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년 안팎의 짧은 역사 속에서 놀라운 성장을 이뤄낸 한국의 개신교. 당시 초기 선교사들은 복음전도와 함께 한국사회 발전의 동력이 된 교육과 의료, 지역사회 봉사 등 다양한 방법들을 통해 사회에 긍정적인 역할을 했고, 이 때문인지 교회는 교회 안 성도들 뿐 아니라 교회 밖 국민들에게도 존경의 대상이 되었다.
이런 개신교의 고속 성장은 6.25라는 동족상잔의 비극 속에서 피폐해진 국민들의 마음 속에 미래와 소망을 불어 넣으며 본격화됐다. 상처 받은 영혼들의 가슴을 달래주며 사회 재건 사업에 팔을 걷어붙이고 뛰어 든 교회는 국민들로부터 한층 더 두터운 신뢰를 얻게 되었다. 특히 과거 70,80년대에는 하루에 6개 교회 이상이 새롭게 개척되는 등 교회성장이 가시화 되고 있었다. 이 밖에도 개신교인들은 당시 민주화 투쟁 최전선에 포진해 한국사회의 민주화에 목소리를 높여 ‘교회성장’과 ‘사회 정의 실현’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 듯 보였다.
그러나 9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부터 지나친 개교회주의 그리고 지나친 사회참여 등으로 교회 안팎에서 비판을 받던 한국교회는 침체기로 돌아섰고, 2000년대엔 침체기를 넘어 쇠퇴 일로에 접어들게 됐다. 얼마전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이 개신교의 사회적 신뢰도를 조사한 결과, ‘10명 중 2명만이 한국 개신교를 신뢰한다’고 응답했다. 한국 개신교가 국민들로부터 얼마만큼의 신뢰를 잃었는지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한국 개신교가 신뢰를 잃은 그 이면엔 무엇이 있었을까? 전문가들은 그 첫째도 둘째도 사회와의 소통 부재를 꼽았다. 과거 어려운 시기 때마다 사회와의 긴밀한 소통을 통해 한국사회를 선도하며 비전을 제시해 왔던 한국교회는 언제부턴가 사회의 꽁무니를 쫓아다니기 바쁜 처지에 놓이고 말았다. ‘미래사회를 대비하라’는 교회의 목표가 재설정된 시점에서 본지는 (사)기독교산업사회연구소(소장 박찬식)와 함께 총 7회에 걸쳐 한국교회호의 방향타를 제시해 보고자 한다. - 편집자 주
제3부
과학기술 시대와 교회
윤완철 교수 (서울대학교 공대)
Ⅰ. 서언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형태의 문명이란 인류의 긴 역사에서 볼 때 아직도 무척 새롭고 낯선 것이다. 우리는 역사상의 위대한 문명들에 대하여 책을 읽고 이야기하고 영화를 보는 데 문제가 없다. 그러면서 과거 어느 때에나 대체로 비슷한 인간 사회가 펼쳐져 있었으리라 상상하게 된다. 단지 물질적 도구나 수단들이 현재보다 다소 불편한 것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 역투사에 불과하다. 환경적 변화는 삶의 모습도 바꾸고 가치관과 우선순위도 바꾼다. 사실상 20세기는 인간 사회의 모습을 과거와 다시는 비교할 수 없게 바꾸어 놓았다.
가령 옛 사람들에게 가서 예언해 주기를, 서울, 부산 간을 보름이 아니라 세 시간에 갈 수 있고, 걸어가면서 지구 반대편의 사람과 이야기를 주고받아 사업을 추진할 수 있으며, 도시의 땅 밑을 달리는 기차 안에서 필요한 정보나 뉴스를 휴대전화로 검색할 수 있고, 몸 속의 뼈나 장기를 기계로 자세히 들여다 볼 수 있고, 다른 나라 사람과는 친구가 되면서도 같은 건물에 사는 주민은 서로 얼굴을 모르고 사는 그런 사회가 온다고 말해 준다고 하자. 그런 세상에서 한 인간이 어떤 삶과 어떤 정신세계를 살아갈 것인지 그들이 비슷하게나마 상상해 낼 수 있을까?
