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기획연재- 이장식의 교회 역사 이야기(41)

수도원

본지는 한신대 이장식 명예교수의 교회 역사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이 교수는 얼마 전 본지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예수는 평신도였고, 초대교회 예수 운동을 이끈 무리들 역시 평신도들이었다"며 교회사에 큰 기여를 한 무명의 평신도 그리스도인들을 조명했습니다. 앞으로 연재되는 글이 평신도들의 신앙 생활 함에 있어 좋은 길잡이가 되어 줄 것으로 기대합니다. -편집자주 


제7장 수도원

중세기 그리스도교의 신앙과 경건의 특징은 수도원의 이상과 생활에서 볼 수 있다. 초대교회 시대 그리스도교가 자유롭게 된 이후 수도원은 급속하게 늘어났고 그 제도도 발전하여 교회의 수보다 수도원의 수가 많아졌다. 그리고 야만족의 침략으로 로마제국 도처에서 전란과 함께 파괴와 약탈이 극심했지만 그 와중에서도 수도원들은 비교적 안전하였다.

초대교회 시도의 안토니와 파코미우스의 수도생활을 모방한 켈틱(Celtic) 수도원은 아일랜드와 영국 밖의 중앙 유럽과 스페인과 이태리에까지 널리 퍼졌는데, 개인의 완전을 목표로 한 엄격한 수도생활을 장려하는 동시에 학문도 장려하였다. 켈틱 수도단 가운데 성 콜럼바누스(Columbanus) 수도원 규칙이 가장 엄격하였다. 매일 기도, 예배, 금식, 노동 및 독서로 짜인 고된 공동생활을 하면서 겸손과 사랑과 인내와 침묵과 온유 등등을 배우며, 주는 것만을 먹고 주는 것만을 가지며, 맡겨진 일을 하며 자기가 좋아하지 않는 사람에게도 복종하게 하였다. 수도원장을 아버지처럼 사랑하고 그의 명령은 무엇이든지 선한 줄로 하고 복종하며 규칙에 따라 고행을 실시해야만 했다. 이때 수도원에 들어온 사람은 대개 귀족가문의 사람이거나 노동하지 않던 사람들이었다.

켈틱 수도원보다 조금 늦게 생긴 베네딕트(Bennedict) 수도원은 베네딕트가 이태리 알프스 산맥의 카시노(Cassino)산에 가서 세운 529년에 세운 것인데, 이 수도원 제도와 생활이 발전해서 유럽 전 지역에 전파되어 유럽 문화에 큰 영향을 끼쳤다.

베네딕트 수도원에 들어간 수도사는 처음에는 하나님을 섬기는 방법을 배우는 학교와 같은 훈련을 받았다. 한 번 들어가면 평생 나오지 못하는 영주를 약속해야 했고, 독방이 없이 한 방에서 잠자며 한 식당에서 식사하며, 애굽의 수도원보다는 낫지만 이태리 농민들과 빈민들의 식사 정도의 소식이었다. 저녁 마지막 예배가 9시경에 끝나서 취침하여 새벽 2시에 기침해서 하루의 성무(聖務)를 시작했다. 찬송, 독서(6시~9시), 들 노동(9시 15분~16시)하고 그 중간중간에 일곱 번 성경암송 했고, 17시 저녁식사 후 저녁기도회 시간이 있고 또 독서 시간이 있고 그 날의 마지막 예배 시간이 있었다. 이태리는 더운 나라여서 한여름 낮에는 두 시간 휴식을 취하고 노동하였다.

