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경동교회] 진실된 아멘

2010년 12월 12일 설교자 박종화 목사

성경본문
  
이사야서 52:7-10

놀랍고도 반가워라! 희소식을 전하려고 산을 넘어 달려오는 저 발이여! 평화가 왔다고 외치며, 복된 희소식을 전하는구나. 구원이 이르렀다고 선포하면서, 시온을 보고 이르기를 “너의 하나님께서 통치하신다” 하는구나. 성을 지키는 파수꾼들의 소리를 들어 보아라. 그들이 소리를 높여서, 기뻐하며 외친다. 주님께서 시온으로 돌아오실 때에, 오시는그 모습을 그들이 직접 눈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너희 예루살렘의 황폐한 곳들아, 함성을 터뜨려라. 함께 기뻐 외쳐라. 주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위로하셨고, 예루살렘을 속량하셨다. 주님께서 모든 이방 나라들이 보는 앞에서, 당신의 거룩하신 능력을 드러내시니, 땅 끝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우리 하나님의 구원을 볼 것이다. 아멘.

고린도후서 1:18-22

하나님께서는 신실하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여러분에게 하는 말은, `예` 하면서 동시에 `아니오` 하는 것은 아닙니다. 나와 실루아노와 디모데가 여러분에게 선포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예`도 되셨다가 동시에 `아니오`도 되신 분이 아니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는 `예`만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약속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는 "아멘" 하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우리를 여러분과 함께 그리스도 안에 튼튼히 서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사명을 맡기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또한 우리를 자기의 것이라는 표로 인을 치시고, 그 보증으로 우리 마음에 성령을 주셨습니다. 아멘.

누가복음서 3:7-14

요한은 자기에게 세례를 받으러 나오는 무리에게 말하였다.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닥쳐올 진노를 피하라고 일러주더냐? 회개에 알맞는 열매를 맺어라. 너희는 속으로 `아브라함은 우리의 조상이다` 하고 말하지 말아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드실 수 있다. 도끼를 이미 나무 뿌리에 갖다 놓으셨다. 그러므로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다 찍어서 불 속에 던지신다." 무리가 요한에게 물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요한이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속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없는 사람에게 나누어 주고,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그렇게 하여라." 세리들도 세례를 받으러 와서, 그에게 물었다. "선생님,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 요한은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너희에게 정해 준 것보다 더 받지 말아라." 또 군인들도 그에게 물었다. "그러면 우리들은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 요한이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아무에게도 협박하여 억지로 빼앗거나, 거짓 고소를 하여 빼앗거나, 속여서 빼앗지 말고, 너희의 봉급으로 만족하게 여겨라." 아멘.
 
설교문  
  
<진실된 아멘>

오늘이 교회력에 따라서 대림절 세 번째 주일이 되었습니다. 다음 주일이 마지막 주일이고, 다음 주일이 지나면 성탄이 저희 앞에 다가옵니다. 성탄을 맞이하며, 오실 주님을 기다리며 이렇게 세 번째 주일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해마다 성탄절이 오기 때문에 그냥 지나갈 수도 있지만 어떻게 성탄절을 맞아야 할까요? 준비 없이도 하나님이 알아서 성탄하시는 게 아니고 준비하는 사람에게만 성탄이 온다고 합니다.

주님을 맞이하는 방법, 딱 한 가지입니다. 그것은 성탄이 아무 곳에나 오는 게 아니고 성탄은 하나님과 우리들이 함께 아멘으로 화답하는 곳에만 온다고 합니다. 우리교회는 아멘을 소리내어 잘 하지 않습니다. 마음으로 하시는데 어느 집회에 가면 아멘 소리를 너무 자주해서 아멘에 대해서 알고서 하시는가 모르면서 하시는가,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아멘은 진실로 해야 하는데 오늘 성경말씀에 보니까 하나님이 우리한테 해 주시는 모든 약속은 신실하십니다. 그리고 그 신실한 약속을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확연하게 보이셨습니다. 그래서 예수 안에만 있으면 하나님이 우리를 향한 약속이 모두 신실하기 때문에 우리가 아멘으로 받아들입니다. 이 아멘의 근거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만났더니 우리가 만난 하나님의 모든 약속이 진실하심을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럴 때 하는 말이 ‘아멘’ 그렇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보았듯이,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모든 일에 대해서 자기가 베푸신 은총에 대해서 ‘아니오,’ 하는 말은 안 쓰시고 항상 ‘예,’ 라는 말을 쓰십니다. 이렇게 고린도후서에 적혀 있습니다. 하나님의 ‘예,’ 하나님의 긍정입니다. 우리가 긍정을 표현할 때 ‘예’ 하는 것, 큰 강연장에서 사람들이 강연을 듣고 참 옳은 말했다고 느낄 때 ‘옳소’ 하는 것, 그러다가 더 신나고 승리할 것 같으면 아예 ‘만세’ 라고 하는 것, 이 모든 말을 합치면 히브리말로 ‘아멘,’ 이 한마디입니다.

