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지는 한신대 이장식 명예교수의 교회 역사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이 교수는 얼마 전 본지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예수는 평신도였고, 초대교회 예수 운동을 이끈 무리들 역시 평신도들이었다"며 교회사에 큰 기여를 한 무명의 평신도 그리스도인들을 조명했습니다. 앞으로 연재되는 글이 평신도들의 신앙 생활 함에 있어 좋은 길잡이가 되어 줄 것으로 기대합니다. -편집자주
2. 중세 이단
중세 교회에서 교회법은 교황의 권위가 황제나 왕 같은 세속권력자보다 우월하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위력을 가졌고, 그 다음으로 이단자와 범죄자를 처벌하는 종교재판을 뒷받침하는 위력을 가졌다. 중세 교회가 세속권력자들과 싸운 싸움이 잔인했고, 이단들을 박멸하는 십자군과 종교재판도 잔인하였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잔인한 싸움이 다 교회법의 조문을 따른 것이었다.
중세 로마가톨릭교회는 교회를 그리스도교의 구원의 진리의 보관자이자 그것을 지키는 파수꾼으로 생각하여 그 진리에 어긋나게 말하고 가르치고 글을 쓰는 사람들을 이단자로 보고 여러가지 방법으로 다스렸다. 최후의 방법은 종교재판을 열어 죄의 경중에 따라 형벌을 내리는 것이었는데 최고형은 사형이었고 그 방법은 주로 화형이었다.
초대교회 시대부터 이단으로 간주될 만한 신앙의 이설(異說)들이 있어서 신약성서에서도 그것을 경고하고 있고 사도 시대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을 부인한 영지주의와 신성을 부인한 에비온주의와 같은 이설이 경계를 받았다. 또 몬타누스주의와 같이 잘못된 성령론과 재림설교가 정죄를 받았다. 이러한 이설 또는 이단설을 말한 사람은 교회에서 출교되거나 제명됐다. 그러나 325년 니케아공의회 이후로는 아리우스주의자들처럼 이단으로 규정된 사람들이 유형에 처해졌는데, 이 유형은 교회보다는 황제의 권력으로 집행된 것이었다. 물론 황제의 이 같은 조치는 교회를 보호한다는 명분을 가진 것이었다. 그리하여 콘스탄틴 황제는 그리스도교 국가에서 교회를 수호하는 일에 권력을 사용하는 전례를 만들게 되었다. 즉 교회가 이단자를 신학적으로 정죄하면 국가는 그 이단자에게 처벌을 가한다는 말이었다. 이것이 정교일체 사상의 한 예가 되었다.
중세 이단으로 몰린 사람들 중에는 성서 말씀을 자유롭게 읽고 어떤 영감을 받은 것을 발설한 사람들이 있었다. 이런 사람들의 말이 널리 퍼지기도 하였는데 프란시스코 수도사들 중에도 신령주의자로 알려진 사람들이 이단으로 치부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이단의 종류는 그리 많지 않았다. 때로는 점술가들과 마술사들도 이단으로 정죄 받았다. 성서는 해석의 자유가 있는 책이고 누구나 가질 수 있고 읽을 수 있는 책이라서, 읽고 얻는 영감도 사람에 따라 다를 수 있어서 위험이 있을 수 있다. 성서는 읽기 쉬운 책이면서도 그 해석은 반드시 쉬운 책이 아니다. 교회가 교인들이 성서를 많이 읽도록 권해야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들의 해석을 일일이 조사하거나 단속할 수는 없어도 교회의 전통적이고 기본적인 신앙의 진리에 위배될 때 성서의 올바른 해석의 표준자로서 심판자가 될 수 밖에 없다. 중세 로마가톨릭교회가 라틴어 성경책 한 가지만을 사용하고 외국말 번역도 불허한 이유의 하나는 성서의 번역이 잘못되면 하나님의 말씀이 왜곡될 수 있다는 것과 성서를 아주 개방하여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게 하면 지식이 부족한 사람들이 성서를 잘못 이해할 위험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중세에는 성서를 다른 말로 번역한 사람들을 종교재판에 붙여 사형하기도 하였고 신도들이 성서를 가질 수 없게 하는 정책을 썼다. 그리하여 신도들이 성서를 알지 못하였고 교회와 신부가 가르치는 말을 성서의 하나님 말씀으로 믿고 따르게 되었다.
