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미가서 6:6-8
내가 주님 앞에 나아갈 때에, 높으신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에, 무엇을 가지고 가야 합니까? 번제물로 바칠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가면 됩니까? 수천 마리의 양이나, 수만의 강 줄기를 채울 올리브 기름을 드리면, 주님께서 기뻐하시겠습니까? 내 허물을 벗겨 주시기를 빌면서, 내 맏아들이라도 주님께 바쳐야 합니까? 내가 지은 죄를 용서하여 주시기를 빌면서, 이 몸의 열매를 주님께 바쳐야 합니까? 너 사람아, 무엇이 착한 일인지를 주님께서 이미 말씀하셨다. 주님께서 너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도 이미 말씀하셨다. 오로지 공의를 실천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아멘
로마서 7:19-25
나는 내가 원하는 선한 일은 하지 않고, 도리어 원하지 않는 악한 일을 합니다. 내가 해서는 안 되는 것을 하면, 그것을 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속에 자리를 잡고 있는 죄입니다. 여기에서 나는 법칙 하나를 발견하였습니다. 곧 나는 선을 행하려고 하는데, 그러한 나에게 악이 붙어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나,
내 지체에는 다른 법이 있어서 내 마음의 법과 맞서서 싸우며, 내 지체에 있는 죄의 법에 나를 포로로 만드는 것을 봅니다. 아,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 주겠습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건져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러니 나 자신은,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섬기고,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고 있습니다. 아멘
마태복음서 18:15-20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 둘이 있는 자리에서 그에게 충고하여라. 그가 너의 말을 들으면, 너는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그러나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거라. 그가 하는 모든 말을, 두세 증인의 입을 빌어서 확정지으려는 것이다. 그러나 그형제가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여라. 교회의 말조차 듣지 않거든, 그를 이방 사람이나 세리와 같이 여겨라."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는 것은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땅에서 푸는 것은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내가 [진정으로] 거듭 너희에게 말한다. 땅에서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합심하여 무슨 일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에게 이루어 주실 것이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여 있는 자리, 거기에 내가 그들 가운데 있다." 아멘
설교문
<비참한 사람의 하나님>
건물마다 처음 건설할 때 목적이 있고 기획이 있습니다. 그래서 간단한 말로 건축물의 목적도 쓰고 디자인에 관해서도 씁니다. 심지어 묘비에도 묻히신 분이 좋아하시던 성경구절을 쓰기도 하고 우리의 바람도 적어놓습니다.
제가 오늘은 어느 건물에 관한 이야기 하나를 소재로 택했습니다. 유럽에 있는 어느 신학자 한 분의 신학적 고백담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이분의 이름은 로흐만(Lochmann)이고, 체코슬로바키아 출신으로 살다가 망명을 온 사람입니다. 와서 스위스 바젤에 거처를 정하고 최근까지 스위스 바젤 대학의 총장을 역임하신 훌륭한 지성인인데 참 따뜻하신 분입니다. 그래서 저희들은 보통 그분을 ‘따뜻한 지성인’ 이라고 부릅니다.
이분은 체코가 내놓은 지성인이기도 하고, 훌륭한 신학자이기도 하고, 책도 여러 권 쓰셨는데 이분이 쓴 책을 읽다가 우연히 이런 고백담 하나를 찾았습니다. 공부하는 중에 미국을 방문해서 하버드 대학 캠퍼스를 찾아갔는데 그 웅장한 도서관 입구에 이런 글귀가 쓰여 있더랍니다. “사람이 무엇이길래 주님께서 그토록 생각해 주십니까?” 영문으로 썼는데 그 표기가 시편 8편 4절 상반절입니다.
시편 8편을 읽어보면, “하나님, 우리 인간이 무엇이길래 그렇게도 저희를 생각해 주시고 인자가 무엇이길래 저희를 그토록 돌보아 주십니까?” 하고, 그 밑에 보면 사람을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만드시고 하나님 대신 땅에 있는 것, 하늘에 있는 것, 물 위에 있는 모든 것을 다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지배하라는 뜻은 아니고 잘 가꾸고 다스려서 평화롭게 지내며 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인간이 무엇이길래 그토록 마음을 두십니까?” (What is man that thou art mindful of him?)하는 이 구절을 써놨는데 이 구절을 택하게 된 연원이 뭔지 도서관 책임자들을 만나서 이야기하는 중에 알았다고 합니다. 세계 최고의 지성을 자랑하는 도서관쯤이면 뭔가 상징적인 문구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두 가지 제안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는, 지금처럼 쓰여 있는 시편 8편 4절의 말씀이고, 또 하나는 유명한 철인인 프로타고라스(Protagoras)의 명제, ‘인간은 만물의 척도이다’(panthon metron anthropos)였습니다.
