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출애굽기 34:4-9
모세는 주님께서 그에게 명하신 대로, 돌판 두 개를 처음 것과 같이 깎았다. 이튿날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그는 두 돌판을 손에 들고 시내 산으로 올라갔다. 그 때에 주님께서 구름에 싸여 내려오셔서, 그와 함께 거기에 서서, 거룩한 이름 `주`를 선포하셨다. 주님께서 모세의 앞으로 지나가시면서 선포하셨다. "주, 나 주는 자비롭고 은혜로우며, 노하기를 더디하고, 한결같은 사랑과 진실이 풍성한 하나님이다. 수천 대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은 사랑을 베풀며, 악과 허물과 죄를 용서하는 하나님이다. 그러나 나는 죄를 벌하지 않은 채 그냥 넘기지는 아니한다. 아버지가 죄를 지으면, 본인에게 뿐만 아니라 삼사 대 자손에게까지 벌을 내린다." 모세가 급히 땅에 엎드려서 경배하며 아뢰었다. "주님, 주님께서 저에게 은총을 베푸시는 것이 사실이면, 주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가 주시기 바랍니다. 이 백성이 고집이 센 백성인 것은 사실이나, 주님께서 우리의 악과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우리를 주님의 소유로 삼아 주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야고보서 5:15-18
믿음으로 간절히 드리는 기도는 병든 사람을 낫게 할 것이니, 주님께서 그를 일으켜 주실 것입니다. 또 그가 죄를 지은 것이 있으면, 용서를 받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서로 죄를 고백하고, 서로를 위하여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낫게 될 것입니다. 의인이 간절히 비는 기도는 큰 효력을 냅니다. 엘리야는 우리와 같은 본성을 가진 사람이었지만, 비가 오지 않도록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니, 삼 년 육 개월 동안이나 땅에 비가 내리지 않았으며, 다시 기도하니, 하늘이 비를 내리고, 땅은 그 열매를 맺었습니다. 아멘.
마가복음서 1:32-39
해가 져서 날이 저물 때에, 사람들이 모든 병자와 귀신 들린 사람을 예수께로 데리고 왔다. 그리고 온 동네 사람이 문 앞에 모여들었다. 그는 온갖 병에 걸린 사람들을 고쳐 주시고, 많은 귀신을 내쫓으셨다. 예수께서는 귀신들이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그들이 예수가 누구인지를 알았기 때문이다. 아주 이른 새벽에, 예수께서 일어나서 외딴 곳으로 나가셔서, 거기에서 기도하고 계셨다. 그 때에 시몬과 그의 일행이 예수를 찾아 나섰다. 그들은 예수를 만나자 "모두 선생님을 찾고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가까운 여러 고을로 가자. 거기에서도 내가 말씀을 선포해야 하겠다. 나는 이 일을 하러 왔다." 예수께서 온 갈릴리와 여러 회당을 두루 찾아가셔서 말씀을 전하고, 귀신들을 쫓아내셨다. 아멘.
설교문
<참신과 귀신>
지금은 21세기 첨단과학이 지배하는 시대입니다만, 우리가 성경에서 읽었던, 또 여러 책에서 보고 들었던 기적과 같은 일들이 지금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지난 8월 5일 서른 세 명이 갱 속에 묻혀 있다가 69일 만에 모두 생환한 칠레의 한 광산촌 이야기에 여러분도 가슴이 뿌듯하셨을 것입니다. 69일의 긴 시간을 무사히 보내고 모두가 살아나올 수 있었던 자세한 이야기는 여러분도 들으셔서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저는 오늘 본문과 관련해서 한두 가지만 지적해 보려고 합니다. 하나는 어떤 분이 나오셔서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우리는 34명이었습니다. 서른 세 명이 갇혀 있었는데 한 사람이 더 있었습니다.” 아마 인간의 한계상황 속에서 누군가는 나의 이 운명을 우리의 이 운명을 함께 보듬어 줄 분을 바라는 마음일 것이고, 이 고백을 하신 분이 신자든 신자가 아니든 누구나 바라는 마지막 결단이었을 겁니다.
