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가 손양원 목사 서거 60주년을 기념하는 학술 심포지엄을 28일 새문안교회 언더우드교육관에서 열었다. 김흥수 연구소장은 “손 목사님을 학문적으로 돌아보는 기회는 많지 않았다”며 ‘학술적’으로 손양원에 접근하는 데 의의를 부여했다.
손양원은 신학자가 아닌 목회자이기에, 지금까지 그에 대한 접근은 주로 ‘신앙적’ 측면에서 이뤄졌다. 그는 애양원 사역을 통해 나환자들을 자식처럼 돌봤고,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맞서 싸웠다. 아들을 죽인 청년을 양자로 삼았고, 6.25 때 환자들 곁을 지키다 결국 죽음을 맞았다.
▲‘산돌 손양원 목사 순교 60주년 기념 학술 심포지엄’ ⓒ이지수 기자 |
김승태(세계선교신학대 강사)는 손양원이 신사참배를 거부한 근저에는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에 가까운 재림론’이 있다고 주장했다. 조서에서 손양원이 “조선 교회는 비상시대이며 수난시대이다. 각 국가 간에 전쟁이 있고 (…) 신사참배 강요 등으로 우리들을 괴롭히고 있다. 이것이 즉 말세 현상으로 우리가 대망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재림도 목첩간에 임박해 있다”고 진술했다는 것이다.
또 이런 재림론은 손 목사가 1921년 동경에 유학하여 나카다에게 받은 영향일 것이라 추측했다. 그 근거로 나카다의 설교를 듣고 손 목사가 “참된 신앙의 의의를 체득했다”고 진술한 「체형조서」를 들었다.
반박론도 있었다. 양현혜(이화여대 교수)는 “길선주 목사의 ‘말세학’의 영향을 생각해볼 수 없을까. 조선 장로교의 대부라는 길선주 목사는 1928년 「말세론」을 저술했고 1924년부터 1935년 소천하기 전까지 전국 교회의 부흥회와 사경회에서 말세학을 강의했다”며 “장로교인인 손양원 목사가 이렇게 왕성한 활동을 한 길선주 목사의 영향권 밖에 있었으리라 생각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최병택(공주교대 교수)은 손양원의 구라사업(나환자를 대상으로 한 의료와 복음 선교)을 분석했다. 손양원은 ‘하나님 나라가 건설되면 신앙의 힘으로 단번에 한센병이 치유된다’는 이른바 ‘전쾌론’을 앞세워 환자들로 하여금 신앙생활에 주력할 것을 요구하였는데, 이러한 그의 신앙관은 “언뜻 보기에 현대 의학의 발달에 따라 그 의미가 퇴색되어가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러나 “환자들에 대한 순수한 열정과 헌신은 기독교적 봉사의 전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간과할 수 없고, 전쾌론도 질병과 전쟁이 없는 평화로운 사회를 갈망한다는 점에서 현대 한국 기독교회에 시사하는 점이 없지 않다”고 밝혔다.
장동민(백석대 교수)은 손 목사의 삶을 기존의 시각과 다르게 들여다봤다. 그는 좌우 이데올로기를 뛰어 넘을 수 있는 가능성을 손양원으로부터 찾고, “물론 손양원은 누가 뭐래도 반공주의자”였지만 “우익에 대하여도 비판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마지막 설교문 ‘한국에 미친 화벌의 요인’에서 그의 비판 대상은 국가 지도자, 경찰, 미군정, 선교사, 교회 지도자를 망라한다. 좌익과 우익을 동시에 비판하고 있는 그의 마음에 좌와 우를 뛰어넘을 사회사상이 꿈틀거리고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번 심포지엄에서는 손양원이 졸업한 경남성경학교가 당시 명칭이 ‘~학원’이었다는 점, 그의 목사 안수가 1939년 7월 엉거 선교사에 의해 비공식적으로 이뤄진 사실(공식 안수는 1946년 제47회 경남노회 속회) 등이 새롭게 밝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