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분 : 폴 니터 교수, 정현경 교수와 동화사 금당선원 수좌스님들 좌담회
일시 : 2010년 12월 31일
장소 : 동화사
자료 출처 : 폴 니터 교수 한국 초청측
사회자(박경희) : 폴 교수님 지금까지 동화사에서의 첫 느낌이 어떠신지 여쭤보고 싶습니다.
폴니터교수 : 어제 제 아내 캐이티와 이야기 나누기도 했었지만, 여기에 온 것 자체가 저희에게는 굉장한 특권이고 특혜고, 그리고 어제 새벽 2시에 도착해서 오늘 아침 경내를 둘러보면서 이곳은 매우 성스러운 곳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곳에서 약 1400여 년 동안 스님들이 수행을 해왔다는 사실이 정말 놀랍습니다. 이곳은 세상을 위한 하나의 모범적인 본보기가 되는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곳에 온 것이 너무나 기쁜 두 번째 이유는, 저는 평생 동안 종교간 대화에 참여해 왔었지만 제가 여태까지 참여해온 대화는 주로 미국에서 이루어진 대화였습니다. 지금까지 미국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대화 대상으로 함께 해온 분들은 대부분 서양 그리스도인들이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이곳에서 진정한 불자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돼서 너무 기쁩니다.
여러분께서 질문한 것은 아니지만,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 제가 바라고 기대하는 것은, 낮에 진제 큰스님과 대화를 나눌 때처럼 우리가 각자의 마음과 각자의 신앙의 확신으로 이야기를 하되, 서로의 이야기를 마음을 열고 들을 수 있는 그런 열린 마음으로 대화를 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럴 것이라고 기대하고 또한 희망합니다.
선원장스님 : 그리스도인들에게 궁극적인 것은 하느님입니다. 그 하느님을 폴 니터 교수님은 어떻게 이해하고 계십니까?
폴니터교수 : 5분 안에 답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웃음).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하느님이라고 말할 때, 아버지라고 말할 때-요즘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또한 어머니라고도 말하고 있습니다-예수의 가르침을 통해서 경험된 그 경험에 기초해서 우리는 하느님에 대해서 말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것은 우리의 경험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언어는 우리가 개인으로서, 그리고 공동체로서 경험한 것을 표현하고 설명하는 것입니다.
여러분께서 성 아퀴나스나 폴 틸리히 같은 주요한 신학자들의 신학적 작업의 글을 읽게 되면, 우리가 사용하는 모든 말들은 하나의 상징으로서 이해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에 대해 이야기할 때 만져질 수 있는 물건을 가리키듯이 이야기 할 수는 절대로 없다고 우리 신학자들은 보고 있습니다. 우리가 신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것은 상징, 혹은 시와 같은 표현으로써 받아들이면 되겠습니다.
제가 만약 불교의 은유를 빌려서 말한다면, 하느님에 대한 우리의 모든 이야기는 결국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우리는 그 손가락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손가락은 달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인간의 모든 이해를 넘어서고 초월한, 알 수 없는 신비입니다. 성 아퀴나스는 “하느님에 대한 모든 이해는 우리가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그 너머에 있는 그런 분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말할 때 그것은 우리를 붙잡아주고, 유지시키고, 지켜주시는 그러한 경험에 기초해서 ‘하느님 아버지’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 말들도 역시 하나의 상징들입니다. 아버지로서의 하느님, 혹은 말씀으로서의 하느님, 그리고 우리는 또한 영, 성령, 혹은 에너지, 기와 같은 것으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하느님에 대한 세 가지 정도의 상징을 들자면, 아버지 어머니와 같이 인격적인 분. 말씀, 진리와 같은 것,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는 영, 성령, 에너지와 같은 상징으로 하느님에 대해 이야기 합니다.
제가 반드시 강조해야만 하는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자주, 모든 우리의 언어와 표현이 단지 상징일 뿐이라는 사실을 잊을 때가 많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손가락을 달과 동일시하게 됩니다. 그것을 우리는 우상숭배라고 합니다.