카다리
서부 프랑스 지방인 프로방스에는 카다리(Cathari) 또는 알비젠세스(Albegenses)라고 불리는 이단사상이 널리 퍼져 있었다. 카다리라는 말은 순결이라는 뜻이다. 이 지역의 가톨릭교회는 일반적으로 부패돼 있어서 순진한 신도들의 빈축을 사고 있었다. 어떤 사제들은 저질의 책을 써서 돌렸고 또 교회에서 부를 수 없는 노래를 가르쳐 불렀다. 대부분의 신부들은 글을 배우지 못했고 게으르고 속되고 사치를 좋아하였다. 그리고 돈으로 성직을 사고 파는 폐습을 묵인하였고 첩을 데리고 있었다.
카다리 신도들은 서부 유럽뿐만 아니라 동쪽 콘스탄티노플과 슬라브 지역까지 널리 퍼져서 교회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들은 라틴어 성경이 아닌 지방의 언어로 번역한 성경을 사용하여 예배도 지방의 말로 드리고 있어서 지방민들의 호감을 사고 있었다.
카다리 신도들은 이원론 사상을 가지고 선신과 악신, 두 세력이 이 우주에서 대립하고 있고 그 대립은 영원한 것이며 이 세계는 악신이 지은 것이고 영적 세계는 선신의 힘으로 유지된다고 믿었다. 그들은 구약성경의 어떤 부분은 부인하여 믿지 않고 구약의 어떤 사건은 악신의 역사였다고 말하였다. 그들은 신약성경만을 성경으로 받아들이고 신약에서 요한복음을 최상으로 여겼다. 그들은 로마가톨릭교회를 배격하고 자기들 교회를 참된 교회라고 믿었다.
카다리 신도들은 완전한 생활을 지향하여 일종의 영적 세례를 받아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게 죄의 용서를 받는다고 믿었다. 완전하게 되기 위하여 그들은 금욕적으로 생활했다. 육류와 계란과 우유를 먹지 않았고, 미혼자는 독신으로 살 것이며, 기혼자 남성은 아내와 헤어져서 다시는 여자와 가까이 하지 말아야 하며, 절대로 전쟁을 일으키지 말아야 하며, 또한 재물을 취하지 말아야 했다. 카다리 신도들은 영적 세례 또는 성령의 세례를 받고 사죄를 받은 후 ‘위로’(consolation)를 받을 때 완전의 경지에 이르는데 그 때가 구원의 때라고 믿었고, 이 때는 노령의 시기까지 혹은 중병을 앓을 때까지 지체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들은 교회당 건물을 갖지 않았고 예배의식은 아주 간단하였다. 그들은 육은 본래 약한 것이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진짜 사람의 육신을 갖지 않았을 것이고 따라서 십자가에 달려 죽을 리가 없다고 믿었다. 그들은 농부들과 수공업 노동자들로 구성된 선교사들을 동원하여 선교하였고 학자 신도들도 있어서 서적을 많이 써냈다.
로마가톨릭교회의 교황들과 교회회의는 카다리 신도들과 교회를 정식으로 이단으로 정죄하고 국가 관공서와 합세해서 박해하였다. 1179년에 열린 제3차 라테란공의회는 카다리 신도들을 박멸하기 위하여 십자군을 조직 및 파견하여 성과를 거두었으나 전멸시키지 못하여 교황청이 제1차 박해를 시도하였으나 카다리 교회는 살아남았다. 그리하여 여러 교황들의 출병을 거쳐서 카다리 교회와의 전쟁이 끝났으나 여기에는 프랑스의 왕 루이 9세의 가톨릭교회에 대한 충성의 힘이 크게 공헌하였던 것이다.
