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기획연재- 이장식의 교회 역사 이야기(36)

신성로마제국과 이슬람의 침노

본지는 한신대 이장식 명예교수의 교회 역사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이 교수는 얼마 전 본지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예수는 평신도였고, 초대교회 예수 운동을 이끈 무리들 역시 평신도들이었다"며 교회사에 큰 기여를 한 무명의 평신도 그리스도인들을 조명했습니다. 앞으로 연재되는 글이 평신도들의 신앙 생활 함에 있어 좋은 길잡이가 되어 줄 것으로 기대합니다. -편집자주 

제4장 신성로마제국과 이슬람의 침노

1. 십자군과 모슬렘의 전쟁

이슬람의 아랍 군대가 7세기 초에 예루살렘과 다메섹과 시리아 전역을 점령했고, 북아프리카의 알렉산드리아도 점령하여 로마제국의 식민지 영토의 3분의 1을 빼앗고, 키프로스와 시실리섬 더 나아가 스페인에까지 쳐들어갔다. 그러다가 중세기에 들어와서 프랑크제국의 힘으로 유럽의 아랍군은 물러갔지만 이집트, 리비아, 투니시아, 모로코 등의 북아프리카 나라들은 영구히 모슬렘 국가가 되어버렸다.

유럽은 이제 프랑크제국과 로마가톨릭교회의 유대로 신정(神政)체제가 되어 서유럽의 모든 나라가 단합되어 있었지만 다만 동방의 비잔틴제국이 소아시아와 접경하고 있는 관계로 모슬렘의 부단한 침략 위협을 받고 있었다. 예루살렘의 그리스도교 성지를 지켜야 할 책임을 가진 비잔틴 정권은 그 성지의 자유로운 순례마저도 보장 못하는 형편이었으므로 서방의 로마가톨릭 교계의 불만이 컸었다. 비잔틴의 황제는 성지순례 문제보다도 접경하고 있는 소아시아의 모슬렘 군대의 침략을 막기 위해서 서방 신성로마제국의 우군을 여러 번 청하였으나 도움을 받지 못하였다. 서방 로마 측은 프랑크제국도 강력해졌고 영국도 강력한 군대를 가지고 있었다.

십자군원정

교황 우르반(Urban) 2세가 유럽 영주들 사이의 빈번한 전쟁을 종식시키고 예루살렘의 그리스도인의 성지를 회복하기 위하여 1097년에 제1차 십자군 파병을 선언하였다. 그는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과 싸우기보다는 진짜 원수인 동양의 위협자와의 싸움에 가담하라”고 말하였다. 교황의 이 전쟁 선포에 유럽의 황제와 왕들이 일제히 호응하여 “하나님이 원하신다”고 외쳤다.

교황의 이 십자군 파병 선언은 그가 실제로 유럽 그리스도교계의 우두머리로 자처한 일이었고 이 전쟁 행위는 유럽의 신성로마제국의 새 신민(臣民)들의 최초의 운동이 될 것이었다. 그러나 유럽 국가들의 왕들과 정부들은 전쟁을 당장에 시작할 만큼 준비가 되어있던 상태가 아니어서 십자군 운동은 대체로 민간의 운동이 될 수 밖에 없었다. 왕들과 귀족들은 교황의 호감을 사기 위하여 출군할 수 밖에 없었으나 유럽의 왕들이나 정부들 사이에 연합군을 조직할 수 없어서 개별적으로 출군하였으므로 승리할 확률이 적었다. 중세 유럽은 봉건주의 제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봉건 영주들이 토지와 군대를 가지고 있어서 단독으로 출병하여 위세를 과시해볼 수도 있었다. 영주들의 세력이 강하여서 왕들의 권력이 제약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왕들은 귀족들이 출전하여 그들의 힘이 약화되기를 바랄 수도 있었다. 사람들은 십자군에 참전하여 성지순례와 함께 동방 세계를 보고 싶어 하였다.