클루니 수도원

교회의 감독과 수도원 원장을 선택하는 일은 본래 성직자 회의나 수도사들의 권한이었는데 이 교회법이 6세기 이후로 그대로 시행되지 못하고 왕과 대지주 즉 평신도들이 그 일에 동참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봉건주의 사회의 귀족들은 어떤 감독을 물색할 때 교회 주교들과 의논하여 선택하여 세웠다. 특히 어떤 귀족이나 영주가 자기 땅에 교회를 세우면 적당한 감독을 물색하는 권리를 교회법으로 인정받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러한 교회 감독들이나 수도원장들은 그 땅의 귀족과 영주에게 충성해야만 했다. 이것이 평신도의 성직자 임명권과 파송권이었다. 그리고 왕이나 귀족들은 자기들이 임명하여 파송한 감독이나 수도원장들에게 다른 종류의 지주들에게와 마찬가지로 성직의 녹(祿)으로 교회와 수도원의 땅 일부를 증여하였다. 이러한 땅은 일정한 연한 동안만 소유하는 것이었는데 어떤 경우는 삼대까지 소유할 수 있었다. 이때 교회법을 어기고 감독들이 결혼하여 손자 때까지 물려주는 세습재산이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 땅의 소출의 십일조도 교회에 바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이 무렵의 성직자들은 제대로 교육과 훈련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었고 교회법을 어기고 결혼하거나 여자와 동거하기도 했다. 이때 신부 안수는 25세였고 안수 받기 전에 결혼생활을 하던 사람도 있었다. 아무튼 결혼한 신부가 녹으로 받은 교회의 땅이 세습재산이 되어버리기도 했다.

910년에 클루니(Cluny)에 세워진 수도원의 초대원장 베르토(Bertho)는 그 수도원 땅의 주인 귀족이나 그 귀족의 자손들의 간섭 없이 자주적으로 수도사들이 수도원장을 선출하여 세우게 하고, 그 지방의 교회의 감독의 권한과 간섭에서 완전히 자유하고 로마교황청의 보호만을 받게 하였다. 이렇게 하여 수도원 제도의 개혁운동이 시작되었는데 많은 반대와 위협을 받았고, 제2대 원장 오도(Odo)를 살해하려는 음모를 꾸민 귀족들도 있었다.

오도의 수도원 개혁운동이 널리 전파되어 새로 생긴 많은 수도원들이 클루니의 수도원을 본원(本院)으로 삼는 분원(分院)이 되었다. 그리고 베네딕트 수도원도 클루니 수도원의 제도를 본받아 개혁되었고 유럽 지역뿐 아니라 영국에도 클루니 수도원 개혁운동이 파급되었다.

클루니 수도원 개혁은 수도원의 권익을 보장하는 것으로서 왕이나 귀족이나 영주들로부터 수도원장 선택권과 임명권을 빼앗고 수도원의 자율을 보장하게 되었는데, 이 운동이 교회의 개혁운동으로 확대되어서 교회 감독의 선택권과 임명권을 교회가 갖는 본래의 교회법이 회복되었다. 이 과정에서 교황이 황제나 군주들과 충돌하였지만 그 충돌이 결국은 교회와 국가 곧 교황과 제왕들 사이의 애매한 유대 관계를 깨뜨리고 양자가 각각 독립적인 권세와 분리된 영역을 가지게 되었다. 곧 정교분리 원칙이다. 그리고 수도원의 원장이나 수도사들이 다 독신자였듯이 교회 신부와 감독들이 본래의 교회법대로 독신자가 되게 하였다.

클루니의 개혁을 싫어한 사람은 귀족이나 영주들만이 아니고 많은 감독들과 신부들이 이 운동을 반대한 까닭은 결혼도 하고 땅도 사유하면서 안락한 성직생활 하기를 탐하였기 때문이었다. 교황 그레고리 7세는 클루니 개혁운동을 적극적으로 추진한 사람이었다.

클루니 개혁운동은 교회와 수도원을 보호할 뿐만 아니라 빈민구제 사업을 벌였고, 농민들과 평민을 해치는 민폐를 막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중세기 귀족과 영주들은 이웃 귀족 및 영주들과 싸우는 전쟁을 마치 스포츠처럼 즐겼다. 그들은 각각 군병을 소유하고 있었고, 독일의 경우 300여 주에서 귀족과 영주들간 전쟁이 빈발하여 농민과 평민들에게 많은 해를 끼쳤다. 그리하여 클루니 수도원은 ‘하나님의 휴전’이라는 대책을 귀족들이 수용하게 하여 어느 토요일 오후부터 시작해서 월요일 새벽까지는 휴전하게 만들었다. 이 규정을 어기는 자는 죽어도 신부의 장례식 주례를 받을 수 없게 하고 그러한 사람의 시체는 아무도 장례를 치러주지 못하도록 하였다. 이렇게 하여 클루니 수도원의 평화운동은 부녀자와 어린이, 농민들을 보호할 수 있었다.