옳습니다, 저도 동감입니다, 만세, 그리고 예, 이 모든 것을 합한 말이 아멘입니다. 그러니까 예배에 오셔서 아멘, 아멘, 하실 때, 이 세 마디를 다 합할 수 있는지, 그렇게 확신하면 ‘아멘’ 하십시오. 그리고 아멘은 사람이 혼자 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도 우리를 향해서 ‘아멘’ 하신다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아멘은 사람의 영혼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심성, 하나님의 약속도 아멘으로 주십니다. ‘그대로 이루어지이다.’

성경말씀에 보면 말구유간에 탄생하신다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번역이 잘못된 겁니다. 이스라엘에는 말이 없고 염소만 있었습니다. 그래서 염소 축사에서 태어났다고 해야 하는데 이상해서 말구유간이라고 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아멘으로 오시는 그 분의 아들이 우리에게 태어날 때는 말구유간이라는 가장 작은 곳, 눈 여겨 보지 않는 곳, 또는 비참한 곳, 그런 곳에 가장 높으신 분이 태어납니다. 이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 말구유간의 탄생사건입니다.

이분이 탄생하셔서 마태복음 25장에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중에 여러분이 최후의 심판장에 갈 때 하나님이 이렇게 물으실 겁니다. “내가 배고팠을 때 먹을 걸 주었느냐, 내가 목말랐을 때 나한테 물 한 모금 준 적이 있느냐?” 이렇게 물으실 때 여러분은 줬습니다, 안 줬습니다, 대답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또는 이렇게 물을 것입니다. 주님이 언제 목말랐습니까? 언제 저한테 와서 밥 한 술 달라고 하셨습니까?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입니다. “내가 말구유간에 태어난 것처럼 나는 가난한 사람이 되어 그대를 찾아 갔었노라.” 말구유간에 태어난 예수를 유대 땅 사람 아무도 몰라봤습니다. 빈곤한 가난뱅이로 태어난 사람을 이 땅의 그리스도라고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그분은 가난하고 목마르고 헐벗은 사람의 모습으로 여러분을 24일에 찾아갈텐데 그분이 그리스도이심을 깨닫기 바랍니다.

뉴욕에서 목회를 성공하신 한 목사님의 목회 수상록에서 이런 글을 읽었습니다. 자기 교인 중에 혼자 사시는 할머니 한 분이 계셨는데 재산을 꽤 모으신 모양입니다. 이 재산을 어디다 헌납을 할까 생각하다가 일부는 공익법인이나 사회나 교회에 헌납하겠는데 가족들에게도 줄 재산을 남기려고 목사님을 찾아왔는데 피붙이라고 하는 것이 자기 조카딸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조카딸이 그 유산을 받아서 정말 좋은 일에 쓸지 반신반의가 되어서 목사님을 찾아왔는데 결론을 못 내렸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분이 직접 시장에 나가서 가발과 누더기 옷을 사고, 얼굴에 칠도 하고서 자기 조카딸이 사는 집 앞 계단에 앉아서 구걸을 했습니다. “한 푼 줍쇼.” 하루 이틀 지났는데 한 푼도 안 주고 박대하더니 삼일 째 되니까 조카딸이 화가 나서 욕을 하며 내쫓더랍니다. 당장 안 나가면 경찰에 신고하겠다며 쫓아냈습니다. 그 후에 다시 목사님을 찾아와서 이 할머니가 하는 말씀이 제 재산은 조카딸에게 줄 수가 없고 공익법인에 헌납하겠습니다, 했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가 뉴욕의 이야기만입니까? 오늘 우리사회의 이야기고, 세계 곳곳에 있는 사람들이 사는 실상의 이야기입니다. 많이 가졌지만, 배운 것도 많지만,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베풀어야겠다고 생각할 때 누구한테 베풉니까?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을, 자기 자신을 누군가에게 맡기고 싶을 때 여러분은 누구를 찾습니까? 은행에 거래할 때, 일상에서 서로 가족끼리 거래하고 사람들끼리 거래할 때, 제일 중요한 것이 저는 신용이라고 생각합니다. 신뢰라고 생각합니다. 진실이고 신실성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없으면 받을 수도 없고 줄 수도 없습니다.

