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차정식 칼럼]말로써 폭력을 권하는 사회

한일장신대 신학과 교수

조심하지 않는 사람들

문근영이라는 앳된 여배우가 지난 몇 년간 남몰래 8억이 넘는 기부금을 낸 선행이 언론의 추적 끝에 밝혀졌다. 그 사연이 이 어려운 시절에 훈훈한 미담으로 회자되던 즈음, 한 보수논객은 그것을 요상하게 비틀어 외조부와 일가친척들의 계보를 두루 꿰어 차며 붉은 색깔을 칠하느라 분요했다. 이 나라의 가장 사랑받는 인기여배우가 네티즌의 ‘악플’ 세례에 상심한 채 스스로 달달볶다가 유명을 달리한 게 불과 한 달 조금 넘은 시점이었다. 그때 그 사건으로 ‘악플’에 대한 사회적 반성의 분위기가 비등하던 즈음, 대중적으로 이름과 얼굴이 알려진 사람들 중 양심 고백하듯 너도나도 그런 류의 언어폭력에 시달려왔노라며 때늦은 비분에 강개를 토해내곤 했다.  또 비슷한 시점에 이 나라의 ‘문화’를 책임진다는 장관은 개인적 울분을 참지 못해 공석에서 기자들을 향해 욕설을 한 것이 언론의 입방아에 올라 곤욕을 치르기도 하였다. 욕을 했느니 안 했느니 뒤늦게 항변하며 공박을 주고받았지만, 사람들의 상식적 추론은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랴’는 것이었다.

남북관계가 악화일로로 위태롭다고 한다. 그 발단의 시점을 돌이켜보면,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말을 공석에서 내뱉어 화근을 부른 격이다. 조심하지 않은 태만한 몸가짐과 분위기를 살피지 않은 조신치 못한 지도자의 행실이 서로 나쁜 쪽으로 치고받고 감정을 악화시키며 상승 작용한 셈이다. 그로 인해 마음이 닫히고 아무런 영양가 없이 피해를 입는 걸 뻔히 보는데도 왜 그러는지, 인간의 혀는 도통 사태의 추이에 무감각한 채 저질러진 상황을 뒤늦게 미봉하기에 급급하다. 언론매체는 매일 나름의 편집적 전략과 정치적 기획 하에 따옴표 속에 인용되는 사람들의 말을 소개하고 그것을 찧고 까부르기에 열심이다. 그렇게 큼직한 문자의 표제어로 현상된 사람들의 말은 그 사람들의 사회적 위상과 권력이 부여하는 후광에 비례하여 세상을 충격한다. 그 위상과 권력의 후광이 대단치 못한 사람들은 그 말과 함께 쏟아낸 끔찍한 행동들로 이 세상의 폭력을 더 화려하게 장식하지 못해 안달이다. 어찌하든, 충격을 줘서 이목을 끌고자 하는 이 깜짝쇼의 언어적 유희 가운데 회전하는 인정 욕구와 인정 투쟁은 지나치게 풍성하지만, 제 혀에 재갈을 물려 조심하거나 그 마음을 절제하여 극진하게 예의를 갖추어 공대하는 사람들은 점점 더 희귀해져가고 있는 듯하다.

말의 폭력성, 그 악순환의 궤적

시대가 급박하게 돌아가서인지 점점 더 사람들의 마음도 말라가는 게 완연해 보인다. 오랫동안 억압적 독재체제하에 눌렸던 울분이 민주화 이행 과정에서 곳곳에서 분출하는 광경은 개인의 심적 보양과 체제의 질서를 가늠하기가 심히 곤란한 형국으로 치달아온 추세다. 술꾼들의 야간 행보 중에 폭발하는 고함소리나 삿대질이야 그나마 실존의 고단함으로 치부할 수 있겠다. 한때 ‘술 권하는 사회’의 부조리를 낱낱이 해부한 작가가 있었듯이, 이제도 변함없이 하루치 생활의 피로에 파묻혀 추워지는 밤중마다 포장마차 안의 지친 화상들로 득시글거리고, 거리마다 술꾼들의 비틀거리는 행렬은 끊일 줄을 모른다. 문제는 대낮에도 술 취한 듯, 조심하지 않고 막말하며 조신하지 않은 몸가짐으로 막가파식 행태를 보이는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의 존재 자체가 우울한 시대의 단면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려니와, 그것을 특정 개인의 가정교육 탓으로 돌려 그 못된 성깔을 타박할 노릇만도 아니다. 배울 만큼 제도교육의 수혜를 받고 교양도 쌓을 만한 환경에서 자란 사람들인데, 기묘하게도 그들의 언행은 막무가내의 폭력적인 칼부림으로 환한 대낮의 분위기를 민망하게 만들기 일쑤이다.

