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김경재 한신대 전 명예교수 95회 총회 주제 해설

95회 기장 총회 둘째날 아침기도회 주제강연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6:10)

김경재 목사(광주노회 / 한신대 명예교수)

1. 들어가는 말
기장총회는 2010년 총회 주제로서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 6:10)를 설정했다. 우리의 주제가 함의하는 심원한 복음진리의 핵심을 다시 한번 밝히기 위해 ‘주기도문’의 전체 빛 안에서 다음 같은 몇 가지 물음을 가지고 말씀 앞에 겸손히 서서 듣고자 한다.
   첫째, 주기도문은 예수의 복음전파와 사도시대 이후 교회선교 안에서 어떤 자리매김을 갖는가?
   둘째, 주기도문의 중심핵은 ‘하나님의 나라’인데, 하늘과 땅과 인간의 삼중적 관계는 무엇인가?
   셋째, 오늘의 삶의 상황에서 ‘땅’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넷째, 하나님의 뜻이 땅에서도 이뤄지려면,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참여적 영성은 어떠한 형태를 가져야 하는가?

2. 주기도문은 예수 영성의 알짬이며, 복음 선교의 가장 짧은 총괄적 내용
2.1. 주기도문은 축도대신 드리는 ‘집회마감 예전기도’(closing prayer)일 수 없다.
  개신교도들은 모든 집회 시작을 기도로 시작하고 기도로 끝맺는 아름다운 신앙 전통을 갖고 있다. 그런데, 집회의 규모가 크거나 작거나, 흔히 집회의 마감을 “주기도 드림으로 마칩시다.”라고 집회 인도자가 말하고, 참여자는 한 목소리로 ‘주님 가르치신 기도문’을 드리고 집회를 마친다. 한편 생각하면, 그만큼 주기도문은 신앙생활 속에서 날마다 먹는 ‘밥’처럼 친숙하고 필수적인 영적 양식이 되어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 너무나 친숙하고 일상화된 나머지 ‘주기도문’이 얼마나 심원한 복음의 진수를 간직하고 또 전하고 있는지 간과하기 쉽다. ‘주님 가르치신 기도’는 ‘집회마감 전례용’일 수만은 없다. 그것은 예수님 영성의 알짬이 영글어져 표현된 것이다. 깊이 들여다보면 볼수록, ‘주기도문’은 군더더기 없는 가장 순수하고 단순한 복음의 핵심을 담고 있다. 그리고 그 주기도문의 중심에는 ‘하나님의 뜻’이 땅 위에 실현되는 현실로서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와 실현에 대한 강한 소망과 의지가 나타나 있다. 성서학자들은 마태복음(마 6:9-13)과 누가복음(눅 11:2-4)에 나타난 두 종류의 ‘주님 가르치신 기도문’을 비교 연구하였다. 누가복음에 나타난 보다 짧은 기도문이 원형에 가깝지만, 마태공동체에서 고백 된 ‘주기도문’은 이스라엘 신앙 전승의 빛 안에서 예배공동체 신앙고백문으로써 좀 더 자세하고 부연 설명된 기도문으로 본다.