오늘 성경말씀에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하는데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은 우리한테 준다고 했다가 뺏어가는 분도 아니고 일단 약속을 하셨으면 그분이 손해가 나도 주십니다. 어느 정도 손해가 나도 주시느냐 하면 고린도후서의 말씀처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항상 ‘예,’ 하는 분입니다. 예수 안에 온 사람에게는 하나님은 손해, 이익을 따지지 않으시고 약속한 것을 몽땅 주시는 분입니다.

어떤 방법으로 주십니까? 예수는 하나님의 분신입니다. 아들입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약속 때문에 오셔서 말구유간, 염소 축사에 태어나셔서 가장 비참한 곳에 태어나셔서 엄청난 세계 변화, 인간 변화를 일으킨 분이신데 그분은 그런 역사를 통해서 저와 같은 사람, 우리 같은 사람의 죄를 대신 지시고 죄값을 죽음으로 치르셨습니다. 죽기까지 약속을 지키십니다. 우리는 고난, 슬픔, 아픔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한 것들을 누가 같이 져줍니까?

오늘 말씀은 단순합니다. 당신의 아픔을 져주는 사람, 슬픔도 끌어안아 주는 사람, 심지어 죽을 죄를 지었으면 대신해서 죽어주는 사람, 그 사람이 하나님이고 그 사람의 아들이 예수입니다. 그 안에 오면 목숨까지 주기로 했으므로 신실하게 약속을 지키십니다. 우리를 살려내시려고 목숨을 지키십니다. 우리를 살려내려고 목숨을 버리십니다. 그것을 우리는 부활이라고 합니다. 죽은 자도 살리십니다. 죄값도 대신 치르고, 그것도 안 되니까 죽은 자를 살려서 하나님의 약속의 진가를 나타내십니다.

하나님도 자존심이 있습니다. 같이 죽어주는 게 무슨 자존심입니까? 죽은 자를 살려내야 자존심이 회복되는 것입니다. 생명의 하나님, 생명의 자존심은 죽은 자도 살리는 것이 자존심이지 같이 죽는 것만으로 자존심은 회복되지 못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고백합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그 신실을 맛보고 싶으시면 예수 한 번 찾아가 보십시오.”

예수가 누굽니까?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찾아가보면 거기서 하나님이 우리 대신 죽었습니다. 십자가가 3일 동안 있다가 살아나신 부활의 아침에 가면 죽은 우리를 살려내셔서 생명의 하나님의 자존과 본뜻과 신실하심을 입증해 보이셨습니다. 그런 분이 우리에게 오신답니다. 헐벗은 자의 모습으로 오신다는데, 말구유간에 오신다는데, 이 땅의 가장 천박한 곳에 오신다는데,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깨달으시면 그 하나님께 아멘, 하고 응답하십시오. 그 뜻입니다. 하나님, 응답하십시오.

세례요한이 미리 와봤습니다. 와봤더니 세상 사람들이 응답하기는커녕 하나님을 만날 수도 없고 만나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너무 비참해서, 자기 백성들이 너무 싫어서, 이 독사의 자식들아, 합니다. “남을 물어 뜯어서 죽이려고나 하고 독을 품기나 하지, 독에 물린 사람을 고치주기는커녕 산 사람을 죽이려고 하는 인간들아, 독사의 자식들아, 회개 안 하면 예수를 만날 자격도 없고 말구유간을 찬양할 자격도 없고 찬송하고 기도할 자격도 없다.” 세례요한의 말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렇게 주십니다. “이기적 인간들아, 하나님 앞에서 진실되게, 신실하게 구하는 것을 구하고, 하나님도 우리보고 신실하게 대할 수 있도록 그렇게 회개하자.” 회개하자는 말이 오늘 세례요한의 가장 핵심적인 이야기입니다. 회개합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말구유간에서 태어나신 하나님이 오늘 저한테 태어나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지키는 대림절, 성탄절, 교회력이 정한 상징적인 주일입니다. 이걸 지켜서 뭐하려고 합니까? 지나가면 안 됩니까? 왜 대림절이고 왜 성탄절입니까? 하나님이 오늘 저 가슴속에 저 인생 속에 태어나고 싶어 하시고 여러분의 한 가운데 태어나고 싶어 하십니다. 말구유간이라도 괜찮습니다. 여관방도 괜찮습니다. 아파트 방도 괜찮습니다. 어느 곳이라도 하나님은 가리시지 않지만 “다만 말구유간에서라도 태어나겠다. 그래서 같이 인생을 끌어안고 싶다. 부활까지 선사하고 싶다. 내가 태어날 장소 좀 다오. 그 장소는 그대들 가슴 속이 아니고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장소라면 내가 어디든지 간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 믿고 하나님 오심을 기다립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오셔서 태어나고 싶어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거부하면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아멘으로 받아들이면 태어나실 거고 아니면 하나님이 지나가십니다. 그것은 우리 자신의 결단입니다. 하나님은 아프지만 참으시겠죠. 오늘 내가 태어나고 싶은데 나보다 앞서 간 세례요한의 말을 들어라. 회개하라. 나한테 태어날 장소 하나를 마련해라. 그리고 나와 함께 내가 아멘이라는 축복을 가져갈테니 아멘으로 응답해 달라. 그 뜻입니다. 다른 뜻은 없습니다.