영성주의 프란시스코 수도사들
프란시스코 수도단의 수도사들 중에 이단으로 규탄받은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들은 영성 생활을 강조한 신령파였다. 1323년에 교황 요한 22세는 그들이 그리스도와 그의 사도들이 재산을 소유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이단이라고 선언하였다.
그들과 같은 프란시스코 수도단의 요아킴(Joachim)이 이단으로 정죄받고 있었다. 그가 쓴 「영원한 복음」은 이 세계가 세 주기 곧 성부의 시대와 성자의 시대, 그리고 앞으로 올 성령의 시대로 진행되는데 앞선 두 시대에 이룩된 모든 일은 완전히 실패였고 앞으로 올 제3시대 즉 성령의 종교 시대가 도래하면 완전한 그리스도교가 실현될 것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이 마지막 시대가 1260년에 올 것이고 그때 프란시스코 수도단 성도들이 그 새 종교의 시동인(始動人)들이 될 것이라고 말하였다.
요아킴의 역사관을 진보사관이라고 부른다. 성부의 시대는 아담으로부터 시작된 시대였는데 이 시대는 장가가고 시집가던 육적 생활의 시대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때에 끝났다. 제2시대는 그리스도가 탄생하기 전 이미 우시아왕 때부터 시작하여 1260년에 끝난다. 이 시대는 영적 생활과 육적 생활이 혼합된 시대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시대가 그가 세상에 태어나시기 전에 이미 시작되었다는 견해는 역사에서 새 시대는 갑자기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그 이전부터 배태되는 것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제3시대 즉 성령의 시대는 순전히 영적 생활을 하는 시대인데 누르시아(Nursia)의 베네딕트(Benedict)로부터 시작하여 세상 끝날까지 이어질 것이라고 보았다. 이 시대는 성령의 은사를 사모하며 명상하는 것이 교회 생활의 전부가 될 것이라고 말하였다. 성부 시대는 율법, 공포, 노동, 노예의 시대였고, 제2시대는 은혜, 겸손, 진리, 단련, 효성적인 봉사의 시대였고, 마지막 제3시대 성령의 시대는 사랑, 자유, 행복, 명상의 시대라고 말하였다.
요아킴의 이러한 예언은 당시 현실 교회의 개혁을 염원한 것이었지만 교회의 권력자들은 교회를 폄하한 불경이라고 단죄하였다. 1225년에 요아킴의 책들 가운데 「영원한 복음」이 정죄되었고 1259년에도 그 밖의 저서들이 정죄되었다. 교황청의 이러한 단죄에도 불구하고 그의 추종자들은 늘어났고 그들은 종교재판에 회부되어 사형당했다. 그러나 과격파 신령주의자들이 여전히 성빈사상을 표방하고 성 프란시스코의 선교정신을 고취하였다. 이들은 ‘작은 형제단’(Little Brothers)라는 교단을 만들었다.
로마 교황청은 이들 프란시스코 수도단의 영성운동가들을 억압하기 위하여 여러가지로 노력하였다. 1316년 교황 요한 22세는 이들을 박해하는 교서를 발표하였다. 그럼에도 극단주의자들은 교황을 적그리스도라고 부르고 프란시스코 수도단의 헌장대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사도들은 절대 성빈생활을 하고 아무런 재산과 재물을 갖지 않았다고 주장하였다. 교황은 이런 말을 하는 그들을 이단이라고 선언하였으나 프란시스코 수도단의 영성운동은 여전히 이어져갔다.
왈도(?~1217)
리용(Lyons)에서 살던 피터 왈도(Waldo)라는 한 부자가 신약의 복음이 읽히는 것을 듣고 어느 신부에게 부탁해서 복음을 번역한 것을 얻어서 그것을 읽고 사도들이 시킨대로 완전한 생활을 해보려고 노력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자기의 모든 소유물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었고 사도가 아닌데도 동네나 광장에서 복음을 전하였다.
