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지는 한신대 이장식 명예교수의 교회 역사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이 교수는 얼마 전 본지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예수는 평신도였고, 초대교회 예수 운동을 이끈 무리들 역시 평신도들이었다"며 교회사에 큰 기여를 한 무명의 평신도 그리스도인들을 조명했습니다. 앞으로 연재되는 글이 평신도들의 신앙 생활 함에 있어 좋은 길잡이가 되어 줄 것으로 기대합니다. -편집자주
제9장 교회법과 이단과 종교재판
1. 교회법의 발달
국가에 헌법이 있고 거기에 따른 여러가지 실정법이 있어서 국가의 질서와 기강을 세우듯이 교회에도 교회법이 있게 마련이지만 중세교회의 교회법이 교회와 교황청의 권위를 보호하기 위한 너무도 엄한 것이 되어 폐단이 많았다. 교회법(canon law)이라는 것은 종규 곧 교회의 규정인데 그것을 법이라고 부르는 것은 종교에 맞지 않는 용어이기도 하다.
최초의 세계교회 공의회인 325년 니케아공의회 때 각 지방의 교회들 사이에 필요한 사항들을 만든 것이 최초의 교회법이었고 그 이전에는 교회가 성서에서 자료를 얻어 교인들이 지키게 한 규정들이 있었다. 그리고 각급 교회회의에서 의결한 규정들이 성문법(成文法)이 되어 지켜져 왔다. 그리하여 니케아공의회 이전 약 300년 동안은 교회법이라는 전문적인 술어로 불릴 만한 교회법이 없었다.
니케아공의회가 의결한 몇 가지 규정은 교회들 사이에 주로 목회사무에 필요한 사항들을 결의한 것이어서 교인들의 기강과 교회의 성례전 제도와 운영에 관한 문제들을 다루지 못했다. 사도들의 이름으로 「사도헌장과 교회법」(Apostolic constitution and canon law)이라는 책이 나왔고 692년에는 콘스탄티노플의 한 노회가 ‘85사도 교회법’(85 apostolic canon law)이라는 것을 냈으나 그 법들이 정말 사도들이 만든 것인지의 신빙성이 없어서 교회들이 그대로 따를 수 없었다.
희랍교회는 그 노회의 ’85 교회법’을 채택하였는데 그것은 325년의 니케아공의회의 교회법과 381년 콘스탄티노플공의회의 교회법과 430년 에베소공의회의 교회법과 451년 칼케돈공의회의 교회법을 포함했고, 더 나아가 유명한 교회 감독들이 쓴 법적 서신들에 들어있던 법도 포함했고, 그 후 787년에 모인 제2차 니케아공의회의 교회법도 포함했다. 이것이 오늘날까지 희랍정교회가 사용하고 있는 퀴니섹스툼 교회법(Quinisextum canon law)인데 트룰로(Trullo)회의 교회법이라고도 불린다.
서방의 로마가톨릭교회는 교황 요한 8세(재위 872~881)가 동방 희랍교회의 트룰로 교회법 일부를 라틴어로 번역하여 채용하였고 그 밖의 지방교회들이 만든 교회법도 채용하였다. 로마의 수도사 디오니시우스 엑시구누스(Dionysius Exignus)가 그동안의 서방의 교회법들을 잘 정리하여 편집한 「교회법전」(Book of Canon)이 있었고, 그는 새로 생긴 교황들의 교령들을 편집하여 또 한 권의 교회법전을 펴냈다.
서방 로마교회의 교회법의 역사에서 이시도레(Isidore) 위서(僞書)라는 법전이 유명하다. 이 책은 9세기 프랑크왕국에서 나온 것으로서 교회의 많은 결정사항들과 교황청의 교령들을 포함하였는데, 로마 교황청의 수위성(首位性)을 지지하는 법조문이 많았다. 그런데 그 중의 많은 조항이 허위라는 것이 판명되었다. 그 중 한 가지는 콘스탄틴 대제가 이탈리아의 전 영토를 교황청에 기증하였다는 문서였는데 후에 이 문서가 가짜라는 것이 판명되었다. 그 밖에도 교황청의 권위와 교황의 특권에 대한 법들이 있었으나 로마 교황들은 그 법들의 제정의 유래와 진위를 물어볼 생각 없이 그대로 받아들였다.
제11세기 교황 그레고리 7세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헨리 4세와 다투면서 로마 교황청의 우위성을 뒷받침할 만한 교회법 조문들을 수집하여 편찬하였다. 그러나 중세 대학에서 스콜라주의 학자들이 교회법전을 비판하고 시시비비를 가렸다. 이탈리아의 볼로냐(Bologna)대학은 율법학 연구로 유명하였다. 이때 재래 교회법전을 비판하여 새롭게 편찬된 것이 11세기 중엽에 나온 그라티안 법전(Decree of Gratian)이었다. 그라티안은 볼로냐대학에서 공부하고 교회 개혁을 열망한 무리 중 한 명이었고, 교황의 지위를 드높여주려고 하였다. 교회의 교리와 전통을 비판하여 옳고 그른 것을 밝히려 한 피터 아벨라드의 「예와 아니오」(Sic et Non)가 교회개혁가들을 자극하였다. 이때 교회개혁을 시도한 교황 알렉산더 3세는 그라티안과 아벨라드의 제자였는데 이 두 교수와 700통의 서신 연락을 통하여 지도를 받았다.