선원장스님 :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매달려서 하느님을 이해하는 분들 때문에 갈등이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손가락이 아닌 달의 입장으로 폴 교수님을 하느님을 이해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폴교수 : 하느님 아버지라고 하는 상징은, 달, 즉 궁극적인 실재에 대해서 이야기하지만 결코 그것과 동일시될 수는 없습니다.
선원장스님 : 아까 오후에 조실 큰스님과의 대담 속에서, 폴 교수님의 하느님에 대한 이해를 불교에서의 일심(一心)과 같은 이해를 하고 있는 걸로 느꼈습니다.
폴교수 : 제가 볼 때 불성(佛性)은 그리스도성(性)과 비슷하면서도 혹은 유추할 수 있는 그런 개념관계로서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선원장스님 : 마이스터 에카르트의 신관과 폴 교수님의 신관은 같은 입장인가요?
폴교수 : 마이스터 에카르트는 물론 아버지로서의 하느님에 대해 이야기 하셨지만, 또한 동시에 하느님 너머에 하느님에 대해서도 이야기 했습니다. 하느님은 아버지이지만, 역시 하느님 너머에 하느님이 있다고 마이스터 에카르트가 말하는 것은, 그의 방식에서 ‘모든 것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과 같은 것’이라는 그런 의미입니다.
선원장스님 : 에카르트나 폴 교수님 같은 열린 신학자의 신관처럼, 신학계의 주류 신학자들이나 일반 기독교인 대다수가 하느님을 그렇게 이해한다면 종교간 갈등이 해소될 걸로 봅니다.
폴교수 : 바로 그 점이 아까 낮에 말씀드렸듯이,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대화가 더 중요하다는, 그래서 좀 더 열리고 진보적인 그리스도인들과 보수적인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대화가 종교간 평화를 위해서라도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습니다.
선원장스님 : 그래서 저는 그 점에서 폴 교수님 같은 신학자들이 보수주의 신학자들이나 그리고 일반 기독교인들이 하느님을 믿고 있는 그 입장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도록 설득하고 이해시키는 데 많은 노력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매우 어려운 작업일 것 같습니다.
폴교수 : 제가 희망을 갖고 있는 이유는, 미국에서는 지금 보수적인 그리스도인들과 열린 진보적인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대화가 활발하고, 특히 최근 몇 년 동안 저는 많은 보수적인, 복음주의적인 신학자들의 모임에 초대받아서 다른 종교들과의 관계에 대한 저의 생각의 토론할 수 있는 기회를 많이 가져왔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제가 한 가지 질문 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한국의 최근 상황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 외국인으로서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만약 동화사 스님들이 복음주의적이고 근본주의적이고 보수적인 그리스도인들을 이 절에 초청해서 대화를 나누자고 제안하신다면 어떤 일이 과연 벌어질까요?
선원장스님 : 대화가 매우 폴 교수처럼 대화가 어렵겠죠. (웃음) 그렇지만 진지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충분히, 진리는 하나이기 때문에 토론할 수 있다고 봅니다. 지금 폴 교수 같은 하느님에 대한 이해를 많은 사람들이 지지하고 동의하고 있는 추세입니까?
폴니터교수 : 완전한 합의가 있다고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최근 미국에서는 제가 말씀드린 하느님에 대한 이해와 같은 것이 많은 그리스도인 사이에 받아들여지고 있는 추세입니다. 이런 주제에 대해서 제가 쓴, 그리고 정현경 선생님도 쓴 그런 책들이 굉장히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근본주의자들은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웃음)
정현경교수 : 감사합니다, 선원장님. 미국에서 숭산 스님 제자 스님들이 신부님들하고 같이 명상하는 그룹이 있어요. 그런데 기독교에서 수행하시는 신부님들 중에, 교구들 중에, ‘하느님은 진공(眞空)이시다.’ 이미 그렇게 말씀하신 분이 있으시기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만날 수 있는 거리가 많은 것 같고, 폴 선생님이 말씀하신 듯이 정말 어렵겠지만, 저는 불교가 근본주의도 품어줄 수 있을 만큼 큰 종교라는 생각을 해요. 그런 시도가 일어나면 참 아름다울 것 같습니다.
