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경동] 하늘의 집인 인간

2010년 9월 26일 설교자 박종화 목사

성경본문

이사야서 49:1-6

너희 섬들아, 내가 하는 말을 들어라. 너희 먼 곳에 사는 민족들아, 귀를 기울여라. 주님께서 이미 모태에서부터 나를 부르셨고, 내 어머니의 태 속에서부터 내 이름을 기억하셨다. 내 입을 날카로운 칼처럼 만드셔서, 나를 주님의 손 그늘에 숨기셨다. 나를 날카로운 화살로 만드셔서, 주님의 화살통에 감추셨다. 주님께서 내게 말씀하셨다. "이스라엘아, 너는 내 종이다. 네가 내 영광을 나타낼 것이다." 그러나 나의 생각에는, 내가 한 것이 모두 헛수고 같았고, 쓸모 없고 허무한 일에 내 힘을 허비한 것 같았다. 그러나 참으로 주님께서 나를 올바로 심판하여 주셨으며, 내 하나님께서 나를 정당하게 보상하여 주셨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주님께서는 나를 그의 종으로 삼으셨다. 야곱을 주님께로 돌아오게 하시고 흩어진 이스라엘을 다시 불러모으시려고, 나를 택하셨다. 그래서 나는 주님의 귀한 종이 되었고, 주님은 내 힘이 되셨다. 주님께서 내게 말씀하신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네가 내 종이 되어서, 야곱의 지파들을 일으키고 이스라엘 가운데 살아 남은 자들을 돌아오게 하는 것은, 네게 오히려 가벼운 일이다. 땅 끝까지 나의 구원이 미치게 하려고, 내가 너를 `뭇 민족의 빛`으로 삼았다." 아멘.

고린도후서 6:14-18

믿지 않는 사람들과 멍에를 함께 메지 마십시오. 정의와 불의가 어떻게 짝하며, 빛과 어둠이 어떻게 사귈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떻게 화합하며, 믿는 자가 믿지 않는 자와 더불어 함께 차지할 몫이 무엇이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떻게 일치하겠습니까?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습니다. "내가 그들 가운데서 살며, 그들 가운데로 다닐 것이다.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그들 가운데서 나오너라. 그들과 떨어져라.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아라. 나 주가 말한다. 그리하면 내가 너희를 영접할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너희의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 자녀가 될 것이다. 나 전능한 주가 말한다." 아멘.

마태복음서 15:21-28

예수께서 거기에서 떠나서,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가셨다. 마침, 가나안 여자 한 사람이 그 지방에서 나와서 외쳐 말하였다.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내 딸이, 귀신이 들려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셨다. 그 때에 제자들이 다가와서, 예수께 간청하였다. "저 여자가 우리 뒤에서 외치고 있으니, 그를 안심시켜서 떠나보내 주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의 길을 잃은 양들에게 보내심을 받았을 따름이다." 그러나 그 여자는 나아와서, 예수께 무릎을 꿇고 간청하였다. "주님, 나를 도와주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서, 개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 그 여자가 말하였다.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얻어먹습니다." 그제서야 예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여자여, 참으로 네 믿음이 크다. 네 소원대로 되어라." 바로 그 시각에 그 여자의 딸이 나았다. 아멘.
 
설교문
  
<하늘의 집인 인간>

성가를 부르면서, 기도하면서, 예배를 드리면서 느끼는 점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왜 예배드리고 찬양하고 기도합니까? 오늘 성경말씀에 답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예배 속에 기도 속에 찬송 속에 함께 계십니다. 우리가 허공을 향해서 말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그 분만을 상대로 우리가 예배드리는 것도 아닙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하나님은 우리의 일상 속에, 모든 생각 속에 함께 계십니다. 우리의 생각이 하나님의 거처입니다. 우리의 하는 말이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우리 살아가는 실존적 상황, 역사 상황이 다 하나님의 집입니다. 이렇게 굉장히 놀라운 말씀을 오늘 하나님께서 고린도후서에 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피조물들을 구원하려는 분이시고, 창조주이신데 우리가 창조절 예배를 드리면서 구약과 신약 전체를 통해서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 하나님과 자연과의 관계를 설명하실 때 여러 가지 은유법을 쓰셨습니다. 그 중에 아주 특이한 은유법 하나가, ‘하나님은 신랑이시고, 인간은 신부다. 예수님은 신랑 되신 예수고 우리는 신부되는 사람이다.’ 라고 신랑 신부의 관계로 많이 표현하셨습니다.

