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공중예배에서 목회기도는 원칙적으로는 목사가 드리는 기도인데 한국교회에서는 언제부터인지 장로들이 도맡아서 드리고 있다. 목회기도의 본 의미를 미루어 본다면 목회기도는 목사가 교회와 나라 더 나아가서는 전 세계의 피조물을 대신하여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고, 민족과 국가와 인류의 죄악의 용서를 위하여 하나님께 중보의 기도를 드리는 것이어서, 예배 행위는 중보자가 드리는 하나의 제사의식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목사는 옛 이스라엘의 제사장의 직책이며 더 나아가서는 영원한 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대신하는 중보자이며 제사장이다. 베드로는 그리스도인을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했다. 왕은 나라와 국민을 위해 천신에게 제물을 바치고 제사하는 사람이다. 이러한 중대한 의미를 가진 목회기도를 목회 전문직이 아닌 장로가 드릴 때 그의 목회기도가 올바른 것이 되기 어려워 길어야 2, 3분간이다.
초대교회에서는 목회기도가 길어서 초신자는 그 시간에 밖에 나가서 기다렸다. 한국교회에서 장로들에게 목회기도를 시키면서 목회기도의 의미와 내용과 방법을 가르쳐주는 목사가 얼마나 있을까?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장로가 제대로 기도를 드리지 못하여 공중예배에 부합하지 못한 기도를 드리게 된다. 해방 직후 기장의 성남교회를 창립하신 송창근 목사는 목회기도를 자기가 드렸는데 그 까닭을 그는 알고 있었지만 장로들은 섭섭하게만 생각했지 그 이유를 몰랐었다.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 특히 요즘의 장로들의 목회기도는 하나님을 높이고 그의 존귀와 권능과 자비를 찬양하는 인사(?)말 없이 바로 무엇 때문에 감사하다는 말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우리의 죄와 민족과 인류의 죄에 대한 참회와 용서를 비는 기도 없이 무엇을 해달라는 기도를 드린다. 한 주 동안 교회 안에서 생긴 일이나 교인들 가정에서 생긴 희비간의 사건을 들어서 온 교인이 같이 기뻐하고 슬퍼하는 기도를 드려야 할텐데 한 주 동안 자기 직업에 분주하던 장로가 그러한 일을 모르고 기도를 드리고 있으니 성도의 친교가 두터워질 수 없다.
나라 안팎의 큰 사건들을 위한 중보기도도 없이 자기 교회만을 위한 기도를 드리며, 하나님께 영광 돌릴만한 일도 한 일 없이 영광을 받으시라고 말한다. 그리고 민족과 교인과 교회가 짓는 죄에 대한 사죄 없이 축복만 빈다. 특히 정치 대립이 심한 한국에 사는 우리 한국교회 목사나 장로나 일반 신도들이 나라를 위한 기도를 바로 드리지 않는다. 어떤 교회의 장로의 목회기도에서는 한 번도 나라를 위하거나 위정자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을 못 들었다. 자기 지방의 정치 경향이나 자기의 소속 정당 정치 때문이었다. 대통령이 어느 지방, 어느 정당이든 나라의 영도자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나라를 위한 기도이다. 잘못은 지적하고 바로 다스리도록 기도해주어야 하고 잘하는 일은 칭찬해주어야 한다. 군정 때 어느 신학생이 채플 시간에 대통령을 죽여달라고 기도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었는데, 그런 사람이 목사가 되면 어떻게 올바른 정치참여 운동을 할 수 있을까?
필자의 세대 사람들은 나라 잃은 불쌍한 시대를 살아서 그런지 이제 나라를 되찾고 보니 누가 대통령이든지 일단 그가 바로 다스려주기를 기도할 마음이 생긴다. 해방동이나 6.25동이들은 자유나 평등만 알뿐이어서 그런 것들을 위하여 자기들의 부모 세대가 피눈물 나는 기도와 고통을 겪은 아픔과 슬픔을 모르고 자유롭지 않다거나 평등이 없다고만 불평한다. 과거 역사의 경험이나 그것에 대한 올바른 인식 없는 세대의 사람들이 어떻게 국가와 민족의 역사의 향방을 잡을 수 있을까?
기독교 신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정치의식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세상 나라의 정치에 대해서는 중립적 의식으로 예는 예 아니오면 아니오로 끝나야 하는 것이지 거기서 더 나아가 정치적 맹세를 하는 것은 악이 된다(마태 5:37). 기독교는 가이사의 손에 쥐인 시녀 종교가 아니므로 어떤 정당이나 위정자에 대해서도 예와 아니오가 있어야 한다. 또 기독교는 하나님의 권위를 일부 행사한다고 볼 수 있는 위정자와 국가에 대하여 언제나 대립하는 과격한 종말주의자들과 이원론자일 수 없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위정자에게 간신 노릇을 해도 안되지만 위정자를 무조건 반대하여 나라에 역도가 되는 것도 원치 않는다. 옳고 잘하는 것도 지방과 정당을 캐물어서 반대하는 것은 나라에 반역하는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때 독일의 나찌에 대항한 독일 개신교의 일부 신학자들이 ‘복음주의 교회’라는 가치관을 들고 ‘발멘 선언’을 만들어 히틀러에게 반항하다가 폴 틸리히 같은 신학자들이 미국으로 망명했다. 칼 바르트도 그 선언문 작성자 중의 한 사람이다. 오늘날 독일의 이 복음주의 교회가 건재한다. 한국에서는 복음주의자라는 사람들은 무조건 여당으로만 치부되고 있고 진보주의자라는 사람들은 무조건 반정부인사라고 못박고 있는 듯한데 이해 못할 일이다. 복음주의자는 ‘하나님나라 수호자’를 자처하고 진보주의자는 ’하나님나라 확장자’를 자처하는데 수호자와 확장자 사이의 불화의 원인이 무엇일까? 그 원인이 어떤 정권에 대한 의견 대립인 듯한데 양자가 예만 또는 아니오만 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 교회의 목사나 장로들이 나라를 위한 중보기도가 다 제대로 될 수 없을 것이다. 보수와 진보 사이의 싸움으로 하나님나라마저 침노 당하여 두 조각 나는 것이 아닐까? 바울의 말대로 하나님나라는 어지러운 곳에 있지 않다.
시애틀에서 이장식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