부주지스님 : 지금 저희 한국 사회 안에서는 기독교와 불교와 갈등과 대립이 첨예하게 벌어지고 있습니다. 기독교의 원리주의와 복음전파주의, 더구나 자본주의가 결합된 종교를 고 있습니다. 이런 문제가 한국 사회에 민족과 종교 또 사람과 사람의 갈등을 만들어내는 최고의 요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한국 기독교가 원리주의와 전파주의와 더불어 물질주의까지 합해져서 지금 이렇게 됐는데, 이런 갈등에 대해 교수님께서는 한국 사회에 어떤 메세지를 던져주실 수 있는지요?
폴니터교수 :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종교적 갈등은 하나의 사실로서 우리에게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종교가 권력과 관련을 맺게 될 때 매우 큰 위험성이 있습니다. 종교가 권력과 관계를 맺게 될 때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은, 권력을 사용하고자 하는 의지입니다. 권력을 사용하고자 할 때 반드시 나타나는 태도는, 우리의 종교만이 유일하고 가장 올바르고 가장 좋은 것이라고 하는, 따라서 다른 종교들을 무시하게 되는 그런 현상이라고 봅니다.
불행하게도, 역사적으로 볼 때 그리스도교는, 권력을 세계적으로 가져왔던 유럽의 국가들에서 기독교가 함께 성장해왔습니다. 권력의 종교가 되어왔습니다. 역사적으로 그리스도교는 기독교만이 유일하고 올바른 종교이고, 하느님이 유일하게 선택한 종교라고 주장해왔습니다. 제가 속한 로마 천주교에서는 ‘교회 바깥에는 구원이 없다’라고 하는 것을 오랫동안 가르쳐왔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역사입니다. 우리는 반드시 그것을 인식해야 합니다.
또 하나 제가 매우 중요하게 강조해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이러한 태도가 현재 변화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변화의 한 가지 원천은, 제가 낮에 말씀드렸다시피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는 다른 종교 안에도 하느님이 일하고 계시고 진리가 있다는 것을 인정한 것과 관계가 있습니다. 지금 말씀드린 것은 가톨릭 쪽입니다만, 개신교 또한, 이것은 WCC(세계교회협의회)에서도 마찬가지의 입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변화를 가능하게 한 것은 그리스도교 공동체 안에서 두 가지 주요한 흐름인 로마 천주교 교회 전통과 개신교 교회 전통이 이제는 다른 종교와의 대화를 하는 방향으로 움직여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WCC와 로마 카톨릭의 입장과 다르게, 또한 반대편에서는 복음주의와 근본주의적 그리스도인들이 ‘오직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진리’라는 방향을 강조하면서 계속 다르게 발전해가고 있습니다.
저는 확신합니다. 제가 믿고 또한 기도하고 싶은 것은, 대화를 통한 방향으로의 움직임이 점점 더 강해질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말씀드린 이러한 상황은 한국에 크게 도움 되고 적용될 만한 사실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제가 듣기로는, 한국에서는 복음주의적이고 근본주의적인 그리스도인들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제가 방문자로서 말씀드리는 것이 부적절할 수도 있겠지만, 미국의 사례를 말씀드리자면, 지금 복음주의, 근본주의 그리스도인들과 진보적인 그리스도인들이 신앙과 교리에 대한 이야기는 일단 접어두고 지금 현재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들, 그 문제들을 다루고 해결해가는 과정에서 서로 만나는 것이 미국 그리스도교의 상황입니다. 우리 미국에서는 복음주의자들과 진보적인 그리스도인들이, 가난ㆍ여성차별ㆍ환경문제 등 이러한 중요한 사회적 문제들을 함께 해결해가기 위해서 만나고 노력함으로써 서로 간에 우애를 쌓게 되고, 이러한 우애를 통해서 우리 안에 분열과 차이를 넘어설 수 있을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부주지 : 지금 한국 기독교는 종교, 경제, 정치가 한 위험한 고리로 이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것을 가지고 있는 한 종교적 대화는 상당히 어렵지 않겠는가, 앞으로 한국 사회 안에서는 종교 갈등이 더 심화될 것이라고 저희들은 생각합니다.
