그런데 그 율법교사는 자기를 옳게 보이고 싶어서 예수께 말하였다.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서, 거의 죽게 된 채로 내버려두고 갔다. 마침 어떤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 사람을 보고 피하여 지나갔다. 이와 같이, 레위 사람도 그 곳에 이르러 그 사람을 보고, 피하여 지나갔다. 그러나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길을 가다가, 그 사람이 있는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측은한 마음이 들어서, 가까이 가서, 그 상처에 올리브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에, 자기 짐승에 태워서,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주었다. 다음 날, 그는 두 데나리온을 꺼내어서, 여관 주인에게 주고, 말하기를 `이 사람을 돌보아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오는 길에 갚겠습니다` 하였다.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서 누가 강도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그가 대답하였다.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여라." 아멘.
설교문
<오늘의 선한 사마리아 사람>
오늘 예수께서 우리들에게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 이야기는 오래 되었지만 지금도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이야기입니다.
비슷한 이야기가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지난 금요일에 북한을 다녀왔습니다. 가까운 개성까지 다녀왔는데 5대 종단 아홉 분이 밀가루 300톤을 차에 싣고 개성공단 지나서 개성 봉동역에 내려놓고 왔습니다. 본래 불교 정토회에서 밀가루 200톤을 미리 준비를 했고 나머지 100톤은 천주교, 청도교, 원불교, 기독교에서 나누어서 모금하기로 한 것인데 불교모임에 저희가 낀 샘이 되었습니다.
300톤 밀가루를 25톤 트럭 13대에 가득 싣고, 지게차 한 대까지 해서 공동역까지 다녀왔습니다. 밀가루는 개성에 있는 어린이집, 황해남도 황해북도에 취약계층이 살고 있는 어린이집과 요양원에 주기로 하고 왔습니다. 가려다 보니까 미안한 생각이 들더라고요. 불교에서는 한 분이 가셨는데 아홉 명 여행에 다섯 사람이 기독교 목사인데 제일 조금 모금하고 갔으니 말입니다.
저희들이 두 달 전에 종교인들이 모여서 우리나라에 위기가 닥쳐서 이럴 수는 없지 않느냐는 논란에도 불구하고 우리 입장을 밝히자고 해서 500여 명이 서명을 한 일이 있었습니다. ‘북한은 이유를 불문하고 천안함 사태에 대해서 사과해야 한다. 남한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고픈 백성에게 인도적 지원은 계속해야 한다.’ 두 가지를 놓고 양국이 정상회담을 통해서 빨리 한반도 문제를 풀었으면 좋겠다고 성명서를 썼습니다.
그 일환으로 그런 정신에서 북한의 배고픈 백성을 돕자고 그래서 십시일반으로 밀가루를 모아서 취약백성을 돕자고 해서 성사가 되었습니다만 천안함 사건이후로 물건은 갈 수 있지만 사람은 못 간다, 그래서 실랑이를 벌이다가 사람 못가면 물건도 안 가겠다고 해서 다행히 지난 목요일에 허락이 나왔고 금요일에 다녀왔습니다.
북한을 다녀온 모든 사람들이 늘 느끼는 것이지만 변하지 않은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많은 것을 돕고 돌아옵니다. 도우면서 가면서 만나면서 느끼는 감정 중에 이런 게 있습니다. 당원들이나 중간 간부들의 태도를 보면 건방지고 고마움도 없어서 이런 태도를 보면 정말 돕고 싶은 생각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 밑에서, 그 체재 밑에서 고생하는 굶주리는 사람들을 눈으로 보면 그래도 먹여 줘야지, 하는 이중적인 심정을 가지고 오는데 그 심정이 이번에도 하나도 바뀌지는 않았습니다.
사람이 뭘 좀 도와주면, 고맙다고도 하고 해야 하는데 본래 사회주의 국가 사람들은 이북만 그런 게 아니라 고맙다는 말을 잘 안 합니다. 생각해 보건데 일한 만큼 배급받고 특별히 보너스도 없고 그러다보니 도와주는 것도 당연하고 이렇게 생각하면서 사는 게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거기에 북한같이 체통을 중시하는 나라는 아무리 도와줘도 고맙다는 말이 없습니다. 이번에도 못 들었습니다. 밑에서 일하는 세금 관리들은 찾아와서 고맙다고 합디다. 바닥은 고맙다고 하고, 지도층들은 아무런 말도 없는데, 그래도 마음속으로는 고맙지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
제가 이런 장면을 경험라면서 어릴 때 생각이 났습니다. 충청도 시골에 살 때인데, 제 어머니는 가난한 목사의 아내입니다. 교회 집사님 중에, 권사님 중에 감을 땄다고 감 몇 개를 바구니에 담아서 가져오는 걸 제가 많이 봤습니다. 그리고 생선 중에 맛있는 거라고 고등어 한쪽 가져오시면, 저희 어머니가 이렇게 말씀하시는 걸 들었습니다. 충청도 사투리를 쓰시면서 “얼라, 뭣하러 가져오셨대유?” 고맙다고 한마디면 끝나는데 말이죠. 이번엔 저쪽에서 권사님이나 집사님이 말씀하십니다. “어이구, 쬐금 밖에 안 되는데 뭐유. 미안혀유.”