2.2. ‘주기도문’은 기도의 본질과 내용과 자세를 말함으로서 복음 선교의 목적을 가르친다.
  복음서가 전하는 바에 의하면, 주 예수께서 ‘주기도문’을 가르치신 배경과 동기에 대하여 이렇게 전하고 있다. 먼저 마태복음서에서는 유대적 경건의 세 가지 핵심인 자선(구제), 기도, 그리고 금식을 행함에 있어서 인간의 죄성과 타락한 심성 때문에 변질되고 왜곡된 경건의 꾸밈과 자랑과 위선을 경고하시고 참 경건의 실체, 특히 기도의 자세와 목적과 지향성을 가르치신 데서 연유하고 있다. 누가복음서에서는 선의의 경쟁 관계에 있던 ‘요한제자공동체’ 제자가 자랑하는 기도문을 듣고, “(기도)를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눅 11:1) 간청하여 받게 된 것이라고 상황을 설명한다. 십계명이 돌판 두 개로써 구성되듯이, 주기도문도 먼저 하나님의 아버지되심, 그 이름의 거룩하심, 그 분의 뜻의 실현, 그 삼중 반복적 영광의 주 하나님의 생명 현실로써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기도한다. 후반부는 우리 삶에 꼭 필요한 세 가지 간구 곧 일용할 양식, 죄의 용서, 시험과 악에서 구원이 간구된다.
  주기도문 전체가 지향하고 가리키는 큰 방향과 목적의식에 주목해야 하겠다. 예수의 천국복음 운동은 ‘종교로서의 기독교 교세 확장’이 아니고 ‘하나님의 나라’ 실현이었다. 예수의 복음 활동은 아들이 영광 받고 아들의 이름이 높임 받는 데 있지 않고, 오직 그가 ‘아버지’라고 불렀던 거룩하신 하나님의 이름이 존귀하게 되는 일이었다. 예수의 영성은 타계주의나 내세주의 신앙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 위에서도 이루어지는 데 관심이 집중되어 있다. 주기도문에 나타난 예수의 영성은 ‘성육신적 영성’이었지 결코 ‘영지주의적 영성’이 아니었다. 주기도문이 허락하는 청원기도는 일용할 양식, 죄의 용서, 시험에 들지 않는 것, 악에서 구함 받는 것 등이었지 더 많은 물질 축복이나 힘의 획득이 아니었다. 역사적 현실체로써 교회와 기독교 공동체는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나라’가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일하는 선교공동체이라야 한다. 제도적 교회 그 자체, 종교 단체로서의 기독교 그 자체가 자기 존재의 궁극적 목적이 되려고 시도할 때, 세 가지 ‘광야의 시험’이 오고 교회는 역동적 생명력을 상실하고 만다.

