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경동] 죽음아, 네가 어디 있느냐?

2010년 9월 19일 설교자 박종화 목사

성경본문
  
예레미야 애가 3:19-24

내가 겪은 그 고통, 쓴 쑥과 쓸개즙 같은 그 고난을 잊지 못한다. 잠시도 잊을 수 없으므로, 울적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다. 그러나 마음 속으로 곰곰이 생각하며 오히려 희망을 가지는 것은,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이 다함이 없고 그 긍휼이 끝이 없기 때문이다. "주님의 사랑과 긍휼이 아침마다 새롭고, 주님의 신실이 큽니다." 나는 늘 말하였다. "주님은 내가 가진 모든 것, 주님은 나의 희망!"
아멘.

디모데후서 1:7-10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비겁함의 영을 주신 것이 아니라, 능력과 사랑과 절제의 영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대는 우리 주님에 대하여 증언하는 일이나 주님을 위하여 갇힌 몸이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복음을 위하여 고난을 함께 겪으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시고, 거룩한 부르심으로 불러주셨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행실을 따라 하신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계획과 은혜를 따라 하신 것입니다. 이 은혜는 영원 전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것인데,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타나심으로 환히 드러났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을 폐하시고, 복음으로 생명과 썩지 않음을 환히 보이셨습니다. 아멘.

요한복음서 3:21-27

“그러나 진리를 행하는 사람은 빛으로 나아온다. 그것은 자기의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려는 것이다." 그 뒤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유대 지방으로 가셔서, 거기서 그들과 함께 지내시면서, 세례를 주셨다. 예루살렘 근처에 있는 애논에는 물이 많아서, 요한도 거기서 세례를 주었다. 사람들이 나와서 세례를 받았다. 그 때는 요한이 아직 옥에 갇히기 전이었다. 요한의 제자들과 어떤 유대 사람 사이에 정결예법을 두고 논쟁이 벌어졌다. 요한의 제자들이 요한에게 와서 말하였다. "랍비님, 보십시오. 요단 강 건너편에서 선생님과 함께 계시던 분 곧 선생님께서 증언하신 그분이 세례를 주고 있는데, 사람들이 모두 그분에게로 모여듭니다." 요한이 대답하였다. “하늘이 주시지 않으면, 사람은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 아멘.
 
설교문  
  
오늘부터 추석연휴가 시작됩니다. 추석 때,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을 많이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추석은 천년된 우리의 전통으로 추석이 계속 축제가 되는데 추석 때 추모도 우리가 꼭 가슴에 끌어안고 해야 할 일입니다. 추석과 추모, 이 두 가지가 오늘 저의 당면한 축제의 내용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어떻게 추석을 잘 지내는지, 추모를 어떻게 잘 해야 예배가 되는지에 대해서 그 말씀이 쓰여있다고 믿어서 오늘 본문말씀을 택했습니다.

사람은 살아가면서 개인적으로나 집단적으로 꼭 두 측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 죽겠습니다. 살려주십시오.’ 하고 호소하는 아픔이 하나 있고, 하늘의 구원을 받고 기쁨을 얻어서 너무 좋아서 ‘하나님 감사합니다. 정말 찬송입니다.’ 하고 축배의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상황이 있습니다. 두 가지가 항상 인간에게 있습니다.

오늘 예레미야를 잠깐 보겠습니다. 예레미야가 살던 시절은 우리로 비교하면 구한 말, 나라가 망하기 직전입니다. 이유가 어떻든 하나님을 배반한 이스라엘은 바벨론한테 망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 예언자로 부름받은 예레미야는 오늘 본문 말씀대로 얼마나 간장이 쓰리고 가슴이 탔던지 이렇게 예언합니다.

“하나님, 제가 매일 살아가는 것이 쓴 쑥을 씹는 것 같습니다. 매일 먹는 음식은 쓸개즙 같습니다. 아무런 희망도 없고 좌절 밖에 없으니 제 생활은 울적하기만 합니다.” 이 한 대목은 자신의 운명, 민족의 운명, 하나님에 대한 절규가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면서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계시를 받습니다. “참아라, 기다리면 다시 하나님의 사랑이 임할 것이다.”