마찬가지로 우리는 앞으로 15년 동안 우리 사회가 또 어떻게 변모하여 우리 자신에게 어떤 변화를 강요할 지 상상하기 어렵다. 우리의 15년 전 경험도 그러했다. 90년대 초기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터넷이라는 단어를 아직 모를 때였던 것이다. 초두에 현재의 기술문명이 아직 낯선 것이라 한 것은, 인류가 과연 스스로의 문명의 속도에 제대로 적응하고 있는 것인지 의문을 표하는 것이다. 우리가 소화해 내기를 기다리지 않고, 환경 자체가 제 나름의 속도로 마구 변화해가는 것이 현대 문명의 특징이다.
이런 속도에서 다음에 올 큰 변화를 어느 누구도 계획하지 못하고 있으며 단지 예측만 해 볼 뿐이다. 심지어 발명가 자신도 하나의 발명이 사회에 어떤 변화를 어느만큼 가져올 지 제대로 예측할 수 없다. 그래서 기술 문명은 점점 격류에 뜬 뗏목의 상황을 닮아간다. 물길이 급할수록 앞길을 예측하기 어렵지만 그럴수록 애써 내다보아야 할 필요는 더 커진다. 내다보아도, 뗏목을 통제할 수 있는가는 또 별개의 문제이다.
Ⅱ. 흐름과 여정
과거를 나열하면 추억이 되지만 꿰어보면 지혜가 된다. 가깝게는 격동의 정보화도 이미 수십 년이나 진행되어 왔다고 할 수 있으나, 오늘의 문명도 꿰어 볼 과거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지난 세기를 관통하는 문명의 큰 흐름을 살펴보는 것이 우리가 가는 길을 이해하고 예측하는 지름길이 될 것이다.
1. 생산혁명과 자동화
지금으로부터 100년 조금 전일 뿐인 19세기말과 20세기 초는 현대 문명을 위한 기본 인프라가 갖추어진 때라 할 수 있다. 발전소, 전등, 사진, 내연기관, 자동차, 영화, 진공관, 무선전신, 전화, 비행기 등이 불과 30년이 안 되는 기간에 집중적으로 사람들의 삶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발명품들은, 지금도 그렇지만, 종종 보급 초기에는 재미있고 마술적인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머지않아 그 오락적인 얼굴을 벗어 던지고 사회를 변모시키려 덤벼든다.
덕분에 20세기 벽두는 생산의 혁명으로 시작되었다. 1908년 포드의 T형 자동차의 대량생산은 인류 문명을 영원히 돌아가지 못할 새로운 세계로 진입시킨 것이다. 20세기에 일어난 생산과 소비 양쪽에서의 생태계적 변화는 인류의 삶의 방식과 문화까지 변화시켰다. 여기서는 두 가지를 염두해 두고자 한다. 첫째, 전문화된 생산에서 기술은 경쟁의 제1요소가 되었다. 가격과 성능 품질이 기술에 의해 경쟁력을 얻는다. 그런데 기술은 보통 자본에 의해서만 공급되므로 자본의 위치가 확고해졌다. 둘째, 자동화와 분업은 노동과 그 생산물 사이의 의미적 연결을 끊는다. 예를 들어, 자동차 문짝만을 조립하는 노동자는 자동차를 만든다는 창조의 의미와 보람으로부터 소외된다. 그 결과 인간의 노동과 시간은 본격적으로 도구적인 자원이 되어 버렸고, 역시 자본에 의해 공급된다.
이 두 가지 경로를 통해, 결국 기술에 의한 생산 전문화의 결과는 자본의 기술과 노동의 투입수단으로서 그 압도적인 위치를 가지게 된 것이다. 자본은 이익을 찾아 움직이므로, 생산과 발명, 그리고 문명의 방향은 어쩔 수 없이 상업적인 자기장 안에서 움직이게 된다. 이것이 우리가 낙관하는 자본주의적 시장경제가 단순한 균형의 도구를 넘어서서 삶과 정신에 편향을 가지게 되는 이유가 된다.
2. 정보화와 지식화
20세기 대부분에서 생산, 즉 인간의 일 부문에서 진행되어 왔던 변화의 중심 추세는 자동화되었다. 그러다가 20세기 후반에 와서 정보화 단계로 진입했다가, 이제는 지식화의 본격적 특징을 드러내고 있다. 자동화는 인간을 노동에서 해방시킨다는 것과 인간의 직업을 빼앗는다는 두 가지 평가를 받았다. 그것은 인간을 육체노동에서 정신노동, 즉 정보처리 업무로 이동하게 하는 흐름이었다.