시테오 수도원

클루니 수도원의 개혁운동의 영향이 컸으나 그 수도원 자체의 성빈생활과 금욕생활이 해이해졌다. 클루니 수도단에 속했던 로버트 씨스터시안(Robert Cistersian)이란 사람이 1098년에 들판에 나와서 초막을 치고 암자생활을 시작하고 양을 키워서 양털로 짠 흰색 옷을 입었다. 이때 다른 수도원 수도사들은 다 검은색 옷을 입었었다. 이 수도원을 시테오(Citeaux) 수도원이라고 불렀다.

클루니 수도원은 대리석으로 집을 짓고 수도원 안에는 금은으로 된 그릇들도 있었으나 시테오 수도원에는 그러한 값진 기구 없이 성빈생활을 하였고 보기 좋은 예술품도 비치하지 않았다. 수도사들이 입는 옷은 무명옷, 염색하지 않은 흰 천으로 만들었고 다듬은 기도문이나 화창한 노래 없는 단순한 예배를 드렸고, 나무로 만든 십자가를 사용하였고, 예배 시간보다 명상 시간을 더 많이 가졌다. 클루니 수도원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쾌활한 찬송을 즐겨 불렸으나 시테오 수도원은 평범한 찬가를 합창으로 불렀다. 어떤 때는 하루 한 끼만 식사하였고 평상시에는 하루 두 끼만 먹었고, 생선과 고기와 계란과 버터와 같은 자양분이 많은 것은 먹지 않았고 매일의 힘든 노동은 견디기 힘들 정도였다.

이 수도단의 한 유명한 원장은 베르나드(Bernard)였다. 그는 1113년에 이 수도단에 가입하였다. 그는 한 귀족가문의 출신이며 학문이 많은 사람이었으나 세상에서 방황하다가 수도원으로 들어올 때 자기 숙부와 형제들 중 몇 사람을 설득해서 약 30명과 같이 들어왔다. 그는 수도원 암자에서 견습기간에 명상과 기도와 깊은 생각으로 영성을 닦았고, 마치 농부처럼 일하고 합숙소에서 피곤하여 제복을 입은 채 잠들었고, 노동의 대가로 약간의 돈을 주는 것을 사양하여 받지 않았다. 그리고 밤중에 드린 기도와 철야는 사람의 육신의 힘의 한계를 넘을 정도로 과중하였다.

베르나드의 명성은 널리 알려졌고 그의 설교는 감동적이었다. 그가 대중에게 설교하면 사람들을 수도원으로 유인해가는 양 그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이 그를 따라 수도원까지 뒤따라 왔다. 그는 하나님이 자기 영혼 안에 자주 들어오신다고 믿었는데 언제 그가 들어오시며 또 언제 자기를 떠나시는지 감득할 수 없다는 신비체험을 고백하였다. 그는 구약의 아가서를 본문으로 하는 설교와 강의를 많이 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노래하는 찬송가를 많이 작사하였는데 여러 나라 말로 번역되어 불렸다. 그 중에도

“내 주 예수를 생각만 해도 내 마음에 즐거움이 넘치나이다. 더구나 당신의 얼굴을 뵙는 것은 더 즐겁고 당신의 궁전에 쉼이 있습니다”

라는 찬송이 많이 애창되었다. 이 찬송은 한국의 교인들도 즐겨 부르는 찬송가이다.

“내 마음에 당신이 한 번 찾아오시는 때
진리는 빛나기 시작합니다
세상의 허영에서 떠나고 거룩한 사랑을
일으키나이다”