교황 우르반은 십자군 모병을 독려하는 설교를 하면서 십자군에 참전하면 영생을 얻는다고 말하였고 범죄한 사람의 완전 면죄도 약속하였다. 그는 군인들 어깨에 두를 흰 삼베 천에 붙일 십자가 표지를 분배하여주었다. 제1차로 출병한 귀족 3명은 고드프레이(Godfrey)와 로버트(Robert)와 레이몬드(Raymond)였는데 1099년에 니케야에 도착했다가 예루살렘을 점령하는 데 성공하여 그곳에 소왕국을 세우고 에뎃사의 발드윈을 왕으로 세웠다. 이렇게 해서 출전 3년만에 성지는 회복되었으나 그 셋 귀족들의 군대 외에 개별적으로 모군하여 출전한 군대들은 도중에 다 패배하였다.

제2차 십자군원정은 터어키의 사라센족이 예루살렘의 그리스도인 왕국을 위협하였으므로 교황 유게니우스(Eugenius)가 1147년에 프랑스 왕 루이 7세와 신성로마제국 황제 콘라드(Conrad)를 출전시킨 것이었다. 이들은 다메섹을 공격했으나 그곳 삼림지대에 대기하고 있던 적군의 복병의 공격을 받아 패전하여 귀국하였다.

제3차 십자군원정에는 영국의 왕 리차드(Richard) 1세, 프랑스 왕 필립 아우구스투스(Philip Augustus),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레데릭 바바로사(Frederick Barbarrosa)가 1189년에 출병한 것이었는데 바바로사는 소아시아에서 강을 건너다 익사하였고 그의 독일군 대부분이 귀국하여버렸다. 영국 왕과 프랑스 왕이 협력해서 적군을 패배시켰으나 적군의 계속적인 공격을 막을 수가 없어 평화조약을 맺고 3년 3개월 동안의 성지순례 자유를 얻었다. 프랑스 왕은 도중에 귀국하였고 영국의 왕 리차드의 용전으로 된 것이었다.

제4차 십자군원정은 1201년 교황 인노센트(Innocent) 3세 때 모병된 군인들이 실시했는데 그들은 제2류의 군인들이었다. 기사들이 앞장서서 십자가 군기를 들고 베니스 상인들이 제공한 선박에 올라탔다. 선박을 제공한 베니스 상인들은 자기들의 재물 탐욕을 채우기 위하여 먼저 이집트에 상륙해서 제라(Zera)시를 점령하여 재물을 탈취했고, 콘스탄티노플에 가서 황제에게 십자군 군비 조달을 강요하면서 콘스탄티노플의 값진 예술품을 약탈하여 성 소피아 성당의 미(美)는 회복할 수 없게 되었다. 교황 인노센트 3세는 베니스 상인들을 모두 출교처분하고 십자군을 그곳에 1년 더 머물게 하였다.

제5차 십자군원정을 일으키던 때는 이 원정이 그전에 3번이나 실패한 까닭에 응모하는 사람이 없어서, 교황 인노센트 3세가 십자군을 모집하려 했으나 실패하였다. 그런데 프랑스의 스테펜(Stephen)이라는 한 소년이 일으켰다. 어른들이 그를 만류했으나 막을 수 없었고 많은 소년들이 호응하여 프랑스와 독일의 수천 명의 소년 십자군이 조직되었는데 대개 12세 전후였고 소녀들도 있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무력으로 이길 힘이 없었으나 옛 이스라엘 모세의 군대처럼 기적을 바랐던 것이다.

1221년에 독일 소년 십자군 수천 명이 험한 알프스산을 넘어 이태리로 가서 평야를 거쳐서 배를 타러 바다에 가야 했는데 식량을 구하지 못하여 허약해진 소년이 많았다. 그중 더러는 진군을 포기하고 이태리 땅에서 살게 되었다. 그들은 로마 교황청에 들러서 교황의 축복을 받으려 했으나 교황은 그들을 설득하며 집으로 돌아가라고 했다.