주는 사람은 조금 밖에 못줘서 미안하다고 하고, 받는 사람은 뭘 이런 걸 가져왔느냐고 하고, 이게 우리의 민심이 아닌가 생각이 들어가는데 지금은 서양화가 많이 되어서 속에 있든 없든 고맙다는 말을 많이 하는데 북쪽은 아직 그게 안 되는지 그런 말을 잘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들의 속마음은 다 받아들일 수 있는 부분입니다.
제가 독일에 살 때, 독일 사람들도 고맙다는 말을 자주 합니다. 그런데 살다보니까 이분들의 깊은 감정 속에 고마움을 표현하는 토속적인 언어는 반드시 감사합니다가 아니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감사하다는 말을 아주 겸손하게 표현할 때는 ‘그거 안하셔도 됐는데요, 그렇게 안 하셔도 되는데요,’ 이 말이 감사합니다의 토속적인 표현입니다. 사람이 사는 사회는 다 비슷한 게 아닌가, 생각을 합니다.
어쨌든 체통 문화가 지배하는 북녁 그곳에 가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천안함 사건은 불행한 사건인데 냉혹한 국제 현실 속에서 국제적 미결 사건으로 되어 가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남쪽은 미국과 철저히 동맹을 강화해서 대북 강경책을 쓰고 있고 북쪽은 중국과 밀착하여 보란 듯이 지금 새로운 봉남정책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개성에서 느낀 점입니다. ‘이러다가 남과 북은 통일 문제, 먹고 사는 문제, 교류 협력 화해, 우리끼리는 멀어지고 우리 운명을 중국과 미국이 자기 이해 관계로 계속 풀어가겠구나’ 하고 말입니다. 구한 말 우리가 어려움을 당할 때에 강대국들이 우리가 내부에서 싸우는 사이, 진보와 보수가 싸우고, 척사파와 교류파가 싸우고, 개방과 쇄국이 싸우는 사이에 우리는 구한 말 때 불행한 역사를 겪었는데 그 때와 상황은 다르지만 그러나 미래의 민족의 운명을 결정하는 데에 있어서 우리의 주도권은 어디로 가고 자꾸만 멀어져 가나,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21세기를 시작하는 지금, G20 회의도 유치하는 지금, 우리는 어떤 민족적 지혜가 필요합니까? 도대체가 이 민족이 어떻게 축복된 역사를 살아가려고, 하나님이 주신 축복을 어떻게 기획하고 의견을 수렴해 가려고 하는지 안타까웠습니다. 우리의 싸움과 갈등에도 불구하고 한반도를 둘러싼 강대국들의 헤게머니에 편승하면서 민족의 장래를 제대로 담론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정말 가슴아프게 여기며 개성에서 한숨 쉬며 그렇게 다녀왔습니다. 그것은 마음으로 부인하든 안 하든 주변 국제정치의 현실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사실은 밀가루도 전해주고 밀가루가 개성, 황해남도, 황해북도에 있는 어린이집, 취약계층 노양원에 전해주기로 했는데 저희들이 꼭 한 곳이라도 보고 싶었습니다. 요구를 했는데 이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굉장히 논란을 많이 벌였습니다. 싸움을 했을 정도로 감정도 폭발했지만 결국 실패했습니다.
여러분, 북한 방문해 보면 아시겠습니다만 자기들이 정해놓은 방문지, 아무리 개방해도 좋을 곳, 자신 있는 곳, 그런 곳은 방문토록 해 두었지만, 취약 계층이 사는 곳, 어려운 곳, 지저분한 곳을 보여주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취약계층은 어느 나라에나 있는데 그들은 그런 말만 꺼내도 상처를 많이 받은 것 같습니다. 알면서도 요구했지만 안 되었습니다.