지금 우리는 그 흐름이 결국 지식사회를 향하고 있다는 뚜렷한 방향을 보고 있다. 정보사회가 주로 문제풀이에 의한 기술혁신과 생산성의 측면을 부각시키는 것이라면, 지식사회는 지식을 생산 활동의 자원으로 삼는 현대 문명의 특질을 포괄적으로 가리킨다. 지식 업무와 의사결정은 오직 인간만이 할 수 있다는 점에서 가장 인간적인 일이라 할 수 있고, 따라서 지식화는 인류문명의 성숙 단계를 시사한다고 볼 수 있다. 지식사회의 주요 과제로 떠오르는 것들은 교육과 평생 학습을 통한 인적자원개발, 지식의 집적과 네트워크 적 공유 및 유통, 지적 협력의 문제, 지식활동의 동반자로서 컴퓨터의 활용 등이다.
3. 시스템화와 논리화
신기하게도 제2차 세계대전은 시스템 관련 학문을 미리 준비한 듯이 집중적으로 태동시킨 산파의 역할을 했다. 1946년 첫 디지털 컴퓨터 ENIAC이 등장하고 1948년에는 폰 노이만이 소프트웨어라는 개념을 탄생시켰다. 같은 해에 노버트 워너의 사이버네스틱과 새년의 정보이론이 출현하여 정보과학의 원류가 되었다. 또한 시스템의 문제를 수리적으로 해결하는 OR도 대전 후에 발전되면서 기획, 경영, 자원문제 등 폭넓은 분야에서 사용되고 있으며, 시스템적 관점과 데이터의 중요성을 부각시켰다. 이들이 오늘날의 정보혁명의 엔진 역할을 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러한 학문을 관통하는 시스템이라는 개념은 현대 문명을 조직화하는 중요한 키워드 역할을 하게 된다. 시스템적 관점이란 시스템 내의 요소들은 서로의 관계성 안에서 전체적으로 파악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관계성이란 원인-결과, 포함-소속, 분류, 통제 등의 관계로 구성되는데, 모두 논리적 관계이다. 즉, 시스템적 원리에 의해 복잡한 물리적인 작동들이 결국 논리적 관계로 해석될 수 있다는 것이다. 논리적인 것은 또한 정보적이기도 하므로 시스템의 발전은 정보화 지식화의 흐름과도 연결되고, 뒤에 이야기할 네트워킹의 사회와도 관련된다.
지금 현대인은 거대-사회 시스템을 우리의 일상 환경으로 삼아 살아간다. 전력과 인터넷 등 사회 인프라, 자유 시장 경제, 정치 체제, 교육제도 등이 모두 시스템이다. 이러한 시스템의 일반화는 우리의 세상에 대한 인식에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현대인은 거대 균형을 의지하는 것을 배우게 되고 늘 최적화를 도모한다. 또 시스템은 효과와 효율로 평가되므로 현대인의 마음에는 이 두 단어가 인각되게 되었다.
4. 네트워킹과 사이버사회
최근 10년 내에서는 인터넷과 휴대전화의 보급이 가장 중요한 환경 변화였다 할 수 있지만, 이것은 단순한 도구의 발전이 아니다. 인류는 이제 과거 어느 시대에도 없던 전혀 새로운 방법으로 사회를 이루고 교육을 하고 경제와 생산 활동과 소비생활을 하기 시작했으며, 그것도 아직 시작점에 서 있는 것에 불과하다. 요컨대 사회는 네트워크화 되고 있다. 또는, 소유가 아닌 접속의 시대가 왔다.
네트워크화 현상은 지식화 정보화 또는 시스템화의 기반을 형성하고 있다는 점에서 특히 주목된다. 연구자들은 인터넷 망이 없이는 문헌을 조사하고 연구동향을 알아내는 일을 달리 할 수 없게 된지 이미 오래 되었다. 산업적으로는 전자상거래와 종합관리시스템인 SCM(Supply Chain Management)로 나아갔다. 생산도 시장경제도 네트워크화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인터넷을 필수로 하는 분야는 정치, 경제, 산업, 연구, 오락, 취미, 교제, 정보조회, 지식획득, 홍보, 사무처리, 쇼핑, 선교 등 다양하다. 인터넷은 가상사회라는 또 하나의 신대륙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다. 새로운 대륙의 발전은 또한 당연히 새로운 시대와 새로운 삶을 만들어 내게 될 것이다.
