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요한복음 11:38~44
설교문
저는 가끔 우리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함께 하다 세상을 떠난 분들을 생각하곤 합니다. 그분들과 함께 했던 지난 날들을 생각하면 그분들에 대한 그리움으로 가슴이 아파오곤 합니다.
한 번 세상을 떠난 분을 다시 볼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고인(故人)이라고 합니다. 죽음은 정말 무서운 것입니다. 한번 가면 다시 못 오기 때문입니다.
이 죽음의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는 자는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아무리 영웅호걸이라도 한번 가면 못 옵니다. 그 유명한 목사님도 한 번 가면 다시 못 옵니다.
그러한 죽음이 두려워 어떤 사람들은 ‘냉동인간’이 되려고 합니다. 세계 최대 규모의 냉동인간 회사를 문화방송의 이 2007년도에 국내에 소개한 바 있습니다.
미국 애리조나에 소재한 알코르(Alcor) 생명재단이 이 그 회사로 1972년부터 인체 냉동보존 서비스를 해주고 있습니다. 현재 74명의 ‘잠재적으로 살아 있는 자’가 이 곳에서 부활의 날을 기다리며 긴 잠을 자고 있습니다.
냉동보존 과정은 법적 사망선고가 내려진 다음에 이뤄집니다. 특수차량을 통해 환자를 알코르사로 수송한 뒤 8명의 요원이 투입돼 냉동을 시작합니다.
먼저 변질을 최소화하기 위해 신체를 냉각시키고 체내에 특수 용액을 흘려보내 몸 수분의 60%를 뺍니다. 이어 부동액을 넣어 급저온으로 유지시키는 것입니다.
이런 과정을 거친 후 냉동된 신체 혹은 장기들은 부활될 때까지 ‘듀어’로 불리는 탱크에 보존됩니다. 부활의 시기는 장담할 수 없습니다. 미래에 냉동인간들을 다시 살려낼 수 있는 기술이 개발될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다.
현재 알코르사의 냉동인간 대기자는 800명을 넘는다고 합니다. 직업, 인종, 나이 등 천차만별이지만 그들은 한정된 수명을 연장시키고 싶은 꿈에 부풀어 있습니다.
현재 냉동인간이 된 사람은 불치병을 앓다 죽기 전에 냉동인간이 된, 세계적인 유원지 미국의 디즈니랜드를 조성한 월트 디즈니(1901~1966년)를 비롯해 1000명을 넘습니다. 이들은 미래 기술의 진보를 믿고 일종의 도박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으로는 죽음을 해결할 수 없습니다. 예수만이 이 죽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이 죽음의 문제에 관해 아무 것도 하실 수 없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아무 희망도 없을 것입니다.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고전15:19).
사망이란 사람에게 있어 최후의 적입니다.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고전16:26).
예수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나사로가 중병에 걸렸다는 말씀을 듣고 이틀을 유하고 그곳에 가시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도착했을 때는 이미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이나 되었을 때였습니다. 아마도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것을 예수께 알리러 간 뒤에 바로 그가 죽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께서 오셨을 때 그의 두 누이들인 마르다와 마리아는 원망스럽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이 무서운 원수인 죽음을 완전히 그리고 영원히 무너뜨렸습니다.
예수께서 죽은 지 나흘이 지나 장사되었던 나사로를 일으키셨습니다. 생명의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이런 일은 우리에게도 일어날 것입니다. 아니 오늘도 일어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말씀의 은혜를 깊이 받고 나사로와 같은 생명의 기적을 체험하는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1. 주님을 믿을 때 생명의 기적이 일어납니다.
예수께서 나사로의 집에 가졌을 때 마르다가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요11:21-22)라는 위대한 신앙고백을 하였습니다.
대단한 고백입니다. 주님이 함께 하시면 죽지 않는다는 것과 예수께서 지금이라도 살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지금이라도 주님이 하시면 하실 수 있다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이미 썩어 냄새가 나는 나사로를 되살리기 위하여 우선 무덤을 가로막고 있는 돌을 옮기라 명하셨습니다.
나사로가 다시 살아나는 것과 같은 기적의 역사를 보면 사람이 해야 하는 일과 주님이 하시는 일이 다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돌을 옮기는 것은 사람이 해야 할 일입니다.