3. 하나의 통일적 창조세계 안에서 ‘하늘’과 ‘땅’, 그리고 인간의 본질과 상호관계성
3.1. 하나의 창조된 피조세계로서 ‘하늘과 땅’의 변증법
  성서적 신앙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창 1:1)는 고백으로부터 시작한다. ‘하늘과 땅’은 피조세계를 총칭하는 두 개의 단어이다. ‘하늘’이라는 어휘가 상징하는 피조세계는 ‘땅’ 이라는 어휘로 상징하는 피조세계와 어떻게 서로 다르며, 어떻게 서로 관계되어 있는가? ‘하늘’은 푸른 창공을 의미하지 않고, ‘땅’은 황토밭 대지를 의미하지 않는다. 성서에서 ‘하늘적인 피조세계’는 시공간 속에 있는 인간의 오성과 이성이 다 해명하거나 설명하지 못하는 피조세계 곧 존재질서 차원이 시공4차원의 세계보다 높은 피조물을 총칭한다. 흔히 말하는 영계(靈界)와 천사들과 같은 ‘영적 존재자들’의 세계이다. 철학적으로 말하면 형이상학적인 이데아의 세계에 속한 피조물이다. ‘땅적인 피조세계’는 단순히 가시적 물질계만을 의미하지 않고, 인간의 오성과 이성이 파악하고 조정하고 설명하는 피조세계의 총체를 말한다. 아무리 심원한 정신적 실재이거나 미학적 실재일지라도 그것은 땅에 속한 실재이다.
  성서적 신앙은 하늘이나 땅이나 그것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찬양하며 하나님의뜻을 구현하는 피조물들이다. 성서적 신앙에 의하면, 하늘과 땅은 예배의 대상이 아니다.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통하여 함께 일하시며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지만, 하늘과 땅이 예배의 대상으로 자리매김 될 수 없다.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일지라도 주 하나님을 모시지 못하며(왕상 8:27), 하나님께서 만물을 새롭게 하실 때는 하늘도 거기 있지 않고 흔들리며, 하늘과 땅이 새로 지음을 받는다(사 51:6, 65:17, 계 20:11, 21:1ff). ‘하늘’과 ‘땅’은 차원을 달리하여 상호구별 되어야 할 피조물이지만, 별도로 분리되어 독립적으로 있지 않고 끊임없이 관계 속에 있게 된다. 땅의 피조물은 하늘의 피조물과 간단없이 상호 작용한다. 하늘이 땅에 임하고, 땅은 하늘을 받아들여 생명적 땅이 된다. 그러므로 ‘대지’로서 상징하는 땅은 생명 없는 물질분자 집합체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 찬 ‘생명의 땅’이 된다. 그런 전제 아래 땅과 땅 위의 생명과 물건들이 ‘예배’ 대상은 될 수는 없지만 ‘공경’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왜냐하면 그 안에, 하나님의 영의 활동과 은총의 성육화가 이뤄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부모나 조상을 추모하는 추모예식에서, 공경은 하되 예배하지 않는 이치와 같다. 하늘과 땅의 상호 변증법적 관계에 대하여 성서는 양자의 불가분리성만 아니라, 그 상응성(相應性)과 공명성(共鳴性)을 강조한다. 땅과 하늘은 함께 기뻐하고 함께 슬퍼한다(사 49:13, 렘 4:28). 하나님은 하늘에 응답하고, 하늘은 땅에 응답하고, 땅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에 응답하고, 또 이것들은 이스르엘에 응답한다(호 3:21-22).
  성서신앙 전통에서 볼 때, 사람은 흙으로 지음 받아 땅에 속한 존재이지만,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기에 ‘하늘’과 ‘땅’이 가장 심도 깊고 뚜렷하게 만나는 접촉점이 된다. 사람 안에서 ‘하늘’과 ‘땅’은 존재론적으로 만나는 것을 넘어서, 실존적 응답성을 가지고 만난다. 사람의 ‘마음의 지성소’안에 하나님의 영은 임재하시고 인격적 영으로 말씀하신다. 사람의 몸은 ‘하나님의 영’이 임재하시는 성전이기 때문이다(고전 6:19). 인간은 만물의 맏형으로서 창조주 앞에 찬양과 감사와 간구로 응답한다. 20-21세기 영성은 ‘宇宙神人的 靈性’(cosmotheandric spirituality / R. Panikkar)의 특징을 갖게 되는데, 그 영성은 창조주 하나님, 우주 대자연, 그리고 인간성, 그 삼자(三者)가 서로 만나고 사귐을 가지며 상호침투하고 상호 회통(會通)하는 영성을 말한다.

