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이사야서 55:1-2, 6-9
너희 모든 목마른 사람들아, 어서 물로 나오너라. 돈이 없는 사람도 오너라. 너희는 와서 사서 먹되, 돈도 내지 말고 값도 지불하지 말고 포도주와 젖을 사거라. 어찌하여 너희는 양식을 얻지도 못하면서 돈을 지불하며, 배부르게 하여 주지도 못하는데, 그것 때문에 수고하느냐? "들어라, 내가 하는 말을 들어라.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으며, 기름진 것으로 너희 마음이 즐거울 것이다. 아멘
야고보서 2:14-17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누가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도 행함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런 믿음이 그를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그 날 먹을 것조차 없는데, 여러분 가운데서 누가 그들에게 말하기를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하게 하고, 배부르게 먹으십시오" 하면서, 말만 하고 몸에 필요한 것들을 주지 않는다고 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와 같이 믿음에 행함이 따르지 않으면, 그 자체만으로는 죽은 것입니다. 아멘
마가복음서 13:32-37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들도 모르고,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신다. 조심하고, 깨어 있어라. 그 때가 언제인지를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사정은 여행하는 어떤 사람의 경우와 같은데, 그가 집을 떠날 때에, 자기 종들에게 권한을 주어서, 각 사람에게 할 일을 맡기고, 문지기에게는 깨어 있으라고 명령한다. 그러므로 깨어 있어라. 집주인이 언제 올는지, 저녁녘일지, 한밤중일지, 닭이 울 무렵일지, 이른 아침녘일지, 너희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주인이 갑자기 와서 너희가 잠자고 있는 것을 보게 되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은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다. 깨어 있어라." 아멘
설교문
우리가 오늘 교회 창립 65주년도 기념하고 교회력에 따라서 대림절 두 번째 주일을 축하하는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 창립도 중요하지만 크리스마스가 없었던들 창립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우리교회 창립은 조건부로 중요합니다. 우리가 주로 모시는 예수그리스도의 탄생을 진심으로 축하하는 전제로 자그만 교회창립을 축하할 수 있습니다.
교회절기를 보면 지난 주일이 대림절 첫째 주일이었고, 오늘이 둘째 주일, 셋째, 넷째, 그리고 다섯째 주일에 성탄절을 맞이합니다. 이렇게 합시다. 우리 교회의 생일은 우리의 주님이신 그리스도의 생일에 맞추어서 축하합시다. 우리끼리 자축하는 창립기념 주일은 하나님 보시기에 별 소용이 없습니다. 주님의 생신을 위해서 준비하는 창립일로 그렇게 지킵시다.
문화 예술위원회에서 교회 안에 성탄절 장식을 하나씩 하고 있습니다. 성탄 주일까지 하나씩 하나씩 완성해서 꽉 채워서 주님의 성탄을 축하하게 될 겁니다. 오늘 찬양을 불렀고, 기도도 드렸고, 세례 ‧ 견신도 했습니다. 모든 것이 완성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함께 모여서 주님이 재현하신 그 뜻과 그 의미를 새기는 우리의 결단을 모아서 하는 창립이고 세례고 성탄입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에게 65주년을 맞는 보람이 있고 기쁨이 있다고 믿습니다.
오늘 이사야서에 보니까 “여러분, 목마르시죠? 오세요. 물 드릴게요. 갈증이 심하시죠? 마실 물 드리겠습니다. 배가 고프시죠? 오세요. 드릴게요. 그런데 돈 안 받을테니 돈 없는 사람도 오세요. 지불하지 말고 그냥 드세요.” 뭘 드느냐하면 포도주 드시고 축제하라는 뜻입니다. 처소를 사세요. 일상생활도 하세요. 다 드리겠습니다.
“여러분, 그런데 어찌해서 양식도 얻지 못하면서 자꾸 돈 지불하세요? 먹고 배부르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해서 쓸데없이 밤낮 수고만 하세요? 왜 이러십니까?” 이렇게 성경말씀에 쓰여 있습니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시려는 겁니까?
이사야서에 이렇게 쓰여진 당시 상황은 이렇습니다. 바빌론이 이스라엘을 식민지화 시켰습니다. 정확히 이 시기가 언제일지는 모르나 아마 70년 동안 식민지 생활을 했기 때문에 70년 중에 한 50년 쯤 지나고 나머지 20년을 더 식민지생활을 해야 할지 모릅니다.