주먹이나 칼로 치고받는 물리적 폭력의 현장은 화끈한 한 방으로 끝장을 내주면 승패가 확실히 갈리고 그야말로 파장하는 분위기이다. 한데 이런 차원과 달리 말과 글이라는 형식에 담긴 인간의 욕망은 그 폭력성을 위장한 채 무한하게 번식하는 속성이 있다. 별것 아닌 말 한 마디가 부주의하게 내뱉어지고 그것이 과장ㆍ왜곡되어 거친 반응을 유발하면 거듭 공박을 주고받으면서 거침없이 질주한다. 그 틈새로 당사자들의 원망과 분노는 더욱 가열차게 그 폭력의 회로에 뜨거운 연료를 붓는다. 아무도 그 회로를 먼저 차단하여 다소곳이 침묵하고 조심의 모드로 회귀하지 않으면 마침내 살기를 번득이며 죽고 죽이는 가인과 아벨의 범죄를 되풀이하게 된다. 최근 경기도에서 한 젊은 아비가 부부싸움 중에 울면서 칭얼대는 예닐곱 살 딸을 4층 창밖으로 내던져 죽게 한 사건은 이런 극단적인 비극의 한 가지 사례일 뿐이다. 결국 조심하지 않은 말과 글이 발단이 된 싸움은 한 쪽이 죽어 나뒹굴거나 망신창이가 되기 전까지 정지하는 법이 없다. 그 당사자뿐 아니라 구경하다 끼어든 사람들이 그 싸움에 가세하여 험한 분위기를 더 뜨겁게 달구기 일쑤인데, 그 끝판에는 아무런 소득 없이 여러 사람 망가지는 허탈한 결말이 대기하고 있을 뿐이다.

놀랍게도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말과 글로 입은 상처는 상처대로 곪아 치유받은 뒤로도 외상의 앙금으로 남는다. 그 말과 글은 사람들의 마음에 각인되고 유전되어 적절한 타이밍에 맞춰 재현되고 부활하는 생명의 자율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 언어의 자율적 생명성을 매개하는 것은 기억과 기록이다. 거칠고 악랄한 말들로 얼룩진 기억은 나도 모르는 사이 내 속에 똬리를 틀고 폭력의 욕망을 부추긴다. 더럽고 졸렬한 글들로 도배된 기록은 우리 사회가 방심한 틈을 타고 다시금 또 다른 폭력을 권하며 공격을 충동질한다. 그렇게 이 시대에 횡행하는 공적인 말과 글은 사람들의 욕망과 결탁하여 사건화되고 담론화되며, 그것이 조심성 없이 거칠수록, 또 체계의 억압에 민감하게 반응할수록 일상의 폭력성을 가중시킨다. 말의 폭력성은 그렇게 그 악순환의 궤적을 선회하며 오늘도 자극적이고 허풍스런 말, 공격적이고 사특한 말, 그리고 각종 악플과 폭압적인 글을 양산하고 있는 것이다.   

혀의 불, 불의의 세계

동서의 지혜문학은 예외 없이 인간의 말에 집중적인 관심을 보여주었다. 요컨대, 신중하고 조심성 있는 말의 실천이 일상적 지혜의 주요 관건이 됨을 역설한 것이다. 잠언-전도서-집회서 등의 계보를 잇는 구약성서 지혜문학이 또한 그 점을 일관되게 강조하였다. 가령,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잠 15:1)는 말씀이 대표적인 요절이다. 나아가 이는 사악한 말의 현상에 대한 극도의 민감한 반응을 보인 시편의 세계와도 연동된다. 원수의 사악한 말들을 향해 독한 의분을 토해내며 하나님께 하소연한 시편 기자의 관심은 워낙 맹렬한 기세라서 말이 왜 칼보다 더 아픈지 절감할 수 있게 된다. 예수께서는 입에서 나오는 말을 심판의 준거로 여기고(눅 19:22), 우리가 내뱉은 모든 무익한 말에 대하여 심판 날에 책임을 묻을 것임을 엄중히 경고한 바 있다(마 12:36).