이 성경말씀에서 우리에게 주시려고 하는 의도는, 신랑과 신부는 합하여 가정을 이루고 신랑과 신부는 서로 간에 둘이 한쪽이 없어서는 안 될 파트너가 되고, 그래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를 파트너십이라고 하면 좋습니다. 한쪽이 없으면 다른 한쪽이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위대한 분이시지만, 인간 없이 하나님은 무슨 재미로 사시겠습니까? 창조주 홀로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질문하십니다. “나는 인간 파트너 없이 나 홀로 사는 것은 외롭다. 그대들도 똑같은가? 나 없이 사는 것이 좋은가?” 저는 결혼식 주례할 때마다 결혼하는 당사자들과 부모님들께 드리는 말씀이 있습니다. 당사자들에게는 서로 사랑하며 파트너십을 가지고 서로의 안에 머물며 살라고 하고, 부모님께는 결혼하는 날, 인사하는 순서에서 아들과 딸을 뺏긴 거라고 생각하지 말고 자식 하나를 가슴으로 얻은 것이라 생각하기를 말씀 드립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 겁니다.

그런데 요즘에 세상이 험악해진 것 같습니다. 어떤 웹페이지를 보니까 ‘여성들의 착각’이라는 시리즈가 있었습니다. 아직도 며느리를 딸로 착각하며 사는 여자, 사위를 아들로 착각하는 여자, 그리고 마지막이 더 재밌습니다. 며느리 남편을 아직도 아들이라고 착각하는 여자라고 하는데 여러분도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남녀가 만나 결혼해서 살고, 사별을 하기도 하고, 헤어지기도 했을지라도 한 가지만은 분명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것은 파트너와 파트너로 살아갑니다. 서로, 함께, 같이 살아갑니다. 오늘 하나님 말씀은 “나는 내 파트너인 너희와 항상 같이 있어야 되겠다. 파트너만 가지고는 안 되겠고 항상 같이 있어야겠는데 그러려면 방법이 있다. 내가 내 파트너를 집으로 삼아야겠다. 거처로 삼아야겠다.”

고린도후서는 “사랑하는 여러분, 당신들이 하나님의 집입니다. 하나님이 거처할 집이 당신들입니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저보고 하나님이 “네가 내 집이다. 나는 너의 집에 가서 평안을 누려야겠다. 나는 거룩한 사람이기 때문에 내가 거룩함으로 내 집인 너를 거룩하다고 부르겠다.” 그래서 제가 하나님과 함께 있으면 거룩할 ‘성(聖)’ 붙여서 ‘성인(聖人)’, 하나님 편에서 보면 하나님께서 살 집, 거처하는 집인 저 자신이 하나님이 거룩하므로 하나님의 거룩한 거처인 제가 ‘성전(聖殿)’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성전, 성전에 사는 사람들은 성인, 저는 이 말씀이 엄청난 축복의 말씀인 동시에 분부의 말씀이라고 믿습니다.

어느 신문 광고에, 아내를 구한다는 광고가 났습니다. 그랬더니 답이 이틀 만에 300통이 왔는데 발신자가 전부 남자입니다. 그리고 ‘제 아내 좀 데려가세요.’ 라는 내용의 글이었습니다. 남편을 구한다는 광고가 나면 아내들의 답장이 쇄도할 이런 우스울 수밖에 없는 세태입니다만 하나님이 구인광고를 낼 때 “나 집구함, 하나님이 거처할 집을 구함. 집은 다양할수록 좋음. 단 공의로우신 하나님이 거처할 수 있는 집은 공의로운 집이어야 함, 사랑이신 하나님이 거처할 수 있는 곳은 미움과 좌절이 있는 곳이 아니라 사랑이 있는 집이면 좋다. 모양은 상관없음.” 그렇습니다.

예수의 비유로 가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말씀 전하시고 병 고치러 다니시는데 뒤에서 계속 따라와서 귀찮게 구는 한 여성이 있었습니다. 그 여성은 귀신들린 딸을 둔 어머니였습니다. 예수께 간구합니다. “제발 내 딸한테서 귀신 좀 몰아내 주십시오.” 하도 귀찮게 구니까 제자들이 “병 좀 고쳐서 내 보냅시다.” 얘기를 했는데 예수님께서 이렇게 테스트를 하십니다.

