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지는 만우 송창근 목사의 납북 60주년을 맞아 그의 생애와 사상을 조명하고자 주재용 박사(한신대 전 총장)의 기고글 ‘만우 송창근의 성빈의 삶과 사상’을 총 12회에 걸쳐 연재합니다. 경건과신학연구소 소장직을 맡고 있는 주 박사는 그의 제자 장공 김재준과는 달리 연구 및 평가에 있어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하고 있는 송창근을 오랜 기간 연구, 지난 2008년 말에는 송창근 평전 『벽도 밀면 문이 된다』(송우혜 저·생각나눔)를 펴내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편집자주
Ⅱ. 삶의 여정
▲주재용 한신대 명예교수(한신대 전 총장) |
한 사람의 전기는 그의 출생으로부터가 아니라 그의 죽음에서부터 쓰여져야 한다는 말이 있다. 그는 1950년 8월 6․25 전쟁 중 납북되었다. 그의 나이 52세 때였다. 그 이후 그가 세상을 떠난 것만은 사실이지만 언제 어디서 어떻게 생을 끝냈는지는 지금까지 확실하게 아는 것이 없다. 다만 전해지고 있는 몇 가지 이야기가 있을 뿐이다. 서울에서 의용군에 끌려 나가 철원 가도를 가다가 도망쳐 왔다는 한 청년은 지팡이를 짚고 납북인사 대열에 끼어가던 한 노인을 인솔병의 명령으로 뜻하지 않게 업고 가게 되었는데, 등에 업힌 분이 “나는 남대문 밖 송창근 목사인데, 나를 업고 오래 걸을 수도 없을 것이고 결국 당신도 위험할 것이니 나는 내리겠소. 혹 탈출할 기회가 생기거든 내 제삿날이 X월 XX이라고 전해 주시오” 하더라고 전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 그 청년이 누구인지는 알 수가 없다. 납북 인사의 책임자였다가 귀순한 김창순이라는 사람은 만우 송창근이 초산까지 갔었으며 서울 YMCA 총무였던 구자옥(具慈玉)의 묘에 조상하였는데, 이때 북한의 기독교 연맹 김인준이 인사를 하자 “이 배신자야, 물러가라!”고 호통을 쳤다고 전하고 있으며 송창근은 평양에까지 갔으나 장질부사에 걸려 격리실에서 혼자 돌아가셨다고 한다.
어느 이북 문제연구소에 의하며 평양 부근에 있는 장철리에서 송창근은 이북의 세뇌공작에 협조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심한 고문을 받다가 외롭게 옥사하게 되었고 시신은 외딴 곳에 매장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죽음에 대하여 지금까지 확인된 것은 하나도 없다. 통일이 되어 이 땅에 평화가 오면 그의 죽음의 사실이 밝혀지기를 기대해 본다.
우리는 그의 사망 날짜를 모른다. 그러므로 추도 예배도 드릴 수가 없다. 그렇다고 그가 지금도 생존해 있으리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는 50대 초반의 사람이었으나 그때 그는 매우 병약했던 것이다. 6․25 전쟁 중에 그는 서울을 떠나지 않았다. 그것은 그가 피난을 갈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의 주변 사람들이 그에게 피난 갈 것을 간곡하게 요청하기도 했으나 그는 거절했다. 그것은 학교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피난을 가자고 하는 사람에게 만우 선생은,
“임자나 나가보게, 내야 미국에서 이미 죽었을 목숨인데 살겠다고 어디를 가겠나, 건강도 이렇고 어쨌든 나는 마지막까지 신학교를 지킬 테니 내 염려들은 말게”라고 했다. 그가 “미국에서 죽었을 목숨인데” 한 것은 학교를 위해 모금관계로 미국에 갔다가 중풍에 걸려 쓰러졌던 사건을 의미한다. 조향록 목사는 송박사에게 신사리로 피신하시자고 했으나 별로 반응을 보이시지 않았다고 전한다. 강원룡 목사는 도농리에 장공 선생과 함께 피신해 있다가 송박사를 모시러 왔었는데, 그는 강원룡의 뜻을 거절했다고 전한다. 그것은 그 자신이 병중에 있었기 때문이었고 다른 하나는 그의 교회 집사 중 월북했던 사람이 서울에 와서 송목사의 신변을 보호해 주겠다고 한 약속을 믿고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가 피난을 가지 않은 것은 크게 세 가지 이유가 있었던 것 같다. 그 첫째는 신학교를 지켜야 한다는 것, 둘째는 건강에 대한 자신이 없었다는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는 공산주의자에 대한 다소 감상적인 이해를 하고 있었다는 것 등이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한국교회와 학교를 위해서 땅에 떨어져 죽은 한 알의 밀알이 되었다고 할 것이다. 그는 세상을 떠났으나 지금도 많은 사람들의 마음과 사상 속에 살아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의 죽음에서부터 그의 삶과 사상을 비추어 보아야 한다.