폴니터교수 : (웃음) 바로 그것이 불자들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로부터 배울 수도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리 반대가 많고, 그리고 객관적 상황으로 볼 때 전혀 희망이 없는 그런 상황에서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희망을 갖고 희망을 내어 일하곤 합니다. 여러분께서 지금과 같은 불교-그리스도교 대화모임을 많이 가지면 가질수록, 그리고 세계 곳곳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종교간 대화 협력에 대한 사례들을 많이 보여주면 보여줄수록, 또한 심지어 다른 보수적인 그리스도인들을 초청해서 대화를 나누면 나눌수록 그분들이 가지고 있는 신앙이 올바르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한 스님 : 제가 알기로는 교수님께서 불교학과 불교실천 쪽에 깊게 연구하고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 그렇다면 부처에 대해서는 어떤 인식을 갖고 있는지요? 그리고 예수와 부처, 어떤 관계성으로 서로 소통될 수 있다고 보십니까?
폴니터교수 : 제가 유니언 신학교에 오기 전에, 다른 학교에서 학부학생들을 대상으로 종교를 가르칠 때, 『부처님과 예수님의 대화』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 글에서 저는 부처님과 예수님은 매우 다르다고 썼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차이를 갖고 있는 친구들이라고 생각합니다. 부처님과 예수님은 어떤 면에서 보자면 매우 비슷하고, 또 다른 면에서 보자면 매우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두 분 모두 참된 실재, 진리를 심오하게 체험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경험이 팔레스타인과 인도라고 하는 다른 문화적 조건에서 깊은 평화, 내적 평화로 표현되었고, 깊은 평화, 내적 평화로부터 깊은 사랑과 자비가 솟아나왔다고 봅니다. 그것이 두 분의 비슷한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두 인격적 체험은…예수님은 유대인이었죠. 그래서 그 체험을 유대인의 문화적 전통에서 그 체험을 하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그 분의 체험에 대해서 설명할 때 항상 그가 속해있었던 유대교의 문화적 전통 안에서 그 언어와 상징들을 사용하면서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했습니다. 그 중에 가장 중요한 상징은 아빠(abba), 아버지라는 것이었습니다. 부처님 전문가들 앞에서 부처님에 대해서 말을 하자면, 말씀드리기 뭐하지만, 제가 아는 바로는, 유대문화 속에서 당신의 종교경험을 표현했던 예수님과 달리, 부처님은 북부 인도에서 힌두 종교문화, 브라만, 아트만, 윤회, 카르마와 같은 종교문화의 상징들이 사용되는 곳에서 깨달음을 얻으셨고, 물론 깨달음은 그 이전의 힌두교의 기본 생각을 극복하시면서 무아(無我) 등을 말씀을 하셨지만, 인도 문화적 상황에서 종교적 상징언어를 사용하셨습니다. 이러한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부처님과 예수님은 내적 평화에 이르셨고, 그 내적 평화를 모든 존재를 위한 사랑과 자비로 승화시켰다는 점에서 비슷하신 분들이라고 봅니다. 제가 보기에는 두 분이 다 우리에게 웰빙을 주기 위해서 오신 구원자라고 생각합니다.
(중략)
강주(講主)스님 : 저희들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고(苦)의 문제, 이 고에 문제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출발을 했고, 그 인식에 의해서 수행이라고 하는 것이 성립된다고 하겠습니다.
폴니터교수 : 저도 그리스도인으로서 똑같은 말씀을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제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수행하고 있는 것은 제 인생과 세계의 고통을 극복하기 위함입니다. 풀어서 말씀드리자면, 만약 스님께서 이런 불교전통에서 태어나서 수행하고 계속 해오지 않으시고, 만약 다른 전통, 기독교라든지 유대교 전통에서 태어나셨다면, 물론 모든 전통에서 개인의 인격적인 경험이 가장 중요하지만, 그 전통에 따라서 이 인격적 경험이 이루어지고 또한 표현되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개인의 경험과 공동체의 경험을 분리해서 사고하는 것은 어렵다고 봅니다.