베르나드는 자기 수도단에게만 영감 있는 지도자가 아니고 다른 많은 수도단에도 감화를 끼쳐 수도원들의 폐단들이 시정되었다. 그의 사심 없는 행동과 경건의 감화로 교황이나 황제보다도 존경 받는 사람이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왕이나 귀족들의 부도덕과 농민들에 대한 잔인한 행동을 겁내지 않고 책망하였다. 그는 이단자들과 논쟁하는 일에 불려 다녔고 신앙 문제나 세속적 문제 해결에 중재 역할도 하였다. 그는 유럽과 영국의 많은 사람들과 서신으로 교제하였고 그를 반대하고 미워하던 귀족들과 이단자들도 그를 만나면 태도가 달라지고 감화를 받았다. 그는 대교구의 감독 자리나 교황의 자리에도 오를 수 있었으나 수도원 원장으로 만족하였다. 그는 당시의 교계와 교황청의 부패와 비리를 질책한 바가 있고, 교황청과 교회 법정의 재판 절차와 판사들의 술책을 탄핵하고 부당하게 지체되는 재판을 규탄하였고, 면죄부 제도와 교황청이 성직자들에게 주는 녹의 증여에도 폐단이 있는 것을 지적하였다. 아래와 같은 그의 연설은 실로 대담한 것이다.

“야심이 많은 사람들, 음란한 사람들, 근친성교, 그리고 인간성의 괴물들이 로마에 모여들어서 교황의 손에 있는 성직을 유지하려 하거나 혹은 그것을 얻어가지려고 술책을 부린다.”

그는 당시의 교황청 법정의 개혁을 요청한 것이다.

도미닉 수도단

스페인 태생 도미닉(Dominic)은 프랑스 남부의 한 대교구의 교회학교에서 교육을 받고 그 교회 안에 속한 어거스틴 수도단의 수도원장이 되었다. 그는 그 지방에 있던 이단들과 가톨릭교회를 반대하던 사람들을 설득해서 돌아오게 하는 설교운동에 종사하였다. 그는 확신에 찬 신앙심과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겠다는 사랑과 진지한 기도로써 설교하고 다녔다. 1215년 투루즈(Toulouse) 시민들이 그에게 집 한 채를 주어서 도미닉은 수 명의 사람들과 함께 그 집에서 한 새로운 수도원을 시작하였다.

그는 교황 인노센트 3세로부터 1215년에 새 수도단의 인가를 받고 어거스틴 수도단의 규정을 채용하였다. 인노센트 3세 교황은 도미닉의 수도단이 ‘설교 수사단’이란 명칭을 갖도록 권하였다.

도미닉은 1218년에 로마에서 성 프란시스코를 만나 깊은 감명을 받고 프란시스 수도단의 탁발 제도를 본뜨게 되었다. 도미닉의 수도원은 여러 지역에 빨리 확산되어 설립되었고 동시에 여자 수녀원과 평신도 수녀원도 세웠다. 이 수도단의 수사들은 설교자들이 되어서 유럽과 아시아와 아프리카 각처로 설교자로 파송되어 신자들을 감동시키고 불신자들을 회심케 하면서 한 강력한 수도단이 되어갔다.

도미닉 수도단의 특징은 극도의 단순성과 절대적인 빈곤과 희생적인 사랑을 실천하였던 프란시스 수도단과는 달리, 무지와 과오를 깨우치는 선교운동이었다. 그리하여 이 수도단은 각종 교육기관과 대학을 세워서 인문학과 신학을 가르쳤다. 기존의 유명 대학교의 교육과 행정에도 개입하여 파리대학과 옥스포드대학과 볼롱(Bologne)대학들의 분교들을 세우고 도미닉의 탁발 수도사들이 인문학 과정을 거치지 않고 바로 신학부에 입학할 수 있게 만들었다. 인문학 공부는 탁발 수도사들이 수도원 학교에서 수학할 수 있었다. 이처럼 수도사들이 고등교육을 받았으므로 선교지에서 본토민 언어로 성서와 기도서와 교리서적과 설교집을 발간하여 선교의 효과를 높였다. 그리고 도미닉 수도사들 중에 학자들이 나와서 유명 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또 도미닉 수도단은 자선과 의료사업에도 주력하여 병원을 세우고 약품을 개발하였다.

도미닉 수도단은 중세 유명한 신학자들을 배출하였다. 카시노 산에서 멀지 않은 한 마을에서 왕족 가문 아퀴노(Aquino) 백작의 아들로 태어난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1274)는 베네딕트 수도원의 한 분원인 카시노산 수도원에 들어가서 그 수도원의 원장인 그의 숙부의 지도를 받으면서 학문을 닦았다. 그는 과묵하였으나 탐구에 몰두하는 성격을 가진 지성인이었다. 그 당시 유럽 학계에서는 희랍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 연구가 성하였는데, 토마스는 그의 철학, 윤리학, 논리학을 비롯한 자연과학 사상에까지 통달한 중세의 대표적인 학자가 되었다.