프랑스에서는 스테펜의 지휘 아래 바닷가까지 가서 다행히도 일곱 척의 배를 구했다. 그런데 한 배에 700명씩 태우고 떠난 그 배와 소년들의 소식은 듣기 힘들었고 18년이 지나 카이로의 모스렘 노예상 술탄(Sultan)으로부터 풀려나온 한 소년을 통해 듣게 되었다. 2척의 배는 풍랑으로 파선하여 침몰했고 남은 5척에 실린 소년들은 그 배의 선주들이 노예로 팔아넘겼다는 것이다. 이 소식을 전한 소년은 말하기를, 모슬렘에 팔려가서 노예가 되었지만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모하멛을 믿어서 노에 신세를 면하려는 소년은 한 사람도 없었다고 하였다.

제6차 십자군원정은 1229년에 신성로마제국 프레데릭(Frederick) 2세가 지휘하여 성지를 점령하고 10년간 휴전조약을 맺고 순례의 자유를 얻었다. 1249년에는 프랑스 왕 루이(Louis)가 제7차 십자군을 만들어 출전했지만 실패하였다.

길었던 십자군운동은 예루살렘 성지를 모슬렘의 지배에서 해방시키지 못했고, 성지는 터키 모슬렘의 지배 아래 있다가 제1차 세계대전에서 터키군이 연합군에 패망한 후 영국의 위임통치를 받게 되었다. 중세기의 십자군운동을 통하여 로마가톨릭교회의 교황의 권세가 한층 더 강력하게 되었다. 유럽의 황제와 왕들이 교황의 명령이나 권고를 받아 십자가에 출전하여 막대한 재정과 수많은 군인들의 생명을 잃었다. 한편으론 영주들과 귀족들이 십자가 출전으로 힘이 약화되었기 때문에 황제와 왕들은 자기들의 중앙집권 왕정 체제를 발전시키게 되었다.

십자군전쟁이 약 150년에 걸쳐서 산발적으로 일어나면서 서쪽 라틴 유럽과 동쪽 비잔틴의 희랍 사회 사이에 통로가 트여서 문물의 교류와 상업의 교역, 동서 교회의 교제가 이루어졌다. 그리하여 동방의 희랍 문화가 서방에 소개되어 희랍의 고전학문과 과학이 서방의 문예부흥을 촉발하는 자극제가 됐다. 한편으론 동방의 비잔틴 교회가 십자군에 의하여 피해를 많이 입어서 로마가톨릭교회와 희랍정교회의 관계가 훼손되었고, 무엇보다도 그리스도교와 이슬람 두 종교의 관계가 악화되어 적대적인 것이 되어버렸다.

2. 성상 타파 논쟁

아랍 종교인 이슬람이 유럽의 동서 로마제국에 끼친 충격은 정치, 군사뿐 아니라 종교적으로도 심각한 것이었다. 이슬람이 아랍반도에서 북진하여 시리아와 기타 중동의 모든 나라를 넘어뜨린 동시에 로마제국의 영토까지 점령하여 재래의 모든 종교와 그 종교들이 섬기던 우상들을 타파하여 이슬람 세계를 만들고자 했고, 알라 곧 야훼 하나님 한 분만 섬기게 한 동시에 십계명의 제2계명대로 하나님을 위하여 어떠한 형상도 만들지 않을뿐더러 하늘이나 땅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어떤 것이든지 그 모양을 본떠서 우상을 만들지 못하게 하였다.

이슬람의 이 같은 종교 정책은 유대교의 신앙과 완전 일치하였다. 그리하여 이슬람과 유대교가 공존하던 시리아와 중동지역에 있던 그리스도교 동양교회도 대체로 교회당 안에서나 또는 교인들의 일상에서 서방 로마가톨릭교회와 동방의 희랍정교회가 섬기던 성상(聖像)들을 보존하거나 섬기지 않았다. 특히 동양교회의 주류인 네스토리우스파는 성모 마리아를 하나님의 어머니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어머니로 믿어 마리아를 신화하거나 그 형상을 만들어 섬기는 일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슬람의 비판의 대상이 되지 않았지만, 로마가톨릭교회와 유대를 가진 교회들은 성상을 가지고 있어서 이슬람과 유대교인들의 비판거리가 되었다.

