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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천 칼럼] 전쟁과 평화

▲기장신학연구소 이재천 소장 ⓒ베리타스 DB
I. “전쟁은 두려움에서 비롯된다.” 토마스 머튼(Thomas Merton, 1915-1968)이 남긴 말이다. 미국 켄터키주 겟세마니 수도원(the Abbey of Gethsemani)에서 기도하던 머튼은, 세계적으로 전쟁광증이란 질병이 전염병처럼 퍼져나가고 있는데, 이 병을 가장 심각하게 앓고 있는 나라가 미국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미국이 종교적인 진리를 수호하고, 자유와 영적인 가치들을 지키기 위해서 전쟁을 한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참담한 파괴의 늪으로 뛰어들고 있을 뿐이라고 했다.

머튼은 오늘의 시대를 살아가는 크리스천으로서 감당해야 할 가장 우선적인 과제가 전쟁에 반대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현대 사회의 전쟁이 인간 개인뿐만 아니라 인류 전체의 생존권을 침해하는 심각한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머튼은 크리스천으로서 전쟁에 반대하는 책임을 감당하기 위해서 먼저 갖추어야 할 조건을 제시했다. 나 자신과 인간 사회의 심리적 행태에 대한 입체적인 성찰이다. 머튼의 안목에 의하면, 오늘날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과 갈등의 위기는 실은 우리 자신이 초래한 것이기도 하다. 모든 전쟁의 근본에는 ‘두려움’이 자리 잡고 있다. ‘너’에 대한 두려움과 불신은 실은 ‘나’ 자신에 대한 불신과 불가분의 관계이다. 나아가 서로에 대한 불신은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믿음을 갖지 못함에서 비롯하는 것이다. 평화를 사랑하게 되면, 불의를 미워하게 되고, 세상의 폭력적 지배의지나 탐욕을 미워하게 되기 마련이다. 크리스천이라면 남에서가 아니라 먼저 자기 자신에게서 평화를 해치는 요소들을 발견하고 그것을 미워할 줄 알아야 한다.

머튼은 크리스천의 전쟁 반대는 타자와의 관계에서 폭력적이고 공격적인 나 자신의 본성을 억제하고 희생하고자 하는 신앙적 깨달음을 전제로 해야 함을 밝혀주었다. 오직 겸손한 사랑만이 전쟁의 뿌리가 되는 두려움과 공포를 해소시킬 수 있다. 크리스천으로서 ‘전쟁에 반대하는 전쟁’에서 사용해야 할 가장 강력한 영적 무기는 기도와 자기희생이다. 

II. 물리학자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이 가장 고통스러워했던 것은 자신이 인간이라는 타락한 종에 속해있다는 사실이었다. 아인슈타인이 보기에 자연계에서 오직 인간만이 우주의 숭고한 법칙을 위반하는 존재이다. 인간은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사태’인 전쟁을 일으켜 헤아릴 수 없는 생명을 학살하는,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는 행위를 서슴없이 자행하는 존재이다.

아인슈타인의 관심은 물리학의 영역에 제한되지 않았다. 제일차 세계대전을 경험하면서 아인슈타인은 인간의 잔혹성과 증오심에 눈을 뜨게 되었다. 그는 사람을 죽이는 방식으로 인간 사회의 갈등, 특히 국가 사이의 갈등을 해결하려는 것 자체가 터무니없는 일임을 깨닫고, 평화주의적 신념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에게 평화주의는 폭력적인 수단을 사용하는 국가에 대해서 무방비상태가 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나찌 독일과 같은 악한 세력에 맞서 평화를 지켜내기 위해서는 주변국들의 재무장이 필요함을 역설했다. 그리고 전쟁을 폐지하고, 폭력적 수단에 의존하지 않고 국가 사이의 평화를 지켜내기 위한 세계적인 기구의 수립을 지지했다. 1914년에는 유럽 통합(United Europe)을, 1919년에는 국제연맹(League of Nations)을, 그리고 1945년에는 국제연합(United Nations)의 출범을 지지했다.

권력을 장악한 나찌 정부에 의해서 독일로부터 강제로 축출된 아인슈타인은, 1933년 이후 20여 년 동안 이민자로써 미국에 거주하면서 점차 ‘과격한 평화주의자’가 되었다. 그는 미국 사회가 경제적 대공황을 지나면서 매우 군사적이고 공격적인 사회로 변했음을 안타까워했다. 공산 러시아에 대한 공포심이 일반 시민들로 하여금 그러한 변화를 받아들이게 하는 수단이 되었다. 평화를 옹호하는 것이 비애국적인 행위로 의혹을 받게 되고, 정치적 박해를 감수해야하는 상황이 되었다. 평화운동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점점 줄어들면서, 아인슈타인은 자신이 점점 소외되고 있음을 느꼈다. 보수화로 치달아 가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아인슈타인은 평화운동에 참여하기를 주저하는 학자들과, 민족주의적인 선전에 휘말려 진실을 외면하는 대다수 시민들의 무지함에 대해 개탄했다.

세계전쟁을 겪은 지 한 세대가 채 지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또 다시 전쟁으로 치닫고 있는 사회 현실을 목도하면서, 아인슈타인은 과학자적 양심을 포기할 수 없었다. 그래서 기꺼이 그 자신의 표현에 의하면 ‘돈키호테’(Don Quixote)가 되고자 했다. ‘평화를 위한 돈키호테’는 이렇게 외쳤다: “선한 전쟁은 없으며, 나쁜 평화도 없습니다. 나는 평화를 위해서 기꺼이 싸우고자 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전쟁에 나서기를 거부하지 않는 한 전쟁은 결코 끝날 수 없습니다.”

