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경동설교] 물성과 영성

2010년 10월 24일 설교자 박종화 목사

성경본문


창세기 8:18-22

노아는 아들들과 아내와 며느리들을 데리고 나왔다. 모든 짐승, 모든 길짐승, 모든 새, 땅 위를 기어다니는 모든 것도, 그 종류대로 방주에서 바깥으로 나왔다. 노아는 주님 앞에 제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집짐승과 정결한 새들 가운데서 제물을 골라서, 제단 위에 번제물로 바쳤다. 주님께서 그 향기를 맡으시고서, 마음 속으로 다짐하셨다. "다시는 사람이 악하다고 하여서, 땅을 저주하지는 않겠다. 사람은 어릴 때부터 그 마음의 생각이 악하기 마련이다. 다시는 이번에 한 것 같이, 모든 생물을 없애지는 않겠다. 땅이 있는 한, 뿌리는 때와 거두는 때, 추위와 더위, 여름과 겨울, 낮과 밤이 그치지 아니할 것이다." 아멘.

고린도후서 3:3-6

여러분은 분명히 그리스도께서 쓰신 편지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작성하는 데에 봉사하였습니다. 그것은 먹물로 쓴 것이 아니라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요, 돌판에 쓴 것이 아니라 가슴 판에 쓴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확신을 가지고 있으므로, 이런 말을 합니다. 우리가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자격이 우리에게서 났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자격은 하나님에게서 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새 언약의 일꾼이 되는 자격을 주셨습니다. 이 새 언약은 문자로 된 것이 아니라, 영으로 된 것입니다. 문자는 사람을 죽이고, 영은 사람을 살립니다. 아멘.

마가복음서 2:23-28

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시게 되었다. 제자들이 길을 내면서, 밀 이삭을 자르기 시작하였다. 바리새파 사람이 예수께 말하였다. "보십시오, 어찌하여 이 사람들은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합니까?"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다윗과 그 일행이 먹을 것이 없어서 굶주릴 때에, 다윗이 어떻게 하였는지를 너희는 읽지 못하였느냐? 아비아달 대제사장 때에, 다윗이 하나님의 집에 들어가서, 제사장들 밖에는 먹어서는 안 되는 제단 빵을 먹고, 그 일행에게도 주지 않았느냐?" 그리고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인자는 또한 안식일에도 주인이다." 아멘.
 
설교문
  
  
<물성과 영성>

세상 살아가면서 좋을 때도 있고 안 좋을 때도 있고, 기쁨이 넘치는 이야기도 많고 서글퍼서 감히 입에 내기조차 어려운 그런 상황도 있습니다. 지난주에는 전 세계가 다 감동했던 칠레의 광산이야기를 했습니다. 오늘은 좀 아쉬운 이야기를 나눠야 할 것 같습니다.

여러 가지 얘기가 많지만 열세 살 난 중학생이 이유가 어떻든 자기 집에 불을 지르고 아버지가 불에 타고 엄마도 할머니도 동생도 불에 타서 죽은 사건을 다 기억하실 것입니다. 우리 가까운데서 일어난 사건이기에 충격이 더 컸습니다. 그런가하면 그 중학생은 불이 난 현장에 와서 능청스럽게 어머니를 부르며 통곡했다는 얘기를 들으며 속에 있는 가슴이 타오르는지 물에 녹아나는지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살아가면서 이런저런 일 다 있지만 우리 사회에 우리 가까운데서 이런 일도 있다는 것이 참 가슴 아픈 일입니다. 아마 이 학생한테도 다양한 감정이 있었을 것입니다. 부모한테 고마운 마음도 있었을테고, 부모가 다그치는 것에 대해서 분노하는 마음도 있었을 것이고, 사랑하는 부모님이 좋았을 수도 있었을테고, 잔소리한다고 싫어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이렇듯 다양한 감성들, 감정들이 있는데 이것을 우리가 언어로 표출하기도 하고 그림으로 표출하기도 하고 또는 음악 소리로도 표출하기도 합니다. 사람의 심리를 정신과학적으로 분석을 하면 여러 가지 상충되는 또는 조화되는 마음들이 언어로 표출되어서 나타납니다.

융이라는 스위스의 정신과학자가 정신과 치료를 하면서 사람마다 언어로 표출할 때 다양한 감정들이 있고, 이 정신상황을 묶어놓으면 합치될 수도 있고 합치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이 분이 발견한 것이 다양한 감정을 언어로 표출해서 그 언어 집단들을 묶어놓을 때 생길 수 있는 화합의 의미였는데 그러다가 이분이 만든 단어가 있습니다. 바로 ‘콤플렉스’입니다.