아무튼 이슬람의 엄격한 성상배격사상의 영향으로 서양의 그리스도교 안에서 성상을 반대하고 타파운동을 일으킨 사람들이 생기게 되었고 그 결과로 무려 100여년 동안 서양교회가 심각하게 진통을 겪고 드디어는 로마가톨릭교회와 희랍정교회의 분열을 조장하였다.

성상에는 예수가 달리신 십자가와 성모 마리아를 비롯하여 베드로와 바울과 그 밖의 성자들의 형상을 조각한 것 등이 있었는데 희랍어로 이콘(icon)이라 표현하였다. 예수의 십자가에는 조각된 그의 육체를 붙였고 성모 마리아의 형상은 여러가지가 있었다. 성자들의 이콘은 그들의 기도가 특별한 효력이 있다고 생각하여 나라를 지켜주는 힘이 되거나 개인들의 수호자가 되어준다고 믿고 만들어진 것들이었다. 예를 들면 성 죠지(George)는 영국의 수호성자이고 성 안드레(Andrew)는 러시아와 스코트랜드의 수호성자라 여겼다. 희랍 제국에서는 이콘에 키스하고 그것을 물이 마른 우물에 넣으면 물이 솟아난다고 믿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숭배는,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어머니 헬레나가 예루살렘의 예수의 묘지에서 십자가를 발견하고 그 자리에 성묘사원(聖墓寺院)을 짓고 십자가를 숭배한 데서 시작되었다. 그 십자가에는 금은보석을 박아 장식하였고 그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고 기적을 구하는 기도를 드리고 그 십자가에 키스를 하며 숭배하기 시작하였다. 교황 그레고리 1세가 십자가 숭배의식을 장려하여 영국과 온 유럽 교회로 번져갔다.

성모 마리아 숭배가 민간신앙이 되어 널리 퍼져 있었는데 마리아의 부활과 승천 신앙도 있었고 마리아를 하나님의 어머니로 믿는 신앙이 알렉산드리아 교회를 중심으로 널리 퍼져 있었다. 430년 에베소에서의 제3차 에큐메니칼 공의회에서 마리아를 그리스도의 어머니로 부르자는 네스토리우스파가 정죄된 후 마리아의 신화는 서방 로마가톨릭교회와 동방의 비잔틴 희랍교회에서 일반적인 신앙이 되었다. 그리하여 성모 마리아의 여러가지 형상이 조각되어 교회당 안팎에 세워졌다. 특히 수도원들이 여러가지 성상을 보유하여 순례자들을 많이 유치하여 수도원의 재원의 한 길이 되어 있었다.

성상 숭배를 반대하고 교회당과 수도원과 그밖의 곳에 있는 성상들을 철거하거나 파괴하는 행동이 시작된 것은 726년 동방 비잔틴제국의 황제 리오(Leo) 3세의 칙령 발표 때였다. 이때 그의 제국은 쇠약해 있었고 아랍의 모슬렘이 침략해 올 위협도 있었기 때문에 그는 국내 지식층과 아랍계와 유대계 신하들 및 장교들의 지지를 얻어야만 했다. 그리하여 그들이 평소에 미신시하여 싫어하던 성상을 없앨 필요를 느꼈다. 동시에 많은 수도원이 성상으로 막대한 수입을 얻어 국가 재원을 감소시키고 있는 것을 막을 필요도 있었다.