그라티안의 교회법전은 체계도 없이 수집, 편찬되었던 과거의 잡다한 교회법전들과는 달리 스콜라주의적 방법으로 체계 있게 정리한 것이어서 당시 파리대학과 볼로냐대학에서 교재로 사용되었고 교회법 연구의 새 발전을 만들었다. 중세 교황들 중 가장 강력하여 황제들과 왕들을 복종시킨 인노센트 3세와 4세는 모두 볼로냐대학에서 법률을 공부한 사람들이었다. 후대로 오면서 새 교황교령들과 교회공의회의 결의들이 많이 나와서 그라티안의 법전에 추가된 법전이 나올 수 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그라티안의 법전 외에 4가지 새 법전이 나와서 모두 5가지 법전이 생겼다.
로마가톨릭교회 법전은 1부는 교회의 모든 사제와 재판관에 관한 법, 2부는 교회법 시행에 관한 절차, 3분은 교회 사제의 권리 및 의무와 재산에 관한 법, 4부는 혼인에 대한 법, 5부는 범죄자의 형벌에 관한 법 등이다.
로마가톨릭교회는 역사적으로 이렇게 많은 교회법들을 편집한 방대한 법전을 가지고 있고 그것들이 그라티안의 법전 이후로 새로 편집된 신법(新法)이지만 그라티안의 법전에도 교황들의 교려잉 아닌 허위가 있었다. 그라티안 자신이 자기 법전에 허위가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편집하였고 허위 교령들이 다른 법전에도 들어 있었다. 그라티안의 법전도 엄격하게는 사적 법전이었다. 아무튼 로마가톨릭교회에는 많은 법전이 있었고 그 법전들에 들어있는 법령의 수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러므로 그 법들이 교회를 위하여 공정한 법으로서 집행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 법전들의 법이 로마가톨릭교회라는 큰 건물을 받들고 있던 지주(支柱)들이다. 마틴 루터가 이 교회법전들을 불태웠을 때 그 연기가 하늘을 덮었었다.
2. 중세 이단
중세 교회에서 교회법은 교황의 권위가 황제나 왕 같은 세속권력자보다 우월하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위력을 가졌고, 그 다음으로 이단자와 범죄자를 처벌하는 종교재판을 뒷받침하는 위력을 가졌다. 중세 교회가 세속권력자들과 싸운 싸움이 잔인했고, 이단들을 박멸하는 십자군과 종교재판도 잔인하였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잔인한 싸움이 다 교회법의 조문을 따른 것이었다.
중세 로마가톨릭교회는 교회를 그리스도교의 구원의 진리의 보관자이자 그것을 지키는 파수꾼으로 생각하여 그 진리에 어긋나게 말하고 가르치고 글을 쓰는 사람들을 이단자로 보고 여러가지 방법으로 다스렸다. 최후의 방법은 종교재판을 열어 죄의 경중에 따라 형벌을 내리는 것이었는데 최고형은 사형이었고 그 방법은 주로 화형이었다.
초대교회 시대부터 이단으로 간주될 만한 신앙의 이설(異說)들이 있어서 신약성서에서도 그것을 경고하고 있고 사도 시대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을 부인한 영지주의와 신성을 부인한 에비온주의와 같은 이설이 경계를 받았다. 또 몬타누스주의와 같이 잘못된 성령론과 재림설교가 정죄를 받았다. 이러한 이설 또는 이단설을 말한 사람은 교회에서 출교되거나 제명됐다. 그러나 325년 니케아공의회 이후로는 아리우스주의자들처럼 이단으로 규정된 사람들이 유형에 처해졌는데, 이 유형은 교회보다는 황제의 권력으로 집행된 것이었다. 물론 황제의 이 같은 조치는 교회를 보호한다는 명분을 가진 것이었다. 그리하여 콘스탄틴 황제는 그리스도교 국가에서 교회를 수호하는 일에 권력을 사용하는 전례를 만들게 되었다. 즉 교회가 이단자를 신학적으로 정죄하면 국가는 그 이단자에게 처벌을 가한다는 말이었다. 이것이 정교일체 사상의 한 예가 되었다.
중세 이단으로 몰린 사람들 중에는 성서 말씀을 자유롭게 읽고 어떤 영감을 받은 것을 발설한 사람들이 있었다. 이런 사람들의 말이 널리 퍼지기도 하였는데 프란시스코 수도사들 중에도 신령주의자로 알려진 사람들이 이단으로 치부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이단의 종류는 그리 많지 않았다. 때로는 점술가들과 마술사들도 이단으로 정죄 받았다. 성서는 해석의 자유가 있는 책이고 누구나 가질 수 있고 읽을 수 있는 책이라서, 읽고 얻는 영감도 사람에 따라 다를 수 있어서 위험이 있을 수 있다. 성서는 읽기 쉬운 책이면서도 그 해석은 반드시 쉬운 책이 아니다. 교회가 교인들이 성서를 많이 읽도록 권해야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들의 해석을 일일이 조사하거나 단속할 수는 없어도 교회의 전통적이고 기본적인 신앙의 진리에 위배될 때 성서의 올바른 해석의 표준자로서 심판자가 될 수 밖에 없다. 중세 로마가톨릭교회가 라틴어 성경책 한 가지만을 사용하고 외국말 번역도 불허한 이유의 하나는 성서의 번역이 잘못되면 하나님의 말씀이 왜곡될 수 있다는 것과 성서를 아주 개방하여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게 하면 지식이 부족한 사람들이 성서를 잘못 이해할 위험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중세에는 성서를 다른 말로 번역한 사람들을 종교재판에 붙여 사형하기도 하였고 신도들이 성서를 가질 수 없게 하는 정책을 썼다. 그리하여 신도들이 성서를 알지 못하였고 교회와 신부가 가르치는 말을 성서의 하나님 말씀으로 믿고 따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