3.2. 하나님의 구원 사역의 시원점은 ‘하늘’이지만, 그 종착점과 목표점은 ‘땅’이다.
  성서의 증언에 의하면 ‘하늘’의 실재들은 그 영적 초월성과 초능력 면에서 창조주에 더 가까운 실재이다. 공간적 은유로서 말하면 하나님은 천사들과 영적 그룹에 둘러싸여 하늘보좌에 좌정하시지만, 인간은 땅 위에 있다. 천사는 인간보다 하나님을 가깝게 모신다. 성서적 신앙의 특징은 인간을 포함한 세계 구원의 시원(始原)과 가능성이 하나님에게 있고 땅의 피조물 그 자체 안에 있지 않음을 말한다. 창조의 영광이 땅의 피조물 자체 안에 있지 않고  빛의 근원인 위에 계신 하나님에게로부터 온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러나 성서적 신앙의 놀라운 증언은 하나님이 사람의 구원을 위해 천사를 지으신 것이지, 천사를 위하여 사람을 지으시지 않았다. 하나님의 창조적 구원활동의 궁극적 목표와 목적은 ‘땅’에 있다. 구원 능력의 원천과 시원적 질서에서 보면 “하늘이 위, 땅은 아래”이지만, 속량받는 구원론적 질서에서 보면 “땅이 결승 목적지, 하늘이 시원 출발지”로 되어 있다. 종말론적 비전에서조차도 깊이 보면 “땅이 폐기처분되는 멸망이 아니라, 갱신하여 새롭게 하신다.”(계21:1-5)
  하늘과 땅의 구원론적 질서가 그렇기 때문에, “당신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주기도문을 진지하게 드리는 신도는 ‘하늘’을 사랑하기 때문에 ‘땅’ 곧 현 세상을 부정(否定) 하거나 하늘보다 덜 사랑해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칼 바르트, 본 훼퍼, 떼이야르 샤르뎅). ‘땅’의 피조세계는 물질세계만은 아니지만, 물질적 피조성과 시공간적 현실성을 갖춘 현실적 세계이다. ‘하늘’이 땅보다 높고 순수한 영적 실세계이지만, 인간 입장에서 보면  ‘땅’으로 성육화 하기 전의 ‘하늘’이란 아직 순수 관념세계(觀念世界)일 뿐 현실세계(現實世界)가 아니며, 아직 잠세태(潛勢態)일뿐 현실태(現實態)가 아니다.
  장공 김재준 목사께서 항상 강조하신 대로, 성서세계는 “하늘이 땅으로, 영원히 시간으로, 하나님의 독생자가 인간으로 성육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종교이다. ‘범우주적 사랑의 공동체’를 완성하기 위하여 말씀이 육신을 이루는 ‘성육신적 영성’(incarnational spirituality)이 복음의 기조음(基調音)이라 강조하셨다.
  우리는 죽음 이후 곧바로 영의 몸으로 변화되고 덧입혀져 주님과 함께하는 ‘영적세계’가 실재함을 믿는다. “육의 몸이 있음과 같이 영의 몸도 있음을 믿는다.”(고전 15:44). 그러나 명심해야 할 것은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리라.”(고전15:49)는 신앙고백을 하지만,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며, 먼저는 육의 사람이요 그 다음에 신령한 사람이라는 점이다.(고전 15:44-46) 그리고 이곳과 저곳, ‘육의 몸’이 누리는 세계와 ‘영의 몸’이 누리는 세계를 시공간적으로 분리된 세계로써 설명할 수밖에 없지만, 하나로 통일된 ‘범우주적 사랑의 공동체’에 모두 속해 있는 차원이 다른 생명세계일 뿐이다. 인간의 체험과 언어가 인식론적으로 시간과 공간의 거리 개념을 차용하여 표현하지 않으면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에 ‘이곳과 저곳’이라는 공간적 거리로서 표현할 뿐이다. 줄여 말하면, ‘하늘’이라는 신령계와 ‘땅’이라는 시공계는 구별되지만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서로가 상대와 어울리고 삼투(滲透)하며 순환(循環)적 관계구조 속에 있으면서도, 각각 차원이 다른 특성을 잃지 않는 ‘다차원적 하나의 창조세계’(One multi-dimensional Creation)가 있을 뿐이다. 실재의 다차원성을 두 가지 큰 범주로서 대별하여 호칭할 때, 성서는 ‘하늘과 땅’이라고 부른다.