이사야가 이야기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목마르시죠? 배고프시죠? 어떻게 하시렵니까? 아무리 수고를 해 본들 여러분의 수고는 다 허사입니다. 식민지에서 독립도 못 얻으면서 자유도 없으면서 먹을 것은 고사하고 의에 주리고 목마르면서 설령 일용할 양식은 얻었다 하더라도 자유도 못 누리면서 무슨 일을 어떻게 헛일을 하십니까? 여기 오시면 제가 여러분께 공짜로 드리고 물도 마시게 하고 먹는 것도 드리겠습니다. 빨리 오세요.
제가 이 말씀을 읽으면서 우리 교회가 창립되기 이전 이야기를 생각했습니다. 우리 민족 구성원들이 1945년 해방을 맞이하기 전, 교회마다 기도처마다 모여서 가장 많이 읽은 말씀 중에 하나가 오늘 이사야서 55장 이 말씀이었을 겁니다. 독립에 목이 마릅니다. 자유에 목말라 못 견디겠습니다. 아무리 힘써서 해본들 제대로 된 나라 찾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여기 주님께서 주시는 독립의 약속이 있습니다. 자유의 약속이 있습니다. 평화의 약속이 있습니다. 어서 오세요. 교회마다 모여서 이 약속을 읽으면서 주님, 우리한테 자유 주시고 독립, 평화, 정의도 주옵소서. 새벽제단마다 주일 예배마다 기도했습니다. 똑같은 이야기가 오늘 이사야서에 같이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을 보통 읽으면 별 감흥이 없을지 모르나 옛날 우리가 처했던 상황을 생각하며 읽으면 이사야서가 준 복음의 의미를 우리가 뼈속 깊이 간직하며 그 뜻을 헤아릴 수 있을 겁니다.
그러면서 6절에 가면 “사랑하는 여러분, 온다고 약속했는데 주님이 아주 가까이 오셨습니다. 주님이 가까이 계실 때 주님 맞이하십시오. 가까이 계시기 때문에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만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을 때 주님 찾으십시오. 주님 멀리 떠나신 후에 후회해도 소용없습니다. 만날 수 없는데 왜 안 만나주시냐고 아무리 항구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지금 만날 수 있을 때 찾으시고, 가까이 있을 때 주님 부르십시오.” 이 약속을 이사야서를 통해서 했고 주님이 실제로 만나주십니다.
우리 선조들은 일제시대에 그렇게 배고팠고 목말랐고 힘들었습니다. 해방이 되었습니다. 해방이 되어서 해방의 기쁨을 누리던 사람들이 북쪽에 계신 분들이 남쪽으로 서울에 몰려왔습니다. 몰려와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신 구원을 베풀어주신 주님을 중심으로 모이고 주님을 찾았습니다. 그래서 1945년 두 번째 대림절 때 모인 곳이 경동교회가 되었습니다.
이 교회는 바로 이사야서의 말씀대로 목마른 자, 배고픈 자, 힘든 자,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이 자유와 해방을 맞아서 모이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장충동에 교회를 짓고 싶다. 그런데 수많은 교회 중의 하나로 교회를 만드는 것은 싫다. 딱 없어서는 안 될 교회이고 싶다.” 라는 생각으로 우리 교회를 짓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65년이 지나왔습니다. 지금까지 지나왔습니다. 여러분이 이 교회를 만들 때 한 약속이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믿고 싶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자유가 있고 독립이 있고 큰 미래가 열려있고 행복이 있는 것을 압니다. 믿고 싶습니다. 믿는 사람들 오십시오. 그렇게 우리교회가 만들어졌습니다.
그리고 약속을 한 가지 했습니다. 우리는 믿는 것으로 믿고, 믿는 대로 생활 속에 실천하겠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선조들이 이교회를 세울 때 우리 교회는 믿는 자들의 공동체이지만 동시에 믿고 행함이 있는 교회이고 싶습니다. 그래서 교회 이름을 ‘야고보 공동체’라고 했습니다. 싫든 좋든 우리의 출발은 야고보 공동체입니다.