제가 이 서른 세 명 중에 하나였다면 저도 이렇게 믿고 고백했을 것 같습니다. “나 홀로 있지 않다. 서른 세 명만 있지 않고 또 한 분이 분명히 계시다. 그분은 나를 잡아 주실 것이다.” 사실 그분이 안 계셔도 이렇게 믿으면 힘이 생기는 것이고, 그분이 계시면 그분은 더군다나 생명의 주님이시기 때문에 얼마나 큰 힘이 되겠습니까?
그분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분과 함께 생명을 유지해 갔습니다. 그들을 통해 들은 이 말씀이 저한테는 충격이기도 했고, 당연한 것이면서 감사한 말씀으로 와 닿았습니다. 갱도에 갇힌 사건이 없었다 하더라도 여러분이 중대한 질병으로, 생의 어려움으로, 정말로 헤어 나올 수 없는 위기에 처해있을 때, 여러분은 혼자 있고 싶으십니까? 혼자 견뎌내기가 쉽습니까? 심방을 받고 위로를 받으시면 힘이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누군가가 저와 함께 계셔서 저를 붙들어 줍니다. 이렇게 믿을 때, 여러분이 느끼는 환희는, 기쁨은 어느 정도입니까? 서른 세 분의 기도가 아마 그렇게 상달되었다고 믿습니다.
또 하나는 마지막에 이분들이 갱에서 구조를 받은 다음, 그 사진을 보면서 한 쪽에 걸린 아름다운 글귀가 제 맘에 와 닿았습니다. 스페인어로 쓰여 있는 글귀였는데 우리말로는 “사명완수, 할 일 끝냈음” 이라는 말이었습니다. 그 때 이 말 속에 담긴 뜻은 ‘우리가 해야 할 일 다 끝냈습니다. 살아나왔습니다. 우리가 갇혔던 그 갱도는 서른 세 명과 보이지 않았던 한 분, 서른 네 명이 있었지만 지금은 텅 비었습니다.’ 라고 느껴졌습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셔서 제자들 앞에 나타나시기 전, 여자들이 가서 보았더니 무덤이 비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무덤이 비기 전에 예수께서 마지막으로 하나님께 살려달라고 기도하신 대목 중에 하나님이 답변이 없으시니까 이분이 잠자코 계시다가 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내 영혼을 주께 맡기나이다.” 하기 전에 하신 말씀, “다 이루었다.” 무덤은 텅 비어있었습니다. ‘다 이루었다. 죽음은 없다. 죽음은 사라졌다. 죽음의 공포도 사라졌다. 갱 속에서 나왔다.’
이런 구제심은 과거 같으면 상상도 못했을 겁니다. 지금은 사람이 만든 첨단과학의 힘이 이렇게 클 줄 몰랐습니다. 그렇게 오랫동안 기다릴 수 있었던 것, 구조대에다 드릴을 통해서 메시지를 보내고 받기도 하고 하나씩 건져내 온 것, 인간이 만든 첨단과학의 발전이 엄청나게 큽니다. 그런데 이분들이 구조 당한 것이 과학의 힘만으로, 물질문명의 이기만으로 이분들이 살아남았느냐, 그건 아닙니다. 절망이었고, 좌절이었고, 마지막 지푸라기라도 붙들고 싶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살 수 있다는 한 분이 더 계시다는 생각, 우리가 살아야 한다는 문명의 이기와 상관없는 인간의 본질 속에 들어있는 깊은 심성이 있었을 겁니다. 생명의 숨, 호흡, 살고자 하는 결단, 이 모든 것을 우리가 영성이라고 해 봅시다. 이번 기적은 인간이 기본적으로 갖춘 서른 세 분과 밖에서 기도하고 응원하는 모든 사람들의 영성과 사람이 만든 첨단과학과 보이지 않는 ‘+α’에 속하는 그 분이 합해서 만든 합작품입니다. 합동하여 선을 이루는 것이 기적이라고 믿습니다.
기적은 누군가로 인해 땅에서 떨어지는 기적이 아니고, 아무 노력도 못하는 것이 아니고, 당사자들이 서로 협력하여 손을 맞잡고 노력하면 이루어지는 것이 기적입니다. 기적을 원하십니까? 원하면 파트너를 찾으셔야 합니다. 기적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고 기적은 땅에서 만들어지는 것인데 하늘도 돕고 사람도 돕고 사람이 만든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서 만든 모든 문명의 이기도 함께 도와야 합니다.