3.3.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뜻’이 현실화된 생명이 충만한 나라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아직’(already...... not yet)의 긴장 속에서 성취적 완성을 향해 진행 중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주권이 실현된 생명 현실로서 특히 자유ㆍ정의ㆍ평등ㆍ평화ㆍ화해ㆍ진실ㆍ건강ㆍ사랑이 충만한 생명세계를 말한다. ‘하늘의 나라’(kingdom of heaven / 天國)와 ‘하나님의 나라’(kingdom of God / 神國)는 본질적으로 같은 것이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함부로 입에 올리는 것만도 그들의 경건성 때문에 삼가는 관습에서, ‘하늘’이라는 표현으로 간접 지칭한 것이다. 그러나 연구에 의하면 ‘하나님의 나라’가 성서적으로 오리지날(original)한 표현이다.
  ‘하늘의 나라’(天國)는 ‘하나님의 나라’가 함의(含意)하고자하는 신적 주권, 초월성, 영원성을 강조하면서 ‘하늘’의 관점에서 ‘땅’을 포섭하는 표현이다. 그에 대조하여 볼 때, ‘하나님의 나라’는 ‘왕국(kingdom)’이라는 은유적 상징성이 강조하듯이, 왕의 주권이 실효를 발하는 영토성, 구체성, 공동체성, 정치성, 주민의 책임적 참여성을 강조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특정한 우주 시공 속에 존재하는 ‘별천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다스리심이 햇빛처럼 막힘없이 비취는 생명현실이다.
  ‘하나님의 나라’(神國)는 예수님의 ‘천국비유’에서 가르치신 대로 사람 맘 속에 있고, 사람들 사이 속에 있고, 생명이 자라는 생명 현실 속에 있고, 해방되고 자유케 되는 구원의 현실성 속에 있다.

4. 오늘의 상황에서 ‘땅’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당신의 뜻이 ‘하늘’에서 이뤄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Thy will be done on earth as it is in heaven)라고 날마다 기도하는 그리스도인에게 ‘오늘의 구체적 땅’은 무엇이며, 그 ‘땅’의 현실은 어떠한가? ‘땅’은 추상적으로 존재하지 않고 구체적 현실로서 존재하는 피조세계라고 앞서 이미 살펴보았다. ‘땅’은 미세한 먼지 하나로부터 무한 우주세계를 다 포함하지만, 우리에게 피부로 다가오는 ‘현실적 땅’은 5가지 현실로써 나타난다.
  (i) 오늘의 ‘땅’은 사람들에게 물신숭배와 힘숭배를 강요하면서 ‘생산-소비-욕망증폭-무한성장’ 신화를 절대시하는 신자유주의적 지구촌 경제 구조와 군산동맹체계(軍産同盟體系)현실이다.
  (ii) 오늘의 ‘땅’은 새로운 냉전체제를 재생산하려는 패권적 강대국들에 의해 고통과 비인간화가 지속되는 한반도의 ‘분단현실’이다.
  (iii) 오늘의 ‘땅’은 지구촌의 실현으로 인해 불가피하게 나타난 삶의 다양성과 차이를 존중하고 협력하고 서로 배워야하는 ‘다문화-다종교 사회’의 현실이다.
  (iv) 오늘의 ‘땅’은 지구온난화와 자연 생태계의 급속한 파괴로 말미암아 현실로 다가온 지구 녹색행성 위에서 생명체 지속 가능성이 문제되는 위기상황의 생태계이다.
  (v) 오늘의 ‘땅’은 초대교회의 역동적 생명력을 잃고 경직화ㆍ권력화ㆍ제도화ㆍ물상화 되어가서, 한국사회로부터 비판과 멸시를 받고 있는 한국 개신교계이다.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기도할 때, 우리 교단은 추상적으로 막연하게 혹은 관습적으로 기도하는 것이 아니다. 위에서 지적한 구체적인 5가지 ‘땅의 현실’ 속에 하나님의 자유ㆍ평등ㆍ평화ㆍ정의ㆍ건강ㆍ화해ㆍ사랑이 실현되기를 기도하고 노력하기를 다짐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의 권고를 진지하게 생각해야 할 때이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역사의 시대마다 하나님은 교회와 그리스도인에게 시대적 사명을 준다. ‘하나님의 나라’를 ‘땅’에서 이루어지도록 염원하는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위에서 언급한 ‘오늘의 현실적 땅’ 가운데 ‘하나님의 뜻’이 실현되도록 성령의 인도하심과 도우심을 받아 최선의 노력을 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 시대의 복음 선교이며, 성육신적 영성의 실천이다.

