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장식 한신대 명예교수 ⓒ베리타스 DB |
믿음 없이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나 예수 그리스도나 그 밖의 영계의 것을 확신할 수 없다. 그리고 그러한 보이지 않는 것들을 현실에서 보여주는 것이 믿음의 기능이다. 사도 도마가 예수에게 아버지를 보여달라 즉 내 눈 앞에 현실로 나타내 보여달라고 요청했을 때 예수는 자기의 못 자국이 있는 손바닥을 보여주었고 이로써 도마는 믿음의 확신을 얻었다.
오늘 한국 사회에서 한국 사람들이 우리 크리스천에 요구하는 것은 흔히 듣는 예수에 대한 설교나 글이 아니고 한국 사회의 현실에서 예수를 보여달라는 요청이다. 수많은 교파와 교회당이 있지만 그것들 말고 예수를 보여달라는 것이다. 사상이나 예배의식이 아니고 크리스천의 삶, 즉 말과 행동으로 예수를 보여달라는 것이다. 수많은 그리스도교의 연구기관과 사회참여 단체들이 있으나 예수가 누군지 잘 모르겠다는 말이다.
오늘날 한국 국민들은 살아가기 바쁘다. 그래서 교회에 나가거나 나가서 긴 설교를 듣고 있을 형편이 못 되며, 신학사상이나 보수, 진보 사이의 신학 싸움이 무슨 영문인지 모르며, 교회에서 목사들끼리와 장로, 신자들이 서로 싸우는데 그 이유를 모르고, 안수기도 받으면 병이 낫는다고 하는데 안수 받다가 죽은 사람도 있다니 그것도 못 믿을 수 밖에 없다. 부흥사들이나 방송 설교자들이 설교를 그렇게 자주 하는데 그 설교들을 크리스천들이 듣고는 잊어버려서 그렇게 많이 자극하는 것인가?
열성이 제일 많아 보이는 한국의 개신교가 그렇게 안 보이는 천주교나 불교보다 못하여 한국 종교계에서 평점 ‘C’ 정도라고 한다. 그동안 한국 신학계는 그리스도교의 세속화, 즉 교회와 세상과의 거리를 좁히자는 주장을 이해하기 어려워했고, 종교다원주의 사상가들은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는 말을 애매하게 설명하므로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은 굳이 ‘힘든 예수 믿기’를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어쨌든 이제 예수교에만 구원이 있다고 크게 부르짖을 수 없는 시대가 되었다. 근대 한국교회가 이웃사랑 운동을 많이 하고 있지만 천주교회는 훨씬 이전부터 그리고 말 없이 아주 실속 있고 정직하게 이웃사랑을 실천해왔다. 크리스천이라는 말이 수많은 한국의 교육기관과 병원과 사회사업기관들에게 이제 무의미한 것이 된 까닭은 비기독교 기관들과 별다른 것 없이 영리 추구, 노동쟁의, 행정과 업무 수행의 부정과 비리를 저지르고 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오늘날 한국 개신교는 정체성의 ‘총체적 위기’를 맞고 있다.
특히 지난 40~50년 동안 한국교회 강단의 설교들과 오늘날의 교회 설교에도 예수의 이름과 그의 십자가 사건의 언급이 없고 하나님의 이름도 안 나오는 설교가 많았다. 또 한때는 성령의 이름만이 일색이 된 설교가 있었는가 하면 성령의 이름은 아예 터부시해버린 설교도 많았다.
16세기 종교개혁운동의 한 원동력이 되었던 운동은 홀랜드 지방에서 일어난 예수를 모방하여 그를 현실에서 즉 그리스도인의 삶 전체에서 현실적으로 사람들이 볼 수 있게 그를 닮자는 운동이었다. 교회에서 예수가 막후로 밀려가고 안 보이던 때 그를 다시 그리스도인들의 생활 무대에 등장시켜서 그가 주역을 하게 하자는 운동이었다.
미국의 하버드대는 미국을 개척한 영국 청교도들이 세운 미국 최초의 학교였는데 20세기 말부터는 본래 신학교육을 주목적으로 세운 이 학교가 과학과 사회학문으로 명문학교가 되면서 신학부도 자유사상에 편승하여 하버드 신학대학은 학내에서 권위가 떨어졌고 미국 신학계에서도 ‘C’점 정도의 신학교로 떨어져 각광을 받지 못하였다.
