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주재용] 만우 송창근의 성빈의 삶과 사상(6)

본지는 만우 송창근 목사의 납북 60주년을 맞아 그의 생애와 사상을 조명하고자 주재용 박사(한신대 전 총장)의 기고글 ‘만우 송창근의 성빈의 삶과 사상’을 총 12회에 걸쳐 연재합니다. 경건과신학연구소 소장직을 맡고 있는 주 박사는 그의 제자 장공 김재준과는 달리 연구 및 평가에 있어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하고 있는 송창근을 오랜 기간 연구, 지난 2008년 말에는 송창근 평전 『벽도 밀면 문이 된다』(송우혜 저·생각나눔)를 펴내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편집자주


Ⅲ-1. 성빈사상
 

▲주재용 한신대 명예교수(한신대 전 총장)

송창근이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존경했던 인물은 중세기 실천적 신앙인인 아시시의 성 프란시스(St. Francis of Assissi, 1182-1226)였다. 그는 국내에 있을 때나 국외에 있을 때 프란시스의 초상화를 언제나 책상머리에 놓고 그의 사상과 삶을 한국에서 실현시키려고 했었다. 그것이 곧 ‘성빈’(聖貧; Holy Poverty)의 사상이요 삶이었다. 김인서는 송창근에 대해서 평하기를 “경건문학을 애호하여 프란시스 연구로는 朝鮮에서 第一人일 것이다”라고 하였다. 송창근은 1926년 『靑年』誌에다 “지금으로부터 약 700년 전 이태리 나라 아씨스성에서는 천년 만년 가더라도 사라질 줄 모를 방향이 떠도는 성빈의 꽃이 되었나니 그는 걸식 승 프란시스였다”는 서언과 함께 프란체스코의 “태양의 노래”를 번역 게재하였다. 이 “태양의 노래” 가운데 그가 김재준에게 붙여준 아호 ‘長空’이 나온다.
 
성 프란시스가 태어났던 12세기의 교회는 여러모로 개혁이 필요했었다. 교구 성직자들은 대부분 무식했고 교구민을 위해서는 거의 일을 하지 않았으며 수도승들은 재산축적에 바쁠 뿐이었고 민중들은 무시되었고 무지했고 미신에 사로잡혀 있었다. 이러는 동안에 교황에게 복종하기를 거부하고 성직자를 중심으로 많은 소종파가 생겨났다.  이 종파들은 원시 기독교를 회복하려고 했다. 그들은 지금의 교회가 너무 권위적이고 너무 힘이 있고 너무 부하며 민중에게 너무 떨어져 있다고 생각했다.
 
이와 같은 시대를 배경으로 성 프란시스는 아시스의 부한 포목상의 아들로 태어났다(1181-82). 다른 부한 청소년들과 다를 바 없이 그도 기사의 꿈을 갖고 성장했으나, 전쟁 포로를 겪고 생명의 위협을 받을 정도의 중병을 앓고 난 후, 그의 회심의 삶이 시작되었다(1205 또는 1206년 경). 그는 황폐해가고 타락한 중세 기독교의 재건을 명하는 하늘의 음성을 들었으며, 특히 마태복음 10:7-13의 말씀에서 그는 복음 이외에는 아무것도 소유하지 말라는 절대 청빈(淸貧)으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다. 그는 재산, 의복, 부자지간까지 모든 소유를 버리고 당시 가장 가난한 농부의 옷을 입고 맨발로 전도 여행을 시작하였다.
 
프란시스의 ‘청빈 생활 규율’은 마지막 생존의 필수조건까지도 주님께 맡기는 ‘완전 무소유의 수사’가 되는 것이며, 이렇게 함으로써 인간을 얽어매고 속박하는 마지막 유혹까지도 끊어버리고 절대 자유인이 되어 생명의 구원인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추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청빈의 규율은 단순히 물질적 가난을 찬미하는 소극주의 또는 고행주의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그것은 가난을 애인과 같이, 여인과 같이 사랑하고 그 가난과 결혼하여 모든 것을 얻으려 한 것이다. 그것은 부정을 통하여 모든 것을 긍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규율은 의무적으로 지키고 실행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만나는 복음의 길이었다. 여기에는 물질적인 것, 현세적인 것을 악하게 보는 영지주의적 이원론은 없다. 청빈의 길은 그러므로 단순히 고행의 길이 아니라 축복과 환희와 감사의 길이었다. 여기 “성빈”(Holy Poverty)의 의미가 있는 것이다.
 