5.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주기도문은 그리스도인들의 참여적 행동 없이는 실현 불가능
5.1. 종교개혁 3대 모토의 바른 이해와 오남용에 따른 문제들
  기장 교단의 금번 총회의 주제를 한맘으로 설정하고 결단함에 있어서, 우리는 프로테스탄트 신앙 원리의 3대 모토인 ‘오직 믿음만, 오직 은총만, 오직 성경만!’의 근본정신을 오해하거나 남용하는 병폐에서 벗어나야 한다. 위에서 언급한 종교개혁의 3대 모토는 중세 가톨릭 교권 체계가 심지어 면죄부까지 팔면서 공로신앙을 강조하여 복음의 순수성을 훼손시키는 상황에서 나온 것이다. 교황을 정점으로 하는 주교단의 교권이 하늘을 찌를 듯이 오만해질 때 나온 것이다. 각종 교회 공의회에서 결정한 문서와 교리 장전이 성경처럼 권위를 부릴 때 나온 종교개혁자들의 신학모토였다. 그 본래적 정신에 있어서 ‘오직 믿음만, 오직 은총만, 오직 성경만!’의 근본 개혁 정신을 기장은 지켜갈 것이다. 그러나 3대 모토가 오남용 되거나 병들고 경직화되어 또 다른 ‘율법적 멍에’가 될 때, 기장은 새롭게 갱신하고, 새롭게 재해석하여 본래의 동기와 취지를 회복시켜야 할 것이다. 3가지 경직화된 오해와 오남용의 핵심은 무엇인가?
  첫째 오남용의 병폐는 무엇인가? 구원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은총으로 가능한 것이니, 일체의 인간의 책임적 참여는 불필요할 뿐 아니라 인간 참여를 강조하는 것 자체가 인본주의적 발상이라고 매도하는 병폐이다. 주 예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셨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 18:18)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기도하는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은 인간의 책임적 결단과 참여적 행동 없이 앞에서 언급한 구체적 ‘오늘의 땅’에 하나님의 뜻은 실현되지 않고 멈춰 있을 것임을 안다. 오늘의 세상이 무한성장, 성공신화, 적자생존, 무한경쟁, 승자독식, 가시적 외형주의를 따른다고 해서 그리스도 교회마저 그럴 수는 없다. 휴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꾸고, 생태파괴적인 4대강 사업을 반대하고, 무한경쟁사회가 아니라 더불어 살아가는 공생적 영성사회 실현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교세를 과시하는 나팔 부는 종교행사를 중지하고, 교인들로 하여금 골방에 들어가 은밀히 보시는 하나님께 기도하도록 해야 한다. 끝없이 계속되는 ‘욕망-충족’의 생활 메커니즘에 휘둘리지 말고, ‘단순한 삶’에서 오는 자유와 행복을 되찾게 해야 한다.
  종교개혁 3가지 모토의 오남용 병폐 사례의 두 번째는 ‘오직 믿음만’의 원리를 ‘기독교 교리수용’이라고 변질시키는 병폐이다. 그렇게 변질시킴으로서 유대교가 이스라엘백성을 율법노예로 전락시키듯, 예수님이 주신 복음의 자유 안에서 해방된 그리스도인들을 맘이 굳어진  교리주의자로 만들어 버린다. 사랑은 식어지고 교리 논쟁만 판을 친다. 근본주의 신학이 말하는 5가지 근본교리를 수용하는가 아니하는가 조건을 가지고서, 신도들의 구원 여부를 결정하거나, 믿음의 형제 중 신앙적 동지와 원수를 결정하는 전투적 기독교인들로 만들어 버린다. 교의나 교리는 등산객에게 산행(山行)에 도움을 주려는 표지판에 불과하다. 에베레스트 산정에 오르는 표지판이 설치되지 않을 때도 그 산정에 오른 사람이 있었듯이, 기독교의 정통 교리가 공의회에서 작성되어 공표되기 전에도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역동적 신앙, 생명적 신앙을 살아 갈 수 있었다. “믿음, 소망 ,사랑, 그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고전 13:13)는 성경 한 구절이면 바른 정통신앙의 길을 걸어가는데 충분한 것이다.
