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식 박사 ⓒ베리타스 DB |
이제까지 역사의 예수와 관련된 내용을 항목별로 정리해보았다. 이 내용이 후대 교회에서 공식적으로 정착된 모습은 ‘사도신경’에서 잘 읽어볼 수 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한 이후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전파해 나간 사도들은 간결하게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사람들에게 알려야 할 필요를 느꼈다. 따라서 이들은 예수님의 정체에 대해 짤막한 ‘선포문’을 만들었다. 선포문의 내용은 표현상에 약간의 차이가 있을지 모르나 대체로,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십자가사건) 그리고 그분의 다시 오심(再臨)이라는 세 가지 내용을 포함한다(데전 1,9-10; 로마 1,3-4; 고전 15,3-7 등). 그러므로 예수님에 대해 처음 듣게 된 당시의 사람들은 예수님을 무엇보다도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장차 재림하실 분으로 이해했을 것이다.
어떤 그리스도인이 스스로 참된 그리스도인임을 밝히기 위해서는 자신이 전해 받은 선포문의 세 가지 내용을 신념을 가지고 입에 담을 수 있어야 했고(=신조, 혹은 신앙고백문), 이를 통해 자신의 믿음을 증거 하게끔 되었다는 사실은 그리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다. 그리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앞의 세 가지 내용에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를 보여주는 ‘삼위일체 그리스도론’(성부, 성자, 성령으로 드러난 위격位格, 혹은 인격은 셋이지만 본질은 하나라는 설로 예수님의 신성을 헬라철학에 기초하여 형이상학적으로 표현한 것)이 덧붙여지고(“성령을 믿으며...”), 이제 예수님을 십자가 사건에만 국한시킬 것이 아니라 거슬러 올라가 그의 살아생전 모습까지 담아내게 된 것이다(“동정 마리아께 잉태되어 나시고...” 등등). 다시 말해서, 초대 교회에서는 예수님을 받들어 모신 나머지, 십자가 사건만으로는 도저히 부족해 그분의 신성(삼위일체)은 물론 살아생전 지상 모습에까지 자신들의 믿음을 투사하여 성문화시킨 셈이다.
초대 교회 시대의 신앙고백문에 오늘날 우리가 바치는 사도신경의 원시적인 모습이 담겨 있었다고 해도, 많은 교회들이 서로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었고 변변한 통신수단도 없었기에 제 각각의 신앙고백문들이 발생하게 되었다. 그 대표적인 예들로는 ‘니케아 신경’이나 ‘콘스탄티노플 신경’ 등이 있다. 즉, 당시에는 모든 교회에서 공동으로 바치던 신앙고백문은 없었다는 뜻이다. 사도신경도 그 중의 하나로, 특히 박해를 피해 지하 무덤(카타콤)으로 숨어 다니며 예배를 드린 로마 교회 교인들이 바치던 신앙 고백문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사도신경이 정확히 언제부터 지금과 같이 신앙고백문들 중의 신앙고백문으로 그리스도교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기원후 350년경에 예루살렘의 주교였던 치릴루스가 세례 준비 기간에 12가지 항목으로 나누어서 교육을 시켰다는 말이 나오고 이는 로마교회의 신앙 고백문과 매우 흡사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대략 4세기초로 그 연대를 잡을 수 있겠다. 그리고 381년에 열린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는 마체도니우스라는 이단자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이단의 가르침에 대응하려는 목적으로 오늘날과 같은 모습의 성문화된 사도신경이 완성되었다고 한다.
박태식 박사(서강대, 가톨릭대, 성공회대 신학 외래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