칼 융이 ‘콤플렉스’라는 말을 정신과 치료에 처음으로 쓰기 시작했습니다. 다양한 감성들의 모음, 서로 다른 것들이 모였을 때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뜻합니다. 그래서 흔히 우리가 이 말을 쓸 때, 너무 자기를 비하하고 열등감이 많으면 ‘열등감 콤플렉스’라고도 하고, 자기를 너무 높이고 교만해지면 ‘우월감 콤플렉스’라고도 합니다. 콤플렉스는 두 가지입니다. 본래 콤플렉스 자체는 중성인데 우리는 이 말을 아주 부정적으로 쓰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아까 말씀드린 열 세 살 난 아이를 보면서 이 아이 속에 있는 좋고 나쁘고, 선하고 악한 콤플렉스가 생산적이고 좋은 데로 발전하지 못하고 이렇게 부정적으로 발전했습니다. 콤플렉스라는 말은 단순히 이런 열두 살 아이에게만 해당하는 게 아니라 우리 인간 삶의 전체에서도 해당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어떻게 다양한 것을 화합시켜서 생산적인 생명체를 만들어 낼 수 있습니까?

오늘 성경말씀에 좋은 본보기가 있습니다. 우선 하나님께서 창세기 1장을 통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자연을 다 만들어 놓고, 마지막 창조한 인간들의 모습이 너무 좋아서, 에덴동산에서 뛰어노는 인간의 모습, 자연의 모습이 너무 좋아서 하나님이 “참 좋다.” 라고 표현했습니다. 이것이 창조에 대한 창조주의 첫 음성입니다.

너무 좋고 신나서 하나님이 이렇게 선언합니다. 선언 내용은 1:28에 다 있습니다. “인간들아, 이 땅에 생육하고 번성해라. 어느 만큼 생육하고 번성하느냐 하면 온 땅에 완전히 충만하도록 생육하고 번성해라. 그리고 땅을 정복해라.” 이 정복이라는 말을 잘못 해석해서 인간들은 이 땅을 다 뒤집어 놨습니다. 바로 우리가 환경 파괴의 주범들입니다. 본래 정복하라는 말은 땅을 잘 갈고 닦아서 소출을 많이 내고 그리고 배불리 먹고, 땅도 좋고, 인간도 좋고, 그런 뜻에서 정복하라는 뜻이었습니다.

어쨌든 이 말씀을 하나님이 창세기를 통해서 선포하실 때 하나님의 얼굴은 아마 희열로 가득 찼을 겁니다. “너무 좋다. 좋으니 생육하고 번성해라. 땅을 완전히 충만하게 만들어라. 그리고 땅을 끌어안고 정복해라.” 시간을 말할 필요는 없습니다만 이 당시에 인간의 생각에서는 ‘땅은 우리의 것, 삼라만상 자연도 우리의 것, 우리 마음대로 굴리자.’ 그러다 보니까 자연만 파괴된 게 아니라 인간도 타락합니다.

이 창조설화 이야기 다음에 나오는 오늘 성경본문이 재밌습니다. 오늘은 소돔과 고모라에서 그렇게 칭찬받던 인간이 타락하고 타락이 지나쳐서 구원받을 수 없게 되자 하나님이 인간을 다 멸절 시키는 장면입니다. 일부 남은 사람들만 노아의 방주에 불러다 놓고 나머지는 홍수로 다 멸망시킵니다.

오늘 대목은 배가 수면으로 올라와서 물이 다 빠지고 노아가 자기 아이들, 며느리들, 또 생물을 종류별로 다 배 뚜껑을 열고 내보내면서 다시 창조주를 회복하는 장면입니다. 그 장면 가운데 이런 표현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새로 드리는 번제의 연기 향기를 맡으시고 마음속으로 다짐하셨다.” 대담하게 선포하셨다가 아니라 마음속으로 다짐하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제가 감성조로 읽으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이 처음 창조해서 마음대로 번성, 생육, 충만했을 때의 마음이 아니고 생물이 다 죽고 나니, 인간도 죽고 생물이 다 죽고 땅도 다 죽고 나니 하나님이 후회스러웠습니다. “하나님이 후회하시면서 이렇게 작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이렇게 표현해야 하는데 그냥 마음속으로 다짐하셨습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사람이 악하다고 해서 다시는 땅을 저주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노아 홍수는 하나님이 잘못하신 것 같습니다. 자기 뜻이 있었으면 사람이 악하다고 사람만 멸절시키지 왜 땅을 하늘을 자연을 다 멸절시킵니까. 오늘 말씀을 보면 “내가 잘못 생각한 것 같다.” 하나님도 실수하셨나 봅니다. 이는 하나님의 마음의 아픔을 표출한 이야기입니다. “사람이 악하다고 해서 이제부터는 땅까지 멸망시키는 일은 없을 것이다. 본래 사람은 어릴 때부터 마음에 생각이 악하기 마련이다. 그렇다고 해서 자연을 멸망시키지 않겠다.”