  종교개혁 3대 모토를 잘못 이해하는 세 번째 병폐는 ‘오직 성경만’의 원리이다. 이 원리를 주장했던 종교개혁자들의 동기와 의도는 중세 스콜라신학자들과 교권주의자들이 공의회 결정 사항이나 교황의 이름으로 선포한 교리 내용과 전례행위(典禮行爲)가 성경하고 똑같은 계시적 권위를 갖고 행동규범이 된다고 주장하는 것을 반박하기 위해서 그랬던 것이다. 종교개혁의 정신은 하나님의 계시와 교훈이 ‘성경책’ 안에 제한된다고 주장하기 위하여 ‘오직 성경만’을 주장한 것이 아니다. 자연과 역사 속에서 하나님은 당신의 능력과 영광을 계시하신다고 성경은 말한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다.”(롬 1:20) 성경이 하나님을 알리는 첫째 텍스트라면 ‘대자연’은 둘째 텍스트 이다.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다.”(히1;1) ‘옛적의 선지자들’을 구약성경에 나타난 이스라엘 예언자들로 국한 하는 것은 너무나 좀스럽다. 장공 김재준 목사는 인류 문화권의 성인들을 통하여서도 하나님의 로고스(말씀)는 활동하였다고 보았다. 성경, 대자연, 그리고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인간성’ 자체가 하나님을 알리는 세 번째 텍스트가 될 수 있다.
  20세기 후반부터, 세계 신학계의 지형도는 그렇게 새로운 눈으로 성경, 대자연, 그리고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성을 새롭게 주목한다. 기장은 세계 교회의 그 흐름을 앞서서 선도해 가야 한다. 그렇게 될 때만 생태학적 신학과 윤리의 형성은 물론이요, 다양한 종교 문화의 가치를 포용하면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나타난 온전하고 궁극적인 ‘은혜와 진리’로써 세계를 치유하고 풍요롭게 만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5.2.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기도하는 ‘무지개 영성’의 7가지 색상
  겉으론 문명이 발전하고 생활이 풍요롭게 변한 것처럼 보일지라도, 성경 말씀의 빛과 복음적 관점에서 보면 현대는 ‘위기시대’이다. 신앙의 위기, 교회의 위기, 기장의 정체성의 위기 시대이다. 참 교회답게 세상 가운데서 등대ㆍ소금 역할하기 어렵고, 참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가기 어려운 시대이다. 그 이유는 우리 시대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요1서 1:16)을 추구하는 문명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기장교단의 신앙이 존 번연의 ‘천로역정’(天路歷程) 경건신학에 따라 ‘장망성’(將亡城)에 대하여 눈감고 위를 향해 달려가 천국에 이르는 타계주의 신앙에로 돌아갈 수 없다. 우리에게 주어진 단 하나의 창조세계를 망하도록 방치할 수 없다. 그리스도 예수의 보혈의 피가 스며든 이 ‘땅’을 멸시해서는 안된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뜻 곧 ‘하나님의 나라’가 땅 위에 이뤄져가도록 변혁시키고 갱신시켜 가야한다. 주기도문을 진지하게 드리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주기도문의 영성’이 요청된다. 그 영성은 거룩한 하나님이 노아를 통하여 말씀하신 영원한 언약 곧 “다시는 모든 생물을 멸하지 아니할 것이라. 땅을 멸할 홍수가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창9:11)는 은혜의 언약 위에 세운 무지개의 표징처럼 7가지 주기도문 영성의 색깔들이다.

