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경동 설교] 살리는 사랑

2010년 10월 10일 설교자 박종화 목사

성경본문
  
이사야서 53:1-5

우리가 들은 것을 누가 믿었느냐? 주님의 능력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그는 주님 앞에서, 마치 연한 순과 같이, 마른 땅에서 나온 싹과 같이 자라서, 그에게는 고운 모양도 없고, 훌륭한 풍채도 없으니,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모습이 없다. 그는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고, 버림을 받고, 고통을 많이 겪었다. 그는 언제나 병을 앓고 있었다.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돌렸고, 그가 멸시를 받으니, 우리도 덩달아 그를 귀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는 실로 우리가 받아야 할 고통을 대신 받고, 우리가 겪어야 할 슬픔을 대신 겪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받는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고, 그가 상처를 받은 것은 우리의 악함 때문이다.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써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매를 맞음으로써 우리의 병이 나았다. 아멘.

야고보서 2:14-17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누가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도 행함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런 믿음이 그를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그 날 먹을 것조차 없는데, 여러분 가운데서 누가 그들에게 말하기를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하게 하고, 배부르게 먹으십시오" 하면서, 말만 하고 몸에 필요한 것들을 주지 않는다고 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와 같이 믿음에 행함이 따르지 않으면, 그 자체만으로는 죽은 것입니다. 아멘.

마가복음서 12:28-31

율법학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다가와서, 그들이 변론하는 것을 들었다. 그는 예수가 그들에게 대답을 잘 하시는 것을 보고서, 예수께 물었다. "모든 계명 가운데서 가장 으뜸되는 것은 어느 것입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우리 하나님이신 주님은 오직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여, 너의 하나님이신 주님을 사랑하여라.`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여라.` 이 계명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아멘.
 
설교문  
  
<살리는 사랑>

며칠 전에 어느 복음주의 협회가 주관하는 모임에서 이런 주제를 가지고 기도회를 열었습니다. 그동안 우리 곁을 떠나신 목사님들 가운데 한국교인들에게 영향을 많이 주신 분들을 꼽아서 추모기도회를 가졌습니다. 가신 순서대로 한경직 목사님, 강원용 목사님, 김준권 목사님, 정진경 목사님, 그리고 최근에 돌아가신 옥한흠 목사님을 추모했는데 저는 강원용 목사님 추모를 맡았었습니다.

이분들이 훌륭하게 사셨고 좋은 목회자로 사셨지만, 선한 목회자들이 생을 마감할 때 전부 다 아름답게 가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훌륭하시던 분이 치매로 고생하면서 가신 분도 있고, 그냥 가셔도 될 분이 암의 고통에서 지내다가 가신 목사님도 계셨고, 하나님께 가는 방식이 똑같이 평화스러운 것은 아닙니다. 우리 강 목사님이 제일 행복하고 편안하게 가신 것 같습니다.

비록 이 땅에서 살다가 돌아가시기 전에는 병마에 시달리거나 아픔이 있고 고통스러웠을지라도 이 추모를 하면서 느낀 점은 “목사님들 사랑합니다. 목사님들도 우리 사랑하셨죠? 하나님의 사랑은 얼마나 크겠습니까? 또 한 가지, 사람은 몸으로도 살고 정신으로도 살고 영으로도 삽니다. 몸만 가신 목사님들, 지금도 살아계시는군요. 지금도 생명이 넘쳐 나시는군요.” 그런 마음을 느꼈습니다.

최근에 제가 신문을 읽다가 충격을 받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작은 충격이긴 합니다만 행복과 희망을 전했던 전도사 한 분이 목숨을 끊었다고 합니다. 최윤희 씨라는 방송인인데 이 분 유서에 보니까 통증이 심해서 견딜 수가 없었고, 그런 나를 사랑하는 남편 혼자 있게 할 수 없었고, 그래서 같이 갑니다. 그러면서 목숨을 끊은 이야기입니다. 이분이 책을 20여권 이상 썼다니까 책이라도 목숨 끊지 않는 생명의 이야기로 알고 읽혀지길 바랍니다.

