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지는 만우 송창근 목사의 납북 60주년을 맞아 그의 생애와 사상을 조명하고자 주재용 박사(한신대 전 총장)의 기고글 ‘만우 송창근의 성빈의 삶과 사상’을 총 12회에 걸쳐 연재합니다. 경건과신학연구소 소장직을 맡고 있는 주 박사는 그의 제자 장공 김재준과는 달리 연구 및 평가에 있어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하고 있는 송창근을 오랜 기간 연구, 지난 2008년 말에는 송창근 평전 『벽도 밀면 문이 된다』(송우혜 저·생각나눔)를 펴내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편집자주
Ⅲ-3. 기독교 윤리신학
▲주재용 한신대 명예교수(한신대 전 총장) |
송창근의 윤리신학은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는 문제에 대한 해답을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이 문제가 “우리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라고 하였다. 이것은 속죄적 신앙에 있어서 중심이 되는 것이어서 사도바울이 유대주의와 싸운 것도 이것 때문이었으며, 루터나 칼빈 등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이 로마 카톨릭 교회에 개혁을 요구한 중심 내용도 속죄적 신앙이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속죄적 신앙만이 기독교 윤리의 기초가 되는 것이다. 기독교 윤리는 결국 ‘새사람이 되는 윤리’요 ‘새 피조물이 되는 윤리’인 것이다.
송창근은 기독교를 떠난 윤리는 완전한 윤리가 아니라는 입장을 가지고 있다. 그는 “종교적 전제를 가지지 못한 윤리는 완전한 윤리가 못된다. … 종교적 전제를 가진 도덕만이 최고 이상을 실현할 가능성이 있다.” 고 하였다. 그에 의하면 “윤리적 종교만이 참된 종교요 또한 종교적 윤리만이 참된 윤리”이다. 그러나 그는 여기서 스토아학파에서 주장하듯이 신앙을 일반적 합리관념과 혼돈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즉 하나님 나라와 윤리적 ․ 사회적 진화의 역사발전 과정과 혼돈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예수를 윤리적 교사만으로 보는 것에 반대한다. 그러므로 그는 산상설교를 “최고 도덕적 표준, 윤리적 계율, 윤리적 프로그램”으로 보는 것에 반대한다. 따라서 그가 윤리의 ‘종교적 전제’를 강조하는 것은 윤리의 신적 기초를 강조하는 것이다.
송창근에 의하면 “윤리적 교훈에 가장 힘 있는 원동력은 자중(自重)과 자존(自尊)이요 가장 큰 목적은 그렇게 자중하고 자존하는 자기를 철저하게 실현하는 것”인데 이것은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철저하게 죄인임을 깨닫는 데서 가능하다. 이것은 하나님의 절대성을 인식하는 것이요 철저히 “자기 파산을 선언”하는 것이며 하나님께 절대적인 “자기 항복”을 하는 것이고 우리를 “하나님의 영역에서 퇴출”시키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항복할 때,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의 심정과 의지를 사로잡아 악의 근원이 되는 우리의 허위성이 파괴되어 하나님이 최후 승리를 하게 되는데, 이것이 기독교 윤리의 기초인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의 자유의지가 무시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최후의 승리는 결코 인간을 무시하는 강제적 행위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용서와 사랑으로 인간의 자기의지의 벽을 허물고 은총으로 선과 의를 행하게 하는 것이다. 즉 우리가 어떤 공로(선행)를 세우기 전에 하나님은 은총으로 우리를 자녀로 삼고 성결의 은총으로 새로운 존재가 되게 한다. 우리는 이것을 믿는 것이다. 이것이 바울이 말하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속죄적 사랑을 믿어야 한다. 이 믿음에 의해서 신의 의지가 인간의 의지 가운데서 실현이 된다. 다시 말하면 신의 의지가 인간의 의지로 전환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신앙으로 받을 수 있는 은총에 의해서 가능한 것이다. 송창근은 “이것이 복음이 가르치는 윤리적 기초”라고 한다.
송창근은 윤리를 내적 생명의 문제로 보고 있다. 따라서 외적 행위의 문제는 그 다음인 것이다. 그에 의하면 선한 행동이 선한 인간을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선한 인간이 있는 곳에 선한 행동이 있게 된다. 그와 만찬가지로 신의 의지적 행동이 있는 곳에 인간의 의지적 행동이 있게 된다. 따라서 신의 의지적 행동은 관념적인 것이 아니라 엄연한 현실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윤리적 행위(선행)를 할 수 있는 것은 이미 하나님의 의지적 행위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송창근이 말하는 ‘종교적 윤리’인 것이다. 종교적 윤리에는 하나님의 의지적 행동에 대한 감사와 감격의 행위가 있을 뿐이다.
“… 감사의 행위뿐일 것이다. 하나님의 의지적 행동에 대한 감사와 감격의 행위, 겸허와 환희의 중심을 표현하는 행위만이 우리에게는 있을 것입니다. 여기에는 도덕적이나 윤리를 말하며 자기의 수양이나 노력을 말할 여유가 없고 오직 우리 인간의 전인격과 전중심이 신의 의지에 정복되고 그리고 하나님 자신의 행동만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지적 행동에 대한 감사와 감격의 행위“는 곧 ‘남을 위한 행위’인 것이다. 송창근은 이것이 진정한 “자기 건축”이라고 하였다. 송창근에게 있어서 ‘자기 건축’은 이기주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형제를 자기와 같이 사랑하는 것을 의미하였다. “利他的 행위는 서로의 方面으로 보면, 곧 나를 사랑하고, 나를 귀히 여기는, 나를 위하여, 利我의 한 方法”인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 건축은 기독교 윤리의 목적이 되고 있다. 자기 건축의 모델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발견한다. 그리스도는 극기, 희생, 박애를 인간에게 교훈하셨고 사셨는데, 그것은 극기, 희생, 박애를 통하여 자기의 이상이 실현되고 자기가 건축되기 때문이었다.
“진실로 원만한 자기 건축의 大事를 성취하려면 자기 건축에 第一義人이 되는 예수의 인격에 本하고 본받음이 있어야 할 것이라 한다. 예나 지금이나 자기 건축의 道는 예수와 같이 감성과 이성을 선히 조화융합하여 원만한 인격 양성함에서 他道가 없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