정현경교수 : 그럼 이제 폴 선생님이 스님들에게 질문해 주시죠.
폴니터교수 : 낮에 제기하기 시작한 질문입니다만, 부처님과 예수님의 차이, 그리고 불교의 어떤 형태와 기독교의 어떤 형태의 차이에 대해서 묻고 싶습니다. 부처님과 예수님 모두 고통의 문제로부터 출발하셨습니다. 두 분 모두 마음의 변화, 의식의 변화의 필요성을 인식하셨습니다. 불교에서는 그것을 ‘깨달음’이라고 부르고, 기독교에서는 그것을 ‘회개’, 마음의 변화라고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무엇보다도 마음의 변화를 강조하셨습니다. 신약의 일부 글에 따르면, 예수님께서는 또한 사회적 의식, 사회적 구조의 변화의 필요성에 대해서 인식하셨습니다. 불교에서는 모든 고통의 원인이 우리의 집착, 탐욕으로부터 오는 것이고, 바로 이것을 바꾸는 것, 변화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도 역시 탐욕의 문제를 보셨지만, 동시에 이 탐욕의 문제가 당시 유대교의 지배제도와 로마의 압제를 통해서 어떻게 구현되는지를 보셨습니다.
제가 그리스도인으로서, 누군가 가난과 폭력으로부터 고통 받는 것을 볼 때, 제가 그런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음식을 준다든지, 약을 준다든지 해서 배고픔을 해결하고 병을 낫게 하는 그런 것만이 아니라, 더 묻고 싶은 것은 그러한 굶주림과 폭력의 근본적 원인은 무엇인지, 그 근본적 원인은 아마도 정부의 권력과 관계된 것이라든지, 아니면 잘못된 경제질서,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자본주의와 같은 그런 구조적 문제로부터 오는 것이 아닌지를 묻고자 합니다.
제가 낮에 진제스님과 대화를 통해 나누었듯이, 제가 불합리한 구조와 정부, 경제구조를 바꿔야만 한다고 얘기할 때, 스님들께서는 저의 마음을 먼저 바꾸기 전에는 바깥 사회구조 질서를 바꿀 수 없다고 말씀하신다면 저는 전적으로 동의하겠습니다.
하지만 또한 스님들께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마음을 바꾸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스님들께서는 동시에 이 사회구조를 바꿔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마음의 변화가 자동적으로 사회구조를 바꾸지는 않습니다. 그것이 제가 생각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주지스님 : 폴니터 교수님 말씀에 대단히 감명을 받았구요, 낮에 조실스님과 대화에서도 많은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굳이 폴 니터 교수님이 말씀을 빌지 않더라도,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불교가 사회 부조리라든가 많은 고통받는 사람들의 현실을 너무 등한시하는 것이 아닌가 지적을 하고 있습니다. 특히 한국불교가 한때는 상당한 비난을 받아왔습니다.
그러나 결코 불교는 사회구조 변화라든지, 중생의 고통이라든지, 많은 사람의 불행을 방치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상당히 대다수 많은 출가 수행자가 치열하게 고민하는 부분이, 불자로서 두 가지의 과제가 상구보리(上求菩提)와 하화중생(下化衆生)인데, 두 가지 과제를 어떻게 조화를 이룰 것인가, 선후(先後)가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늘 따라다닙니다. 저도 젊은 시절에 큰 고민 중에 하나가 그 문제였습니다. 부처님이나 예수님이 체험하신 깨달은 진리 자체는 완전무결하지만, 그 이후에 기독교나 불교가 교단을 형성하고 역사적 과정을 거치면서 상당한 오류를 범했던 것도 사실상 많습니다.
조금 요약해서 말씀을 드리면, 조선조 500년 동안 세계 역사에 찾아볼 수 없는 지속적 종교탄압을 받아온 경험을 가지고 있는 것이 한국 불교입니다.