황제의 칙령이 발표되자 병사들이 성당과 수도원과 궁전에 들어가서 눈에 보이는 모든 성상을 철거하거나 파괴하는 과격한 행위를 보였다. 교회당 높은 벽에 걸려있는 십자가나 마리아 성상을 병사들이 사닥다리를 타고 올라서 끌어내리려 했을 때 교인들이 사닥다리를 빼어내서 병사들이 떨어져 죽기도 하였고, 병사들과 교인들, 수도사들이 성상을 안고 밀고 당기는 가운데 성상들이 바닥에 떨어져 부숴지기도 하였다. 병사들의 난동을 저지할 길이 없어서 성상들이 거의 다 철거되어 교회당과 수도원을 아름답게 장식했던 모든 미는 일시에 사라지고 말았고, 성상 앞에서 드리던 기도와 명상의 경건행위도 볼 수 없게 되었다.

로마가톨릭교회의 교황 그레고리 2세는 리오의 성상 타파 행위를 정죄하고 그를 파문한다는 선고를 발표하였다. 리오에 동조한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도 파문하였다. 로마 교황의 파문을 받는 사람은 국가적, 사회적 직위도 박탈당하는 것이어서 리오가 파문되자 희랍인 계통의 한 새로운 황제가 옹립되었다.

리오 3세 황제는 시리아인 계통의 사람이어서 불신을 받고 있었다. 이제부터 성상의 찬반 논쟁이 불붙기 시작하여 성상 옹호자들은 우상숭배자와 미신자로 몰리게 되었다. 콘스탄티노플 지역의 희랍정교회 안에서 시작된 이 논쟁은 서방 로마가톨릭교회 안에서도 일어나 신학 논쟁이 되어갔다.

이 논쟁을 종식시키려는 교회 회의가 소집되기 시작하였는데 787년 니케야에서 회의를 열고 성상을 예배하지 않고 존경하는 것이 온당하다는 합의를 양측으로부터 얻어냈다. 그런데 같은 해에 비잔틴의 새 황제가 폭력 없이 성상들을 제거하기 시작하여 다시 충돌이 일어났다. 그리하여 842년에 교회 회의를 열어 787년의 합의를 재확인했다.

이러한 합의를 본 후에 동방의 희랍정교회는 예수의 십자가와 성모 마리아의 성상을 그림이나 사진으로만 만든 화상을 교회당과 수도원에서 사용하게 되었고 서방 로마가톨릭교회는 십자가에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달린 형상을 조각하여 사용하고 성모의 성상은 육신의 형상을 조각하여 사용하였다. 그리하여 희랍정교회는 787년의 합의에 충실하게 성상에 대하여 존경(veneration)하는 경건심을 가지게 되었고 서방 로마가톨릭교회는 성상이 숭배(adoration)의 대상이 될 만큼 여기게 되어 로마가톨릭교회의 성상들은 우상이라는 느낌을 주는 것이 되었다.

3. 동서교회의 분열

서쪽의 로마가톨릭교회와 동쪽의 희랍정교회가 갈라진 원인이 여러가지가 있지만 가장 심하게 싸운 것은 성상 논쟁 때였다. 로마 교황이 비잔틴 황제를 파문하고 또 콘스탄티노플 교회 총대주교를 파문한다고 선언하였고,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는 로마 교황을 파문하였다. 서로가 온갖 험구를 구사하며 정죄하였다.