  (i) 단순성의 영성과 절제의 영성을 회복한다.
     생활은 단순하게, 욕망은 절제하여, 멈출 줄 모르는 물신숭배 우상종교의 폭력에 당당하게 맞서서 산다.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 하늘나라가 저의 것이다.”(마 5:3)
  (ii) 경쟁과 성공 출세의 세속 철학을 거절하고, ‘바보’라는 말듣는 것을 게의치 않고, 더불어 사는 세상을 만들어 나간다.
     예수가 가르친 대로 ‘예수살기’ 생활신앙을 산다. 강자가 약자를 배려하며, 높은 자가 낮은 자를 섬기는 ‘사랑하는 자유’를 지닌 자의 ‘생활신앙’을 되찾는다. ‘예수살기’로 말미암아 발생하는 시련과 손해가 있다 해도 기꺼이 감당하고 자랑으로 여긴다.

  (iii) 일체의 전쟁과 폭력을 거부하고, 화해와 평화의 일꾼으로 산다.
      ‘예와 아니오’를 분명하게 말하되 형제 비방을 아니하며, 한민족의 평화와 통일을 위하여 힘쓴다. “땅 중의 땅은 민중의 마음이다. 그곳에 하나님의 나라가 온전히 임하기 전에는 종말은 임하지 않는다.”(함석헌)

  (iv) 교회는 땅 위에 세운 ‘하늘의 기관’이요 영적공동체임을 각성한다.
      교회는 세상의 시녀가 아니다. 교회는 성직자와 직분자가 주도하는 종교법인체가 아니다. 교회는 사회복지사업에 봉사하지만 교회는 사회복지단체가 아니다. 교회는 혈육적 인간을 그리스도 예수와 성령의 능력으로 중생시켜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시켜 세상에 파송하는 ‘人間革命 道場’이다. 교회는 그 순수한 영적 생명력과 본래적 사명을 회복해야 한다.

   (v) 하나님의 인류역사 섭리 안에 있는 타문화와 이웃종교의 다양성을 존중한다.
      주기도문의 영성은 지구촌의 종교사가 하나님의 손안에서 이루어진 창조적 활동임을 인지한다. 참 남편을 만나기 전의 ‘다섯 남편’(요4:18)이라고 그리스도인은 고백한다.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웃종교는 우리 조상들의 삶을 이끌어왔던 종교들이다. 존경과 협동을 통해 생명ㆍ평화ㆍ정의로운 사회를 함께 형성해 나간다.

  (vi) 평생학도로서 새로운 학문동향 파악에 게으르지 않고 진리에 개방적 태도를 견지한다.
      기장교회 지도자와 신도들은 항상 새롭게 배우며 앞으로 전진하는 열려진 마음, 배우려는 자세를 가진다. 특히 자연과학과 종교의 대화에 유념한다. 왜냐하면 현대 분자생물학과 일부 유물론적 환원주의자들은 인간의 영성과 종교를 ‘환상’으로 규정하고, 젊은 세대들에게 ‘하늘이 없는 땅만 인정한 무신론적 세계관’을 갖도록 도전하기 때문이다.

  (vii) 우리시대의 영성은 ‘생태학적 영성’임을 자각하고, 생태학적 공감능력 함양에 힘쓴다.
      ‘생태학적 영성’이란 인간의 생명과 그 영적 현상마저도, 스스로 독립적인 것이 아니고, 철저하게 창조질서와 생태계의 삶의 그물망에 의존되어 있음을 자각하는 영성이다. 선악을 판단하는 도덕적 행위기준도 인간의 공리적 관점에서가 아니라, 생태계의 지속가능과 생명공생적 관점에서 판단되어야 한다.

주기도문의 영성은 미가 선지자의 예언 말씀 속에 간략하게 피력되었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야훼 하나님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仁慈)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아니냐?”(미 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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