그는 동네에 들어가서 집집을 찾아가 복음을 전하였고 교회당에도 들어가 복음을 전하였다. 그리고 성서에 없는 것들을 교회에서 가르치고 집행하는 것들, 곧 일곱 가지나 되는 성례전과 고백제도와 고행과 성자에게 드리는 기도와 서약 받는 일 등등을 폐지하자고 주장하였다는 것이 그를 체포하여 고발한 고발장에 기록되어 있다.
왈도의 추종자의 수가 많아졌고 그들이 다 평신도였는데도 당시 교회가 허락하지 않은 평신도 설교를 하고 다녔다. 1184년에 교황은 칙령을 내려 왈도파를 이단으로 규정하고 그들의 설교행각을 금하였다. 그들은 학문이 없는 평신도들이어서 라틴어 성서를 자국어 말로 번역한 것을 읽었다. 그들은 치밀한 조직을 만들어서 방랑하는 생활을 하며 설교하였고, 여자들은 때로 작은 조직체를 만들어서 자급자족하는 생활을 하면서 남자들과 떨어져 생활하다가 예배는 공동으로 드렸다.
그들은 자칭 ‘마음이 가난한 자들’이라 불렀고 ‘리용의 가난한 사람들’이라고도 불렀다. 이들의 운동이 유럽 전역으로 급속히 퍼져서 스페인, 이탈리아, 독일 및 프랑스 지역에 그들의 추종자가 많아졌다. 그런데 왈도의 독단적 행동 때문에 내분이 생겨서 몇 분파가 생기고 조직과 교회에 차이가 생겼다. 그러나 그들은 공통적으로 성서의 문자적 교훈을 따르는 성서주의와 성령의 내증 곧 성령의 영감과 성빈생활을 강조하였다.
그들은 겸손한 옷차림이었고 부지런히 일했다. 순결하였고 먹고 마시는 생활에 절제하였고 술집에 가거나 춤추는 것을 거부하였고, 말이 신중하였다. 그들을 미워하던 사람들도 그들의 이러한 품격을 인정하고 존경하였다.
이들이 교황청에 종교단체 등록을 신청하였으나 거절 당하였다. 교황청은 이들의 운동이 교회에 해롭다고 하여 이단으로 규정하고 국가의 군대의 힘을 빌려 박멸을 시도하여 수많은 사람이 비참하게 학살되었다. 그들은 이탈리아의 산골짜기들에 피신하여 살다가 16세기 종교개혁 운동이 일어났을 때 그 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들의 신학사상이 종교개혁자들의 신학과 일치하는 것이 많았다.
죤 위클리프(1329~1384)
위클리프는 옥스포드 대학에서 공부하였고 그리고 그 대학의 유명한 철학교수였고 또 많은 책을 저술한 학자였다. 그리고 동시에 그는 유명한 설교자로서 교회의 개혁과 정치와 사회의 개혁을 부르짖었다.
교회 개혁을 위해서 그는 신약성서에 기록된 초대교회처럼 교회 조직과 운영을 단순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당시의 교회의 법정과 복잡한 교회법을 비롯하여 교회의 막대한 재산과 기업가와 같은 교회 감독들과 사제들과 교황청 추기경들의 막대한 권리와 영화를 비판하였다. 신도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온순하고 가난한 생활을 한 그리스도의 생활을 본받아야 하는데 이 생활에 반대되는 생활을 하는 사람은 적그리스도이며 교황들도 적그리스도에 해당한다고 비판하였다.
위클리프는 신약성서적인 교회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라틴어 성서가 각 나라 국어로 번역되어 성서를 자유롭게 그리고 쉽게 읽을 수 있어야 한다고 역설하여 친히 성서를 영어로 번역하였다. 이것은 교황청이 엄금한 일이었으므로 위클리프는 이단자가 되었다. 그가 죽은 후 이 사실이 교황청에 알려져 그의 무덤에서 해골을 파내어 화형식이 거행되었다.