두 교회는 권위와 명예 문제로 오랫동안 다투었다. 로마가톨릭교회는 로마가 로마제국의 수도이며 베드로가 순교하여 세운 교회이므로 로마 교회가 온 세계 교회 가운데서 으뜸간다는 수위성(首位性)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베드로가 예수 그리스도의 수제자이며 천국 문의 열쇠를 받았으므로 예수의 대리자인 베드로가 그 문을 열고 닫을 권리를 가지고 있으므로 모든 교회는 베드로가 세운 로마 교회의 감독인 로마 교황의 결정에 따라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로마 교회의 감독만을 폽(Pope, 교황 또는 법황)이라 부르고 다른 교회 감독들은 다르게 부르게 하였다. 콘스탄티노플 교회의 감독은 패트리아크(patriarch)라 부르는데 총대주교라고 번역하고 있다. 본래 초대교회 시대에 로마제국 안에 3대 도시는 로마, 알렉산드리아, 안디옥이었고 이 세 대교구의 감독은 모두 동등하고 독립적인 교권을 행사해 왔고, 교세를 보아서는 로마 교구가 가장 약하였다. 그러다가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로마제국의 수도를 콘스탄티노플로 옮긴 후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비잔틴 교회 곧 희랍 교회가 급속히 성장하여 콘스탄티노플 교구도 대교구의 하나로 등장하였다. 특히 476년에 서방 로마제국의 황제 로물루스 아우구스투스가 주재하였던 라벤나가 야만족의 침략으로 함락한 후 로마시가 수도로서의 명분을 완전히 상실하게 되었고 동쪽의 비잔틴의 콘스탄티노플이 명실 공히 로마제국의 수도가 되었다.

콘스탄티노플에서 멀리 떨어져 있던 로마시가 야만족의 지배를 받게 되자 로마 교회의 감독이 시민들을 정치적으로 보호 지도하며 시민의 생활과 복지 문제까지 돌보아주게 되었다. 이러한 어려운 시기에 로마 교회의 감독 그레고리가 유능하여 로마 교회의 천 년의 번영의 토대를 닦았다. 이때 콘스탄티노플 교회의 총대주교가 콘스탄티노플 교회의 총대주교의 명칭을 에큐메니칼 감독(ecumenical bishop) 즉 세계 감독이라 불러달라고 그레고리에게 요청했는데 그레고리는 이 명칭이 유일한 감독이라는 뜻이므로 허용할 수 없다고 일축하였다. 당시 콘스탄티노플이 한때 로마시처럼 세계의 수도가 되어 있었으므로 에큐메니칼 감독이란 이름도 가당할 수 있었다. 로마 교회 감독은 ‘그리스도의 대리자’(vicar of Christ)로 자처했다. 그러나 베드로가 로마에서 순교한 것은 사실로서 받아들일 수 있지만 그가 로마 교회의 창설자도 아니고 또 목회자도 아니었다.

동서 두 교회를 멀어지게 한 또 하나의 사건은 제3차 십자군원정 때 십자군들이 베니스 상인들이 제공한 배를 타고 콘스탄티노플에 가서 비잔틴 황제에게 십자군 군비 조달을 강요하고 콘스탄티노플에 있는 귀중한 보물들과 심지어 성 소피아 성전에 있던 여러가지 값진 예술품들을 약탈하고, 그곳의 황제를 물리치고 새 황제를 세워서 서쪽 로마인들의 라틴 왕국을 1206년에 세운 사건이었다. 이것은 비잔틴 제국을 타도한 것이어서 비잔틴 사람들의 강한 반감을 샀다. 그리하여 비잔틴 주민들이 십자군이 패하도록 모슬렘 군대에 협력한 일도 있었다.

콘스탄티노플에서 라틴 왕국의 왕 요한 3세가 다스리고 있던 동안에 비잔틴 제국의 황제들은 시리아 지방의 니케야에 수도를 정하고 콘스탄티노플을 탈환할 것을 도모하고 있었다. 한편으로 그들 중 한 황제가 두 교회 사이의 화해를 제안하여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와 로마의 교황 간 교섭을 위한 사절단을 1234년 파송하여 의논하게 하였으나 양편의 감정 대립이 너무 심해서 실패하였다. 비잔틴 제국의 황제가 콘스탄티노플로 복귀한 것은 1261년이었고 그 후에도 비잔틴 황제들은 모슬렘인 터키의 오토만(Ottoman) 군대의 침략을 막기 위하여 서방 신성로마제국의 군사적 협조를 필요로 하여 로마가톨릭교회와 희랍정교회 사이의 화해를 염원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274년 에큐메니칼 회의에서 양 교회의 화해와 일치에 관한 내용을 통과시켰으나 비잔틴 지방 사람들이 강력한 민족주의 사상을 가지고 동조하지 않았고, 비잔틴 교회도 화해를 원하지 않았다. 화해는 로마 교회의 수위성을 인정하는 일이었다.