불교는 생명을 대단히 존중하고, 전쟁을 싫어하는, 소위 반전 평화주의 이념을 기초로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임진왜란 때 서산대사, 사명대사 같은 분이 분연하게 칼과 창을 들고 전쟁에 나갔습니다. 특히 서울 부근에 보면 남한산성과 북한산성이 있습니다. 남한산성은 벽암 각성 스님이 중심이 돼서 쌓았구요, 북한산성은 계파(桂坡) 성능 스님이 중심이 돼서 쌓은 성인데, 270년간 수도방위를 스님들이 담당해왔습니다. 이것을 보고 일부 학자들은 강제징집이나 강제노역이 아니냐고 생각하지만, 이것은 그때 당시의 스님들이 당시의 무능하고 부패한 정치권력을 보호하기 위해서가 아니고, 외부로부터 침입을 받아서 당대 수많은 백성들이 고통 받는 것을 눈에 차마 볼 수가 없어서 칼을 들고 방패를 들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는 우리 사회의 중생들이 안고 있는 아픔들을 결코 도외시하지 않습니다. 다만, 한 출가 수행자가 얼마만큼 자기의 깨달음의 바탕위에 사회 구원에 나설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대단히 고민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이 순간도 전국 백여 개 선원에서는 2천여 명의 수행자들이 뼈를 깎는 정진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정신적인, 근원적인 바탕이 돼서 한쪽으로는 우리 사회의 구조를 변화시키고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복지혜택을 베풀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수레가 양 바퀴로 굴러가듯이 지금 역시 그 수행의 전통, 정신적인 보고(寶庫)로서 한쪽의 축이 서고, 또 한쪽은 사회적인 실천을 위해서 열심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폴니터교수 : 고맙습니다.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특히 주지스님의 마지막 말씀에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저는 앞으로 불자님들과 그리스도인들이 사회를 개선하기 위한 노력에서 더 많은 대화와 협력을 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제가 한 가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이러한 사회를 개선하기 위한 대화와 협력이 중요할 수밖에 없고 또한 활발해질 수밖에 없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정현경교수 : 제가 번역을 해드려야겠군요. 특히 선생님이 희망이 있으신 것은, 선생님이 키우신 정경일 박사 같은 분이 지금 논문을 쓰는 게 기독교의 해방신학과 불교의 참여불교, 그것을 어떻게 서로 대화를 하면서 배울 수 있을까에 대해 논문을 쓰고 있습니다. 이런 젊은이들이 커 나오기 때문에 희망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입승스님 : 아까 폴 선생님이 스님들에게 자신의 부처님에 대한 이해를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물으셨는데, 그것은 결코 쉽게 대답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저 역시 조심스럽게 대답하겠습니다. 먼저 묻겠습니다. 간단하게 대답해주시기 바랍니다. ‘하느님’은 무엇입니까?
폴니터교수 : 하느님은 제가 그분으로 속하는 신비이고, 저로 하여금 고통 받는 사람들을 위해서 일하게 하는 원천이고, 자비를 가지고 일하게끔 하시는 분입니다.
입승스님 : 지금 말씀하시는 하느님은 손가락입니까? 달입니까?
폴니터교수 : 손가락입니니다.
입승스님 : ‘부처님’은 무엇입니까?
폴니터교수 : 그리스도인으로서 말하겠습니다. 저에게 있어 부처님은 한 인간으로서 신비를 경험하셨고 신비에 이끌리셨던 분입니다. 제가 하느님이라고 부르는 신비에 이끌린...
입승스님 : 그것은 손가락입니까? 달입니까?
폴니터교수 : 항상 손가락이죠.
입승스님 : 폴 교수님, 당신은 누구입니까?
폴니터교수 : 제가 누구냐구요? 저는 신비의 표현입니다.
입승스님 : 그것은 손가락입니까? 달입니까?