III. 1898년 2월, 쿠바의 하바나 항구에 정박하고 있던 미국 전함 ‘메인호’(USS Maine)가 의문의 폭발로 파괴되어 바다 속으로 가라앉았다. 이 사고로 인해서 267명의 수병이 목숨을 잃었다. 폭발의 원인을 밝히는 확실한 증거물은 없었지만, 분노의 물결이 순식간에 미국을 휩쓸었다. 당시 대통령이었던 맥킨리(William McKinley, Jr., 25대)는 전쟁이 새로운 경제제국을 건설하기 위한 근거를 제공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결국 미국은 스페인에게 전쟁을 선포(Spanish-American War, 1898)하고, 쿠바에 군대를 보냈다.

스페인과의 전쟁이 발발하자 “거친 기병대”(Rough Riders)란 자원병 부대를 조직해서 전쟁에 참가한 인물이 있었다. 그는 곧 전쟁의 영웅으로 떠올랐다. 그 여세를 몰아 전쟁 이후에 부통령이 되더니, 이어서 1901년에는 맥킨리가 암살되어 공석이 된 대통령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가 바로 테오도르 루즈벨트(Theodore Roosevelt)이다.

루즈벨트는 미국이 군사력과 경제력을 바탕으로 해서 국제 사회에서 새로운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고 생각한 확장주의자였다. 그는 “평화로운 승리는 전쟁에서의 압도적인 승리만큼 위대한 것이 아니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루즈벨트는 중남미 지역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면서 ‘곤봉 정책(Big Stick Policy)’이라는 강경정책을 추진했다. 미국이 태평양으로 진출하기 위해서 파나마 운하가 전략적 가치가 있음을 간파하고, 프랑스 운하 회사로부터 파나마 운하 건설 권리를 사들였다.

루즈벨트가 주도하는 미국의 제국주의적 확장 행태를 보면서, 철학자요 심리학자였던 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 1842-1910)는 “루즈벨트는 전쟁을 마치 인간 사회의 가장 이상적인 조건인 것처럼 요란하게 선전하면서, 평화는 군더더기가 덧붙여진 것처럼 가치 없는 것으로 취급하고 있다.”고 우려를 표명했다.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하겠는 것은 루즈벨트가 제임스가 하바드(Harvard College)에서 철학을 가르쳤던 제자였다는 사실이다.

IV. 신학자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iebuhr)는 루즈벨트가 호전적인 정책을 추진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국민의 암묵적인 동의가 있었음을 밝힌다. 니버는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에서, 현대의 전쟁이 경제적이 능력과 특권을 차지한 현대 자본주의 체제에 의해서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라고 지적한다. 니버는 일반 국민들의 좌절된 충동이 스페인과의 전쟁에서 야심적인 행동을 보여준 루즈벨트라는 개인에게서 상징적인 대리 만족을 발견할 수 있었다고 분석한다. 팽창하려는 국가의 ‘권력에의 의지’와 평범한 사람들의 폭력적 열망이 합쳐져 전쟁으로 표출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니버가 현대 산업 자본가들이 필요로 하는 원료와 시장, 그리고 미개발 지역의 통치권을 둘러싼 경쟁이 바로 현대 전쟁의 계기임을 간과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가 밝히고자 했던 것은, 지배적인 경제 집단들의 야심과 탐욕만이 국제 분쟁과 전쟁의 유일한 원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일정한 세력을 형성하게 된 모든 사회 집단은 제국주의적 야심을 발전시키는 경향이 있다. 개인과 마찬가지로 모든 집단은 생존의 본능에 뿌리를 두면서 동시에 그것을 넘어서려고 하는 팽창적인 욕망을 갖고 있다. 개인적으로든, 집단적으로든, 인간 사회에서 삶에 대한 의지는 권력에의 의지로 전환되기 마련이다. 종교집단도 이러한 현상에서 예외는 아니다.

니버의 현실주의적 안목에 의하면, 안타깝게도 이 세상의 평화는 강제력에 의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항상 불안정하기 마련이다. 이 세상의 평화는 사회적으로 갈등을 빚는 이해관계의 조정에 의해서 부분적으로 달성되기도 하지만, 그것마저도 서로의 권리에 대한 도덕적이고 합리적인 조정에 의해서는 결코 이루어지지 않는다. 가족처럼 친밀하고 직접적인 사회 집단들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강제력을 배제하고 도덕적이고 합리적인 수단으로 인간 사회의 평화가 유지되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본성을 직시하자면, 인간 사회의 항구적인 평화는 인간 자신에 의해서 결코 실현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그것은 개인의 양심과 통찰력에 의해서 생겨난 환상일 뿐, 인간의 집단에 의해서는 실현될 수 없는 꿈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미래 사회를 향한 우리의 관심은 강제가 없이 완전한 평화와 정의가 실현된 이상 사회의 건설이 아니라, 충분한 정의는 있지만, 동시에 사회적인 정의를 유지하기 위한 강제력이 비폭력적인 사회의 건설에 있다.

인간은 본성상 이기적 충동과 이타적 충동을 함께 갖고 태어난 존재이다. 인간 사회의 갈등과 불의의 궁극적 원천은 인간의 무지와 이기심에 있다. 인간 존재의 한계성을 직시할 때, 역사의 투쟁을 초월하여 역사의 지평을 하나님의 나라와 동일시하려는 순수한 평화주의조차도 그것이 존재할 수 있는 사회조건을 안정시켜 놓은 세상 권력에 기생하고 있는 것임을 발견하게 된다.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죄인’일 뿐이다.

이 땅에 참 평화를 이루실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시다. 다만 우리는 그의 뜻을 땅에서도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도구로 쓰일 뿐이다.



※ 외부 필자의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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