도서관은 지식의 창고의 보고인데 이곳에서 책을 읽고 정보를 습득하면 이곳에 오는 사람들 은 인간이고, 그들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척도인 것입니다. 인간은 모든 피조물을 다 다스립니다. 그러나 창조주 뜻에 따라서 다스리라고 하시는 말씀은 아마 그런 뜻으로 인용했을 겁니다. 프로타고라스의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는 말은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고 가장 존엄한 존재라는 인간예찬의 말일 것입니다. 그러나 시편 기자의 고백의 눈으로 보면 인간 홀로 척도가 아니라 인간도 만들고 피조물도 만든 창조주, 그 분의 가슴 속에서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고 생각함이 옳을 것 같습니다.
이것이 저희가 믿는 하나님, 자기가 고백하는 신앙의 핵심입니다. 우리 인간은 자유합니다. 우리 인간은 지성, 감성, 모든 것을 다 누릴 수 있는 존귀한 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단 한 가지 우리는 창조주와 함께 사는 인간입니다. 창조주 없이 태어난 인간은 없습니다. 인간은 존귀합니까? 홀로 존귀합니까? 항상 정의를 베풀었습니까? 홀로 살면서요?
오늘 말씀대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그냥 예배도 아니고 물질 바치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예배 때 공의가 강물처럼 흐르고 모든 사람을 사랑하며 교만하지 않고 겸손하게 너를 만드신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 아니냐. 언제 하나님이 인간의 자유를 구속한 일이 있느냐, 언제 하나님이 인간의 존엄성을 짓밟은 일이 있느냐, 그런 하나님은 없다. 설령 그런 신이 있다고 해도 신을 거부했으면 그 뿐이다, 그런 신은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시편에 있는 신은 그런 신은 아닙니다. 인간의 존중, 인권, 존엄성, 다 같이 주십니다. 그러나 살리고 복 주시고 위로해 주고 또 인정해주시는 인간의 존엄성은 본래 인간 자체에 있는 게 아니라, 인간을 만드신 창조주의 가슴에 몸담고 있을 때 인간이 그런 존엄성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로흐만은 그렇게 하버드 도서관의 표어 내용을 이해했습니다. 시편의 내용과 같습니다.
요즘에 우리 사회에서는 옛날과 달리 갈수록 목숨 끊는 사람도 많아지고 폭행도 많아집니다. 학교 캠퍼스에서, 심지어 교회에서, 가정에서 그런 일들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배고픔 때문에 목숨 끊었다는 사람 이야기 들어봤습니까? 스스로 잘났고, 굉장히 훌륭하다고 자부하는 사람이 목숨 끊는 일 봤습니까?
왜 우리는 많은 것 가지고 있고 많이 쌓았고 많이 이루었는데도 불구하고 귀한 생명을 헌신짝처럼 저버립니까? 인간이 만물의 척도라고요? 어떤 인간 모습인가요? 어떤 인간이, 어떤 인간성이 삼라만상 모든 것의 척도입니까? 또 기준입니까? 또 수준입니까?
오늘 시편 기자의 말은 이렇습니다. 사람은 귀합니다. 정말 귀중합니다. 그런데 정말 귀중하려면, 정말 행복하려면, 진심으로 행복하려면 사람이 어디 있어야 합니까? 사람은 창조하신 분의 가슴 속에 있으면 행복을 찾을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속에 있으면 지성을 마음대로 발휘할 수 있습니다. "머리는 차갑고 가슴은 따뜻하게", 그 말 참 좋은 말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의 세상이 있습니까? 가슴이 따뜻하고 머리만 차면 세상이 행복해집니까? 이상적으로 말하면 차가운 머리와 따뜻한 가슴이 함께 어울리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세상에는 차가운 머리 따로 있고 따뜻한 가슴 따로 있습니다. 화합이 잘 안 됩니다. 먹는 것 가지고도 안 되고, 가진 것 가지고도 안 되고, 정말로 어렵습니다.