Ⅱ-1. 신앙과 신학을 향한 출애굽의 삶(1898-1931)
6․25 전쟁 중에 학교를 지키다가 납북되어 세상을 떠난 만우 송창근은 1898년 10월 5일 아버지 송시택(宋始澤) 씨와 어머니 신봉남 씨의 장남으로 함경북도 경흥군 웅기면 웅상동(慶興郡 雄基面 雄尙洞), 속칭 몽새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시대는 국가의 운명이 매우 위태로운 때였다. 국내 정치계는 수구파와 개화파가 권력 투쟁을 하고 있었고 백성들은 가난과 억압에 시달려야 했으며 한국을 지배하려는 외세는 그 세력을 확대해 가고 있었다.
개화파에 의해서 일어난 쿠데타인 갑신정변(1884), 정치, 경제 제도의 혁신을 시도한 갑오경장(1894), 같은 해에 일어난 동학혁명, 일본의 승리로 끝난 청일전쟁(1895), 민비시해사건(1895), 불안에 견디다 못해 고종이 러시아 공관으로 피신하여 섭정을 한 아관파천(1896), 같은 해 독립협회의 창립 등이 있었으며 1898년에는 흥선대원군이 사망하고, 동학교도 최시형 등의 사형이 집행되었으며 경부선 철도 부설권을 일본인에게 특허해 주었고 독립협회가 주최한 만민공동회가 열리기도 했었다. 송창근은 이와 같은 격동기에 태어난 것이다.
그가 태어난 웅상동은 연해주와 북만주로 가는 길목이라 일찍이 복음이 들어왔고 때를 같이 하여 개화의 바람도 불어왔기 때문에 독립운동의 정신도 강한 곳이었다. 이 마을에 기독교가 언제 전해졌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마을 주민 대부분이 기독교 신자들이었으며 교회의 장로와 집사들은 거의 모두가 송(宋 )씨와 안(安)씨들이었다. 송씨 가문의 첫 입교자는 송창근의 종숙인 송시명(宋始明)이었다. 몽새 교회는 한국 기독교 지도자들이 된 김관식(金觀植), 채필근(蔡弼近) 목사 등의 젊은 시절에 목회를 했던 교회였다. 어린 송창근은 그들에게서 큰 감화를 받았을 것이 틀림없다. 이것은 그가 어릴 때부터 목사가 되겠다는 꿈을 가지게 된 원인 중 중요한 것의 하나였을 것이다.
송창근은 종숙인 송시명 씨가 세운 북일(北一)학교에서 공부도 했었으나, 고향에 있으면 평생 농사일이나 하다가 일생을 끝내게 되겠다는 생각에서 그는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혼한 지 2년 밖에 안 된 아내를 집에 남겨두고 간도 땅으로 배움의 길을 떠났다. 이 일이 가능했던 것은 그의 총명함과 범상치 않은 사람 됨됨이를 알고 있었던 그의 종숙 송시명 씨의 적극적인 도움 때문이었다. 매우 예민한 10대 소년 송창근이 간도로 간 1910년대 초는 1905년 을사조약에 이어 1910년 일본의 일방적이며 강압적인 한 ․ 일 합방으로 국내외가 매우 술렁이던 때였다. 송창근은 출생부터 멸망해가는 약소민족의 비극적인 운명을 함께 경험하면서 성장했다. 예를 들면 이준(李儁)이 해아에서 순국했으며(1907), 하르빈에서는 이또오(伊藤)가 안중근(安重根)의 저격으로 죽고(1909), 1911년에는 테라우찌(時內)총독의 암살이 미수에 그친 사건도 있었다.