저는 아직 죽어보질 못했습니다. 죽을 질병에 아직은 고통을 당하면서 신음한 적은 없습니다. 그런데 저희 앞서 가신 분들을 병문안 하면서 제발 죽을 때 편안하게 죽었으면 하는 마음이 굴뚝처럼 일어납니다. 그것은 제가 선택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명을 살아야 하고 죽음이 있으면 죽음을 하나님께 드려야 하고, 그 죽음을 끌어안으시는 하나님이 다시 영원한 생명을 우리에게 주시고 이 신앙 하나 가지고 지금도 살아갑니다.

오늘 말씀 보니까 하나님께서 구약, 서신서, 복음서를 통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구약을 통해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고통을 받지만 어떤 사람은 우리가 받을 고통을 대신 받고, 우리가 겪어야 할 슬픔을 대신 겪고, 우리가 받아야 할 찔림을 대신 받고 그래서 그분이 받은 상처는 우리 약함 때문이고 그분이 받은 죽음의 징계는 우리의 구원과 평화 때문이고 그가 매 맞음으로 우리의 질병이 나았습니다. 구약시대, 이사야가 읊었던 고난 받는 종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 고난 받는 종이 한참 후에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인 것을 모른 채 읊었지만 우리는 그분이 우리 죄를 대신해서 죽으신 예수그리스도라고 믿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이 예수의 죽음이지만 그 죽음은 저를 대신한 죽음이기 때문에 제가 예수를 믿고 여러분이 예수를 믿습니다. 대신 죽음, 대신 받는 고난, 이렇게 우리한테 대신 죽을 수 있는 사람이 또 있을까? 그분은 우리 구원을 위해서 죽으신 예수그리스도십니다. 저는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을 보면서, 또 고통을 당하고 고통을 이기고 살아야 하는 것을 보면서, 죽음과 생명, 사랑과 미움, 여러 가지 가운데서 우리는 홀로는 살 수 없는 존재구나. 하는 것을 느낍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신 하나님, 그 분을 사랑하십시오.

두 번째, 생각할 수 없는 문장이 또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사랑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사랑하는 모습 그대로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이 전제 속에는 홀로 계신 하나님, 그 하나님을 우리가 믿는 것이 아니고 죽어주실 수 있는 하나님, 고통을 대신 끌어안아줄 수 있는 하나님으로 살겠다고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표출합니다. 그래서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은 홀로 사신 하나님이 아니고 자기가 만드신, 고통도 받아야 하고 힘도 없고 병마에 시달려야 하고 절규도 해야 하고 이런 인간과 함께 사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이렇게 관계를 맺고 사시는 하나님이시지 나홀로 존재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분 말씀이, 사랑하는 여러분, 홀로 사시는 줄 아십니까? 홀로 살지 않습니다. 누군가와 같이 삽니다. 이 누군가가 바로 이웃입니다. 이웃과 살아가면서 하나님이 여러분과 함께 살면서 사랑으로 살듯이 여러분도 사랑으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고통과 슬픔이 있고 아픔이 있는 것은 누구나 다 공통입니다. 아픔이 없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속을 들여다보면 다 아픔이 있습니다.

언젠가 인용한 적이 있는데 제가 감동받은 이야기 하나 들려드리겠습니다. 우리 주변에도 요즘에 많이 생기는 스토리입니다. 중증 장애자를 낳게 된 젊은 어머니입니다. 기도 중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게는 작고 예쁜 십자가 하나가 있습니다. 원한 것도 아니었고 바라는 것도 아니었는데 좋다고 가질 수도 없고, 싫다고 버릴 수도 없고 웃으면 웃어서 슬프고, 울면 울어서 슬프고, 잠들면 잠들어서 슬프고, 그런데 너무 작고 예뻐서 가슴 저린 나만이 안고 가야 할 아주 작고 아주 예쁜 십자가 하나 있습니다.” 엄마의 고백입니다.

저는 이 고백문을 읽을 때마다 이런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저희를 끌어안고 계시는데 저는 장애인입니다. 비록 몸에서는 의학적으로 장애인이 아닐 수 있지만 하나님 보시기에 제가 작은 장애인인데 울어도 웃어도 잠들어도 슬픈 이야기, 그분이 오늘 저를 끌어안고 우리를 끌어안고 그렇게 자기 고백을 하십니다. 저는 그 고백 속에서 한 가지를 발견합니다. ‘하나님은 나를 물건처럼 주머니에 넣고 소유하지 않으셨구나. 하나님은 저의 아픈 울음과 웃음과 잠듦 소리침에 하나님이 공재공존 하시는구나.’