1세기 예수님이 살던 당시, 사회 풍조에서 합당되는 말인데 “내가 자녀들과 함께 식탁에서 빵을 먹는데 빵을 개한테 줄 수는 없다.” 귀신들린 딸의 어머니 앞에서 하는 이 말의 뜻은 ‘당신의 딸은 개다, 개 같은 사람한테 내가 어떻게 내가 함께 먹는 빵을 줄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서 ‘개’라는 말이 우리가 쓰는 ‘개’라는 말과는 말의 느낌이 다를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예수님이 오셔서 이런 표현을 쓰면 당장 고소당합니다. 명예훼손, 인격농락, 유린, 여러 가지로 고소 당했을텐데 1세기에 예수님이 오셔서 다행입니다. 성경말씀 읽을 때 당시 상황에서 이해될 수 있는 말로 용어가 택해졌지, 21세기 말로 쓰이지 않았습니다. 이 말씀을 읽고 예수님도 개라고 했으니 우리도 나가서 개라고 하면 큰일 납니다. 예수님의 말씀도 오해하고 우리가 잘못 쓴 것입니다.

당시 ‘개’는 정신병자, 질병에 걸려서 불치의 병에 걸린 하나님의 진노를 받은 사람, 거기다가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한 자도 지킬 수 없는 신앙적 무능의 사람, 말하자면 변두리, 운명적으로 병자, 이런 사람을 개라고 표현했을 뿐입니다. 중요한 말은 예수님께서 하도 다그치니까 어머니가 하는 말이 “개, 좋습니다. 개도 주인의 밥상에서 떨어지는 빵 부스러기는 먹을 권리가 있지 않습니까? 그것마저 거부하십니까?” 정말 애절한 호소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 믿음이 크다. 인격농락에도 불구하고, 비하에도 불구하고, 인권유린에도 불구하고, 딸을 고치고 싶어하는 어머니의 믿음이 크다, 네 소원대로 되어라.” 그리고 그 순간 딸이 낳았습니다.

오늘 고린도후서에 나온 “여러분은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여러분 안에 하나님이 둥지를 틀고 살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집인 여러분, 제발 방 좀 빌려주시오.” 하나님은 귀신들린 딸한테도 구원의 둥지를 틀고 싶어 하십니다. 병든 자에게 둥지를 틀고 싶습니다. 단, 하나님은 아무데나 둥지를 트는 게 아니라 귀신들린 사람이 사는 귀신들과는 함께 살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사시는 곳은 귀신이 없어야지 어떻게 귀신 집에 하나님이 살 수 있습니까? 귀신은 나간 후에 그 자리에 하나님이 들어와야 딸은 건강을 회복하고 하나님도 영광 받으시기 좋을 것 아닙니까? 중요한 이야기는 하나님은 자기가 살 집을 원합니다. 모든 귀신은 하나님의 요구 때문에라도 이 땅에서 사라져야 합니다.

질병에 걸려서 질병에 허덕이는 사람한테도 하나님이 오십니다. 질병을 두고 하나님은 살지 않습니다. 살의, 죽임, 고통, 좌절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그 곳에서 하나님보고 편히 쉬시라고요? 하나님이 오실 조건은 “질병은 가라, 좌절은 가라, 고통도 가라, 나는 가서 평안을 끼치고 싶다.”

하나님이 우리보고 “나는 살 집을 원한다. 그대들이 내가 살 집이다”, 라고 말씀하셨을 때, 요지는 “나는 구원을 베풀고 그 곳에서 살고 싶지, 구원을 농락당하는 곳에 살고 싶지 않다. 세상의 불의여, 아픔이여, 가라.” 사랑하는 여러분, 어둠과 빛이 공존할 수 있습니까? 이 이야기를 우리 편에서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 편에서 생각합시다.

하나님은 빛이시므로 이 세상을 빛으로 만들어서 주거를 만들고 싶어 하십니다. 어둠 속에 하나님이 둥지를 틀지 않고 어둠을 없애고 빛 대신 오게 하십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은 불의 속에 와서 집을 짓지 않습니다. 불의가 물러가고 하나님의 의가 넘치는 곳에 하나님이 좌정해서 자기 둥지를 틀고 이것이 내 집이다, 말씀하십니다. 세상의 의를 위해서, 사랑을 위해서 우리가 살아야 할 이유는 하나님 때문입니다.