오늘 말씀을 보면 예레미야는 그 사실을 쓸개즙을 씹으면서도 “하나님은 얼마 있으면 우리 백성을 용서해 주시고 해방의 기쁨을 주실 것이다.” 하면서 지금 환상으로 계시를 받으며 쓸개즙을 씹고 있습니다. 고난의 와중에 희망의 메시지를 하나님이 주십니다. 고난은 현실이고, 미래의 가능성일 뿐입니다. 두 가지를 같이 노래합니다. 현실은 너무 씁니다. 울고 싶습니다. 씁니다. 하나님이 주신 약속은 아직 손에 잡히지 않았으나 감사하고 기쁜 축복입니다.

그 말을 “제가 오늘 쓴 쑥을 먹고 쓸개즙을 마시는 것 같지만 따져보니 주님은 내가 가진 모든 것, 나의 희망이십니다. 우리 민족이 의지할 분, 우리 민족의 희망, 우리 모두의 희망입니다. 이유는 주님의 사랑이, 주님의 긍휼이 너무 커서 쓸개즙이나 쓴 쑥 같은 것은 삼켜버리고 말 것이고 그 기쁨이 너무 커서 제가 그 기쁨을 생각해 봤더니 쓴 쑥을 먹는 아침마다 입에서는 쓴데 가슴과 머릿속에서는 아침마다 주님의 사랑과 긍휼이 넘쳐나도록 풍성합니다.”

이 두 노래를 오늘 예레미야가 했습니다. 추석 때 뭘 해야 하냐면 두 노래를 같이 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사랑을 노래할 수 있는 사람이 정말 추모할 수 있는 사람이고 지금의 축복을 누릴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 동안 하나님께 간구하셨는데 대답을 들으셨습니까? 저도 못 들을 때가 많습니다. 간구해도 대답 안 하실 때는 답답하기만 합니다. 들어주신다는 것인지, 안 들어주신다는 것인지, 저한테 역사를 맡긴다는 것인지, 하나님께서 관여하겠다는 것인지 말입니다.

성경말씀을 보면 하나님은 태초부터 우리의 모든 일상을 다 주관하시기로 결정하셨고 은혜를, 사랑을 거울삼아 이 모든 것을 다 마지막까지 지켜주시기로 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제 일상을 지켜주시고 제 역사도 생명도 지켜주시는 분임을 믿지만 매일 살아가면서 너무 고할 게 많아서 하나님께 간구하지만 답이 없으십니다.

어느 목사님이 시골교회에 부임하셨는데 목회하는 이야기를 고백처럼 쓴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부임해서 간 동네는 작은 동네인데다가 모든 이들에게 복음이 전해졌는데 딱 한 분만 교회를 안 다니신답니다. 나이가 많으신 어르신인데 말씀도 잘 하시고 그 동네 제일 주류되는 분입니다. 그런데 이분은 돌아다니면서 교회 욕만 하고 목사 욕만 하는 게 일이랍니다.

그렇게 교회 출석은 안 하시고 계속 욕만 하고 다니는데 그래서 새로 부임한 목사님이 그 노인을 찾아가서 세 시간 대화를 나눴다고 합니다. 그리고 목사가 돌아와서 하는 말이, 세 시간 동안 목사 쪽에서 한 말은 ‘예, 알겠습니다. 그렇군요. 네!’ 그 말만 반복하고 나왔답니다. 그 다음날, 그 동네에 소문이 쫙 났는데 이 노인이 하는 말이, “새로 온 목사 괜찮더구만. 사람이 됐어.” 그리고 그 다음 주일부터 교회에 나왔고, 평안해 졌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도 이 노인처럼 무슨 말이든 하고 싶은 얘기가 참 많았을 것입니다. 간구하시고 싶은 얘기도 참 많았고, 살아가면서 욕하고 싶을 때도 참 많았을 것입니다. 축복이 있건 없건 상관이 없습니다. 누구도 제 불평이나 제 간구를 안 들어주니까 속이 터질 것 같았을 것입니다. 이 노인처럼 욕할 데는 한 군데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 지도자들, 교회를 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목사가 ‘아, 그렇군요. 네, 알겠습니다.’ 한 것은 대답을 피하려고 하는 것보다 확신이 있었을 겁니다. 하나님이 오셔서 당신을 도와줄테니 ‘네, 알겠습니다’ 이렇게 말했을 겁니다. 여러분, 지난 시간동안 기도하시고 들은 답이 뭐냐고 하면 하나님께서 “그래, 알겠다. 기다려.” 그 답변 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기다려. 뭘 그렇게 급해. 당신들의 사고방식과 스케줄대로 안 돼.”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신데 왜 우리의 마음과 정성대로 역사가 움직여지지 않는다고, 우리의 삶이 움직여지지 않는다고 불평불만을 하는 것일까요? “나는 사랑과 긍휼로 그대들의 역사를 주관하고 있는데 조금 스케줄이 안 맞아도 기다려라.” 이렇게 하나님이 말씀하시면서 “알았다. 그래, 알았어.” 이 답변만 하시는 것 아닙니까? 이 답변을 듣고 답답해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늘 그렇게만 답변하시고 말보다는 행실로, 은혜로 우리의 운명을, 역사를 주관해 주십니다.