하늘을 향해서 기도한다고 세상을 다 져버리고 그렇게 기도하면 하늘이 협력할 수 없습니다. 땅을 향해서 내 힘으로 한다 하면 하늘이 들어올 영역이 없습니다. 사람 혼자서 한다고 해도 하늘이 들어올 영역이 없고 하늘만 향해서 소리친다고 그건 공허한 메아리일 뿐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신이 준 사람이 갖고 있는 모든 것이 서로 협력하여 한 뜻으로 모아지면 그 다음에 나오는 결과를 기적이라고 부릅니다.
오늘 성경말씀에 수많은 기적들이 있습니다. 이 기적들을 보면서 도대체 이 기적은 하나님만이 할 수 있고 우리 인간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런 일인가, 하는 의문을 가져보았지만 아닙니다. 기적에 인간의 협력이 같이 있었습니다. 하늘과 땅이 협력하는 가장 아름다운 모습 그것이 기적입니다. 그 기적이 오늘, 칠레 한 산호세라는 광산촌에서 일어난 것을 우리는 압니다.
갱 속에 묻혀 있었던 사람들 사이에 불화음도 났을 것이고, 인육을 먹어야 한다는 말도 나왔다고도 합니다. 그러나 생명의 햇살이 비취면서 부터는 과거를 뒤로 하고 이제는 앞만 향해서 갑시다, 하면서 나중에 보고를 들어봐야 알겠지만 이런 일이 있었을 겁니다. 이제 마지막 죽음을 앞두고 혹시 살게 되면 내가 못 다한 이야기를 다 하고 싶은, 자기의 간직해 놓은 비밀을 풀어서 알리고 싶은 심정이 있었을 겁니다. 아마 저는 그래서 서른 세 명이 아니고 또 다른 한 분을 원했으리라고 봅니다.
“제가 지은 허물과 죄악을 호소합니다. 용서해 주옵소서. 제가 살아나가면 그 동안 못했던 일들을 하겠습니다.” 하고 결단하는 것도 있었을 것입니다. “내 비밀을 유지할 수가 없습니다. 몽땅 드릴테니 이 비밀을 받아 주시고 분석도 해 주시고 불편한 거 솎아 주시고 저를 구원해 주십시오.” 아마 이 기도는 소리를 못 들었을 뿐, 갱도 속에서는 엄청난 음성으로 다가왔을 겁니다.
신이 왜 필요할까요? 신은 제가 갖고 있는 비밀을 아프고, 힘들고, 때로는 창피하고 때로는 자존심 상하고 그러나 제가 갖고 있는 비밀을 다 털어놓고 제 비밀을 얘기하고 받아주실 분을 찾다보니 신 밖에 없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신만이 받아줄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살아가면서 차라리 신이 없는 것이 편하다고 느낄 수도 있습니다. 제 것은 제가 지켜야지, 누가 알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은 “제 비밀을 다 말씀드려도 오히려 행복하고 해방감이 있고, 그걸 통해서 저한테 큰 축복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이런 확신이 있는 사람이 신을 믿지 이런 확신이 없는 사람은 신을 믿을 필요가 없습니다. 신이 여러분의 모든 비밀을 다 안다면 편하세요? 그런 신 갖고 싶으세요? 항상 옆에 두고 살고 싶으세요? 자존심 상하지 않으십니까?
저는 때때로 그런 신이 필요가 없다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저 혼자 살고 싶은데 중요한 것은 아무리 저 혼자 하고 싶어도 이 비밀이 갖고 있는 아픔을 제가 해결할 수가 없어서 언젠가는 이것을 털어놓고 고해성사를 하고 용서를 받고 새 길을 가고 싶은 마음이 항상 있다는 것입니다. 신이 필요한 사람은 이렇게 불편하지만 자기 것을 다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어떤 신이 필요합니까? 모든 신이 그렇습니까?
오늘 예수께서 마귀를, 귀신을 쫓아낸 이야기가 본문에 나왔습니다. 아마 예수님 생각에 내가 하나님의 아들인 내가 사랑하는 병든 자 안에 들어가서 비밀도 아픔도 다 끌어내고 내가 대신 끌어안고 같이 아파주고 혹시 죽으면 같이 죽어주고 그렇게 부활까지 주고 싶은데 예수님이 서야할 자리에 들어갈 공간이 없었습니다.