이렇게 위기에 닥칠 때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북한의 굶주리는 백성들의 수가 900만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500만, 천만이 넘는다는 사람이 있는데, 어쨋든 수 많은 사람이 굶주리고 목말라 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개성 공단을 통과했습니다. 개성공단은 남쪽에서 지은 것인데 그 공단의 경계선을 넘어서는 순간, 개성 시내로 나갈 때의 마음을 솔직하게 고백하면 천국 도로로 가다가 그 경계선을 딱 넘어서 가는 순간 지옥같은 도로로 가는구나, 생각했습니다.
두 세계는 너무나 달랐습니다. 공단으로 일하러 오는 사람, 또 자기 일이 다 끝나서 집으로 가는 사람, 이 경계선은 38선과 비슷했습니다. 저희들이 두 경계선을 넘어갔습니다. 그래서 짐을 내려놓고 왔습니다. 그러면서 스스로 물었습니다. 북한에서 목마르고 배고파하는 사람들이 누구냐고. 그들은 분단의 희생물입니다. 북한 체재가 만들어낸 희생물입니다. 이유를 불문하고 자기 백성을 먹이지도 못하고 마시우지도 못하면서 무슨 민족적 정통성이나 신비스런 체제니 하면서 뭘 주장하는 것은 실로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우리는 그런 역사를 수많이 경험으로 살아왔기 때문에 다 압니다. 그러면 이 백성들은 누구냐 하면, 분단의 희생물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북쪽 체재가 버린 사람들이라고 확신합니다. 오늘 성경말씀대로 하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 성으로 가던 길에, 분단에서 통일로 가는 길에 강도만난 사람들입니다. 누가 먹여줍니까? 북한은 안 먹여 줄 것 같습니다. 저희들이라도 영양실조에 허덕이는 어린이들이라도 먹일 수 있었으면 합니다.
마태복음 21장을 통해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옛날 어렵고 어려웠던 시절, 남쪽에 있는 백성들아, 너희는 쌀도 남는다고 하고, 음식이 많이 남아서 쓰레기로 버리는데 북쪽에 있는 동포들이 굶을 때 뭐했느냐? 이렇게 물으면 우리는 너무 궁색하지 않겠습니까? 이념적인 이유로 감정적인 이유로 북에서 버림받은 백성들이 굶는데 너희는 뭐했느냐고 하셨을 때 무어라고 대답은 해야하지 않습니까. 그래도 사람은 살려야 되지 않습니까? 체재는 미워도 굶는 백성은 살려야 하지 않습니까? 이렇게 답변할 수 있으면 좋겠다며 순박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고 북으로 갔다가 돌아왔습니다. 앞으로도 수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기도 하고 목말라 죽기도 할 것 같습니다.
이천년 전의 이야기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오는 길목에 강도만난 사람이 있었는데 그 강도 만난 사람을 제사장이라는 종교인은 자기 명분을 내세워서 본체 만체 하고 자기 일보러 갔습니다. 사회의 중추세력인 레위사람도 그냥 지나갔습니다. 사회에서 인정도 못 받고 없어도 좋을 만한 따돌림 받는 사마리아 사람 하나만이 강도만난 사람을 입원도 시키고 돈도 주고 마지막까지 돌보아 주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 중에 누가 예수님, 하나님의 사랑을 제대로 실천하는 사람입니까? 말할 것도 없이 제사장도 아니고 레위인도 아니고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분에게 선하다는 형용사를 붙여줍니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
지금 이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 활동해야 할 공간이 북쪽만이 아닌 것 같습니다. 제가 다른 나라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메일로 받은 이야기인데 인도에서는 전통적으로 마법을 행했다는 이유로 마녀사냥이 행해지고 있습니다. 보기 싫은 여성들을 끌어다가 사람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강제로 소변을 마시게 하고 얼마쯤 지나면 대변을 먹게 하고 나체로 마을을 걸어다니게 한 다음, 본인이 수치심으로 자살을 하거나 자살해서 죽지 않으면 살해하는 마녀사냥이 한 해에 보통 200명가량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이걸 어쩌면 좋습니까?
강도 만난 사람들, 나라마다 사정은 조금씩 다릅니다. 기독교 문명의 발상지이기도 하고, 예수를 잘 믿었다고 한 때 세계를 풍미하던 곳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유럽을 가봅시다. 유럽을 떠돌아다니는 집시족들이 천만이 넘고, 불란서에서는 그들을 쫓아내느라고 난리를 펴고 있고, 그리고 죽임을 당하기도 합니다. 동부권이 붕괴한 이후에는 먹을거리를 찾아서 동쪽에 있는 사람이 서쪽으로 많이 유입해 들어옵니다.