5. 흐름 위의 기독교
이 장에서는 20세기의 기술문명이 그은 굵은 궤적을 간략히 파악하려 하였으며, 그것이 일의 측면에서는 자동화-정보화-지식화라는 변화 추세, 그리고 환경 측면에서는 시스템화와 네트워크화라는 변화 추세를 보이고 있다는 것을 지적했다. 그러면 이러한 변화는 기독교 신앙과 어떠한 관계에 있는가? 언뜻 보면 이러한 문명의 발달이 기독교의 특정한 교리와 상충되거나 관계될 것도 없고 교회의 활동이나 신자 개인의 윤리와 얽혀 들일도 없어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기독교를 종교 체계로 보기보다 인간의 마음과 삶의 문제로 보았을 때, 우리는 이 질문을 고쳐 묻게 된다. 현대문명의 변화는 인간의 마음 그리고 삶의 방식과 관계가 있는가? 그리고 너무도 단호한 긍정을 얻게 된다. 20세기가 목격한 문명의 변화방향은 어느 시대보다도 인간의 마음과 삶의 방식에 관여하고 있으며, 바로 그만큼 신앙에 관여하고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우리는 이 점에 대하여 뒤에 집중적으로 논의할 것이다. 그러기에 앞서 과학기술문명의 미래 여정을 잠시 예측해보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Ⅲ. 새로운 물결
향후 15년간 기술문명이 새로이 우리의 삶에 도입하거나 크게 변화시킬 영역들은 어떤 것일까? 보통 사람의 삶과 사회에 실질적인 변화를 가져올 가능성이 높은 기술 분야를 네 가지만 추려서 간략히 소개하기로 한다.
1. 생명공학과 나노 기술
누구나 첫손에 꼽고 있는 21세기의 기대 분야는 생명공학 분야이다. 생명공학과 생명공학이 보건, 의학, 농업 및 식량, 환경과 에너지 등 인류의 문제에 도움이 될 지식과 기술을 공급해 온 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최근 분자생물학, 세포 조작, 유전자 조작, 단백질 공학, 생체공학 등의 급속한 발전에 따라 가까운 미래에 인류의 삶에 격변을 가져올 태풍의 눈으로 떠오르게 되었다. 국제적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 생명체 복제는 의학의 혁명으로도, 또는 인류의 도덕적 또는 사회적 재앙으로도 될 수 있는 양면의 칼로 인식된다. 인류의 수명을 연장시킨 결과 지금 전 지구촌이 당면하게 된 노령화 사회의 도래는 삶과 사회의 모습을 바꾸고 경제의 흐름에도 영향을 미칠 문제이다.
생명은 인간의 가장 큰 관심사가 아닐 수 없다. 따라서 가장 우선되는 소비부문이며 투자처이고 정책부문일 수밖에 없다. 이 부문에서 변화가 기대되는 지금, 전 인류사회가 당분간 이에 몰두할 것이라는 점은 자명하다. 그리고 끊임없이 생명윤리 논쟁과 함께 인간이란 무엇인가 또는 인간의 존엄은 어떻게 지켜질 수 있는가 하는 물음들이 우리에게 던져질 것이다.
21세기의 중요한 다른 한 분야는 나노 기술이다. 나노 기술은 1000나노미터 이하의 크기에서 물질을 조작할 수 있는 기술로서, 제조, 섬유, 생물, 의약, 국방, 에너지, 운송, 통신, 컴퓨터, 전자재료 등 여러 산업에서 현재의 한계를 뛰어넘을 견인차가 될 수 있다. 지금은 스포츠 용품이나 주방기구에 유용한 신소재가 등장하고 있는 정도지만, 정보공학과 생명공학과의 융합적 발전 가능성 때문에 나노기술의 미래를 주시하게 된다. 일례로 향후 15년간의 기간에 개발될 것으로 예상되는 컴퓨터의 극미세회로가 응용되기 시작할 때에는 컴퓨터의 개념을 다시 한번 바꿀 수 있고, 생체 분석과 생체 재료, 바이오센서 등의 기술을 급격히 발전시켜 생명공학과 의학에 기여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2. 시스템 지능화
세 번째로는 다소 넓은 범위를 총칭해서 시스템 지능화를 일컬을 수 있다. 이것은 인터넷과 통신을 통한 정보시스템과 하드웨어의 통합적인 네트워킹을 기반으로 해서, 모든 것이 논리화, 디지털화 되어 가는 것의 필연적 결과로 나타난다. 지능화란 결국 논리적 조작의 가능성을 추구하는 것이다. 주요한 변화로는 지능형 사무실과 지능형 홈 네트워킹 시스템, 양방향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한 디지털 TV, 여러기기가 자연스레 하나로 통합되는 디지털 컨버전스 기기들, 자동차를 정보화하고 네트워크에 연결시켜주는 텔레매틱스, 지능로봇의 등장 등을 말할 수 있다.