그는 19세쯤 되어서 그 당시 교계에서 큰 환영을 받고 있던 도미닉 수도단의 수도사 설교운동에 매혹되어서 가입했다. 그의 모친과 형제들의 반대가 컸지만 그는 약 1년 동안 설교하면서 두루 다니다가 그만두고 파리로 와서 대학에서 3년 동안 당대의 대학자이자 아리스토텔레스 연구의 대가였던 알베르트 마구누스(Albert Magnus) 교수의 지도를 받으며 공부하였다. 그리고는 쾰른(Cologne)대학으로 가서 거기서도 마구누스 교수 아래서 공부하여 대학자가 되었고, 파리대학으로 와서 가르치기 시작하여 저술을 많이 하였다.

이렇게 학자와 교수와 저술가로 큰 공헌을 했지만 도미닉 수도단 소속이 되어 도미닉 수도단의 신학을 대표하는 사람이 되었다. 도미닉 수도단의 신학이 중세 로마가톨릭교회의 신학이 되었고 따라서 도미닉 수도단은 교황청의 신학과 교리를 변호하며 수호하는 역할을 하였고 교황청이 이단자들을 퇴치하는 일에 적극 협력하였다. 

프란시스 수도단

프란시스코(Francisco)라고 불린 이태리 아시스(Asis)의 한 거상(巨商)의 아들이 일으킨 수도단이 도미닉 수도단과 함께 탁발수도사 수도단으로서 13세기의 대표적인 수도단이었다. 프란시스코의 부친은 자기 아들을 귀족가문의 아들처럼 만들기 위하여 학교교육을 시키고 승마를 즐기며 기사도를 닦도록 좋은 말을 사주기도 하였다. 프란시스코는 그 지방의 귀족가문의 청년들과 어울리며 승마와 기사도의 모험행위도 해보았다. 그는 그 지방에 전쟁이 일어났을 때 참전했다가 붙들려서 포로가 된 적도 있었다. 그는 장차 용감한 기사 생활을 해볼 꿈을 가졌었다.

그런데 그가 중병에 걸려서 사경을 헤맨 일이 있은 후 마음이 변하여 로마로 순례 길을 떠나면서 걸인처럼 남루한 옷을 입어 그 당시 이태리의 가난한 사람들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는 그때 모든 사람이 무서워했던 나병자들을 돕기 시작하였다. 그는 1208년 마태복음 10장 7~19절의 예수의 말씀이 귀에 들려왔다. 그 말씀은 예수가 나환자들을 깨끗하게 해주시고 마귀를 쫓아내시고 죽은 사람도 살리신 이적을 행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전대에 돈을 넣어 다니지 말 것과 마을마다 평화를 빌어줄 것과 그리고 뱀과 같이 슬기롭고 비둘기같이 순진할 것과 미움과 박해를 두려워하지 말 것을 가르치신 말씀이었다.

프란시스코의 이러한 생활을 보고 그의 부친이 크게 실망하여 그가 돌아오기를 권고하였으나 그는 부친의 청을 거부하였다. 그의 부친은 분노하여 프란시스코가 자기 아들이 아니라는 법정선언을 얻어내었다. 프란시스코가 1209년에 12명의 동료들과 함께 로마교황청에 가서 수도단 허가를 신청하였을 때 교황은 그들의 완전한 빈곤생활에 관한 규칙이 너무 엄격하다고 염려하면서 인가하여주었다.

한때 기사가 되겠다는 이상을 가지고 말을 타고 모험을 경험했던 프란시스코는 이제 약자들을 보호하며 눌린 자들을 해방시키며 병들고 가난한 사람들을 구출하는 그리스도의 기사가 되어 말과 칼 대신 사랑으로 자기를 무장하였다. 특별히 그는 걸인들과 나환자들을 돌보면서 그들과 함께 사는 십자가를 졌다.