저희들은 21세기까지 살아오면서 저희들이 누렸던 축복도 알지만 저희들이 범한 축복도 알고 있습니다. 자연, 식물계, 동물계, 모든 걸 합쳐서 자연이라고 합시다. 자연 세계를 얼마나 파괴했습니까? 우리의 소유물인 것처럼 파괴된 자연이 우리한테 항의를 합니다. 호소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당하는 오염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들으면서 하나님의 음성을 새롭게 경청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느낍니다. 자연은 인간의 부속물이 아닙니다.

오늘 말씀대로 인간에게는 중요한 인간성이라는 아름다운 가치가 있지만 생물, 동물, 식물을 다 합한 자연에도 ‘자연생명’이 있습니다. 자연생명은 존중합니다. 자연생명은 자연생명대로 권한이 있고 권리가 있습니다. 오늘 노아 홍수 외의 하나님 말씀은 자연 피조물인 자연의 자연권 회복 선언입니다.

“모든 삼라만상은 나름대로 권리가 있고 존중 받아야 하고 생명의 권한이 있다. 이 사실을 인간들이여, 깨달으라.”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다시 한 번 깨달읍시다. 인간의 생명이 중요한 만큼 자연의 생명도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창조질서의 콤플렉스는 뭡니까? 자연생명과 인간생명은 다르지만, 질적으로 다르지만, 그러나 둘이 합하여 하나의 아름다운 생명체가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화의부동’, 논어에 나오는 좋은 말입니다. 자연과 인간은 다르나, 둘이 합하여 자연도 좋고 인간도 좋은 화의의 세계를 만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자연은 몸통이고 사람은 혼입니까? 자연의 몸에도 혼이 있고, 사람의 몸에도 혼이 있습니다. 사람의 몸이 몸과 혼이 같이 움직여야 하듯이 자연 생명에도 생명의 호흡이 있고 자연의 질서가 있습니다. 모든 것이 다 합하여 선을 이루어야지 어느 하나만 가지고 되지도 않습니다.

저는 오늘 이야기를 들으면서 “사랑하는 21세기 성도 여러분, 인간생명이 귀중하면 자연생명도 귀중하다고 깨달으십시오. 우리의 경험이 말한 것이지만 하나님의 창조질서가 본래 그렇습니다. 둘이 합하여 부정적 콤플렉스로 보지 말고 선의 긍정적 콤플렉스로 보고 자연과 인간이 함께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십시오. 합일된 생명을 받으십시오.” 이렇게 오늘 말씀합니다.

인간 세계에 관한 얘기로 예수님께서 다시 무대를 돌립니다. 안식일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하고 같이 하나님 나라 이야기를 선포하고 오시다가 너무 배가 고파서 밀밭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오늘 마가복음서의 이야기는 제자들이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잘랐습니다. 그것도 안식일에. 같은 본문이지만 마태복음 본문에 보면 밀 이삭을 잘라서 먹었습니다. 누가복음 본문에 보면 밀 이삭을 잘라서 손으로 비벼서 알곡을 먹었습니다.

똑같은 이야기인데 표현이 마태, 마가, 누가가 조금씩 다릅니다. 내용은 제자들이 너무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잘라서 손으로 비벼서 먹었다는 것입니다. 이 사건을 가지고 유대교 지도자들이 예수에게 이의를 제기합니다. “안식일에 일하지 말라고 했으면 하지 말아야지, 어떻게 당신 제자들은 밀 이삭을 자르는 일, 손으로 비비는 일, 먹는 일, 이런 일을 합니까?” 이런 질문을 받으면 지금 우리의 상식은 어떻습니까?