우리 가운데 명작을 쓰신 분들이 많습니다. 명작은 수십 년, 수백 년, 수천 년 전에 쓰인 것도 많습니다. 그 명작이 오늘 우리들한테 깊은 감동으로 다가옵니다. 그래서 명작을 읽습니다. 우리가 오늘 찬송을 불렀고 앞으로도 부를 겁니다. 이 찬송이 수백 년 전에 작곡 작사 된 곡입니다. 왜 지금 부르면 그 찬송이 살아서 우리한테 감동을 주고 하나님과 가까이 하게 합니까? 옛날 것인데 시기적으로 다 지난 일인데 말입니다.

수백 년 전, 수천 년 전에 있었던 음악 작품이 오늘 연주가를 통해서 우리한테 들려올 때 새로운 생명력을 얻습니다. 아름다운 그림 한 폭이 수백 년 전에 그려진 것인데 지금 몇 천 년, 몇 백 년이 지난 거기서 영감도 받고 감동도 느끼고 감사도 합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입니까? 그림이 우리한테 온 것입니까? 우리가 그림을 가지고 온 것입니까?

저는 이런 걸 보면서 인간의 역사, 생명의 역사에 중요한 은혜의 단추가 있다고 믿습니다. 의식을 했든 안 했든 아름다운 찬송을 쓰거나 작곡하거나 연주하는 사람은 곡을 현재에 부른 게 아니라 미래에다 작곡했습니다. 미래라는 시간대 속에 곡을 집어넣었습니다. 앞으로 있을 수많은 미래 세대들이 미래를 향해서 미래 악보에 작곡하고 연주했기 때문에 앞으로 있을 수많은 세대의 미래 사람들이 그 음악을 들어도 그 음악은 감동적입니다.

작품도 명품도 모든 사고방식도 단순히 과거를 보고 현재에 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보이지 않지만 약속된 미래를 화판이라고 생각하고 그 시간대에 쓰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면 그 미래를 사는 사람은 과거 작품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지금의 작품으로 봅니다. 또 오는 세대가 미래 작품이라고 하지 않고 그렇게 감사하고 은혜를 받습니다. 우리 주변 일상에 있는 현실들입니다.

추모, 추모는 아름다운 것을 추모하지 비극을 추모하지 않습니다. 조상들, 이미 과거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친척들, 어제 일이 되었습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는 과거 일을 다시 끄집어 와서 오늘의 살아있는 생명체를 다시 만들 능력이 있습니다. 추모를 통해서 받습니다. 사실은 추모할 수 있는 그 분들이 따지고 보면 미래를 향해서 말했고 미래를 화판 삼아 이야기했고 엄청난 미래가 얼마나 될지 모르지만 끝없이 진척될 미래에 이야기를 담았고 소리를 쳤고 말을 했고 정을 담았습니다. 그래서 미래 사람들이 쉽게 가져올 수 있습니다.

그렇게 추모할 수 있는 사람들, 우리 조상들, 우리 앞서 가신 분들이 그런 사람들입니다. 그분들 속에서 과거를 찾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추모하는 속에서 미래를 찾아보십시오. 내일을 뭐라고 말하는지 찾아보십시오. 이제 우리는 추모를 합니다만 얼마 지나면 시차는 있지요. 여러분이나 제가 추모의 주인이 아니고 추모의 대상이 됩니다. 지금, 오늘부터 보이지 않는 내일, 무한대로 펼쳐질 미래에 말씀하시겠습니까? 그 곳에 감동을 담으시겠습니까? 지나간 분들을 추모하면서 우리는 그런 추모에 아름다운 일을 같이 합시다.