기독교 마을이었고 개화가 빠르게 이루어졌으며 독립운동가들의 왕래가 많았던 마을에서 태어나 소년기를 보낸 송창근은 일찍부터 기독교와 민족 역사를 연결시키며 성장했을 것이다. 그가 평생을 교회를 사랑하고 민족의 문제를 잊지 않았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는 단순히 지식을 쌓기 위해서 간도에 간 것은 아니었다. 그는 배워야 하는 목적이 있었다. 그 목적은 결코 개인의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남달리 총명하고 의식이 있었던 그는 멸망해 가는 민족의 운명을 보고만 있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이 관점에서 그가 후에 목사가 된 것, 그가 ‘성빈’(聖貧)사상을 강조한 것, 그리고 그가 민족과 교회의 사명을 그의 신학의 중요한 주제로 삼고 있는 것을 모두 조명해야 한다.
간도에 간 송창근은 명동(明東)중학교에 다니다가 곧 광서중학교로 옮긴다. 이 학교는 독립운동가 이동휘(李東輝, 1873-1935)가 독립군 양성을 목적으로 운영하는 학교였다. 소년 송창근이 이동휘를 만난 것은 이 때였다. 그는 이동휘의 고매한 인격과 뜨거운 민족애에 크게 감화를 받았다. 송창근의 만주 생활은 7개월 정도 짧은 기간이었으나, 그는 여기서 독립운동가의 고난과 고통을 옆에서 지켜보고 경험할 수 있었으며, 그 때문에 나라를 잃은 민족의 서러움을 실감할 수 있었다. 이동휘는 만우에게 직접적인 독립운동가의 길보다 잠든 민족의 의식을 깨우치고 암울한 식민지 역사에 희망을 줄 수 있는 목사의 길이 장래 조국을 되찾는 지름길이라고 설득하여 그가 목사의 길을 가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동휘와 이별한 송창근은 고향에 돌아와 잠시 농사일을 하다가, 목사가 되는 꿈을 이루기 위해서 다시 집을 떠났다. 이때 소년 송창근은 외롭게 고생하며 살아가던 숙모의 돈을 훔쳐 서울 가는 여비를 마련하였다. 그가 후에 이 돈을 갚았는지에 대해서는 아무 말이 없다.
서울에 온 송창근은 1915년에 피어선 성경학교(지금 평택대학교)에 입학하여 3년제 학교를 5년 만에 졸업하고 남대문교회의 전도사로 부임하였다. 그는 여기서 그에게 일평생 목회적 사표가 되었던 남대문교회 목사 함태영을 만나게 된다. 고향의 분위기, 만주에서의 이동휘와의 만남을 통해서 이미 민족에 대한 사랑에 불타고 있었던 그는 함태영과의 만남에서 목회자로서의 신앙적 인격과 확고한 소명감을 갖게 된다. 후에 함태영이 한국신학대학(지금의 한신대학교의 전신)의 이사장과 학장을 역임하게 된 것도 우연이 아닌 것 같다.
22세의 청년 송창근은 남대문교회의 전도사로 있으면서 3․1 운동을 겪게 되었는데, 그는 “경성독립비밀단”의 주모자로 연루되어 정치범죄처벌령 및 출판법 위반죄로 기소되었다. 이것이 일반적으로 “불온창가유포죄”로 알려진 사건이다.
3․1 운동을 전후하여 조국의 독립과 광복을 희망하여 항일투쟁을 북돋우는 노래들이 유포되고 있었는데, 이것들은 모두 조선총독부가 금지시킨 불온창가들이었다. 이와 같은 일에 대해서 서굉일은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1910년대 북간도 지역의 민족주의 교육을 실시하였던 명동학교에서는 ‘시편 창가집’을 만들었고 1915년 개성 한영서원과 호수돈학교에서 이 창가집을 보급하다가 ‘애국창가’, ‘불온창가’ 유포죄로 교사와 학생들이 체포된 바 있다. 남대문교회 학생회 회원인 박인석과 이들을 지도하였던 송창근 전도사는 … 세브란스 병원 안에서 등사기를 이용하여 불온창가집 600부를 인쇄하여 경신학교, 배재학교, 이화학당, 정신여학교, 중앙학교, 세브란스병원 간호부 등에게 배포하였다. ‘조국을 잃고 가는 우리 영혼은 천상도 도리어 지옥되리니 이 날을 잊지 말고 분발하면 부소산 변져질 날 멀지 않으리’와 같은 가사를 담고 있는 이 창가집은 국민의 정신을 일으키게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사건은 결국 발각되어 … 송창근은 징역 6월의 처벌을 받게 되었다.”