안식일 계명을 위반한 것은 사실입니다. 안식일 계명은 사람들이 제안해서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물론 안식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본래 명령은 있었지만 이 명령을 복제한 것은 사람입니다. 그 다음에 마가복음에 가면 이런 비유가 있습니다. 안식일에 예수께서 정말 죽어가는 병자 한 사람에게 안수해서 병을 고쳐주었습니다. 그랬더니 똑같은 반론이 생겼습니다. “안식일에 일하지 않았으면 고쳐주지 말아야지, 왜 병자를 고쳐주는 일을 하십니까?”

예수님의 대답입니다. 본질을 파고듭니다. 하나님이 주신 안식일은 정말 좋다고 한 날입니다. 예수께서 하시는 말씀이 “안식일에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게 옳으냐, 죽이는 게 옳으냐, 좋은 일 하는 게 옳으냐, 나쁜 일 하는 게 옳으냐?” 하고 대놓고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인간들이여, 하나님의 축복을 인간의 고닥적인 언어로, 도식화된 이념으로, 자기의 생각으로 하나님의 이야기를, 하나님의 심정을 곡해하지 말라. 안식일에 일하지 말라는 것의 본래 뜻은 안식일은 생명이 사는 날이다. 죽어가는 자가 있으면 살리는 것이 안식이고, 배고픈 자가 있으면 먹여주는 것이 안식이다. 배고파 죽어가는 사람이 있는데 굶으라 하고, 병들어서 죽어가는 사람을 죽으라고 놔두고 자신은 무의도식하는 것이 안식이 아니고, 배고픈 자는 먹이고 목마른 자는 마시게 하고 죽어가는 자는 살리고 생명의 축제를 여는 것이 안식이다.”

그러면서 예수께서 마지막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안식이 사람을 위해서 있지 어떻게 사람이 안식을 위해서 있느냐.” 아까 노아의 홍수 이야기가 하나님이 만드신 자연의 자연권 선언이라고 한다면 오늘 안식일 이야기는 하나님이 만드신 인간의 인권 선언입니다. “안식일의 계명이 나쁘다는 게 아니라 안식일의 계명은 살리는 계명이어야 한다. 죽게 시키는 계명은 죽은 계명이다. 그것은 죽은 문자다.”

고린도후서에서는 다음과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박제화하고 자기 고착화된 이념이나 생각이나 규정은 사람을 죽이면 그런 규정은 안식일 계명과는 다릅니다. 우리에게 질서가 필요하고 다 필요하지만 모든 것은 살리는 질서여야 합니다. 살리는 말씀이어야 합니다. 살리는 문자여야 합니다. 생명이 사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의 본질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죽이면 안 됩니다. 살립시다. 그리고 살리는 날이 안식일이면 더 좋습니다. 우리 오늘 안식일에 모였습니다. 예배하러 모였습니다. 왜 오셨습니까? 문자를 읽고 터득하려고 오셨습니까? 오늘 안식일의 핵심인 예배는 하나님이 우리를 살리셨고 우리도 서로서로 도와가면서 살려야 하고 자연도 살리고 공기도 살리고 사람도 살리고 살리면서 살림 속에 들어 계신 하나님의 은총이 너무 고마워서 생명을 주신 고마움이 너무 커서 우리는 생명의 축제를 감사와 찬양으로 드리는 것이 예배입니다.

오늘 예배드리실 때 문자를 기억하지 마시고 문자 속에 담긴 글귀 속에 담긴 하나님의 음성 속에 담긴 생명을 기억합시다. 우리가 아름다운 찬송을 들으면 ‘아멘’합니다. 찬송 소리 속에 가사 속에 생명이 움터 있기 때문입니다. 아름다운 그림 한 폭을 보면 그것이 물건이 아니고 그 속에 살아 움직이는 생명의 메시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만든 모든 삼라만상 중에도 생명의 힘이 있으면 생명력이 움터나면 생명의 영이 그 자리에 같이 하면 우리 몸은 기뻐서 찬양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그 경험을 예배를 통해서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생명의 안식일, 생명의 이야기를 주시면서 하나님이 만드신 몸을 규정합니다. 왜 규정하느냐 하면 우리 하나님이 주신 몸은 비록 이완하지만 우리 몸속에 하나님의 생명의 호흡인 입김을 불어넣어 주셨습니다. 우리 몸은 하나님의 생명을 담는 그릇입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영을 담는 그릇입니다. ‘그릇 따로 영 따로’가 아니라 그릇이 망가지면 영도 망가집니다.