불법 이주 노동자들, 그 중에 가장 불쌍한 사람들이 여성들입니다. 소위 유럽에 흥행하고 있는 인신매매 시장이 통계로 잡힌 사람만 현재 14만 명, 그 중에 거의 여성들인데 이 중에 84가 성매매에 동원이 됩니다. 이런 인신매매를 통해서 들어온 연간수입은 줄잡아 25억 유로, 우리 돈으로 3조 7천억원 입니다. 기독교문명의 한복판에서 이루어지는 인간의 삶의 한 현장입니다. 강도 만난 사람들, 강도로 쫓겨 다니는 사람들이죠. 최근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함경도 근방에 새로운 시장 하나가 생겼답니다. 중국과 접경지역에 인력시장이 생겼는데 노래방 가고 싶은 남성들, 잡일 시키길 원하는 사람들, 성매매 원하는 사람은 인력시장에 가서 싼 값에 여성들을 구해다가 농락합니다. 북한판 인력시장인 셈입니다.
풍요를 누리던 우리 옆 나라 일본에 관하여 이런 보도가 나왔습니다. 우리나라도 어디로 여행을 다니냐고 물었을 때, 방에 콕 박혀 있다고 하는 사람들을 "방콕" 시민이라고 하지요. 일본에서는 방콕 시민들을 ‘히끼고모리’라고 해서 방에만 틀어박혀 있는 폐인된 사람들을 일컫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현재 통계에 보니까 공식 통계에 잡힌 사람만 70만명, 1970년대에 생겨서 90년대에는 꽃을 피우고 지금은 사회문제로 등장합니다. 70만명 중에 남자가 66 여자가 34 이고, 연령별로 보면 30대가 절반, 10대가 1/3 이랍니다. 히끼고모리는 복지사회 일본의 강도만난 사람과 같은 피해자들입니다.
유럽을 가도 일본을 가도 인도를 가도 북한을 가도 그런 사람들이 있지요. 혹시 우리나라는 예외인가요? 세계 곳곳에 먹을 것이 없어서 마실 것이 없어서, 아니 먹고 마시는 것은 충분한데 나눔이 없기에 제대로 살 수가 없어서 "강도만난 사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2000년 전, 여리고 근방의 이야기만이 아닙니다. 세계 곳곳의 이야기입니다. 뭐하라는 겁니까? 강도 만난 사람이 우리 도처에 저렇게 많은데 어떻게 하시렵니까. 살려주시겠습니까? 그냥 지나가시겠습니까?
우리가 믿는 구세주는 이런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구원해 주시려고 하는 예수라는 사람은 우리를 구원하는 방식이 특이합니다. 하늘 사람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크리스마스 때부터 예수님을 축하합니다. 예수는 어떤 사람의 모습으로 태어났습니까? 오늘 성경말씀은 분명합니다. 제사장의 모습으로는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제사장의 행태속에 화육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구원의 손길을 베플어야 할 강도만난 사람을 버리고 갔기 때문입니다. 사회지도층인 레위사람의 몸을 입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통하여 그렇게 알라고 말씀했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습니까? 사마리아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습니다. 직접 말씀은 안 하셨지만 강도만난 사람의 몸을 입고 와서 강도 만난 사람의 상처와 한과 아픔을 통해서 하는 말씀은 이렇합니다. 나 예수가 강도 만났다, 날 좀 구해다오. 나 예수가 따돌림 받는사마리아 사람이 되어서 구원의 복음을 전하려고 한다. 이 일에 동참해라고.
이념적인 이유, 체면의 이유, 감성의 이유, 무슨 이유든지 적어고 저 제사장과 같은 사람의 몸으로는 화육되지 않은 예수, 그리고 저 레위사람과 같은 사람의 몸으로는 화육되지 않은 예수, 하지만 사마리아 사람과 같은 인격속에 몸을 입고 오시는 분, 그 예수 말씀이 “나는 강도 만난 사람 구하고 싶다. 그럼 방식으로 나는 모든 백성에게 구원의 복음을 전하고 싶다.” 이렇게 저희들한테 오늘 말씀해 주십니다. 그것을 예수님은 구원하는 "사랑"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사랑은 승리합니다. 승리하는 사랑을 사마리아 사람 비유를 통해서 배워야 합니다.
히틀러가 독재를 한참 휘두르고 유태인들을 학살할 때 히틀러라는 강도를 잡아야 한다는 본회퍼라는 신학자가 있었습니다. 이분이 강도만 잡는 게 아니라 강도만난 희생자들, 유태인들도 도와야 한다고 하시면서 이런 선언을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우리 총통이 죽이려고 하는 유태인들을 위하여 그레고리안 챈트를 불러주는 사람이다. 강도 만난 백성들을 위해서 찬송가 불러주는 것이 진정한 신앙고백이다. 그런자들의 공동체가 주님의 몸된 교회이다라고.
