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신대학교(총장 채수일)의 전신인 조선신학교의 초기 교수였던 故 박봉랑 교수의 신학세계가 조명됐다. 성서무오설로 인해 한국 장로교가 분열된 이후, 박봉랑 교수는 분열의 갭을 메울 화해의 신학으로서 칼 바르트(Barth)의 성서영감론을 들고 나왔다. 타계할 때까지 ‘바르티안(Barthian)’으로 살았던 그의 신학 여정 갖는 의미를 연세대 김균진 명예교수가 9일 한신대 개교 70주년 심포지엄(주최 한신대 학술원 신학연구소)에서 조명했다.
▲'한신신학 70년의 회고와 전망' 심포지엄에서 연세대 김균진 교수가 故 박봉랑 교수의 신학세계에 대해 발표하고 있다. ⓒ이지수 기자 |
성서무오설과 축자영감설로 인해 한국 장로교가 분쟁하던 1949년부터 1952년까지 “박봉랑은 조선신학교의 ‘어린 교수’로 봉직하면서 ‘성서의 권위에 대하여 강단에서 무엇을 말해야 하는가?’를 고민했다.” 그는 이 문제에 대한 대답을 바르트의 성서영감론에서 발견하고 미국 하버드대학에서 관련 논문을 쓰게 된다.
그가 기술한 바르트의 성서영감론은 두 가지 원리로 요약될 수 있다. 오류 가능성을 가진 성서의 글자는 하나님의 말씀 자체에서 구별된다는 ‘구별의 원리’와, 성서의 글자를 통해 하나님의 계시가 증언되어 성서와 계시는 구별되는 동시에 통일성을 갖는다는 ‘구별과 통일의 변증법의 원리’다. 이러한 성서관은 성서가 성령의 영감을 통해 ‘받아쓰기’ 된 것이라는 근본주의 성서관을 극복하는 동시에, 성서의 권위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인간의 내적 경험에 있다는 자유주의 신학의 성서관을 극복한다.
박봉랑은 12권에 달하는 바르트의 ‘교회교의학’ 번역을 위한 기금을 조성하고 말년에 ‘칼 바르트 학회’를 창립하는 등, 세상을 떠나기까지 ‘바르트 신학자’로 살았다. 그는 바르트의 신학이 “오직 성서, 오직 은총, 오직 신앙을 주장했던 종교개혁의 원리와 정신을 회복했다”고 평하고 이는 또 하나의 “종교개혁의 시도”라며 높이 샀다. 또 바르트의 신학에 머물지 않고 불트만, 틸리히, 니버, 알타이저, 몰트만 등 해외 신학자들의 사상을 한국 신학계에 소개하는 데 힘썼다.
김균진은 이러한 박봉랑의 신학 여정이 “오늘날 한국 신학자들이 갈 길을 제시한다”며 몇 가지로 그를 평가했다.
먼저, 박봉랑의 바르트의 영감론 제시는 “초기 한국교회의 근본주의 내지 정통주의의 신학적 폐쇄성과 독단주의를 깨뜨리고, 엄밀한 의미에서의 학문적 신학과 학문적 객관성에 눈뜨게 하는 데 기여했다”고 평했다. 또 박봉랑의 해외 신학 소개 활동은 “그리스도의 복음의 진리를 참되게 추구하고 표현할 수 있는 ‘신학의 자유’를 되찾는 데 기여했다”고 평했다.
이 같은 신학의 자유를 통해 “한국교회는 1960년대 이후 한국 사회의 산업화와 도시화 과정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문제들에 대처할 유연성을 가지게 됐고”, “1970년대 이후 한국교회에서 일어난 이른바 ‘미시오 데이’(Missio Dei) 운동이 가능하게 됐다”고 말했다. 한신대를 주축으로 태동한 ‘민중신학’도 박봉랑의 신학에 빚지고 있다고 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