유명한 가문 출신에, 신앙, 부유함, 사회적 권리, 이 모든 것을 갖춘 대표적인 사람이 사도바울입니다. 그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 앞에 나와서 인간의 존엄성을 그렇게 강조했는데 그가 오늘 로마서 7장에서는 이렇게 호소합니다. “정말 나는 비참하다. 이 곤고한 사람, 이 비참한 사람, 누가 이 비참한 저를 구해줄 수 있습니까?”
왜 그렇게 말했는지 살펴보았더니, 속사람은 하나님을 따르고 싶고, 겉사람은 죄악을 따라 살고 싶고, 자기 자신이 둘이라는 것입니다. 자기 안의 모습이 둘입니다. 속인간이 있고 겉인간이 있는데 둘이 안 맞습니다. 그래서 서로 싸웁니다. 사도바울이 ‘나는 비참합니다. 나는 곤고합니다. 정말 못살겠습니다.’ 하는 이야기는 먹고사는 문제도 아니고 지식의 높낮이도 아닙니다. 왜 나한테 이 두 인간형을 주셔서 속사람과 겉사람이 이렇게 싸우게 만듭니까? 어느 사람을 따라가야 합니까?
이런 상태를 요즘 심리학자들은 ‘자아분열’ 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가진 것, 배운 것과는 상관없습니다. ‘이 곤고한 사람, 누가 나를 구해줄 수 있을까? 하나님, 당신 나 좀 구해주세요. 내가 사도 아닙니까? 당신의 복음을 전하라고 부름받아서 그렇게 살고 있는데 제가 죽겠습니다. 분열 때문에 죽겠습니다.’
우리한테 하늘이 있다고 하는데 하늘과 땅이 만나질 않는다는 것입니다. 논리적 이성과 가슴의 감성이 만나질 않고, 속사람과 겉사람이 만날 수가 없습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서 차라리 목숨을 끊어버리고 말겠다며 세상을 하직한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호소하는 사도바울의 말씀을 계속해서 읽어보면 답이 이런 식으로 나와 있다고 봅니다. “내가 이런 고난을 겪어 보니 하나님의 은혜는 너무 넓고 너무 높고 너무 깊어서 내가 해야 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단 한 가지, 그 하나님을 제가 잡으려고 노력했더니 그 하나님이 저한테 이렇게 다가오셨습니다.”
“자아분열, 고통, 곤고함, 아픔, 좌절, 시련에 휩싸인 저를 위로해 주시겠다고 위로하러 오신 그분의 얼굴 보았습니다. 저의 아픔 때문에 저의 죄악 때문에 저의 자아 분열 때문에, 구원받지 못한 저 같은 사람을 대신하여 죄 값을 치르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부활하셔서 저한테 약속하십니다. 내가 너를 죄 값을 대신 치루고 구원했노라. 너의 아픔을 내가 대신 끌어 안았다. 그러나 그걸로 끝나는 게 아니다. 내가 너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마, 하고 말씀하신 그분이 바로 십자가에 달리신 분이셨습니다.”
사도바울이 고백합니다. 제가 솔직하게 고백하건데 제 지성과 감성과 모든 것을 다하여 제가 진실로 행복하고 구원받았다는 확신은 바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그 분이 저한테 오셔서 하신 말씀, "나는 너 대신 죽었고 너에게 영생을 주마"라는 말씀 때문이었습니다. 이제부터는 십자가에서 달리신 그분이 하시는 말씀 말고는 아무 말씀도 듣지 않기로 했습니다. 십자가의 말씀이 저한테는 생명의 말씀입니다. 고난 당해 보세요. 고난을 같이 맡아줄 사람, 고난을 극복하고 새로운 희망을 주실 분, 그분이 제가 설 자리요, 앉을 자리요, 잠잘 자리입니다.
예수께서는 이 말씀을 이렇게 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이 여러분을 만드셨고 저를 보내서 여러분에게 꼭 이 말씀 전하라고 하십니다. 혼자 고통을 이길 수 없으면 두세 사람이 함께 모여서 기도하십시오. 훨씬 나을 겁니다. 그렇게 간구하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들어주십니다. 또한 여러분, 수고하고 짐 지고 아픈 사람, 그냥 끌어안고 문을 닫고 있으면 하늘이 들어올 여유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땅에서 고통당한 여러분이 여전히 매듭을 묶고 있으면 하나님도 묶이고 여러분이 풀면 하늘도 풀린다고 합니다. 전지전능한 하나님이 왜 인간의 행동에 매여 있습니까? 우리가 매면 하늘도 매고 우리가 풀면 하늘도 풀린다고 하는데 도대체 그런 하나님이면 우리 멋대로 할 수 있는 하나님이 아니냐고 오해할 수도 있겠는데 하나님이 오죽 답답하시면 그러시겠습니까? 그 하나님은 사실은 전지전능을 통해서 많은 사람에게 행복도 주고 해법도 주고 싶어 하십니다.