프란시스는 자유케 하는 영을 통하여 세상의 것, 자기의 뜻을 모두 포기하고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복종하였다. 그의 눈에는 오직 “양을 위해 십자가의 고통을 당하신 선한 목자 예수 그리스도”만이 보였다. 프란시스의 전기를 쓴 보나벤투라는 “프란시스의 그리스도에 대한 헌신은 인간의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철저했다”고 하였다. 그는 걸을 때나 앉아 있을 때나 마실 때나 언제나 기도하는 사람이었고, 그리스도의 고난에 언제나 동참하려고 하였다. 그는 그리스도의 상흔(wounds)을 지니고 있었으며 죽기 전에 두 가지 은총을 베풀어 주시기를 기도했다. 첫째는 주님이 당하신 고통을 가능한 자기도 몸과 영혼에서 경험하게 해 달라는 것과 둘째는 우리 죄인들을 위해서 고난을 견디어 내신 주님의 사랑을 가능한 느낄 수 있게 해 달라는 것이었다.
 
프란시스는 “내 소유가 일체 없어진 후에야 비로소 하나님이 은혜로서 모습을 나타내시며, 자신도, 운명도, 이 세상의 모든 것이 형제자매로서 그 품속으로” 들어온다고 생각하고 살았으며, “청빈에 있어서만이, 청빈을 통해서만이, 하나님의 사랑이 있다”고 하면서 “무소유에 있어서는 모든 것이 다 하사품(下賜品)”임을 몸으로 증거하였다. 여기서 그는 감사가 용솟음쳐 올라왔던 것이다. 그는 “여기야말로 기쁨이 있노라”(qui cˋe letizia)를 되풀이하여 외치었다. 그는 알몸으로 어머니인 대지에 엎드려 숨을 거두었다. “대지는 따뜻하다”라고 중얼거리면서 … 이것은 프란시스에게 있어서 ‘그리스도 프락시스’(Christ Praxis)였다.
 
이와 같은 성 프란시스의 삶을 송창근은 늘 사모하고 있었다. 그가 평양 산정현교회를 떠난 이유가 어디에 있든지 간에, 송창근은 부산으로 와서 그가 오래 전부터 소원했던 빈민사업을 시작하였다. 1936년 그것은 성 프란시스의 삶을 실천에 옮기려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했다. 그는 성빈학사(聖貧學舍)를 세우고 월간잡지 『聖貧』을 발간하였다. 그 ‘창간사’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조선교회는 이제 조선교인 각자의 정돈과 건설을 강요합니다. 팔장을 끼고 外邦의 도움을 기대하던 때는 이미 지났으며 만연(慢然)히 추이(推移)에 맡기기에는 너무나 현실적입니다. 우리는 조선교인으로서의 독특한 사명에 만진하여야 하겠습니다. 이렇게 함에는 우리 각자에게 경륜이 있고 정열이 있고 힘이 있고 피가 있어야 할 것이며 이런 것들이 뭉쳐서 한 소리를 이루어 만인의 심금에 부딪치는 기관(機關)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그 소리 듣기를 심히 고대하였으나 아직도 적연(寂然)하여 들림이 없으며 민연(憫然)한 가운데 우리 자신이 그 작고 고요한 소리가 되어 볼가하고 주님 앞에 빌기 오래 하였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허락과 동료제씨의 협찬을 얻어 이 일을 시작하려 합니다.”

송창근은 우리 사회와 교회가 모두 형식화 되어가고 무정해지고 있음을 한탄하면서 “생각해 주는 마음”을 호소하고 있다.