추석, 천년이 되었습니다. 추석은 말이 없지만 이미 오고가는 수만 대에 이 나라 겨레들의 미래에 추석의 메시지를 담았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살고 있는 것이고 추석을 축하합니다. 역사관, 생명관, 여러 가지를 말합니다만, 누구나가 다 우리는 미래를 향해서 살아왔고 미래를 향해서 앞으로 살 것입니다. 의식하지 않았어도 그렇게 역사는 진행됩니다. 우리 뒤에 미래가 있는 게 아니라 우리 앞에 미래가 있고 저는 미래를 위해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우리 사이에 중요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미래를 어떻게 살라 하십니까? 미래를 살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는 죽음의 문제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의견이 갈라질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우리에게는 거대한 집이 있는데 우리가 태어날 때 집의 앞문을 열고 집 속에 들어옵니다. 그 집은 가정이요, 나라요, 지구요, 우주입니다. 죽는다는 것은 뒷문 열고 나가는 것이 죽음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운명이라고 생각하고 숙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성경말씀 전체를 읽으면서 수천 년 전에 쓰인 이야기, 수백 년 전에 쓰인 하나님의 이야기가 성경입니다. 성경은 과거에 쓰였지만 오고 오는 종말, 미래의 화폭에 쓰였습니다. 오고 오는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 속에 썼지, 과거의 파피루스 종이에 쓴 것이 아닙니다. 죽음은 누구나 언제나 맞이합니다. 저와 우리는 지금도 살아 움직이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이나 저나, 지금 살아있는 우리는 죽음을 끌어안고 삽니다. 죽음과 함께 삽니다. 단, 죽기 전까지 죽음은 가능성일 뿐 실천은 아닙니다. 실천이 될 날이 반드시 있습니다. 죽는 날입니다. 죽음이 있고 아픔이 있고 죄악이 있고 모든 것을 함께 끌어안고 살면서 생명과 죽음의 투쟁을 우리는 우리 삶 속에서 이어갑니다. 최후의 승자가 무엇이길 원합니까?

저는 죽게 되겠지만 죽음 속에 내 생명을 비참하게 주고 싶지 않습니다. 죽음이 승리했다고 죽음이 노래하는 것을 용인할 수 없습니다. 제가 죽어도 생명이 승리했다고 해야지, 내가 어떻게 죽음 속에 내가 패배했다고 고백할 수 있습니까? 패배한 죽음 속으로 제가 살 수 없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나님께서는 옛날부터 천지창조 때부터 노력하셨고 역사를 주셨고 은혜를 주셨고 마지막 예수를 통해서 우리한테 복음의 메시지를 주셨습니다.

“죽음은 끝이 아니다. 죽음은 문과 같아서 그 문을 통해서 나가면 또 다른 집이 있다. 영원한 집이 있다. 그것을 생명이라고 하여라.”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처음부터 우리에게 생명을 살라 했고 죽음을 넘어서 생명도 살라고 했습니다. 살라고 약속하고 우리한테 축복으로 주신 그 미래가 미래에만 있는 게 아니라 그 미래를 희망으로 갖는 사람은 오늘 고난이 있어도 그 미래 때문에 우리는 빛납니다.

예수님께서 여기 오셔서 우리한테 하신 일을 요한복음에 보면, 어떻게 하면 인간들에게 죽음이 끝이 아니고 죽음의 관문을 지나면 또 다른 생명이 있다고 믿고 죽음을 통과해야 살 수 있게 할까? 하나님의 계획은 아들을 보내는 것이었고, 아들을 보내서 이렇게 했습니다. 누구든지 예수와 함께 죽으면 부활도 함께 한다. 죽기는 죽되 그리스도와 함께 죽으면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함께 또 다른 생명을 얻는다. 우리의 신앙고백입니다.