오늘 그래서 모든 말씀 중에 구약의 예언자가 하는 이야기, “하나님이 오신다. 기뻐 맞이하라. 가장 비참한 곳까지도 하나님은 가신다. 큰일을 하기 위해서 가신다.” 세상에 신실함이 없어서 하나님도 고민이지만 저희들도 고민입니다. 아까 장로님 기도하셨듯이 국회에 가면 신실을 느끼십니까? 연평도에 가니까 신실하신 분이 계십니까? 혹시 직장에, 가정에 신실, 진실이 지배합니까?

남편은 부인 앞에서 신실하다고 고백하십니까? 부인은 남편 앞에서, 자식은 부모 앞에서, 부모는 자식 앞에서, 모든 사람들 앞에서 나는 신실하다, 죽기까지 약속은 지킨다, 그리고 다시 살려낸 만큼 나는 헌신적이다. 그렇게 말씀하실 수 있습니까? 신실하기를 원하십니까? 신실하십시다. 오늘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신실하십시다. 그 신실하신 주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신실의 조건은 회개하는 것입니다. 무슨 죄를 지었길래 회개해야 할까요? 키에르케고르라는 실존철학자의 말은 지금도 가슴에 와 닿습니다.

사람이 불안한 이유는 상대방 앞에 섰을 때 나 여기 있습니다, 하고 자기 자신의 정당성을 입증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사람 앞에서도 그렇지만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잘못했으면 잘못한 모습대로 잘했으면 잘한 모습으로 설 수 없을 때, 자기 자신을 나타낼 수 없을 때, 자아실현이 불가능할 때 불안이 깊어지고, 그 불안이 깊어지면 절망입니다. 절망은 죽음에 이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서 자존심 있는 인간, 진실된 인간으로 설 수 있습니까? 사람 앞에 이웃 앞에 설 수 있습니까? 자신이 설 수 없을 때를 죄라고 한다면 설 수 있을 때가 용서받은 죄인일 겁니다.

저는 오늘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아들 앞에서 똑똑하게 설 수 있는 사람, 그런 가정이면 구원에 이르는 가정이라고 믿습니다. 진실하십니까? 신실하십니까? 그럴 때만 주님이 저희 안에 태어나십니다. 그 집, 하나님과 내가 만나는 집입니다. 아멘은 우리가 반가울 때 ‘아멘’ 하십시다. 그리고 하나님을 향해서 아멘합시다. 중요한 것은 아멘은 솔로가 아닙니다. 우리가 아무리 소리쳤다고 아멘이 열매 맺는 거 아닙니다. 하나님이 아멘 하시고 저도 아멘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아멘은 사랑으로 아멘 하실 거고 저는 믿음으로 아멘 할 수 있습니다.

시편 85편에 진실이 땅에서 돋아나고 정의는 하늘에서 굽어봅니다, 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신실한 약속에 대해서 땅에서 돋아나는 진실, 진실로 아멘하면 위에 계신 하나님은 정의, 하나님의 공의란 이름으로 우리에게 임하십니다. 땅의 진실과 하늘의 공의가 만날 때 그것을 구원이라고 합니다. 그 구원의 장소는 신앙적으로는 그리스도 안이고, 하나님과 함께 사는 땅에서 우리가 구원을 받습니다. 진실과 공의가 만나는 것을 평화라고 합니다.

사람의 평화, 이 땅의 평화, 모든 평화가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땅에서부터 진실로 아멘하면 하나님이 정의라는 이름으로, 공의라는 이름으로 아멘하셔서 두 아멘이 만나는 합창, 듀엣이 진실된 아멘입니다. 일방적인 아멘으로 하나님은 응답할 수 없습니다. 아멘, 하늘의 아멘, 만나는 아멘, 여러분의 삶이 되시길 바랍니다. 성탄절에 두 아멘이 만납시다. 그래서 바꿔집시다. 새로운 생명을 얻읍시다. 희망을 가집시다. 그 아멘을 함께 기다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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