당시 교계에는 십자군 원정의 열기가 가득 차있어서 기사들이 “십자가를 지라”는 말을 곧장 잘하고 있었다. 프란시스코는 제5차 십자군원정 때 참여하여 성지로 향해 떠나서 1219년에 이집트에 도착했다. 그는 다른 기사들과는 달리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모슬렘 술탄을 만났다. 그가 그때 이집트까지 십자군을 따라갔을 때 순교를 각오하였는데 오히려 술탄이 그를 존경하였고 그는 1220년에 예루살렘과 시리아 지방을 거쳐서 이태리로 돌아왔다.

프란시스코는 나이 40대 중반에 들면서 몸이 몹시 약해져서 그가 소명을 받은 지 약 17년이 되는 1226년 10월 3일에 숨졌다. 그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십자군이 되어 하나님과 사람과 자연을 사랑하여 찬송하고 노래하기를 즐기면서 기뻐하는 생활을 하다가 평화롭게 운명하였다. 그의 시체에는 그가 그리스도의 고난을 받고 살아온 흔적이 나타났다. 교황 그레고리 9세는 그에게 성자의 호칭을 정식으로 주었다.

그의 수도단은 많은 사람들을 감화하여 수녀원도 생겼고 프란시스코의 생활과 이상을 일상생활에서 실천하는 평신도 수도원도 1221년에 생겨, 프란시스 수도단에는 세 가지 수도단이 있었다. 그가 그의 동료들과 함께 농부들의 일을 도우면서 낮에는 들판에서 일하고 밤에는 한 데서 잠자면서 인간과 대자연을 사랑하는 찬송을 불렀다.

온 천하 만물 우러러 주를 찬양하여라
저 금빛 나는 밝은 해와 빛나는 밝은 달
힘차게 부는 바람, 떠다니는 묘한 구름
돋는 장한 아침 해, 지는 고운 저녁놀
흘러가는 맑은 물, 빛과 열을 내는 밝은 불
귀한 땅, 꽃과 열매 주시네
선한 마음 가진 자, 다 용서하며 살아가고
고통 슬픔 지닌 자들 근심 주께 맡기고
큰 은혜 받은 만민, 성삼위일체 주님께
존귀와 영광을 돌리라

수도사들의 동양선교

1221년에 프란시스 수도단과 도미닉 수도단이 외국선교사업을 결정하였다. 프란시스 수도단은 모슬렘 선교를 아예 수도단 헌장에서 다짐하고 있었다. : “누구든지 하나님의 지시를 받은 사람은 모슬렘들과 다른 불신형제들이 사는 곳으로 가라 … 그리고 수도단의 모든 형제들은 어디에서든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자기들의 몸을 바쳐 복종하여 보이는 또는 보이지 않는 원수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드러내야 한다.” 그리고 도미닉 수도단은 마가복음 16장 15절 말씀을 인용하여 러시아와 중동에 들어가서 선교하기로 결정하였다.

1289년에 프란시스 수도사 존 몬테코르비노(John Montecorvino)가 도미닉 수도사 니콜라스(Nicholas)와 함께 교황의 파송으로 몽고에 가게 되었다. 그들은 교황이 몽고제국의 황제 쿠블라이 칸(Kublai Khan)에게 보내는 편지를 가지고 떠나 먼저 성 도마 교회가 있는 인도로 배를 타고 들어갔다. 그런데 그의 통행자인 도미닉 수도사가 인도에서 죽고 몬테코르비노 혼자 몽고에 갔다. 그런데 이 해에 쿠블라이 칸이 죽었다.

몬테코르비노가 1305년에 교황에게 보낸 편지에서 새 황제 온구츠(Onguts)를 만나 전도하였는데 그 왕은 네스토리우스파 교인이었다고 하였다. 로마 교황이 중동과 몽고에 선교사를 파송하기 이전에 마르코 폴로의 여행기에서 기록된 것과 같이 네스토리우스파인 동양교회가 이 지역에 선교하여 몽고 황제의 자녀들과 신하들이 동양교회 신자들이었다. (중세편 제2장 참조)

몬테코르비노가 교황에게 보낸 편지에서 처음 5년 동안에 네스토리우스 교인들이 자기를 로마제국의 스파이라 하여 몇 번 체포하였다고 보고하였다.