옛날 희랍 철인들이나 우리 교회사 초기 역사 중에 오해가 있었습니다. 사람 몸이 죽으면 우리 몸속에 있는 혼은 몸에 있던 감옥에서 해방되어 영원한 생명의 나라로 홀로 가므로 혼은 영생복락을 누린다고 사고했습니다. 죄송한 이야기지만 성경 말씀에 이 말이 옳다고 되어 있는 구절이 한 군데도 없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이 몸이 죽으면 몸에 같이 있는 혼도 죽는다.’ 싫어도 할 수 없습니다. 사람의 몸과 영이 따로따로 있다는 성경말씀은 하나도 없습니다. 몸과 혼은 같이 붙어 있습니다. 둘이 다르지만 둘은 합해서 인간 전체의 행복을 누리고 인간의 존엄성을 누립니다.

우리가 죽으면 우리의 영도 죽습니다. 이것이 성경말씀의 진리입니다. 몸과 영을 따로 구분하지 마십시오. 몸속에 혼이 있고 혼은 몸으로 둘러 싸여 있습니다. 우리가 죽는데 몸은 죽었고 우리의 혼이 돌아다니면서 무얼 마시고 무얼 먹고 살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몸이 없는 혼을 생각해 보십시오. 떠돌아다니고 아니면 혼이 없는 몸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게 무슨 인간입니까? 혼이 없는 육, 육이 없는 혼, 성경말씀에 두 개를 구분은 했으나 분리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대목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죽으셔서 다 끝나셨는데 하나님께서 죽은 자를 부활시켜서 썩지 않는 몸으로 부활시켰고 영생을 누리는 혼으로 부활시켰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성경말씀은 이해하기를 몸이 죽으면 혼이 죽는다는데 도대체 끝이 어디고 새로운 시작은 어딥니까, 에 대해서 성경말씀 보면 “사람이 죽는다.” 그 말 뒤에 “사람이 잔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부활하신 능력을 주신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인간의 죽음은 몸과 혼의 죽음은 마침표가 아닙니다. 쉰다고 했습니다. 인간의 죽음은 생명의 죽음은 다시 부활하기 위한 쉼표입니다. 마침표(.)가 아니고 쉼표(,)입니다. 이 사실을 믿으십니까? 다시 생명으로 살 때는 썩지 않는 몸으로 죄악을 다 탕감 받은 영으로 다시 부활해서 살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걸 믿으시면 마침표가 아니라 쉼표입니다.

쉼표를 사는 여러분, 오늘 속에 영원한 하늘나라 생명이 싹터 나고 여러분 속에서 움터나고 있습니다. 이 사실 때문에 안식일에 매일 호흡이 있는 한 생명이 있는 한 여러분 찬송하고 찬양하시지 않습니까? 생명 이야기는 우리 개인의 이야기만은 아닙니다.

아까 장로님 기도하신 대로 ‘G20’이 우리나라에서 열리는 것은 참 고마운 일입니다. 세상이 참 많이 변했습니다. 우리가 ‘G20’은 고사하고 밥 먹을 것이 없었던 시절, 고난 받던 시절, 목말라 했던 시절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 때를 생각해서라도 ‘G20’이 모였을 때 조직은 할 수 없습니다. ‘G20’을 바라보면서 그냥 억울해 하는 사람들, 분노를 씹어야 할 사람들, 세상에 있는 수많은 빈곤한 사람들, 이분들에게도 일용할 양식이 있게 해달라고, ‘G20’ 성공과 함께 이분들에게도 일용한 양식을 갖게 해 달라고 우리는 기도로 ‘G20’을 후원해 주십시다.

또 하나 있습니다. 일용할 양식, 배부른 나라들이 모여서 회의를 하지만 몸에 관한 이야기, 이자에 관한 이야기, 환율 이야기가 나올 뿐, 하나님이 자연과 인간을 창조하신 생명의 영성이나 도덕성에 관한 아름다운 이야기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우리는 회의조직은 안했지만 오늘 마음속에 오늘 가슴 속에 하나님이 영으로 사신다고 했으니 하나님과 우리 마음속에 ‘G20’을 같이 개척합시다.

이 땅에 하늘의 영성도 하늘의 도덕도 하늘의 가슴도 풍성하게 함께 주옵소서. 온 세계와 함께 나눌 수 있게 하옵소서. 정부 당국자 회의나 우리 믿는 자들의 회의가 같이 나아갔으면 좋겠습니다. 세상 생명은 같이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참 좋다.” 말씀하십니다. 이 좋다는 축제에 우리도 동참합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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