“… 서로 생각하고 살 수 있다면, 그 세상은 四時春風의 아름답기 꿈같고 맑고 높기가 하늘같은 세상이라 할 것입니다. … 아아! 크다 서로 생각하는 마음이여, 이 마음이 있어 다같이 살고 이 마음이 없어 다같이 죽는구나”

송창근은 위의 글대로 부산에서 “생각해 주는 마음”을 실천에 옮기고 있었다. 부산에서 그는 성 프란시스의 사상과 생활을 정기적으로 강의하여 신자들의 생활지도를 하면서 그 자신도 청빈생활을 하였다. 그는 봉급의 반을 구제 사업에 썼으며 스스로 거지 대장이 되어 찾아오는 거지를 한 번도 빈손으로 돌려보낸 일이 없다 한다. 그는 깡패, 불량소년들, 외롭고 가난한 노인들과 친구처럼 대화를 나누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였다. 그는 그렇게 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따르는 길이요 복음의 내용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송창근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감격하고 그리스도의 인격에 감격해야 경건한 영적 생활을 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는 예언자, 사도, 위대한 신앙인의 삶은 감격의 삶이었다고 주장한다.

“… 교회역사에 나타나는 위대한 성인들의 경건한 생활을 뒤져 보면 전생이 도시 감격이었던 것을 우리는 의심하지 않습니다. … 700여년 전 이태리 남쪽 앗시시의 성자 푸랜지에스코 … 그의 기록을 읽노라면 전부가 마음과 마음의 감격이오 인격과 인격의 감격이오 영과 영의 감격뿐입니다. 슬픔도 기쁨도 성빈도 조롱도 천대받음도 전혀 감격으로 일관한 것이 아니오니까.”

송창근의 삶과 사상은 감격과 감사에 근거한 것이었다. 그래서 일생을 두고 그가 즐겨하던 기도의 대목이 있다.

“있는 가운데서 없게 하고 없는 가운데서 있게 하시는 하나님 … 우리는 분명히 죽음을 확인하고 포기하고 돌아설 때 당신께서는 살았다하며 죽은 자가 무덤을 깨고 일어나는 당신의 힘을 우리는 믿습니다.”

송창근의 성빈은 신비주의적 “一卽多”사상에 근거한다고 할 수 있다. 그에 의하면 종교생활(신앙생활)이란 “卽一의 경지를 밟는 생활”이며 그리스도도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一)가 되었듯이 인간과 우주가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해서 온 것이다. 그러나 이 ‘하나’는 수학상의 ‘하나’, 피차 대립적 ‘하나’, 상대적인 ‘하나’가 아니라 자존(自存)하며 절대적인 하나이다. 또 그 하나는 “피와 눈물이 있는 ‘一’이요 생명이 약동하는 ‘一’이요 세련된 인격과 인격과의 참된 사귐 가운데서만 경험할 수 있는 귀한 ‘一’”이다. 그러므로 그에게 있어서 ‘하나’는 결코 고립된 ‘하나’, 배타적 ‘하나’가 아니라 “一卽多”의 ‘하나’였다.

“절대의 ‘一’은 결코 고립의 一이 아닙니다. 一切를 포용하고 一切의 굳은 터가 되는 一입니다. … 절대의 ‘一’은 ‘一卽多’의 一입니다. ‘절대일’ 가운데 萬有가 살아 있고 … 그 안에서 살림을 받는 것입니다.

無限愛의 絶對一이 온 세계를 한 품에 안아 줍니다. 우리가 절대일의 품속에 안겨 一이 될 때에 비로소 사회, 국가, 인류, 세계가 숨길이 서로 如하고 눈길이 서로 사랑을 속삭이는 것입니다. 사랑의 노랫가락이 전우주적 교향악으로 울려옵니다.