몬테코르비노가 교황에게 보낸 편지에서 보고하기를 칸발리크(북경)에서 6천명의 신자를 얻었다고 하면서 만일 욕설자들이 없었다면 3만명이나 개종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가 말하는 욕설자들이 가톨릭교회를 비판한 네스토리우스파 신자들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칸발리크에서 교회를 세우고 7세에서 12세 되는 아이들을 불러모아 세례를 주고 라틴말을 가르쳐서 로마교회의 예배의식으로 예배를 드렸다고 말하였다. 그리고 신약성서와 시편을 중국말로 번역하고 교회 안팎에서 설교하였고 그리고 신구약성서의 내용을 그림으로 그려서 글자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성서를 가르쳤다고 하였다.

1307년에 교황은 프란시스 수도사 7명에게 감독직을 부여하고 칸발리크에 가서 몬테코르비노를 대주교로 추대하고 사역하도록 파송하였는데 그 긴 여로에서 3명만 살아남아서 칸발리크에 가서 몬테코르비노와 합류하였다. 1321년에 프란시스 수도사 4명이 다시 파송받아서 인도의 폼페이에 선편으로 가서 거기서 중국으로 갈 배를 기다리고 있던 중에 시리아인 그리스도인들 집에 투숙하였는데 다 살해되었다.

가톨릭교회 수도사 선교사들이 동양교회와 협력하여 선교하는 일에 실패해서 중국이나 몽고에서 선교사업이 힘들었다. 





 

좋아할 만한 기사
최신 기사
베리타스
신학아카이브
지성과 영성의 만남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신학대학 살아남으려면 여성신학 가르쳐야"

신학대학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여성신학 교육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제기됐습니다. 백소영 교수(강남대 조교수, 기독교사회윤리학)는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하나님과 사람에게 소외 받은 욥은 멜랑콜리커였다"

욥이 슬픔과 우울을 포괄하는 개념인 멜랑콜리아의 덫에 걸렸고 욥기는 멜랑콜리아를 극복하는 과정을 담고 있는 지혜서라는 주장이 제기됐습니다.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한국교회 성장 이끌었던 번영신학, 이제 힘을 잃었다"

이원규 감신대 은퇴교수가 '기독교사상' 1월호에 기고한 '빨간불이 켜진 한국교회'란 제목의 글에서 한국교회의 미래가 어둡다고 전망하며 그 ... ...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학문적 통찰이 없는 신념은 맹신이 될 수 있지만..."

장공 김재준의 예레미야 해석을 중심으로 예언자의 시심(詩心) 발현과 명징(明徵)한 현실 인식에 대한 연구한 논문이 발표됐습니다. 김윤식 ... ... ...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영적 현존, '경계의 신학'을 '경계 너머의 신학'으로 끌어올려"

폴 틸리히의 성령론에 대한 연구논문이 발표됐습니다. 한국조직신학논총 제73집(2023년 12월)에 발표된 '폴 틸리히의 성령론: 경계의 신학에서의 "영적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길희성은 예수쟁이...그의 학문적 정체성은 종교신학"

김경재 한신대 명예교수가 고 길희성 박사를 추모하는 글을 '기독교사상' 최신호에 기고했습니다. '길희성 종교신학의 공헌과 과제'라는 제목의 ...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솔로몬 왕은 약자들이나 쓰는 속임수를 왜 썼을까?"

아이의 진짜 어머니와 가짜 어머니를 가려낸 솔로몬의 재판은 그의 지혜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최근 발간된 ... ... ... ...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지구라는 개념이 인간에 의해 왜곡되고 짓밟혀왔다"

한신대 전철 교수가 「신학사상」 203집(2023 겨울호)에 '지구의 신학과 자연의 신학'이란 제목의 연구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이 논문에서 전 교수는 ...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이주 노동자 환대의 윤리적 전략 "데리다의 환대"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이하 기윤실)이 12일 오후 안암로 소재 기윤실 2층에서 '이주노동자의 삶과 교회의 역할'이란 주제로 '좋은사회포럼'을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