위클리프는 하나님의 예정으로 사람이 구원을 받는다고 설교하였다. 교회가 구원을 주는 것으로 생각한 가톨릭교회의 교리를 비판한 것인데, 교황이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천국의 열쇠를 쥐고 있다는 주장을 비판한 것이다. 교회가 구원을 준다는 말은 신부, 곧 사람이 구원을 주는 것처럼 들린다는 말이었다. 그는 구원은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은혜로 되는 것인데 곧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예정의 은혜라는 말이었다. 이렇게 하여 보이는 가시적 교회가 전부가 아니고 보이지 않는 불가시적 교회가 참된 교회라는 말이었다.
다음으로 위클리프는 가톨릭교회의 7종의 성례전을 비판하였다. 그는 세례와 성찬과 견신례 세 가지가 성서적인 예전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유카리스트 곧 성만찬 신학을 비판하여 성찬의 떡과 포도주 같은 물질이 은혜의 매개가 되는 것이 아니고, 성찬식에 그리스도가 임재하셔서 그의 임재가 은혜가 된다고 설교하였다. 그는 가톨릭교회의 화체교리, 곧 성찬식의 떡과 포도주의 본질이 신부의 기도로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변한다는 교리는 성경에서 찾아볼 수 없다고 말하였다.
위클리프는 당시의 국가권력과 사회제도를 비판하면서 특별히 농민들과 소작농들과 같은 가난한 계층의 사람들의 불행을 대변하는 설교를 많이 하였다. 그는 주장하기를, 통치할 수 있는 권리는 올바른 정부에게만 있으며 (즉 올바르게 통치를 못하는 정부는 통치할 자격이 없다), 교회든 국가든 통치를 잘못하는 곳에는 세금을 바칠 필요가 없으며, 만일 교회가 재산을 잘못 사용하면 국가의 왕이 교회의 재산을 몰수할 것이며 교황은 자기의 부하들에게서 시정(是正)을 받거나 단죄를 받아야 한다고 설교했다.
영국 사람들이 위클리프의 설교를 경청하고 자기들의 불만을 표출하게 되었다. 농민들 중 소작인들이 그의 설교를 듣고 혁명적인 노래를 부르고 시위를 벌였다. 1381년에 농민들이 단합하여 런던의 시가로 들어왔을 때 위클리프의 적수들이 그를 단죄하였다. 그리고 영국의 상인들이 그의 설교에 자극을 받고 당시의 프랑스인 교황이 영국의 돈을 빼앗아간다고 불평을 터뜨렸다. 그리고 영국의 왕자들과 귀족들이 위클리프의 설교를 경청하고는 영국에서 교회가 영국의 땅 3분의 1을 소유하고 있다고 불평하기 시작하였다. 위클리프는 가난한 사람들을 생각하였는데 교회는 교회재산 늘리기에 정신없었다.
로마 교황들이 영국 교회의 대주교에게 경고하여 위클리프를 단속하라고 명령하였고 영국의 왕과 귀족들에게 충고하여 위클리프를 체포하도록 말하였다. 그러나 위클리프에게는 유력한 친구들이 많았으므로 보호를 받고 옥스포드 대학에서 계속 가르치다가 1382년에 은퇴하고 2년 후 사망할 때까지 계속 활동하였다.
위클리프의 추종자들 중에서 롤라드(Lollard)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그의 교회와 정부와 귀족들에 대한 강력한 비판과 개혁운동을 추종하다가 핍박을 받고 이단으로 단죄됐고, 영국의 왕 헨리 5세가 롤라드 운동을 대대적으로 억압하였으나 그들의 운동은 계속되어 16세기 종교개혁운동이 일어났을 때 영국의 프로테스탄트 개혁운동에 도움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