이러한 신앙 고백을 여러 가지 기도도 있지만 상징적 세례로 표현합니다. 세례란, ‘어차피 죽을 운명이지만 기왕이면 주님 안에서 죽겠습니다. 십자가에서 죽겠습니다. 그러면 부활하신 주님께서 저의 죽음을 끌어안아주시고 부활에도 함께 동승시켜 주십시오. 그걸 내가 믿습니다.’ 그래서 받는 상징적 의미가 세례입니다. 세례는 예전이 아닙니다. 의식이 아닙니다. 세례 속에 담긴 뜻은 바로 이것입니다. ‘죽음의 관문을 넘어서까지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의 뜻을 제가 받겠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세례를 우리보고만 받으라고만 했으면 별 의미가 없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세례를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왜 세례 받았습니까? 요단 강가에 세례를 받을 때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오셨다고 하는데 예수가 세례 받았다는 말은 하나님의 아들은 예수를 통해서 인간의 죽음 속에 함께 하기로 세례를 통해서 명확히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의 죽음 속에 그리스도가 함께 죽겠다고 인간을 부활시켜야겠다는 하나님의 뜻 속에 그리스도가 함께 부활에 동참하겠다고 사람의 부활이 없으면 사람이 죽었다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죽음이 무슨 뜻이냐, 하고 고린도서에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는 우리의 죽음과 생명 속에 함께 하겠다는 표시로 요단강에서 세례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이런 행위가 없었으면 저희들이 받는 세례는 그냥 종교적 예식에 불과합니다. 예수님 말씀이 “내가 그대들의 생명과 죽음과 영생 속에 함께 하기로 보여주마. 내가 세례 받는다.” 세례를 우리도 받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요한복음 말씀에 보면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와서 “선생님께서 예수란 사람에게 세례주지 않았습니까?” 그랬더니 예수란 사람이 와서 다른 사람들을 세례를 주고 사람들이 몰려옵니다. 세례요한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베풀어 주신 것이니까 생명의 세례가 가능하다. 그것을 믿어야 한다.”

저는 오늘 세례 이야기를 드리면서 추모는 과거 분들을 회상하는 게 아니고 과거에 사셨지만 미래를 투시해서 사신 분들의 아름다운 진실, 지금 하나씩 하나씩 빼는 겁니다. 그리고 생각해 보는 겁니다. 미래를 향해서 사시는 분, 죽음의 관문을 넘어서 생명까지 가져가시는 분, 그분을 우리는 추모하고 싶습니다. 제일 큰 추모는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추모입니다. 부활하신 그 분의 추모입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부활절 아침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죽음아, 네 쏘는 독침이 어디 있느냐?” 이렇게 물을 때는 부활을 보고 지나온 십자가의 죽음과 생명이 다시 부활로 승화되는 것을 보고 사도바울은 “죽음아, 네 쏘는 독침이 어디 있느냐?” 추모예배 때 이 말씀을 하셔야 합니다. “죽음아, 네 쏘는 독침이 완전히 무용화시키는 게 아니라 죽었지만 지금도 살아계시다.”

두 번째는 사도 바울이 그렇게 말하고 나서 어떻게 죽음이 없어졌는지 설명합니다. 죽음 이후에 부활이 생긴 게 아니고 죽음 이후에 부활이 죽음을 삼켰다. 그래서 부활이 이겼습니다. 생명이 죽음을 삼킵니다. 우리 지금 살아가시지요? 아까 명작, 명품, 성서의 말씀, 찬양, 작품 모든 것이 다 미래를 향해서 만들기로 했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이제는 미래라는 관문을 향해서 살고, 미래 속에 투시하면서 살고, 내일을 위해서 투자하면서 사십시오. 누군가 이렇게 표현을 했습니다. “We are living into the future.” 우리는 미래를 향해서 사는 것이지 과거를 향해서 살지 않습니다. 미래 속으로 살아갑니다. 내일 속으로 살아갑니다. 그렇게 사는 삶은 내일에 있는 주인이, 미래에 있는 주인이, 지금도 살아계셔서 죽음을, 생명을 다 흡수하고 삼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의 입장에서는 제가 미래 속으로 들어간다고 하지만 미래 입장에서는 “오너라, 미래로 다 삼켜주마.” 하나님의 나라가 온 세상 사람들을 삼키듯이 미래가 현재를 삼키듯이 그래서 현재가 미래가 아름답고 지금도 생명력이 있듯이 우리는 내일 주어진 나를 향해서 그 속으로 들어가 사십시다. 그래야 우리는 과거가 되고 되도록 새로운 생명의 현재가 됩니다.

추모는 과거의 추모가 아닙니다. 미래에 수놓은 아름다운 뜻을 지금 하나씩 열매를 따는 겁니다. 하나님 추모, 십자가 추모는 그런 방식이 아닙니다. 미래의 열매를 지금 따 먹는 겁니다. 그렇게 추모하십시다. 그리고 추석에 주시는 축복도 무한대에 미래에 펼쳐진 하나님의 약속을 지금 2010년에 우리가 열매를 축복으로 받습니다. 내일, 모레, 미래를 향해서 그 속을 향해서 살아갑시다. 하나님의 뜻이 그렇습니다. 그런 하나님이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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