우리는 믿는 성도들만의 교회가 아니고 믿는대로 일상 속에서 실천하는 자부심 가지고 계십니까? 믿음이 중요하지만 믿음이 실천 속에 녹아들어가야 합니다. 그런 교회이고 싶고 그런 교회로 65년 동안 살아왔습니다. 하나님이 받으실 것이고 혹시 이 고백을 다시 살펴봐야겠다고 생각하시면 오늘 우리 겸손하게 고백해야 합니다. 그 동안 우리가 살아있는 믿음의 성전이 아니었으면 우리 하나님께 회개하고 다시 태어나겠다고 결단하십시다.
65년 동안 살아온 과거의 역사가 우리의 삶이고 우리를 세운 주춧돌이 되었습니다. 65년 전으로 돌아가십시다. 65년 동안 있었던 모든 역사를 뒤로 하고 갑자기 65년 전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상념 속에 머릿속으로 들어갈 수 있으나 우리는 살이 되고 피가 되어 이미 우리의 역사가 되었습니다. 지난 해가 65년 전에 생각하면 앞으로 있을 예순 네 번째 미래였을 것이고, 금년은 예순 다섯 번째 미래입니다. 65년 전에 꿈꾸었던 우리의 미래가 오늘 2010년에 얼마나 이루어졌습니까?
믿는 자들의 공동체, 또 믿고 생활 속에 실천하는 자들의 공동체, 사람들이 학문이나 여러 가지 논리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론(Theory)이 확실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만 가지고 세상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반드시 실천(Practice)이 있어야 합니다. 이론과 실천, 똑같은 공식이 성경말씀에 있습니다.
믿는 것으로 족하지 않습니다. 믿음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믿는대로 실천이 더 중요합니다. 실천없는 믿음은,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준엄한 심판의 이야기입니다. 동시에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행함은 있으나 믿음이 없으면 그것도 텅 빈 것입니다. 행함과 믿음은 같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오늘 이사야서의 말씀, 그리고 마가복음 말씀이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믿지 못할 때 믿을 수 있는 때가 있습니다. 자유로 믿고 마음대로 믿고 찬양할 날이 있습니다. 밤이 아니고 아침이 오면 그날이 됩니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새벽이 되면 아침이 되면 대낮이 됩니다. 대명천지가 됩니다. 투명한 세계가 됩니다. 모든 것이 밝습니다. 제한이 없습니다. 제재도 없습니다.
그 아침이 되면 여러분은 밤에 꿈꾸었던 믿음을, 그렇게 믿고 의지했던 희망을 아침이 되면 생활 속에 심고 가꾸어야 합니다. 우리가 식민지 시대에 가졌던 민족 독립의 꿈, 희망, 염원, 해방되는 아침을 맞아서 얼마나 실현했습니까? 해방의 염원이 굉장히 강한 만큼 해방된 날 이 날을 세우는 일에도 강렬했습니까? 그래서 이 민족이 분단되었습니까? 너무나 강렬하고 실천력이 강해서 전쟁으로 초토화되었습니까? 지금까지 살아온 것이 고맙지만 간헐적으로 우리 평화가 좀먹어 들어가고 아픔을 느끼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이 올 때가 있지만 밤에는 어차피 기도해야 하고 힘들면 간구해야 하고 아프면 낫게 해달라고 호소해야 합니다. 밤에는 누구나 하나님께 호소할 수 있습니다. 밤의 신앙은 깊을 수 있습니다. 어려울 때일수록 잘 모입니다. 힘들면 서로 위로를 합니다. 더 어려운 것은 새벽이 되면 아침이 되면 깨어서 일하라는데 준비가 덜 되어서 밤보다 아침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더 답답하십니다.
어둠이 걷히고 새벽이 되었으면, 아침이 되었으면 깨어서 일해야 하지 않습니까? 왜 아침을 방기하십니까? 왜 아침이 왔는데도 불구하고 가능성이 무한대로 주어졌는데도 그냥 썩히십니까? 좋은 게 있고, 배부르고, 행복하다고 느낄 때 왜 일 안하십니까? 어려울 때에 간구를 들어주시지만 더 들어주시는 때는 아침에, 새벽에, 세상이 열렸을 때입니다.