약 50년 전 하버드대 신학교수 하비 콕스(Cox)가 「세속도시」라는 책으로 유명해졌다. 그는 세상과 교회의 거리를 좁히자는 취지로 이 글을 썼다. 당시 미국 교회는 교세가 점점 약해지고 문닫는 대형교회가 생기는 때였는데 그의 저서는 그 현실을 신학적으로 진단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그가 근년에 「예수 하버드에 오다」라는 시사책을 써서 옛날의 자기 생각을 시정하였다. 저술 의도는 간단하다. ‘그리스도’가 없어진 하버드대에 그를 다시 모셔드리자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에 대한 강의를 개설했고 신학생은 물론 타 학과 학생들과 교수들이 그의 강의를 들었다. 이해하기 어려운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 문제를 다시 들추어서 연구하여 학점을 위한 논문들을 썼는데 예수의 족보 문제를 비롯하여 빌라도의 재판 문제와 기타 예수의 생애와 삶에 대한 연구들을 시도했다. 일반학과 교수들도 그의 강의 시간에 들어와서 같이 토론하고 학생들이 제출한 학기말 보고서를 콕스 교수와 함께 읽고 토론하였다. 이렇게 하여 콕스는 하버드대에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모셔드렸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준 가장 중요한 교훈은 너희는 내 제자들이니 내가 한 일을 너희는 나보다 더 잘할 수 있을 것이니 내가 너희들에게 가르친 것을 지키고 전하라는 것이었다. 나는 길이니 내가 간 길을 따라 걸어가라는 말이었다. 그런데 예수의 가르침 가운데 따르기 가장 어려운 교훈이 산상설교에 나오는데, 소위 8복의 이 교훈은 개인 구원을 위한 교훈이라 생각된다. 청결한 마음, 온유한 마음, 긍휼히 여기는 마음, 화목하는 마음, 가난한 마음, 그리고 의를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면 하나님도 볼 수 있고 개인적으로 축복을 받는다는 교훈이다. 이러한 구원의 길 즉 자기 훈련을 통한 자기 구원은 자기와의 싸움이다.
그런데 그 8복에 이어서 주신 교훈은 나와 이웃과의 관계에서 성취되어야 되는 문제인데 요즘 우리가 말하는 ‘사회구원’ 문제가 아닐까? 우리는 이 교훈들을 실천 불가능하다고만 생각해왔다. 맹세하지 말라, 약한 자를 대적하지 말고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주고, 5리를 가자면 10리를 동행해주라, 원수와 박해자를 미워하지 말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라, 남을 비판하지 말고 자기 눈 속의 들보를 빼어버리라 등등이다.
예수의 이 2차적인 실천 문제를 우리 인간의 자연적인 도덕성의 힘으로는 실천할 수 없다고 생각한 독일의 종교사회학자 트뢸치는 그것을 ‘절대적 자연법’이라고 불렀다. 그런 것은 교훈으로만 남아있지 실현되는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16세기의 무신론 철학자 니체는 예수의 윤리를 ‘약자의 윤리’라고 비하하였다. 교훈대로 살면 사회에서 낙오자가 되고 만다, 그러니 따를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러나 예수는 이 두 사람의 생각이 오류라는 것을 가르쳐주었다. 그 중에서 가장 힘들다고 생각되는 5리를 가달라 할 때 10리를 가주는 일을 예수는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로써 설명하였다. 사마리아인이 강도 만난 사람을 구하며 여관에 맡기고 하루의 간호비를 지불하고 또 돌아와서 그 이상의 비용이 났으면 그것 마저도 지불하여주는 것은 5리만 가주지 않고 10리, 아니 20리까지도 같이 동행하는 일이다. 예수가 천대받던 삭개오를 그를 멸시하던 군중 앞에서 특별히 지목하여 인정해주고, 거기서 끝나지 않고 그날 밤 삭개오 집에서 유하겠다고 군중 앞에서 선언한 것은 5리만 가주어도 될 일을 10리까지 가주는 일이었다.