우리가 원하고 하나님을 필요로 한다고 솔직히 이야기하면, 아프다고 말하면, 힘들다고 말하면, 곤고하다고 말하면, 그러면 하늘에서 내려 오셔서 힘든 상황 속에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아무 말도 안하시고 홀로 계시면서 왜 대답안하냐고 위에서 소리치는 그런 하나님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땅에 있는 사람이 매고 풀면 이미 준비된 대로 응답주시는 그 분, 매고 풀기까지 기다리시는 하나님, 그런 분이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인내입니다.
이 하나님이 우리한테 주시는 말씀이 “이제는 내 가슴을 열테니 내 속에 와서 내가 만든 인간의 최고봉을 달성해라. 가장 지성적이 되어봐라. 가장 따뜻하게 되어 봐라. 내가 이 축복을 주마.” 그런 하나님이 우리 하나님 아닙니까? 그런 하나님을 우리가 믿어왔습니다. 그렇지 않는 하나님을 왜 믿어야 합니까?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사도바울은 그 답을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에게서 찾습니다. “십자가에서 구원을 베프신 하나님의 품에 오면 인간이 가장 진실된 인간일 수 있습니다. 간섭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시거든요. 인간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시는 분이거든요.”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성서를 읽을 때 그 내용을 바라보는 눈이 있는데 함께 알아봅시다. 구약 성경을 읽으실 때, 하나님은 누구십니까, 하는 질문이 생깁니다. 그 때는 이스라엘 백성을 400 여년 동안 이집트에서 노예로 있다가 구원해 내주신 하나님, 자기가 선택한 백성은 반드시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 기적을 통해서 홍해를 건너는 기적의 모든 일을 통해서 출애굽의 해방을 일으켜 주신 그 하나님이 우리가 믿는 실재적 모습의 하나님이십니다. 출애굽의 눈으로 구약성서를 읽으십니오.
신약성경을 읽을 때는 어떻습니까? 신약성경에서 하나님은 인간을 살리고 싶어서 죄 값을 아들이 대신 지게 하고, 죽게 하심 분, 하지만 죽음으로 끝나게 하고 싶지 않으시는 분, 죽기 전의 삶도 복되어야 하고 죽은 과정을 거쳐서 죽은 다음에도 또 생명이 있게 하시려는 분, 생명의 하나님이시기에 인간에게 생명을 주시려고 아들을 통해서 십자가에 죽게 하고 부활을 통해서 우리에게 부활을 약속해 주신 하나님을 우리가 믿습니다.
그 하나님의 눈으로 성경을 읽으십시오. 출애굽의 눈으로 구약을 읽고 십자가의 눈으로 신약을 읽으면 그 하나님은 “나는 내가 만든 인간 없이 나 홀로 살고 싶지 않다. 그것이 하늘이든 땅이든 나 하나님은 고독한 하나님이 아니다. 아프면 아픈대로 힘드면 힘든대로 같이 살고 싶다. 풀어라. 매지 말고 풀어라. 나와 같이 살자.” 라고 말씀하심을 들을 수 있습니다.
이 하나님이 오늘 오셔서 다시 말씀하시기를 “나는 사랑하는 여러분에게 반드시 출애굽처럼 항상 해방과 자유를 주고 싶다. 이것이 나 하나님의 본질이다. 나는 그대들에게 아픔에 머물게 하지 않고 아픔을 같이 안아주고 아픔 이후에 죽음 이후에 생명까지도 담보하고 싶다. 이것이 나 창조주 하나님의 존재 방식이다. 나와 함께 이 길을 가자. 그리고 감사하자. 그리고 찬양하자. 인간의 인간됨, 휴머니즘, 인간존엄, 어느 것이든 모든 것을 보장하마.”
창조주의 품에 안겨서 인간됨을 누리며 만세를 부르십시다. 그 분의 사랑은 위대합니다. 창조주의 품속에서 생명주시고 부활주시고 자유주시고 해방주신다고 약속하신 그분 품속에서 우리 모두 자유합시다. 마음껏 기장을 발휘해 봅시다. 그리고 그분의 몸과 피에 동참해서 약속하신 새 생명을 받읍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