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요한복음 12:42-43
설교문
러시아의 문학가로서 노벨 문학상을 받은 솔제니친은 러시아의 혁명사를 이해하기 위해서 50년 동안 수백명과 면담하고 수백권의 책을 읽은 끝에 이런 결론을 얻었다고 합니다.
“만일 6천만명의 러시아 시민의 생명을 삼킨 무서운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난 이유를 설명해 보라고 하면 그 대답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잊었기 때문이라고 되풀이 하는 것 외에는 달리 답변할 수 없을 것이다”
솔제니친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잊어 버렸기 때문에 그 끔찍한 혁명이 일어났다고 했습니다. 러시아에 교회가 그렇게 많이 있었는데 왜 그들이 하나님을 잊어 버렸습니까?
예수를 먼저 믿은 사람들이 마치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생활했기 때문입니다. 믿는 자가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실천하지 않자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도 하나님을 찾지 않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사회가 하나님을 찾지 않으면 엄청난 재앙을 겪습니다. 이것은 결코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세상 사람들 앞에서 무엇을 보여 주고 있습니까?
주일 날 교회에 와서 예배드리고 성도들마다 큰 힘을 얻고 돌아가는 것으로 끝나는 교회가 많습니다. 교회에서 거룩한 예배는 드리되 세상으로 돌아가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빛과 소금은 되지 못합니다.
그냥 한 주만 생활 속에서 신앙으로 어려움을 극복하고 또 교회에 와서 은혜 받습니다. 그것으로 그리스도인로서의 책임을 다 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 그 말씀에 감동을 받고 믿는 자들이 많이 생겼습니다. 그 가운데는 유대 관리들도 있었습니다. 이들이 모두 예수를 따르면서 계속 복음을 전했더라면 예수께서는 십자가를 지시지 않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 믿음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오늘도 예수를 믿기는 하지만 그 자리에만 머물러 있는 이들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하여 예수의 복음을 근거로 하나님의 거룩한 사역에 참여하는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1. 기독인임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의 선교 활동 후반기에 예수의 말씀과 활동을 보고 예수를 그리스도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많이 생겼습니다. 그 중에 유대인 관리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신앙을 고백하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들은 유대교에서 출교당하는 것이 무서워 그들의 신앙이 공개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의 숨은 제자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자세는 비겁한 것입니다. 예수를 속으로만 믿을 수 없습니다. 자신이 예수의 제자인 것을 공개적으로 선언하고 책임적인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빌립보 가이사랴 지역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마16:13)고 물으시니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니이다”(마16:14)고 대답했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시니 그 때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고 대답했습니다.
그 때 예수께서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16:17-19)고 축복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하셨을 때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한 것은 죽음을 각오한 고백이었습니다.
그 당시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로 공인 받지 못하는 때였습니다. 위대한 선생으로 알고 따르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아직은 사회적으로 공인받지 못했습니다.
상황이 이러한 때 베드로가 예수를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한 것은 신앙의 용기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위험을 무릅쓰고 베드로는 자신의 신앙을 표현한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예수를 ‘그리스도,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입술로도 신앙을 고백할 수 있어야 하고, 우리의 실천적인 행위로도 그리스도의 신앙을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실천적으로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고백했을 때는 미움과 투옥과 죽음마저도 각오해야 합니다.
미국의 흑인 목사 마틴 루터 킹은 민권 투쟁을 통해서 흑인을 차별하는 백인 사회에 대해 강력한 항의를 하다가 결국 백인의 총탄에 의해서 살해 되었습니다.
이것이 예수를 그리스도를 실천적으로 고백하는 사람의 자세입니다. 예수께서 원하시는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도 내 놓는 삶이 바로 진정으로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2. 사람들은 주의 일보다 자신의 일에 빠져 있습니다.
프랑스의 영웅 잔다르크는 자신이 버림받고 고독하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 그래요. 저는 참으로 외롭습니다. 제가 계속해서 외로운 것은 프랑스가 당장 망할 것 같은 데도 우리 아버지는 오빠들이 머물러서 양들을 지키지 않으면 물에 빠뜨려 죽이겠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양들이 안전하다면 나라는 망해도 좋다는 것이었지요”
그 당시 프랑스 농민들은 나라의 안전보다 자신의 양들의 안전을 택했습니다. 예수 당시 유대 관리들은 프랑스 농부들과 비슷했습니다.