비잔틴의 황제들은 터키의 모슬렘 군대의 침략을 막는 일이 시급해서 자기들은 로마 교황에 복종하겠노라 천명하고 교황도 그것을 환영하였으나 비잔틴 교회의 총대주교들과 교인들이 동조하지 않아서 결국 화해는 실패하였다. 비잔틴 황제들을 로마 교황과 콘스탄티노플, 안디옥, 예루살렘,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들이 회의를 열어 의논해줄 것을 바랐으나 실현되지 않았다.

로마가톨릭교회와 비잔틴의 희랍정교회 사이에는 서로 다른 것이 많았다. 문화적으로 로마의 라틴 문화와 희랍 문화의 차이는 고사하고 교회의 제도와 신학에 있어서도 다른 것이 많았다. 신학적으로 로마 교회는 성령이 성부와 성자 두 분으로부터 나왔다는 이중발원론을 지지하였으나 희랍 교회는 성령이 오직 성부로부터만 나왔다고 믿었다. 325년 최초의 신앙고백에는 성령이 성부로부터만 나왔다고 했는데 오랜 논쟁 끝에 성령은 ‘또한 성자로부터’ 나왔다고 첨가했다. 희랍교회는 이 첨가된 것을 수용하지 않았다. 또 로마 교회는 성만찬 때 누룩 없는 떡을 사용했지만 희랍 교회는 반드시 누룩이 든 떡을 사용했다. 로마가톨릭교회 신부와 달리 희랍 교회 신부는 수염과 머리를 길렀고 결혼도 하였다.

예배 의식이 로마가톨릭교회에서 일찍부터 제도적으로 확립되어서 다른 교회에 전파되었다. 여러가지 예전의 의식문과 기도문이 라틴말로 된 그대로 보급되어갔다. 그리하여 비잔틴 교회에서도 로마 교회의 것이 그대로 사용되었는데 후대로 오면서 희랍 교회는 그 내용과 용어를 고쳐서 사용하였다.

로마 교회 교황 리오 9세가 시실리섬과 이태리 남부의 교회들이 로마 교회의 예배와 예전을 따르도록 만드는 운동을 시작하고 그곳의 결혼한 신부들에 도전하였을 때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 세르라리우스(Cerelarius)가 대항하여 자기 교구 안에서 라틴식 예배와 예전을 따르는 교회들의 문을 닫아버렸다. 이렇게 양 교회 사이에 싸움이 벌어져서 의견을 조정하려고 1054년에 콘스탄티노플에서 회의를 열었으나 실패하여 동서 두 교회는 이후로 아주 갈라지게 되어 오늘날까지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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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현존, '경계의 신학'을 '경계 너머의 신학'으로 끌어올려"

폴 틸리히의 성령론에 대한 연구논문이 발표됐습니다. 한국조직신학논총 제73집(2023년 12월)에 발표된 '폴 틸리히의 성령론: 경계의 신학에서의 "영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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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희성은 예수쟁이...그의 학문적 정체성은 종교신학"

김경재 한신대 명예교수가 고 길희성 박사를 추모하는 글을 '기독교사상' 최신호에 기고했습니다. '길희성 종교신학의 공헌과 과제'라는 제목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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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로몬 왕은 약자들이나 쓰는 속임수를 왜 썼을까?"

아이의 진짜 어머니와 가짜 어머니를 가려낸 솔로몬의 재판은 그의 지혜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최근 발간된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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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라는 개념이 인간에 의해 왜곡되고 짓밟혀왔다"

한신대 전철 교수가 「신학사상」 203집(2023 겨울호)에 '지구의 신학과 자연의 신학'이란 제목의 연구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이 논문에서 전 교수는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