하나님이 보기에 제가 물건이라면 같이 울어줄 필요가 없습니다. 제가 하나님의 소유물이면 버리면 됩니다. 바꿔치면 됩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부족한 인간이지만 우리는 같이 끌어안을 수밖에 없는 공존공재 해야 할 파트너이고, 그래서 하나님도 아프고 저도 아픈 겁니다. 아플 때, 제가 싫다고 아프다고 소리칠 수 있었지만 저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허락 좀 받고 제 목숨을 끊을 수 없는 것입니까? 불특정 사람들이 우리와 함께 살아가면서 아픔을 알고 있고 힘든 것도 알고 있지만 어떻게 극복하고 죽었는지 이 슬픔의 소리를 어떻게 담아내는지 그 이야기를 전하고 그냥 하나님과 함께 죽음을 맞이할 수는 없습니까?

목숨을 끊은 최 아무개 그 분도 얼마나 힘들었으면 그랬겠습니까마는, 내가 아프지 않을 때는 행복을 이야기하고 통증이 많아서 견딜 수 없을 때는 행복을 말하지 못하겠다는 솔직한 인간적인 고백은 인정하지만, 같이 산다는 것이 운명인 줄 알았더라면 많은 사람들에게 꼭 그렇게 할 필요는 없었던 것입니다. 장애아를 자식으로 둔 어머니 이야기도 했습니다만 아기는 부모의 소유물이 아닙니다. 아기는 부모와 사랑과 믿음의 관계를 가진 파트너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물건 취급하지 않으시고 우리를 아프거나 좋거나 슬프거나 기쁘거나 우리를 상대해 주시는 공존의 파트너입니다. 그래서 유태의 신학자 한 분이 말하는 대로 하나님은 우리를 물건이라고 하는 “아이 이트”, 그렇게 소유물로 취급하는 관계가 아니고 운명을 나누는 “아이 유”, 고어로 “아이 다우”의 관계라고 했습니다. 그 관계가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입니다. 그 관계를 부부간에도 실천해야 합니다. 어떻게 남편이 아내를 소유하고 아내가 남편을 소유합니까? 아이 이트가 아니고 아이 다우입니다. 그래서 우이가 성립이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들을 그렇게 만드셨고 지금도 인격적으로 사랑으로 관계를 이룹니다. 그런 가운데서 믿음이 싹트고 사랑할 수 있는 것이지 그렇게 살아가는데 어떻게 사랑 안 할 수 있습니까? 난 당신을 사랑합니다, 하면서 당신을 안 믿으면 그 사랑은 거짓 아닙니까? 울리는 꽹과리입니다. 우리는 아까 그렇게 공동기도서를 읊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서로 관계를 맺으며 살고, 관계의 가장 기본적인 것이 살라고 하는, 살자고 하는, 사랑의 동기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믿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 “하나님은 한 분이십니다. 그분을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사랑하세요. 이웃도 사랑하는데 그대들이 유일무이하므로 그대들을 사랑하듯 이웃도 사랑하세요. 하나님과 그대들은 소유가 아니고 공존입니다. 그대들과 이웃들도 공존하면서 사랑하세요.” 이 사랑은 살립니다.

제가 감동받은 이야기 또 하나 반복해서 드리겠습니다. 훌륭한 음악가 베토벤의 이야기입니다. 아시는 대로 베토벤이 57세를 살았는데 28살에 청각 장애를 얻었으니 인생의 절반은 잘 들을 수 있었지만 그 이후에 정작 음악활동을 할 때는 청각 장애를 얻어서 귀머거리로 지냈습니다. 귀머거리가 되고 난 뒤 4년 후에 형제들에게 이런 유서를 썼습니다. “나는 지난 몇 년 동안 혹시 청각장애가 나을 수도 있다는 희망 속에 살았지만 속아서 살았습니다. 낫지 않는 군요. 들을 수 없는 운명, 감각이 없는 운명 속에 음악의 작곡가가 된다는 것이 부조리입니다. 잠시 후면 내가 인생을 마감할 겁니다. 형님들. 불운한 존재 용서하세요.”