감옥에서 나온 후 송창근은 고향을 방문하였다. 그것은 출감한 후 근신도 할 겸 고향의 교회들을 예방하기 위함이었다. 이때 그는 뜻하지 않게 훗날 한국 교회와 신학계의 거목이 된 김재준을 만나게 된 것이다. 그때는 1919년 12월 크리스마스가 가까웠던 어느 날이었다. 이 첫 만남에 대해서 장공 김재준은 다음과 같이 회상하고 있다.
“그때 내 나이는 19세, 함경북도 웅기항에 있는 웅기 금융조합 서기로 근무하고 있었다. 기독교 신자도 아니었고 사상적으로 계발된 데가 없는 한 靑果같은 소년이었다. 그래도 3․1 운동 직후라서 상해로부터 또는 만주, 시베리아를 거쳐 잠입하는 독립신문도 가끔 읽을 수 있었고 … 독립지사들도 만나볼 수 있었다. 그래서 민족의식이랄까는 약간 싹트기 시작했었다.
晩雨兄은 나보다 두 살 위였으나 교회인, 사회인으로서 이미 성숙한 청년이었다. … 그는 재치 있는 미남으로서 연설도 잘하고 좌담에도 능숙하고 교제 솜씨도 세련된 품위 있는 청년이었다.
나는 교회와는 관계가 없었기 때문에 그가 웅기교회에서 연설을 했다고 들었지만 별 흥미도 관심도 없이 넘겨 보냈다. 그런데 하루는 그가 내 하숙집 방에 일부러 찾아와서 정중하게 첫인사를 하고 … 이튿날 나는 거리에서 그를 만났다. 그는 좀 더 구면인 친밀감으로 나를 대했다. ‘지금 3․1 운동 이후에 우리 민족은 일어나고 있습니다. 天軍은 갔다가도 반드시 돌아옵니다. 김선생 같은 유능한 젊은이가 그저 이런데 묻혀 있을 때는 아닙니다. 용감하게 정리하고 서울에서 공부를 다시 하십시오’하는 것이었다. 나는 가슴이 뭉클해지고 결단의 용기 같은 것을 느꼈다. 그래서 몇 달 후에는 직장이니 뭐니 다 치워버리고 서울에 모험할 수 있었던 것이다.”
서울로 돌아온 송창근은 앞으로 교회에 지도자가 되어 민족을 위해 일을 하려고 하면 더 배워야 하겠다는 생각을 굳게 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청운(靑雲)의 뜻”을 펴기 위해서 일본으로 건너갔다. 이 일에 대해서 김재준은 다음과 같이 전해주고 있다. “당시 한국 교회는 극단의 보수주의, 고정주의자들인 선교사들의 지배하에 있었고 신학교는 이들이 운영하는 평양신학교 하나밖에 없었다. 이 신학교가 젊은 지성인들의 기미(氣味)에 맞을 리가 없었으며 그래서 晩雨는 일본으로 뛰었다.” 그때가 1922년, 동경 대지진이 난 해였다.
일본에 유학을 온 송창근은 몇 학교를 전전하다가 동양대학 문학과를 거쳐 청산학원 신학부에 편입하였다. 이때 그는 동경대학에 재학 중인 채필근과 가깝게 지낼 수가 있었다. 송창근의 학교성적은 좋은 편이 아니었던 것 같다. 청산학원 학기말 교수회의 마지막 안건 중에는 송창근에 관한 것이 있다. 그의 리포트는 한자, 한글, 일어가 뒤섞여 알아보는 교수가 거의 없었다. 그는 동정 점수를 얻어 매 학기를 넘기고 졸업을 했다고 한다.
그 때문인지 후에 그가 조선신학교 교수로 있을 때 성적 때문에 제적시키는 일에는 언제나 반대를 했다고 전한다.
어릴 때부터 총명했다는 그의 학교 성적이 왜 좋지 않았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 길이 없다. 아마도 ‘학교에서의 우등생이 사회에서도 우등생은 아니다’라는 말이 그에게 해당되는지 모르겠다. 그는 학교에서의 A학점 받는 것보다도 더 큰 뜻을 품고 그것의 실현에 관심이 더 있었는지도 모른다. 여하간 그는 학교 성적에는 별 관심이 없었던 것이 분명하다.