특히 유비쿼터스 환경의 개발은 생산과 소비, 문화, 일상 등의 제 분야에서 인류의 삶을 현저하게 변화시킬 잠재력을 가지고 있어 세계적으로 주목하고 투자하는 부문이다. 유비쿼터스 환경이란 많은 사물이 서로 통신으로 연결되거나 계산 기능을 내장하여 통합적이고 논리적인 환경을 형성하는 것이다. 이 기술은 정보서비스 기능을 풍부하게 갖춘 생활지원 로봇의 등장과 함께 15년 후의 우리의 삶을 상호작용할 상대가 되는 기계들로 둘러싸이도록 할 것이 확실해 보인다.
3. 문화 기술
문화기술은 아직 내용이 확정되지 않은 신조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문화기술을 6T라고 불리는 주요한 여섯 중점개척 기술 분야의 하나로 목록에 올린 것은 한류 등을 의식한 한국 정부의 독특한 선택이다. 그러나 기술의 문화화, 또는 문화의 기술화는 분명히 전 세계적인 흐름으로 생각된다.
기술의 문화화의 한 증거로서 우리가 주변에서 목격하게 되는 다자인 분야의 급격한 성장을 들 수 있다. 기술적 제품들을 두고, 그 기능을 넘어서 문화적 가치를 따지게 되었다는 것은 사실 기술문명이 성숙기에 접어들었다는 필연적인 표정이기도 하다. 반면, 컴퓨터 게임 산업의 신장이나 영화에서의 그래픽 효과는 반대방향으로 문화가 기술화되고 있는 뚜렷한 예이다. 나아가서 가상현실의 응용이 확대되고 전자박물관이나 가상 공원 또는 오락장 등이 보급되는 것도 예상되고 있다.
문화의 기술화가 심화시킬 가장 중요한 현상은 상업화로부터 올 것이다. 문화는 정의하기 애매한 것이지만, 대체로 경제활동의 중심적 대상 영역에서 벗어난 인류의 교양적 활동과 관련되어 있다고 보아왔다. 그러던 것이 문화의 도구가 기술이 되면서 투자가 없이는 문화 생산이 안 되는 상황이 되었고, 결국 수요자로부터 수익을 올릴 수 있어야 한다는 조건이 성립된 것이다. 그 결과 문화의 정의에 비추어서는 역설적이게도 문화가 지속적으로 산업영역이 확장해가는 프론티어가 되는 현상이 연출되고 있다.
문화의 상업화의 문제는 문화 공급자의 힘이 약해지고 수요자의 힘이 전제적이 되는 데 있다. 이미 매스미디어를 매개체로 한 대중문화의 발전 양상에서 우리는 그러한 단초를 본다. 높은 예술혼이나 독창적인 표현의 시도는 일반적으로 외면되기 일쑤이고, 오직 그것이 대중의 기호에 영합될 때에만 근거를 얻고 발전하는 상황이 되므로, 예술과 문화가 대중 교화의 역할을 한다는 것은 이제 옛 이야기가 되었다. 일례로 최근 TV드라마들에서 보여주는 젊은 층의 부박한 물질주의와 성공주의적 세태들에 대해 비판이 있어도, 제작 측에서는 단지 실제 현실과 대중의 선호도를 따라가는 것뿐이라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대중의 문화 기호는 스스로 증폭 확산되는 장치를 갖추게 되며, 그 근저에 가지고 있는 온갖 세계관을 전염시키고 때로는 표준화시키게 된다. 10년 이내에 충분히 대중화될 전망인 양방향 디지털 TV는 아마도 이 현상을 심화시킬 것으로 보인다.