이리하여 一切의 多는 一로 말미암아 살고 一은 또다시 多로 말미암아 삽니다. 一은 多를 살게 하고 多는 一을 살게 합니다. 一과 多는 불가분의 깊은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一을 떠난 多는 생명을 잃을 것이요 多를 떠난 一도 생명을 잃을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살고 하나님은 사람으로 말미암아 삽니다. 하나님 없는 우리 생활은 죽은 생활이요, 사람 없는 하나님 생활은 뜻없는 생존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송창근에 있어서 ‘一’은 하나님이요 ‘多’는 인간을 비롯한 피조물을 뜻하는 것도 알게 된다. 그러므로 인간은 하나님과 하나(unity)가 되어야 한다. 이것이 송창근의 영성의 궁극의 경지였던 것이다.
  그의 “一卽多”사상은 기독교 신비주의의 배경이 되고 있는 고대 헬라철학에서도 발견되고 있다. 특히 신 플라톤 사상의 대표자인 플로티누스(205-270)의 사변적 사상의 주관심이 가시적 세계 피안에 있는 실재(hypostasis)에 관한 것이었는데, 이 사상 체계에서 “다(多)가 곧 하나이며, 하나가 곧 다이다”는 사상이 나타난다. 일자(The One)는 가장 근원적인 실재이며 그 어떤 것도 이 일자가 없이는 성립될 수가 없다. 일자는 스스로 존재하며 뜻하는 대로 행하며 일자는 객관적으로 파악될 수가 없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에도 없는가 하면 어디에서도 존재한다. 신비주의의 궁극적 목적은 이 ‘하나’와의 ‘일체’(unity)가 되는 것이다. 이 경지에서 ‘성빈’의 삶은 가능한 것이다.
 
송창근은 알지도 못하면서 떠드는 교리, 저마다 독선적으로 주장하는 신조, 듣기만 하여도 답답하기만 한 신학이론 등에 지치고 시달리다 못해서 이 모든 것에서 자유하기 위해 “침묵의 말씀”에서 ‘빛을 기다리고’, ‘하나님의 얼굴’을 그리워하고 ‘볼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면서 ‘찰나의 영원’을 노래한다.

“빛이여, 내게로 오소서. 빛이여, 하도 오랫동안 나는 그대로 기다렸나이다. … 지금의 내게는 모든 것이 힘을 잃었나이다. 이제는 빛이여, 그대만이 내게로 올 때가 되었나이다. 빛을 사모하는 것은 내 생활의 생활입니다. 빛을 아니 사모하려 해도 아니할 수 없는 순진한 의식만이 내 생활의 전부입니다. 추상적 개념과 … 논리형식은 나와 인연을 끊었나이다. … 나는 이 한마음 속에서 살기를 바라나니, 빛이여, 내게로 오소서. … ”

“하느님이 그립습니다. 하느님의 얼굴이 한없이 뵙고 싶습니다. 나의 종교생활은 하느님을 그리워하는 생활, 하느님 얼굴을 뵙고 싶어하는 생활입니다. 나의 생활 가운데서 이 한 마음을 빼앗아 간다면 내 생활은 공허합니다.”

“나는 볼 수 없는 사람을 만나봅니다. 그를 만나 보는 기쁨을 어디에 견주어 볼 수 있겠습니까? 그는 내 자신 가운데 살아 있는 사람입니다. 그는 참된 생명의 가치를 소유한 사람입니다. … 이 사람은 추상적 개념이 만들어 놓은 허깨비 같은 사람이 아닙니다. 볼 수 있는 세계의 많은 사람과 같이 무지하고 무정한 사람이 아니고 위로와 웃음과 탄식과 눈물을 가진 지극히 정다운 사람이며 생명의 창조자입니다.
 
생명의 창조자, 내 속에 감추어 볼 수 없는 사람을 나는 한없이 사랑합니다. 만일에 그가 볼 수 있는 사람이었다면 나는 그를 영원히 사랑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
  ‘不見의 見’이란 말의 참뜻을 지금에 와서 깨달았습니다.
  볼 수 없는 사람이여!”

“찰나만이 내게 참된 것을 압니다. 과거도 아니요 미래도 아닌 이 찰나에서만 나는 영원한 세계를 바라봅니다. 이것이 찰나의 영원입니다. 이 한 때는 공간을 용납하지 않을 뿐 아니라 시간의 관념까지도 없는 영원한 생명의 찰나입니다. 이는 일체의 생명의 때입니다. … 초월을 하고서도 내재하고 신비스럽고도 現前한 경지입니다.”

송창근의 위의 글은 성빈 생활을 하는 그의 영성의 내용을 표현해 주고 있다. 기독교 신비주의적인 성격도 나타난다. 빛은 참 실재일 수도 있고 하나님일 수도 있다. 볼 수 없는 사람은 창조자라고 되어 있으나 자아 속의 자아일 수도 있다. 찰나의 영원은 깨달은 자의 의식이요 P. 틸리히의 “영원한 지금”(the Eternal Now)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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