청산학원 졸업으로 만족할 수 없었던 송창근은 도미유학의 꿈을 꾸었다. 그러나 그의 학교 성적을 아는 교수와 동급생들은 그가 미국 유학을 갈 수 있다고는 누구도 믿지 않았다. 그러나 송창근은 “산골 소년을 불러서 일본에까지 와 신학을 공부하게 하신 하나님이 인도해 주시리라고 믿고 정해진 학교도, 학자금도, 아는 사람도 없는 미국의 유학”을 가기로 결심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그는 미국 유학 지망자 제1호가 된 것이다.
미국 유학의 길은 열렸으나 여비가 없었다. 이 때 자기의 집을 팔아서 송창근의 여비를 마련해 준 사람은 뒤에 한국교계에 혁신의 바람을 일으키고 기도와 눈물의 설교가였으나, 기존 교단으로부터 이단으로 비판받기도 했던 목사 이용도(李龍道)였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두 사람이 알게 된 것은 3․1 운동 사건에 의한 옥중 생활에서였다. 두 사람에게 공통되는 것이 있다면 기도의 사람으로 아시시의 성 프란시스(Francis of assisi)의 ‘성빈(聖貧)의 영성’에 지배받고 있었다는 것이다. 송창근은 국내나 국외에 있을 때, 성 프란시스의 사진을 항상 책상머리에 두고 그의 사상을 따르려고 노력하였다. 미국 유학에서 귀국한 후 송창근은 폐병으로 일찍 세상을 떠난 이용도의 가족을 끝까지 보살펴 주었다고 한다.
송창근은 외롭게 홀로 배를 타고 유학의 길을 떠나는 심정을 “태평양 바다에서”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혼자 가는 길”
태양이 바다에 임종을 한지 오래고
별 비치 도도한 바다에 흐를 때
나라를 떠나 한달재 오는 나그네
집 길이 그립길 내
참다 못하야 몰래 우나니
동무 잇서 오는 사람 덜이야
허무러진 도읍터를 남겨두고 오는
저라는 나그네의 애닯은 맛을 알 줄이 잇스랴
여비도 재정후원자도 없이 미국에 송창근이 도착한 날은 바로 성 프란시스 탄생 700주년 기념제일이었다고 한다. 그는 상륙허가를 받기 위해서 마치 야곱이 얍복강에서 천사와 씨름하였듯이 피눈물나는 기도를 했으며, 상륙한 후에는 아무데도 갈 곳이 없어 또 기도하고 있었을 때, 마침 일본에서 선교사업을 하다가 은퇴한 여선교사의 도움으로 그는 미국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후에 부산에서 성빈학사를 운영하고, 부산 부두에 나가서 일본으로 가는 동포를 위한 봉사활동을 한 것은 모두 미국에 도착했을 때의 감격의 경험에서 싹튼 것이었다.
1926년에 미국 유학을 시작한 그는 샌프란시스코 신학교, 프린스턴 신학교, 웨스턴 신학교를 거쳐 1931년에 덴버대학(Denver)에서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 사이 그는 유리붓 장사, 화장품 장사, 부잣집 개 지켜주는 개하인 노릇, 유리창 닦기, 야채밭 김매기 등 고학으로 학비와 생활비를 벌었다. 그는 장사에도 소질이 있었다고 한다.
덴버대학은 미국에서 상류급에 속하는 학교는 아니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는 “그까짓꺼 박사학위, 똑똑한 대학의 석사학위만도 못하지…”라고 했다. 그는 『유대사상에 근거해서 본 바울의 믿음으로 인한 구원사상』이라는 학위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이듬해 1932년에 귀국하였다.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한 송창근은 평양신학교에서 1년 과정을 끝내고 요한복음 3장 16절을 암송하여 강도사 시험에 합격하고 1932년에 목사가 되었다. 어릴 때 “나는 목사가 될테야”했던 그는 그의 꿈과 뜻대로 목사가 된 것이다. 귀국하는 길에 샌프란시스코에서 안창호(安昌浩)가 조직한 흥사단(興士團)에 가입을 하였다. 이 때문에 그는 후일 수양동우회(修養同友會)사건에 연루되어 어려움을 겪게 된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