4. 자원과 환경
부존자원의 소진은 물질문명의 종식을 의미한다. 사람들은 1960년대 로마클럽의 경고 이후 석유와 가스를 비롯한 여러 광물의 추정매장량이 오히려 많이 늘어났으므로 문제가 과장되었다는 식의 이야기를 듣는다. 그런데 그것은 매장량이 새로 생긴 것이 아니라 더 발견된 것뿐이고, 문제가 없는 것이 아니라 시간적으로 늦어지는 것뿐이다. 대체 에너지는 일반의 낙관과 달리 원자력 이외에 당장 믿을만한 것이 없다.
지금의 현대문명은 석유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에너지뿐 아니라 플라스틱, 합성고무, 섬유, 에너지, 도로, 페인트, 화장품 등이 모두 석유에서 비롯되니, 석유를 태워서 없애는데 쓰는 것은 분명히 현명하지 않다. 석유 생산량은 앞으로 10년 이내에 최고치에 도달하고 그 이후 줄어든다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지금 추세라면 1965년부터 2025년까지의 60년 동안 지구의 부존 석유의 80%를 파내어 쓰는 셈이 될 것이라고 예상된다.
에너지나 다른 주요 자원이 고갈될 때엔 문제가 앞당겨 일어날 수 밖에 없다. 자원의 부족은 가격의 변화를 일으키고 그것은 각국 산업의 원가와 상대적 경쟁력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게다가 이런 현상을 잘 알고 있는 각국에 의한 가수요와 확보경쟁이 촉발되는 것은 실제로 자원이 고갈되기 수십 년 전일 것이므로, 석유에 관해서는 이제 언제 시작될지 모르는 시점에 와있다. 어쩌면 시작된 것인지도 모른다. 생존이 문제가 되면 국제적 분쟁이 일어날 가능성 또한 대단히 높다. 우리처럼 석유와 기타 자원을 거의 해외에 의존하면서 또한 수출경제를 영위하고 있는 나라로서는 태풍에 편주 띄운 형국이 되기 알맞은 상황이다.
석유 뿐 아니라, 자원과 환경에서 지구가 인류를 지탱할 수 있는 여력은 한정되어 있다. 지난 역사에서는 그 여력을 걱정할 필요가 없었지만, 지금 인류의 기술문명은 지구의 각종 자원과 에너지, 환경 변수들의 한계를 위협하고 있다. 이것이 엔트로피의 문제이다. 우리는 오랜 시간에 걸쳐 지구에 축적된 자원을 기술 발달에 힘입어 너무 빠른 속도로 소비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지금 우리는 후손들의 생존 기회를 외상으로 끌어다 쓰고 있는 셈이지만, 그 일부 문제는 후손들의 때까지 기다리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Ⅳ 뗏목.
이 글의 앞 장들에서는 각 논제와 기독교적 가치와의 상관관계를 간략히 꼽아보기도 하였으나, 이 장에서는 전체적으로 문명의 영향이 어떻게 마음으로 침투하고 신앙에 관여하는가에 대한 문제를 간략히 논하고, 기독교 세계관적인 대응과 실천이 필요함을 지적하여 결론으로 삼아 보려 한다.
1. 문명이 마음을 주조하다
진화론, 유물론, 환원주의, 자연주의 등으로 나타나는 과학적 세계관의 문제와는 별도로 기술 문명 역시 기독교 신앙에 세계관적 영향을 미친다. 그 영향은 사상으로서 명시적으로 제시되는 대신, 우리 삶의 환경을 형성하고 살아가는 모습을 강제하는 방식으로 전달된다. 긴 시간에 걸쳐 외부로부터 변화의 당위성을 통하여 우리 마음을 포섭해 간다는 점에서 깨어있는 대응이 쉽지 않다.
이런 전달방법은 의사소통에서 전제이라고 부르는 것이 해당한다. 전제란 의사소통 때 서로의 이야기를 이해하기 위해서 일단 가정할 필요가 있는 내용이다. 가령 ‘그가 게으른 것은 내 잘못이 아니다’라고 누가 말하면 ‘그가 게으르다’는 것은 가정해 놓고 잘못의 소재를 묻는 것이 된다. 논란은 주로 누구 잘못이냐 하는 대로 옮겨가고 과연 그가 게으른가 하는 것은 캐서 묻지 않게 된다. 밝혀진 바에 의하면, 사람들은 이런 전제를 다시 묻기보다는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강하다. 바로 문명이 우리에게 세계관을 전달하는 방법이 그러한 것에 비견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일단 문명 안에서 살며, 다른 사람과 문명 전체를 암묵적 전제로 하고 어울려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 전제를 짐짓 가정이라도 하지 않으면 정상적인 사회적 행동이 불가능해진다. 이것이 문명이 마음을 주조하는 방식이다.