예수를 체포하고 정죄한 유대의 대제사장과 제사장들로부터 오른뺨을 맞은 예수는 아무 대항도 하지 않았고 다음에는 빌라도에게 가서 왼뺨까지 돌려 대고 맞았다. 유대의 종교인들이 그리 뺨을 쳤고 로마인들이 그의 다른 편 뺨(정치적으로)을 쳤다. 잡히시던 전날 밤에는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셨다. 소매를 걷어 올리고 그들의 때 묻은 발을 씻으셨다. 그러나 그는 거기서 끝나지 않고 자기의 몸에서 나오는 살을 떼어 주고 피를 빼서 마시게 하겠다는 약속의 의미로 떡과 포도주를 그들에게 주어 먹고 마시게 하고 십자가에서 그의 속옷까지 벗어주셨다. 이렇게 예수는 우리가 도무지 실천할 수 없는 행위를 가르치신 것이 아니고 우리도 하면 실천할 수 있는 것을 육신을 가진 그가 모범으로 보였다. 이것은 절대자연법 개념이나 약자의 윤리 개념 중 어느 것에도 해당되지 않는 실천 가능하고 또 가치 있는 고귀한 그리스도인의 삶의 윤리다.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예수의 본을 따라 겉옷과 속옷까지 다 벗어주고, 또 5리를 가자는 것을 10리까지 아니 100리까지 가주고, 오른뺨을 맞고 왼뺨까지 돌려 댄 신앙의 선배들이 있었기에 우리의 신앙은 확신과 동시에 역사현실로서 우리에게까지 미쳐왔다. 사도 바울은 에수의 산상교훈대로 산 사람이었다.
모세의 율법은 토마스 아퀴나스가 지적한대로 자연법 즉 사람의 생래의 법, 사람 마음 속에 이미 있는 하나님이 새겨주신 법이다. 그러나 예수의 산상설교의 윤리는 반(反) 자연법(Counter natural law)이다. 즉 자연적이고 보편적인 윤리개념과는 다른 새 계명, 복음의 새 법이다. 루터는 이 복음도 하나의 새 법이므로 이 법을 어기면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다고 하였는데, 루터의 말대로라면 교회에 사람 중 많은 사람이 이 새 복음의 법을 심판을 받고 지옥으로 떨어질 것이라는 말이다.
한국교회는 목사들 사이에서, 목사와 장로들 사이에서, 또 신자들 사이에서 서로의 뺨을 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5리가 아니라 2리도 동행할 수 없다고 하는 이기적인 신자들도 있을 것이다. 약한 시골 교회에서 큰 교회에 도움을 요청하면 액수를 깎거나 아예 싫어한다.
바울의 서신을 보면 오늘 우리 한국교회 안에서 교인을 무조건 ‘성도’라고 부르는 것은 문제가 있다. 바울은 ‘성도’와 ‘신도’와 ‘교인’을 구별하게 부른다. 예수의 재림 때 그의 ‘성도’들로부터는 영광을 받으실 것이고 그 밖의 모든 ‘믿는 자’로부터는 놀랍게 여김을 받으실 것이라고 구별하였다. (데살로니가후서 1장 10절). 즉 신도들은 예수의 재림을 보고 기이하게 생각할 뿐 그에게 영광을 돌리지 않을 사람들이다.
고린도전서 1장 2절에서는 ‘거룩하여져서 성도라고 부르심을 입은 자’라고 말한 바, 성도는 거룩하게 된 사람이다. 영어성경 The New English Bible에서는 ‘성도’라는 말을 ‘his own~’ 즉 예수의 (소유가 된) 사람이라고 했고 ‘신자’를 ‘who invokes him’ 즉 예수의 이름만 부르는 사람들이라고 번역했다. 예수께서도 말씀하시길 ‘마지막 날에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며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고, 즉 나의 사람이 아니라고 취급될 사람들(교인들)이 있을 것이라고 하셨다.
오늘 한국 개신교는 총체적으로 정체성 위기에 처해 있다.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여러가지 노력을 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그것은 100만이 넘는 사도들의 대성회로도 극복할 수 없고 교회 수를 더 늘리는 교세 확장 노력과 신학교수의 증가로써도 극복할 수 없고 대형교회 또는 성공적인 사례가 되는 몇 교회의 본으로도 극복할 수 없고 정치 참여와 사회 참여의 행동주의로도 극복할 수 없다. 이웃 사랑의 구제 행위만으로도 극복할 수 없고 또는 우리 그리스도교회에만 구원이 있다는 자랑만으로도 극복할 수 없고, 보수니 진보니 하는 논쟁으로도 안되고, 오직 예수를 오늘 한국 사회와 국민 앞에 보여주어야만 극복될 수 있다.
예수를 현실적으로 보여주는 길은 목자나 신도나 또는 모든 교회 기관들과 단체가 매사에 ‘만일 예수님이시라면 어떻게 하실 것인지’를 바로 생각하고 그대로 행하는 데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