그리고 하나님께 호소하는 글귀가 있었습니다. “하나님, 내게 마지막 기쁨을 누릴 수 있는 한 순간만 허락해 주십시오. 너무도 오랫동안 음악을 듣는 기쁨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한순간만 허락해 주십시오.” 이것이 유서인데 유서대로 되지 않고 불후의 명곡들을 작곡했습니다. 어느 날 실러라는 시인의 책을 받아보았는데 그 책 이름이 독일말로 , 기쁨에 드리는 헌사, 환희의 송가, 이런 뜻입니다.

시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신들의 광체를 발하는 기쁨이여, 모든 생명체를 삼키고 마시니 그대의 태양이 날아가듯 기쁨이 날아가리라. 온 인류여 기쁨 속으로 들어가 하나가 되자. 기쁨이여 오라.” 이 시가 너무 아름다워서 56세 때, 죽기 1년 전입니다. 이분이 작곡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기쁨에 드리는 찬가, 이 곡이 56세 때, 비엔나의 쾨른텐 극장에서 공연이 되었는데 사람들이 일어나서 박수를 쳤습니다. 본인은 아마 광경만 보고 듣지는 못했을 겁니다.

이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베토벤 심포니 9번의 마지막 곡입니다. 저는 이 사실 하나를 보면서 ‘죽고 싶다. 생명이 끊어질 것이다. 정말 죽고 싶다.’ 라고 생각했던 베토벤을 떠올려 보았습니다. 작곡가가 들을 수 없다는 것은 그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슬픔이었을 겁니다. 그럼에도 죽지 않고 실러를 통해서 곡을 건졌는데 그 뒤 160년이 지났습니다.

1989년 12월 24일 밤, 한국시간으로는 12월 25일 저녁 시간입니다. 동독과 서독을 막았던 장벽이 무너지고 통일의 기쁨이 다가옵니다. 브란덴 부르크 성문 광장 앞에서 수많은 관중이 모여 있습니다. 그 때 모든 청중이 약속이나 한 듯이 기쁨에 드리는 송가, 실러의 가사, 베토벤의 곡을 동-서독의 시민들이 광장에 모여서 불렀습니다. 지휘도 아름다웠고 노래도 아름다웠는데 이 기쁨이라는 단어를 통일로, 2절에서는 자유로 바꿔서 불렀습니다.

생방송으로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던 저는 ‘베토벤이 청각장애 때문에 자살했던들, 실러의 시가 없었던들, 분노 속에 미안하다고 먼저 갔던들, 아마 베토벤의 심포니 9번도 없었겠지만 160년 이후의 동서독 통일 때의 환희와 기쁨은 내가 누리지 못했겠구나.’ 그 때 느낌입니다.

“사람은 죽어도 산다. 아프면 아픈대로 아픔을 고백하고,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죽음은 생명, 육신 생명의 마감이지만 인간에게 주어진 하늘의 뜻, 예수, 하늘, 땅, 모든 기쁨, 슬픔을 다 묶어서 대대로 살아간다. 소유할 수 있었다면 그 시대로 족하지만 영원한 관계로 맺어지기 때문에 하늘이 있는 한 하나님이 계시는 귀한 일들은 계속해서 간다.” 제가 그래서 이런 결단을 하고 싶어집니다. 아프더라도 아프다고 하십시다. 아픈 이야기는 하십시다. 그러나 이 고백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관계를 맺고 사는 하나님까지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우리의 생명을 육신의 끝과는 상관없이 계속해서 이어가는 것이 우리 세상입니다.

그 중심에 예수께서 계셔서 우리의 슬픔도 대신, 죽음도 대신, 모든 걸 대신 지시고 함께 죽으시고 하시는 말씀, “이제는 부활 생명만 남아있다. 이 생명의 힘을 지금, 가장 어려운 순간에 내가 기쁨으로 받아들이고 그리고 죽자. 그리고 마감하자. 그리고 새 생명을 호흡하자.”

조금 시간적으로 길게 살아보실 생각 없으십니까? 제가 앉아 있고 서 있는 이 공간만이 아니라 제가 상상할 수 없는 무한대의 공간에서 제가 살 수 있다면 삶과 죽음을 시간 좀 늘리고 공간 좀 넓혀서 그렇게 살 수 있다면 그것이 하나님의 천지창조세계 아닙니까? 사랑하며 사는 것이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을 가져다줍니다. 이 믿음을 오늘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한번 감화하십시다. 조금 넓게 조금 멀리 그렇게 한번 살아보십시다. 주님이 주신 약속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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