대신에 이상한 신이 들어가 있는 걸 봤습니다. 이상한 신이란 예수님의 눈에는 병든 자를 고쳐주는 신이 아니라 병을 더 들게 하는 신, 그리고 성공을 하는 신이 아니라 실패하게 하는 신, 사고도 일으키게 하는 신, 재해도 일으키는 신, 이런 신을 옛날부터 마귀라고 했고 사탄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 입장에서는 병든 자에게 필요한 것은 고침 받는 것과 위로입니다. 예수님은 그 일을 하고 싶었습니다. “내가 들어가서 병을 고쳐주고 위로를 하고 싶다.” 그런데 들어갈 공간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귀신을 쫓아낸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귀신은 누구고 여러분이 믿는 참신은 누구입니까?
모세도 예수님 오시기 전, 하나님이 좋아서 하나님을 찾았고 이스라엘 백성도 찾았지만 도대체가 우리의 모든 것을 주관하신다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시내산에 돌판을 들고 올라가서 하나님을 부릅니다. “당신, 당신이 신은 신이신데 정확히 누구십니까? 당신이 누군지 알아야 십계명도 받고 그것을 내 백성에게 전할 것 아닙니까? 당신은 누구십니까? 당신의 이름이 뭡니까?” 이렇게 물었습니다.
그런데 그 신은 이름을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이름을 알려주지 않고 하는 말씀입니다. “나한테는 이름이 없다.” 무슨 이름이 없다는 말씀이실까요? 이름이란 인간이 상상으로, 사고방식으로, 지혜로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하여 규정할 수 있는 것이 이름입니다. 좋은 이름이 되었든 나쁜 이름이 되었든 우리가 생각하는 최상의 것을 개념화하고 이념화해서 만든 것이 이름입니다.
우리는 이름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할아버지가 지어주셨든 부모가 지어주셨든 그 이름 속에 희망이 담겨있고 소망이 담겨 있습니다. 이름은 이렇게 사람의 작품입니다. 모세가 묻습니다. “당신은 누구요?” 나는 이름이 없다는 말은 나는 하나님이고 신이지만 내 신의 성격과 내 신의 품과 깊이를 내가 창조한 사람의 제한된 개념이나 생각 속에 묶어 두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었습니다. 신을 사람이 규정할 수 있으면 그건 사람의 피조물입니다.
성경말씀 전체를 보면 사람이 규정해 놓은 신을 귀신이라고 불렀습니다. 그것이 산신이든, 바다신이든, 태양신이든, 진실로 하나님은 그렇게 규정할 수 있는 이름을 가질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나는 이름이 없다.” “그럼 뭡니까?” 그랬더니 이분 하시는 말씀이 “난 나야, 난 있는 그대로 나지, 난 나다.” 히브리어로 이 말을 옮기면 ‘야훼’, 또는 발음을 달리하면 ‘여호와’, 그렇습니다.
‘야훼’가 이름이 아닙니다. “나는 본래부터 있는 나다. 규정하지 말라. 나는 나다.” 지금도 하나님은 이름이 없으십니다. 우리말로 ‘하나님’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그분이 한 분이시고 하늘에 계시고 그래서 ‘하나님’이라고 할 뿐 하나님은 여전히 이름이 없고 우리가 이름을 지을 수 없습니다. 그런 분이 저희들이 믿는 하나님입니다. 도대체가 이런 하나님을 어떻게 믿을 수 있습니까? 질병도 낫고 싶고 위로도 받고 싶고, 불의한 세상에 정의도 심고 싶고, 자유하고 싶습니다.
신과 신 이야기는 우리한테 굉장히 복잡한 이야기입니다. 사람인 저는 신들의 이야기에 관심이 없습니다. 신들이 서로 싸움을 하든 말든 그건 제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 저한테 관심 있는 신이 한 분 계십니다. 이 신은 제 몸과 마음속에서 뭔가 관계를 맺고, 저하고 싸우고 부딪히고 함께 하는 분, 그런 신은 저한테 필요합니다.