유대 관리들은 예수의 말씀이 옳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유대 당국자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하는 것이 잘못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를 옹호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나서서 담대하게 예수를 보호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만일 그렇게 예수를 옹호하거나 보호하다가는 자신들이 화를 입기 때문에 거기에 끼어 들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도와 주려다가 자신들에게 너무 값비싼 희생이 온다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오직 자신의 안위에만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예수는 믿기는 하나 자신이 손해 보는 일은 하지 않겠다고 생각하지는 않으십니까? 내 체면, 내 시간, 내 물질은 아무 것도 희생하지 않고 싶지 않습니까?
오늘날 우리들은 오직 자기 자신에게만 관심이 있습니다. 현대인은 거의 이기적으로 자신의 일에만 머물러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이기심을 ‘먹고 살려면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합리화하고 있습니다.
일본의 구로자와 아키라라는 감독이 만든 영화 ‘라쇼몽’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어느 집에 도둑이 들었는데 그 집에 살고 있는 할머니가 죽은 남편의 시체에서 머리카락을 뽑고 있는 이상한 광경을 보게 됩니다.
할머니는 그 머리칼로 가발을 만들어 먹고 살려고 했다며 절박한 상황에 다다르면 산사람이든 죽은 사람에게든 어떤 무례한 행동을 해도 용서받을 수 있다고 말을 합니다.
자신이 이렇게 하지 않으면 굶어 죽기 때문에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나쁜 짓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며... 그만큼 자신의 사정이 딱하다는 것을 누구보다 죽은 남편이 잘 알고 있기에 너그럽게 이해해 줄 거라는 말이었습니다.
그 말을 들은 도둑이 되묻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지금 강도로 변한다고 해도 나를 원망하지 않겠냐고..... 자신도 강도짓을 하지 않으면 굶어 죽게 생겼다고 하면서 그 할머니에게서 옷을 빼앗아 도망을 가버립니다.
아무리 자신의 목숨을 연명하기 위해서라고는 하지만 극단적이 이기심으로 인간의 존엄성을 제멋대로 무시하는 처사가 결국은 무엇과 같은지를 이 이야기는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만듭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예의와 존중을 깡그리 무시하고 오로지 자신의 목숨만을 구하려는 목적으로 어떠한 수단이라도 합리화하다면 그것은 동물만도 못한 삶일 것입니다.
세상은 변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변화의 속도는 상상을 초월합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새로운 물건, 새로운 모델이 쏟아져 나옵니다.
변화하는 시대에 걸맞게 우리도 새롭게 변해야 하는데 웬일인지 우리 기독교인들은 오히려 이기적으로 나쁘게 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말씀 중심, 기도 중심으로 옳게 변해야 합니다. 주님 중심으로 변해야 합니다. 주님께 투자해야 합니다. 시간을 투자하고 물질을 투자하고 땀을 투자해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의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베드로처럼 인류 역사에 도움이 되는 길이 있습니다. 자신의 이기적인 길을 버리고 길이요 진리요 생명되신 주님께로 방향을 돌리시길 바랍니다.
3. 일시적인 것을 위해 영원한 것을 버리면 일생일대의 한을 남길 것입니다.
예수 당시 유대 관리들 가운데서 예수를 믿기는 하나 밖으로 표현하지 않는 자들은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고 사람들을 더 의식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자신들을 어떻게 생각하시는 지가 아니라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 지를 더욱 중요한 것으로 알고 행동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자신들이 현명한 판단을 했다고 자랑스러워했음이 분명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참으로 슬기로운 판단을 했다고 안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 세상에서의 삶이 지극히 짧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했습니다. 지상에서의 짧은 인생을 마치면 하나님의 심판이 기다리고 있는 것을 몰랐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우리의 영생과 관계되는 것입니다. 이들은 눈 앞에 보이는 순간적인 보람을 위해서 영원한 보람인 영생을 놓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예수 편에 서야 합니다. 하루 아침에 사라질 사람들의 시선이 아니라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주님 편에 서야 합니다. 사람들의 눈치를 살필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눈에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인정하시면 됩니다.