오늘날 질병을 치료할 때는 의사가 처방을 하지만 치료하시는 분은 하나님입니다. 의사는 치료의 능력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치료하십니다. 치료하기 위해 의사가 하는 일은 바로 처방과 봉사입니다. 이러한 치료와 봉사가 바로 인간이 해야 하는 행위, 즉 돌을 옮기는 행위입니다.
그런데 마르다는 나사로가 죽은 지 벌써 나흘이나 지났기 때문에 냄새가 날 정도로 부패해 있다고 했습니다. 만일 썩지만 않았어도 주께서 기적을 일으키실 수 있지만 썩어서 이제는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만일 마르다가 22절에서 고백한대로 주님이 하시려고 하시면 언제라도 하실 수 있다고 믿었다면 죽은 지 나흘이 지났건 이미 시체가 썩었건 예수의 능력을 믿었을 것입니다.
그녀가 썩은 시체를 바라보지 않고 오직 생명의 주님을 믿음 가운데 바라 보았다면 예수의 말씀의 권세를 믿고 예수의 명령이 아무리 불합리하게도 보여도 순종했어야 합니다.
그러나 마르다는 예수의 명령이 현실적으로, 이성적으로 터무니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녀가 생명의 기적을 체험하려면 그녀의 마음을 굳게 닫고 있는 의심의 돌문, 불신의 돌문, 이성의 돌문, 지식의 돌문, 합리적 돌문을 걷어 내야 합니다.
이 돌문을 옮기기 전에는 마르다는 생명의 기적을 체험할 수가 없습니다. 생명의 기적을 일으키시는 예수를 진정으로 만날 수 없습니다.
파스칼은 “진실로 온전한 신앙은 인간적 고집과 인간의 이성을 십자가에 못박는 것이다”고 했습니다. 참된 신앙은 주위 환경과 상황과 사람을 보지 않고 오직 모든 능력과 구원이신 예수만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과학만능주의에 살고 있는 우리는 과학적으로 입증되지 않는 한 믿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과학으로 죽음의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또한 어떤 종교로도 불가능합니다. 죽음의 문제는 생명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데서만 해결의 실마리가 열립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예수에게 우리의 생명과 미래를 거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11:25-26)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음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예수 외에는 이런 일은 일어나지도 않았고 일어 날 수도 없습니다.
2. 감사의 기도를 드릴 때 생명의 기적이 일어납니다.
예수께서는 공생애 내내 큰 일을 앞두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향하여 기도를 드렸습니다. 어떤 큰 일을 앞두고 하나님과 내밀하게 교제하는 이 기도의 시간이야말로 영적인 힘과 능력을 덧입는 귀중한 시간입니다.
이 기도는 자기의 소원을 하나님께 아뢰는 간구가 아니라는데 유의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의 기도는 거의 간구와 청원이지 않습니까?
특히 한국 교회의 기도는 더욱 그러합니다. 거의 자기 가족의 건강과 물질의 축복과 성공에 한정되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들의 기도가 능력이 없습니다. 이런 기도에는 영력이 없습니다.
물론 이런 기도 역시 안하는 것 보다는 낫습니다. 그러나 이런 기도보다는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이웃을 위해 기도하는 예수의 기도의 모형을 닮아야 합니다.
주님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기도를 이내 이루어주실 것에 감사했습니다(41절). 우리의 기도도 얼마나 많이 이루어 주셨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꼭 응답해 주십니다.
저와 같이 부족한 사람의 기도도 이루어 주시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제 기도 가운데 이기적인 기도까지도 응답해 주셨습니다.
그런 하나님께 감사가 너무도 없었음을 생각할 때 하나님께 죄송하기 짝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많은 응답으로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감사를 잊어버리거나 너무 작은 경우가 많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 자녀가 임신하기를 그렇게도 기도하여 응답을 받고도, 자녀의 취직을 위해 기도하여 응답을 받고도, 또 여러가지 축복을 받고도 감사가 전혀 없습니다.