나와 상관없이 기적을 행하시든지 하늘을 날든지 그런 신은 제 영역이 아닙니다. 우리가 믿고 있는 신은 사람과 인간과 인간의 역사와 모든 제도와 체재와 이 속에서 뭔가 아까 칠레처럼 합동하여 협력하여 역사를 이루고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이 제가 믿는 신이지 저와 상관없는 신은 제 영역은 아닙니다. 그런 신을 저는 공부하고 싶지도 않고 믿고 싶지도 않습니다.
오늘 성경말씀에 보면 예수가 전하는 신은 어떤 신이냐 하면, 사람 몸을 입으신 신, 역사의 옷을 입은 신, 고난과 아픔도 함께 짊어질 수 있는 신, 심지어 인간의 몸을 입었기에 인간이 입는 죽음까지도 같이 죽어줄 수 있는 신, 그 신이 이름은 없지만 그 신이 오늘 저한테 말씀하시기를 “나는 너와 항상 함께 하고자 한다. 부탁이 있다. 나는 너를 나의 너라고 부르겠다. 나는 너를 이렇게 부를 수 있느냐?”
나의 당신, 하나님과 제가 합해져서 누가 누구였는지 모르지만 저는 그분과 함께 살아갑니다. 세상에 많은 신이 있지만 우리가 신이라고 하는 수많은 것들이 있지만 우리와 똑같은 인간의 몸을 입고 와서 모든 운명을 같이 담으면서 종국에는 인간이 넘을 수 없는 벽을 뚫고 하나님이 본래 예정하셨던 영원한 생명의 호흡을 주신 분, 저는 그 분이 제 생명으로 삶으로 고마워서 그 신을 믿기로 했습니다. 그랬더니 우리가 믿는 하나님, 우리가 믿는 예수그리스도 그분이 그분이심을 다시 깨닫습니다.
저는 그분이 이름이 없어도 괜찮습니다. 그분이 저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모든 신들이 있지만 신들의 이야기가 중요한 게 아니라 사람을 구원하고 구원하는 역사 속에서 우리가 찬양을 진심으로 드릴 수 있는 분, 정말 기도하면 들어주시는 분, 제가 불평을 쏟아놓아도 다 받아주시는 분, 세상이 너무 악하고 제가 악하면 함께 가슴을 찢으며 애통해 하시는 분, 그런 하나님을 저희들이 예수님을 통해서 만났습니다.
그 하나님이 이름이 없지만 오늘 우리한테 말씀하십니다. “약속 하나만 하자. 나는 그대들의 하나님, 그대들은 나의 백성, 나의 분신이다.” 그런 하나님 믿으십니까? 그 하나님 이외에 다른 신을 저는 송축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 하나님에게 맘껏 다 드리고 싶습니다. 그 하나님이 저희들한테 말씀하시면서 “나는 그대들 안에 있고 그대들은 내 안에 있음을 믿어다오. 역사를 기적을 만들어가자.”
히틀러를 죽이려고 했고 그 때 많은 공헌을 했던 본회퍼라는 신학자를 아실 것입니다. 그 분의 말씀 중에 “세상 사람들이 신을 믿는데 세상 사람들이 믿는 신은 있는 것 같지도 않고 너무 타락했다. 그런 신은 신이 아니다. 그런 신 말고 진실로 아픔을 함께 하고 죽어줄 수 있고 부활할 수 있는 신이 따로 있다. 지금 우리 독일 사람들이 믿는 신은 그런 신이 아닌 것 같다.” 그래서 이분이 하는 말이 “나는 신 없이 신 앞에 살고 싶다. 가증된 귀신같은 신 없이 참된 신 앞에 살고 있다. 위에서 기적만 이야기하는 그런 허황된 신 말고 십자가에서 피 흘리며 죽고 찢기고 그래서 부활해서 우리한테 능력 주시는 그런 신 앞에 서고 싶다.”
하나님 없이 하나님 앞에, 귀신 없이 참신 앞에, 그 신은 오늘 여러분 한 가운데 계십니다. 세상 속에서 역사하고 계십니다. 그분이 말씀하십니다. “나는 생명이다. 나는 여러분과 함께 걸어야 할 길이다. 나는 부활이다. 이 길을 함께 가자.” 주님의 축복받으시기 바랍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