하나님 편에서 보면 “나는 세상과 어떤 타협도 안 된다. 불의 속에는 내가 주거환경이 안 맞는다. 불의 속에는 내가 내 집 둥지 틀지 않는다. 미움 속에 틀지 않는다. 좌절 속에도 틀지 않는다. 살의 속에도 틀지 않는다. 나는 사랑 속에 구원 속에 둥지를 틀고 싶다.” 하나님의 요구가 그렇습니다. “나는 그대 안에 내 집을 잡고 싶다. 나한테 방 한 칸 다오.” 주실 의향 있으십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이 사시는 곳이 어디입니까? 하늘 높은 곳입니다. 우리가 사는 곳은 어딥니까? 낮은 곳 땅입니다. 땅과 하늘은 어떻게 만납니까? 신랑과 신부는 어떻게 만납니까? 이 만남을 중재할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믿고 의지했지만 무엇을 통해서 하늘과 땅을 교통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말씀을 기록한 것이 무엇입니까? 율법입니다. 우리말로 토라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늘과 땅이 만나지 못했으므로 하나님과 주거는 같이 하지 못 했지만 그래도 맘이라도 역사라도 삶이라도 통해 살고자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금과옥조처럼 삼았습니다. 나중에 만든 것입니다만 하나님의 율법을 하나님과 늘 같이 살고, 늘 동행한다는 전제 하에서 율법을 만들었습니다.

십계명의 수는 10개입니다. 10개를 확대해서 이렇게 만들었습니다. “1년이 365일이므로 365일 하루도 빠지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며 삽시다.” 그래서 율법의 여러 가지 계명 수가 토라에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처럼 ‘말라’는 율법이 있습니다. 매일 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부정적인 것을 척결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매일 지킵시다. 그래서 유대교 율법에 보면 365개의 하지 말라는 율법 계명이 있습니다.

그것만 가지고 살 수 없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랑해라. 부모를 공경하라. 의를 세우라.” 하라는 계명도 있습니다. ‘하라’는 율법을 요약해서 248개의 계명을 만들었습니다. 숫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굉장히 중요합니다. 365라는 숫자는 1년 내내 하루도 빠짐없이 하나님과 동행하겠다는 결단이고, 248의 숫자는 인간의 뼈마디 숫자가 248개랍니다. 인간에게 주신 하나님의 모든 신체조건, 이것을 마음과 뜻과 정성으로 담아서 이 모든 것을 다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겠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하늘의 하나님과 땅의 인간이 만나는 복을 누리는 유일한 조건입니다. 그래서 토라의 수가 613개입니다.

예수께서는 오셔서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숫자에 연연하지 말자. 365일, 248도 중요하다. 그러나 순간순간 모든 역사와 인간의 실존 순간도 다 중요하다. 하나님 생각에 하나님이 하늘에 있는 한 인간이 땅에 사는 한 하늘과 땅이 만나는 것은 너무 거북스럽다. 땅을 하늘로 올리든가, 하늘이 땅 속에 오든가 둘 중에 결단이 있어야지.”

남녀가 결혼을 했으면 같이 살아야지, 떨어져 살면 문제가 있습니다. 어디로 합쳐야 합니까? 하나님의 결단입니다. “땅을 하늘로 올리는 것은 문제가 있다. 하늘이 땅에 가자. 하늘의 사람이 땅 사람이 되자.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자.” 우리가 믿는 예수그리스도의 탄생, 크리스마스의 요지는 하나님이 인간과 같이 살고 싶어서 그래서 하나님이 땅 속에 내려오셨고, 땅의 사람이 되셨고, 육의 몸을 입었습니다. 이것을 우리가 성육신이라고 신학적으로 말합니다.

성육의 첫 날이 크리스마스입니다. 오셔서 죽으셨고, 또 땅 사람을 위해서 우리한테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주거 공간을 합치자. 내가 땅에 가마. 땅 사람이 되마.” 그렇게 해서 만난 하나님이 보니까 이름이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하늘에 계신 천지 창조를 하신 창조주 하나님, 육의 몸을 입고 오신 성자 예수그리스도 하나님, 이 분이 부활하신 다음에 지금도 같이 살게끔 능력 주시는 하나님, 성령하나님, 성삼위일체 하나님이 오늘 우리한테 주거 공간을 요구하십니다. “그대들 속에서 살고 싶다. “나는 이 땅에 있는 귀신과는 못 산다. 귀신을 쫓아내자. 이 땅에 부정과 부패에서 내가 살 수는 없다. 몰아내자. 선을 만들어라. 질병 속에 내가 살 수는 없다. 질병을 치유하자. 절망 속에 살 수는 없다. 희망으로 바꿔라.”

우리가 하는 일은, 우리가 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하시는 일입니다.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 돌립시다, 하는 말은 우리와 함께 살고 내 집에 사는 주인이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말입니다. 그 분이 행복해야 제가 행복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겁니다.