너무 이기적인 신앙입니다. 주님을 섭섭하게 하지 마십시오. 우리들은 개인적인 희망을 구해 그것이 이루어질 때에는 작은 감사가 있다가도 이루어지지 않으면 불평, 불만, 원망을 합니다.
너무 안타까운 일입니다. 우리가 드린 바람직한 기도는 나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기도는 기필코 이루어질 것을 믿고 먼저 감사하면서 기도해야 합니다.
이렇게 감사하는 사람, 감사가 수반된 기도를 하는 사람에게 반드시 생명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미국의 어느 목사에게 딸이 하나 있었는데 그만 딸이 교통 사고로 몸을 쓸 수도 없고, 기억력을 상실하여 병원에서 오랫동안 신세를 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너무 괴로웠습니다. 하나님께 기도도 많이 했습니다. 3년이 지난 어느 날 그가 병원에 자동차를 타고 가면서 그 동안 하나님께 고쳐 달라는 기도는 많이 했지만 감사는 한 번도 안한 것이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회개하는 심정으로 저런 모양으로라도 딸을 살려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 기도를 드린 다음 병실 문을 열었는데, 딸이 일어나서 아버지! 하고 안기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감사할 때 하나님은 딸을 고쳐 주셨습니다. 감사함에 생명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우리는 감사함으로 구해야 할 것입니다.
3. 하나님의 영광을 위할 때 생명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예수께서는 무슨 일을 하시든, 어떤 경우에서든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셨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예수를 믿어 구원을 받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데까지 이르기를 원합니다.
예수의 모든 사역은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것이었으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었습니다. 이번 나사로를 죽음에서 부활하도록 한 것도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고 한 것이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마르다와 마리아의 연락을 받고도 바로 가지 않고 죽은지 나흘이 지난 뒤에 도착하였습니다. 또한 나사로의 시체가 썩은 뒤에 가신 것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고 한 것이었습니다.
주님은 인간이 도저히 할 수 없는 기적을 행하여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를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하였습니다. 예수께서는 자기 이름을 높이려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 영광만이 관심이 있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자신의 뜻과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혼신의 노력을 기울이지 않습니까? 또한 어렵거나 실패했을 때 하나님을 원망하고 하나님을 떠나기까지 합니다.
이제 우리는 자기의 목적과 영광만 내세우는 것을 삼가고 하나님 중심, 하나님 영광만을 추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위해서 자신을 바치는 자에게 축복을 부어 넘치도록 부어 주십니다.
1990년 가을, 북경에서 열렸던 아시안 게임에서 너무나도 감동적인 장면이 있었습니다. 현정화, 홍차옥 두 탁구 선수가 경기에 임하기 전, 그리고 경기 후에 기도하는 모습이었습니다.
특히 극적으로 이긴 복식 경기에서 두 선수는 승리의 기쁨으로 환호하기 전에 먼저 코트에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공산주의 사회 이념에 철저하게 물들어 무신론 사상이 팽배한 중국 한복판에서 그들의 기도는 곧바로 그리스도의 전파였습니다.
한 사람의 신실한 그리스도의 증인은 직접 나가서 전하지 못하는 천여명의 신학자보다 훌륭할 수도 있습니다. 한 사람의 믿음의 표시가 엄청난 전도를 가능케 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은 영적인 것을 표현할 때 더 많이 성장합니다. 우리는 생명의 영을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다른 이들에게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세계 최고의 부자였던 록펠러가 53세에 무거운 병으로 죽음의 위기에 처했습니다. 그는 살려고 유명한 의사는 다 동원했으나 그 병세가 더 악화되어 갔습니다.
그러나 그가 “돈은 아무 것도 아니다. 내 모든 것은 하나님이다”고 고백하고 그의 돈을 드려 세계의 가난한 자들의 병을 고쳐주는 일과 주님의 교회의 일을 할 때 언제 그 병이 고쳐졌는지 고쳐져 98세까지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 때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은 한없이 큽니다. 우리는 개인적인 소원을 아뢰기 전에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하나님이 영광받을 만한 일이 무엇인가를 먼저 살펴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믿고 바라보고 그분의 가르침대로 살 때 우리의 생명은 기적의 삶을 살게 되고 나를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바로 나의 영광이라는 사실을 알고 먼저 주의 복음의 역사에 헌신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