앞서 이야기한 내용에서 우리는 시스템적인 경쟁, 노동의 자원화, 지식적 능력에의 의존, 효율의 숭상, 문화의 상업적 가치 등을 이미 살펴보았다. 이것들은 전제를 통해 현대인의 마음에 각인된다. 그리고 네트워크화된 사회에서 문화적으로 표준화되고 다음 세대로 전수된다. 신앙적 가치관이란 그 전제들의 건축물 위에 조그맣게 지어지는 옥탑방이 된다. 기술을 혹 가치중립적으로 볼 수 있다 하더라도, 기술 문명을 가치중립적으로 볼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2. 국교가 된 반영주의
위에 든 예들 이외에도 기술적 유토피아에 대한 환상, 유물론적 세계관, 진화론적 인간 이해, 환원주의적 세계 이해, 자연주의적 신관 등 기술문명이 전제하고 있는 것은 많다. 기술부문에서 인간이 뚜렷한 진보를 보인 것인 누구나 긍정한다. 그런데 그것은 역으로 기술이 인간을 진보하게 하는 것이라는, 생각해보면 엉뚱한 전제를 주입한다. 그것은 진보의 정의를 바꾸고 보통 사람들을 유토피아 사상으로 끌어들인다.
그런 진보란 또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므로 사람들은 낙원을 얻는 데 하나님이나 영적인 추구가 필요 없다고 여기게 된다. 기술은 인간에게 자신의 환경을 확실하게 통제하고 있다는 확신을 준다. 물리적 세계를 이해하고 어느 정도 그것을 통제하면서, 인류는 이전에 자신을 두렵게 했던 ‘미신적인 하나님’으로부터의 자유가 증진된 것으로 간주한다. 미래에 대한 보장과 희망도 기술문명과 자본으로부터 나온다. 비유하자면, 기술문명은 인류를 이집트에서 구원하여 끌고 나왔으며 지금의 다소 거친 광야를 거쳐 가나안으로 인도할 것이라고 믿어지며, 온전한 우상이 된다. 하나님께 기대할 것을 다른 데에서 구하면 그것이 우상이다.
그러나 실상 기술문명의 인간은 자기가 느끼는 만큼 자유롭지 않다. 기술의 우상은 상업성의 꼭두각시가 되어 있으며, 번영주의의 신학 아래에서 기능한다. 기술이 없이는 번영할 수 없다는 말에서 다시 번영은 전제가 되고,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져 사회공통의 목적이 된다. 이것을 받아들인 상태에서야 개인은 이웃들과 의사소통 할 수 있고 한 나라의 정치가들은 서로 합의를 이끌어 내거나 국민을 설득할 수 있다. 그것이 지금 세계의 모든 대통령들이 인간들의 리더가 아니라 CEO이자 대표 세일즈맨에 되어버린 이유이다. 의사소통과 집단적 협력을 위한 공통의 기반, 그것은 바로 국교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정치가와 경제인들은 국교의 제사장이 되어버렸다.
지금 사회적으로 공유된 믿음은 과학과 시스템을 신뢰하는 것이요, 모든 사람이 사랑하고 추구하는 것은 부유하게 되는 것이며, 겨레의 소망은 경제 성장과 복지이다. 믿음 소망 사랑을 다 갖추었으니 버젓한 종교이다. 거기에 학교에서 거리낌 없이 심어주는 진보의 이데올로기와 계몽주의, 합리주의의 정신은 이 국교의 세계관을 완성시키고 있다. 서점에서는 성공과 리더십이라는 단어를 제목으로 한 번영주의의 감동적인 신앙서적들이 넘치고 있다. 삶의 의미는 이러한 신앙의 체계 안에서만 발견된다.