여러분, 최선을 다하십시오. 아침이 병들었습니까? 아침이 잡니까? 아니면 아침을 맞은 우리가 잠자고 있습니까? 세상은 밝아졌는데 왜 이러고 있습니까? 오늘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정말 힘들면 내가 고쳐줄 수 있다. 병도 고쳐줄 수 있다. 다 고쳐줄 수 있다. 내가 복을 주면 밝은 세상을 주면 빛을 주면 더 잘 알겠느냐, 세상은 밝을 때 더 못하더라.”
오늘도 아침이 열렸습니다. 이미 점심이 된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밝을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더 열심히 하십시오. 지난 어려운 때를 생각하며 감사도 감사지만 이만큼 주신 밝음의 세상에서 무한대의 가능성이 열려있습니다. 열린 세계에서 더 잘합시다. 믿는대로 잘하고 믿음을 실천할 수 있도록 잘 하십시다. 저는 오늘 이 말씀을 생각하면서 별 다른 이야기보다 주님이 간절하게 구하시는 이야기를 대신 전하는 것뿐입니다.
우리 열심히 믿읍시다. 예수 진실로 믿는 사람 됩시다. 믿는 자들의 공동체를 다시 보상하십시다. 그러나 믿음만 가지고 안 됩니다. 우리 한국교회가 얼마나 많이 믿었습니까? 교회마다 얼마나 시끄럽게 믿습니까? 찬송소리는 얼마나 시끄럽게 울려 퍼집니까. 기도소리는요? 그런데 왜, 기독교는 왜 욕을 듣습니까? 왜 그렇습니까?
‘예수 믿기’에는 일정부분 성공했습니다. ‘예수 살기’에는 아직까지 미진합니다. 예수 믿는 것으로 족한 게 아니라 예수 믿는 만큼 예수로 삽시다. 예수 믿고, 예수 살고, 이 두 가지가 분리되지 않게 살아봅시다. 오늘 주님의 하신 말씀입니다. “내가 언제 올지 모르나 항상 깨어있으라. 지금은 아침이다. 예수 살자. 나와 함께 예수 살자.”
사도바울의 고백입니다. “제가 예수를 믿고 보니 제 안에 사는 것이 저인 줄 알았더니 제가 아니고 예수님입니다. 제 생활과 일상을 통해서, 사고방식을 통해서 제 가슴 속 깊이에서부터 저를 움직여 사는 분이 예수입니다.” 내가 사는 게 아니고 예수가 산다는 그런 고백이었습니다. 이 말은 진실로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받는 사람은 예수를 잘 믿는 사람이자 동시에 예수로 잘 사는 사람입니다.
‘예수 믿기’와 ‘예수 살기’, 이렇게 우리 경동교회가 앞장서봅시다. 이 세상에 예수 믿는 게 좋아서 한 때 희망을 품었다가 ‘예수 살기’가 보이지 않아서 교회를 비방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아니면 우리 신앙을 가지고 있다가도 하나님이, 예수가 진실로 구세주인지 의심하는 사람이 많아졌습니다. 안 믿으려고 거부하는 사람도 많아졌습니다. 냉소주의도 많아졌습니다. 그것을 욕하지 맙시다. 계속 의심하게 하십시다. 비판하게 하십시다. 욕하게 하십시다. 단 해답을 우리가 찾읍시다.
예수 믿기로는 해답이 없습니다. 예수 제대로 살기로 해답을 줍시다. 그래서 바라기는 진실로 의심을 품는 사람이, 기독교 메시지와 모든 것에 의심을 품는 사람이, 예수 살기에 감동하여 내가 한 의심을 의심하고, 내가 한 비판을 비판하고, 내가 한 부정을 부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진실한 예수 살기의 모습으로 부정에 부정, 비판에 비판, 그리고 의심에 의심을 하게 역사하도록 하십시다. 그리고 우리도 진실로 행복하고, 우리를 쳐다보는 이웃들도 행복하게 살기를 바랍니다. 더군다나 이 땅을 주관하시고 이 땅에 하나님 나라 만들기로 하시고 오신 우리 예수님은 얼마나 기쁘실까요? 창립, 대림, 모든 것의 주인은 하늘 뜻입니다. 예수, 제대로 한 번 믿어봅시다. 그리고 제대로 삽시다. 이것이 우리가 바라는 뜻이고 주님이 원하시는 축복의 근원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