유대백성들처럼 우리는 예루살렘에 성전을 짓고 살았습니다만 성전 순례를 일 년에 한 번씩이라도 하지 못했습니다. “성전을 지어서 거룩한 것을 만드는 것은 상징적으로 좋으나, 경동교회를 세우는 것은 좋으나, 이것만 가지고는 하나님의 귀한 역사를 만들 수 없으니 성전을 떠나 직장에 가고 가정에 돌아가고 일터로 가고 각자 자기 방에 가서 여러분이 숨 쉬고 일하는 그곳도 작은 성전이니라. 내가 살고 싶다.”

하나님을 멀리 두고 살지 마세요. 그 시기는 지났습니다. 하나님이 오셔서 우리 안에 거처를 마련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제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제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인입니다. 하나님 때문에. 하나님은 개별로만 그러시는 게 아니라 역사에서도 그렇습니다.

오늘 이사야서의 말씀은 이렇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바빌론이라는 나라의 제국의 포로가 되어서 숨도 못 쉬고 살아갑니다. 오늘 이사야서 49장에는 “내가 오래 참았다. 더 이상 내 백성을 이런 곤고한 틀 속에 넣어둘 수 없다. 곧 이스라엘로 회복시키겠다.” 그 순간의 이야기입니다. 내가 너무 오래 참았다. 내가 바빌론 식민지 속에서 내 둥지를 틀 수 없다. 내 사랑하는 백성이 나와 계약을 맺은 선민이 사는 제국주의 속에서는 내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없다. 이것을 끝내야한다. 곧 페르시아 왕이 와서 제국주의를 몰아내고 이스라엘 백성을 고레스라는 다사왕이 와서 곧 이스라엘 백성을 예루살렘으로 귀향시키는 작전을 합니다.

그 중간에 오늘 말씀이 나옵니다. “내가 오래 참았다. 나는 귀신들린 자 속에서도 집을 지을 수 없지만 압제와 하나님 뜻이 아닌 이방 신들 속에 내 집을 지을 수 없다. 해방시켜주마.” 그래서 역사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해방을 받습니다. 물론 해방시켜준 사람은 고레스라는 페르시아 왕을 통해서입니다.

오늘 전체의 말씀은 하나님은 우리를 더 이상 파트너로만 삼지 않고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주거 공간으로 삼습니다. “너희는 내 집이다.” 하나님이 저희 안에 계시면 하나님은 너무 평안하십니다. 하나님은 행복하십니다. 남편이 아내한테 정말 행복한 공간을 찾았습니까? 아내는 남편한테 있으면 정말 행복하십니까? 평안하십니까? 그래서 평화라고 합니까?

하나님의 공간은, 사람의 공간은 둘이 합쳐서 진실로 하나님 앞에서 복됩니다. 이렇게 표현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요구는 이렇습니다. “참았지만 이제는 내가 영광을 받고 싶다. 그대들 안에서 잠잤더니 행복하다. 내가 영광을 받으니 내 영광을 그대들에게 돌려주고 싶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는 이제는 파트너십만이 아니라 주거공간에 다 꾸밉니다. 저는 이 말씀을 드리면서 살아가면서 하루하루가 제가 일하는 일이, 말하는 것이, 생각하는 것이 하나님의 공간, 하나님의 현존, 하나님이 계시는 곳, 그렇게 되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봅니다.

“안 되면 바꿔라. 하나님의 나라로 바꿔라. 하나님이 있게 하자.” 죽으면 어떻게 됩니까? 죽는다는 말은, 우리 공간에 계셨던 하나님이 거꾸로 우리를 자기 집으로 바꾸어서 우리는 하나님을 집 삼아서 영생을 누립니다. 하나님은 유한한 우리 속에 오셔서 자기 집에 역사를 만들어갑니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 하나님은 우리 안에 오늘 우리는 21세기 맞아서 뭐든지 좋고 아름답고 훌륭한 일을 행하려고 합니다.

한 가지만 기도합시다. 하나님은 멀리 있는 분이 아니고 저를 집 삼아 저 안에 계십니다. 그리고 동행하십니다. 그리고 자기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가십니다. 저도 하나님 안에 삽니다. 이 사실 하나만 확인해 주십시오. 사도바울이 이런 약속을 우리에게 하십니다. 조건은 하나,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하는 백성 주거공간이 됩니다. 거꾸로 하나님의 나라가 주거 공간이 됩니다. 이 약속을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주옵소서. 그대로 이루어지길 빕니다. 주님이 약속하셨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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