예배가 되어야 할 삶의 땅을 문명이라는 국교에 할양해 버린 기독의 신앙은 주변화되고 있다. 정서화하고 신비화하고 심리화하고 율법화해 보지만 여전히 참을 수 없이 가볍게 느껴진다. 요컨대 오늘날 기술 문명은 그 기술 내용이 아니라 그 세계관적 작용에서 인간의 마음을 굴절시킴으로써 기독교 신앙의 참됨과 깊이를 잠식하고 있다. 따라서 지금 교회가 세계관과 가치관을 논하는 것은 지식이나 덕목의 사치가 아니다. 오히려 믿음의 보존을 위한 최후의 불가결한 노력이라 해야 할 것이다.
3. 교회의 도전
기술문명의 우상은 강제와 핍박이 아니라 무의식적인 수용과 무비판에 의해서 사람들의 마음으로 들어오고 있다. 이런 공세를 신자 개개인들이 각자 감당해 내기에는 벅찬 일이다. 교회는 여기에서 문명과 그 전제를 직접적으로 다루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이제는 응전이 아니라 도전이며, 수비전이 아니라 신앙에 비추어 삶을 새로 세우는 탈환전을 해야 하는 입장에 놓였다. 어떤 교회들은 이미 우리의 요새가 아니라 탈환해야 할 산성이 되어 버렸는지도 모른다.
이런 상황에서 단지 종교적인 논점을 애써 찾아내거나, 비관주의적인 태도로 문명의 문제점을 찾아내어 비평하는 것이 기독교 신앙을 수호하고 천명하는 방법으로서 과연 올바른 것인지 의심하게 된다. 진리를 지키는 것은 보수가 아니고, 언제나 도전이 된다. 그것은 인간의 타락한 본성과 그에서 비롯되는 문명의 왜곡된 흐름 역시 언제나 나름대로 주류를 자처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오래된 싸움을 새로운 전장에서 싸우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만물이 하나님의 질서를 그리며 기다려 온 존재로서, 그에 걸맞게 보다 근원적인 방법, 보다 능력 있는 방법으로 이 문명 세상에 대응하고, 경고하고, 혹은 주도하는 길을 찾아 공동의 행보로 삼아야 할 것이다. 그러한 길은 바로 하나님의 나라와 뜻을 깨달아 실천하는 데 있으며, 복음의 깊은 참 뜻을 이해하고 전파하는 데 있다고 믿는다.
예수님은 주류를 장악한 종교가들에게 도전하셨고, 사도들은 시대의 주류인 그리스-로마 문명에 도전하였다. 예수님의 도전은, 그리고 바울의 도전은 세계관적이었다. 신앙을 율법과 의전과 전승으로 아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하나님을 가르치고 하늘나라의 새로운 질서를 가르치셨으며 세상에서 부자 되기를 원하는 자가 얻을 수 없는 생명과 자유를 갈파하셨다. 그리고 천국은 누룩이 온 떡에 퍼지는 것처럼 이 세상에 퍼질 것이라 비유로 가르치셨고, 아닌 게 아니라 복음은 충실한 사도들을 통하여 문명사회 로마제국에서 누룩이 되었다.
그러나 이제 역으로 문명의 세계관은 누룩이 되어 교회로 넘쳐 들어오고 있으며, 그렇게 침수된 마음 안에서 복음의 이해는 오히려 제자리를 잃고, 왜소해지고 왜곡되는 모습을 보인다. 이제 우리는 세상을 향하여 도피적이 아닌 어조로 다시 팔복을 설하고 ‘마음이 가난한 자’임을 자랑할 수 있는가 스스로 물어야 한다. 교회는 세상에서 높아지고자 하는 것이 허망함과 세상의 제물에서 평안을 찾으려는 어리석음과 끝없는 욕구에의 탐닉이 가져오는 허무함을 고발하고, 거듭난 마음의 유쾌함과 이웃 사랑의 기쁨과 하나님의 자녀 되는 영광을 증거하는 문화- 정신 공동체로 세상에 나타나야 한다.
이것은 금욕주의나 청빈주의로 돌아가야 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생명을 잃으면 무슨 유익이 있는가 하는 질문을 낙타가 되어 버린 문명사회의 영혼들에 던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교회는 우리가 과연 누구의 제자인지를 분명히 보여주는 문화 공동체를 형성하여, 신자들에게 바깥세상과 확실히 구별되는 문화의 해방구를 형성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빛은 비취어야 하고, 소금은 그 맛을 잃으면 버려질 것이다.
* 윤완철 교수
서울대학교 공대
조지아공대 산업시스템 박사
미국 NASA Ames 연구원
현재 카이스트 산업공학과 교수
좋은이웃교회 집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