특히, 그는 담백한 언어생활을 중시하여 우리의 말이 ‘예’와 ‘아니오’로 과장 없이 똑 떨어지는 간명한 것이 되어야 함을 강조했다(마 5:37). 여기에서 군더더기로 붙는 각종 현란한 수사와 과장스런 맹세의 언사는 요사스런 장식이나 자기기만이 될 게 뻔했기 때문이다. 진중한 행동으로 말하기보다 촐싹대는 말로써 행동하는 이들의 공통점은 그들의 말에 온갖 허풍이 가득한 과장과 그렇게 화려하게 분식된 말로써 자랑하려는 자기 과시의 욕망이 그 말에 덕지덕지 묻어 있다는 것이다. 그런 사람이 각계의 주요 지도자로 군림하여 벌이는 짓은 회칠한 웅변술을 동원한 자기도취적인 과대선전과 근거 없는 허세가 대부분인데, 거기에는 일관성 없는 언사와 조심성 없는 혀의 장난이 빠지지 않는다. 그 와중에 혼란스러워지는 것은 주변 백성들의 정신이요, 고통을 겪는 것은 그들의 생활이다. 언론의 확대ㆍ증폭 기능도 이 대목에서 단단히 한 몫 한다. 불난 집에 부채질하듯, 그런 말들의 자극성과 선동성에 사람들 욕망이 준동한다는 걸 잘 알고, 그런 말들일수록 상전 대접을 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폭력을 경계하면서 폭력에 호기심을 보이는 말의 이율배반적 수렁, 혀의 욕망이 만드는 자가당착적 심연은 일찍이 야고보서의 통찰이 보여준 섬뜩한 지옥세상이다.

야고보서는 혀를 배의 키에 비유하면서 작은 지체가 커다란 몸집을 조종하는 이치에 주목했다(약 3:4-5). 나아가 그는 그 혀가 작은 불로서 가공할 만한 폭력성을 수반하는 현실을 직시했다. 아울러, 저자는 혀를 끊임없이 분열하고 악과 독이 가득한 ‘불의의 세계’로 묘사하면서, ‘생의 바퀴’를 굴러가게 하는 욕망의 숙주임을 정곡을 찌르며 포착하였다(약 3:6). 그 생의 바퀴를 굴러가게 하는 연료가 지옥(게헨나)에서 공급받는 불이라는 지적에 이르러서는 아연 실색케 된다. 그 혀는 그런 욕망의 속성을 내장하였기에 잘 길들여지지 않고, 끊임없이 하나님의 창조질서와 불화한다. 감람나무와 포도나무가 각기 감람열매와 포도열매를 맺는 창조법칙에 버성기면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말과 함께 동시에 형제를 심판하는 말을 내뱉으며 분열하는 것이 오로지 인간의 혀라는 것이다(약 3:9-12).

폭력을 달래는 말

지옥에서 연료를 공급받는 ‘불의의 세계’로서 혀의 불은 갈라진 혀를 하나로 통합시켜 인간을 소통시키는 또 다른 불의 혀로써 치유받을 수 있다. 사도행전의 오순절 사건(행 2:1-13)이 보여준 이 혀의 계보를 추적해보면 거기엔 오염되지 않은 태초의 말씀으로 좌정하신 하나님이 보이고, 성육하신 로고스 예수 그리스도도 발견된다. 하나님은 내내 침묵으로 말씀하시면서 담담한 인내로 이 세상을 진정시켜오셨다. 그의 종들을 통해 선포하신 ‘야훼의 말씀’은 온갖 폭력으로 가득 찬 말들의 난장을 진정시키면서 공의와 평화의 희망을 견인하였다. 간음하다 잡혀온 여인을 향한 돌팔매의 폭력적인 충동을 진정시키며 예수께서 땅에 쓰신 글자(요 8:2-11)는 그들의 충혈된 폭력적 언사를 성찰케 하는 조신한 몸의 조심스런 동작에 다름 아니었다. 그는 그렇게 폭력으로 얼룩진 이 땅의 언어적 세태 속에서 거듭나는 말의 길을 일러주셨다. 어떻게 피차 공경하는 말이 신뢰를 낳고 그 신뢰가 기적을 이루는지 그의 가르침과 행적은 과연 그 표본이라 할 만하다.

타인의 고통은 저절로 느껴지지 않는다고, 망치로 서구사회를 두들겨 팬 한 철학자는 설파했다. 그것은 조심스레 학습되어야 할 대상이라는 것이다. 타인의 고통을 학습을 통해 체감해야 한다면 무엇보다 중시되어야 할 학습은 타인의 고통을 부르는 폭력적 언어에 대한 성찰이다. 우리네 말의 욕망 깊은 곳에 지옥불로부터 공급받는 분노와 폭력의 연료가 저장돼 있음을 깨달아, 그것이 자기 생의 바퀴를 건전하게 굴리는 쪽으로 달래져야 하고, 타인을 향한 비수가 되지 않도록 재갈 물려야 한다. 여전히 말로써 폭력을 권하는 이 사회에서 너도나도 들뜬 말들로 허세부리고 책임지지 못할 혀로 허풍 떠는 사람들은 그 혀를 제어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임을 깨우쳤으면 한다. 가만히 있어도 오염된 말들이 부유하며 똥처럼 배설되는 이 세태의 한 구석에서 제 존재를 시위하려 더러운 말들을 토해내는 장삼이사가 바로 우리 자신이라는 자각이 왜 그리도 어려운가. 조심할지니, 그 입술! 그 손가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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