오늘은 추수감사절입니다. 추수감사절은 지난 1년 동안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드리는 절기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드리지 않는 이유는 감사의 조건이 없어서 보다는 감사를 깨닫는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 감사를 방해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첫째, 교만한 마음 때문에 우리는 감사를 하지 않습니다. 사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지 않으셨으면 우리는 강도가 될 수 있었고 살인자가 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우리 보다 악해서 그런 짓을 한 것이 아닙니다. 한 순간 그들의 격정을 참지 못해서 강도짓을 하고 살인자가 된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이 정도로 사는 것에 감사해야 합니다.
오스카 와일드라는 소설가가 쓴 단편이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예수께서 과거에 은혜를 입혀준 몇 사람을 그 후 다시 만나게 된 것을 우화적으로 엮어본 것입니다.
처음 예수께서는 한 주정꾼을 만납니다. 그는 거의 폐인과 같이 된 젊은이였습니다. 예수께서 “왜 그런 생활을 하고 있소?” 하고 물었더니 주정꾼은 대답했습니다.
“당신이 내가 절름발이였을 때 나를 일으켜 걷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걸어 다닌들 무엇을 먹고살라는 말이요, 그동안 직업을 구해 보았으나 만족한 직업 하나도 없었소”
그 다음 예수께서는 한 여자가 창녀가 되어 남자들 사이에서 희롱 받고 있는 장면을 보게 되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 여자에게 물었습니다. “어째서 이런 생활로 되돌아갔오?”
창녀는 대답했습니다. “당신이 나를 창녀에서 건져 새 사람을 만들어준 것 같았으나, 창녀에서 발을 씻은들 무슨 행복이 있단 말이오. 나는 더욱 고독해서 살 수가 없었기 때문에 다시 창녀의 생활을 시작했오.”
그 후 예수께서는 한 불량자가 정신없이 이웃을 때리고 있는 장면을 목격하고 그 청년에게 물었습니다. “이보시오 청년. 어째서 이런 생활을 하고 있소?”
불량자인 청년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당신이 눈을 뜨게 해 준 소경이었소. 그러나 눈을 뜨고 무엇을 보라는 거요. 보이는 것이 모두 신경을 돋구고 귀찮고 화나는 세상이 아니오. 결국 나는 화풀이도 하고, 마구 치고 받고 하는 생활이 나에게 주어진 길이라고 생각하였소”
이 단편은 은총을 은총으로 살려, 빛을 내지 못한 인간상을 그리고 있습니다. 이렇게 은총을 망각하고 다시 나락의 삶을 살게 된 것은 진정한 감사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현재 우리의 삶이 불평의 조건이 아니라 감사의 조건이라는 것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중증 장애인인 송명희씨는 이점을 분명히 알고 남이 가진 지식도, 재물도, 건강도 없었으나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그 은혜만으로도 현재의 조건에서 감사할 줄 알았습니다.
둘째, 남들과 비교하기 때문에 감사하지 않습니다. “왜 나는 이렇게 못사나?”고 한탄하기 때문에 감사를 하지 않습니다. 나보다 잘 사는 이들과 자꾸 비교하니 감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지 않았으면 내 형편은 아마 지금보다 더 비참했을 것입니다.
셋째, 마음 속의 욕망 때문에 감사하지 못합니다. 주어진 것에 만족하지 않고 끝없이 타오르는 욕망에 사로잡힌 사람은 감사가 없습니다. 만족이 없는데 어떻게 감사합니까?
감사하는 삶을 적극적으로 개발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는 사람은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보물을 쌓는 사람입니다. 영원한 곳에 보물을 쌓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여기에 행복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신앙을 입술로, 행동으로 표현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세상의 비난이나 현실적으로 입게될 화가 두려워 우리의 신앙을 표현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신자로서의 삶이 아닐 것입니다. 덧없이 없어져 버릴 세상의 욕망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 되신 주님을 붙들어서 모두 다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