이 말의 뜻을 당시 상황과 결부시키면 엄청난 이야기일 것입니다. 오늘의 제사장, 오늘의 레위사람, 신학적, 정치적, 이념적, 문화적 무슨 핑계를 대고 무슨 자기나름의 타당성을 대든지 간에, 강도 만난 사람들을 그냥 지나쳐 버리면 예수님은 그런 사람의 모습으로는 화육하지 않습니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말씀하시기 직전에 예수께 한 유대사람이 와서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선생님, 제가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고. 이 질문에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대답하십니다. 율법에 뭐라고 쓰여 있느냐?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했지요". 그래서 그 대답으로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가 사랑의 구체적 실천의 모습으로 나와 있습니다.
성경에 쓰여 있는 모든 말씀은 우리가 고백으로 받습니다. 십계명대로 이 땅에서 살아가기 어렵습니다. 독일 재상이었던 비스마르크의 말대로 산상수훈 가지고 정치 못합니다. 성경말씀대로 세상을 살면 천국이 이미 이루어 졌겠죠. 성경말씀대로 일상을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정말로 어렵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일상을 살아가면서 우리가 만든 법이나 우리의 법률만 가지고 만족스럽게 세상을 살아갈 수도 없기에 보다 높은 법을 우리가 마음 속에 요구합니다. 법 이전에, 법 위에 도덕을 말하고 윤리를 말하는 이유가 그것입니다. 세상에서 당장 실현은 안 되지만 내일에는 이루어질 수 있는 꿈같은 세상, 그런 것을 우리가 이상이라고 말합니다. 세상에 몸담고 살지만, 세상을 넘어서는 삶, 그것을 우리는 신앙의 법이라 합니다.
이 사람이 묻습니다.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나요 라고. 어떻게 하면 제가 제사장으로 레위사람으로 보통 사람으로 평생 주어진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지, 그렇게 묻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 생명을 넘어서는 영원한 생명까지도 얻을 수 있는지, 이 세상의 척도를 넘은 하나님나라의 비슷한 규범은 무엇인지 질문한 겁니다. 그 뜻을 담아서, 영생을 어떻게 얻을 수 있습니까라고 물은 것입니다. 이 땅의 생명만이 아니라, 오늘의 생명만이 아니라, 내일의 생명은 내가 어떻게 얻을 수 있습니까? 오늘의 척도 말고 내일의 삶의 폭넓은 척도를 묻습니다. 그 척도는 사마리아 사람처럼 행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쓰여 있는 말씀은 우리가 오늘을 살아가는 오늘의 말씀만이 아니고 내일에 해당하는 말씀, 우리의 도덕적 삶, 윤리적 삶의 궁극적 표준으로 삼는 것이 성경말씀입니다. 이루어져서가 아니고 이루고 싶은 우리의 희망을 말하는 고백입니다. 그래서 지금 어떻게 살 수 있는지 묻지 않고 내일의 삶인 영생을 어떻게 얻을 수 있습니까라고 묻습니다. 이 질문에 대해 예수께서는 실행하기 어렵지만 그러나 종국에는 실행되어야 할 사랑의 헌신으로 선한 사마리아 사람 비유를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랑의 주인이십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런 사랑의 나라입니다.
아모스가 말한 하나님의 공의, 인간의 정의, 선, 이것을 실행하면 미래까지 살 수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만을 위해서 사는 사람은 안 계실 것입니다. 내일이 어떨지 모르지만 복된 내일에 투자하고 싶은 사람 많을 것입니다. 사랑도 내일에 투자할 수 있습니다. 세상도 내일을 앞에 보면서 오늘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말씀하신 사마리아 사람 비유를 통해서 주신 말씀, 우리 민족이 지금만 살면 안 됩니다. 통일될 내일을 준비해야 합니다. 우리 각 사람의 지금의 형편대로만 살면 안 됩니다. 내일의 보람찬 희망을 품고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에 만족하는 제사장 되지 마십시오. 지금을 절대화 하는 레위사람은 되지 마십시오. 내일을 사는 사마리아 사람처럼 오늘 베풀고 치유하며 동시에 미래에 투자하며 사십시다. 사마리아 사람은 미래를 향해서 살았습니다. 우리 보고 본받아 살라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오늘 어렵더라도 내일을 밝게 사십시다. 사랑의 승리는 십자가 다음에 있는 부활을 통해서 보여 주셨습니다. 믿고 행하면 약속대로 이루어 주십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