폴니터교수 : 손가락입니다. 제가 저를 신비의 표현이라고 말씀드리는 것이 언제나 손가락이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항상 우리가 말할 수 없는 신비가 있는 것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말하는 것은 우리에게는 너무나 현실적인 것입니다.
입승스님 : 손가락인 걸 안다면, 그러면 무엇이 달입니까?
폴니터교수 : 달은 신비입니다. 지금 그 신비를 스님과 대화하고 있는 가운데 저는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신비는 항상 우리가 말하고 나눌 수 있는 것 이상입니다.
입승스님 : 그렇다면 알고 있다는 겁니까? 모르고 있다는 겁니까?
폴니터교수 : 가톨릭 신학에서는 하느님에 대해 알려진, 그리고 알려지지 않은 분이라고 말합니다.
입승스님 : 교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교수님께서 ‘안다’고 해도 주장자로 때릴 것이고, ‘모른다’고 해도 주장자로 때릴 것입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폴니터교수 : 똑! (대중 웃음)
입승스님 : 저 역시 부끄러움이 많지만, 한 말씀 하고 끝내겠습니다. “돌사람이 크게 웃고 있습니다.”
능혜스님 : 인도에서 중국을 거쳐 한국으로 전해진 동양의 선이 서양으로 전파되어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다른 명상법들과는 달리 간화선은 화두를 참구하는 매우 독특한 수행법인데, 간화선이 서양에서 제대로 꽃피울 수 있겠습니까?
폴니터교수 : 바로 그것은 미국과 유럽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입니다. 미국에서 무슬림들은 모르겠지만, 최소한 그리스도인들과 유대인들은 그들의 교회와 회당에서 너무 많은 말들, 소음이 있어왔다는 것에 대해서 인식해가고 있습니다. 따라서 교회와 회당에서 말보다는 침묵을 더 강조하는 어떤 움직임과 운동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들자면, 로마 천주교회에서 향신기도라고 부르는 신학영성운동이 활발히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 수행법은 특히 카톨릭 수도자들에 의해서 가르쳐지고 있습니다.
제가 불교 참선수행을 오랫동안 한 이유에 향신기도를 경험했을 때, 제가 깨달은 것은, “와! 이것은 그리스도교 선(禪)이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말씀드리자면, 지금 미국에서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참선수행을 하고 있습니다. 제 친구 중 한 분인 로버트 케네디, 이 분은 신부이지만 일본에서 불교를 공부하고 수행하여 선사가 되었습니다. 또 뉴저지에 선 센터를 세워서 명상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정현경교수 : 잠깐만요. 능혜스님의 질문은 더 구체적인 것 같은데요? 화두를 참구하는 선이 서양에서 꽃피울 수 있느냐는 질문 같습니다만.
폴니터교수 : 무척 좋은 질문입니다. 화두는 서양 그리스도인들이 이해하기 가장 어려운 명상 수행법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볼 때 이 화두 참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반드시 배워야할 매우 중요하고 반드시 탐구해야 될 것이라고 봅니다.
수좌스님 : 자기정화와 사회정화 중에서 어느 것이 먼저 되어야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폴니터교수 :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마음의 정화입니다. 만약 제가 제 자신을 정화하지 않고 사회를 정화하기 위해 나선다면 상황을 더 악화시킬 뿐입니다.
제가 마음의 정화가 먼저 중요하다고 말씀드리지만, 조실스님과 대화를 통해 말씀드렸듯이, 마음을 변화시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봅니다.
제가 이 질문과 관계해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우리의 마음을 정화시키는 것은 우리의 사회를 정화시키는 행동 속에서도 이루어집니다. 이것은 제 경험입니다. 제가 제 아내 캐이시와 함께 엘 살바도르에서 평화를 위해서 일할 때, 가난한 농부들과 함께 일을 할 때, 억압받고, 강요받고, 고통받던 그들의 용기와 희망과 그들의 행동을 보는 것은 바로 저의 마음을 정화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명상 방석 위에 앉아서 마음을 정화하지만, 동시에 세상의 정화를 위해 일하는 가운데 우리의 마음을 정화합니다. 우리는 두 가지를 함께 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좌선수행을 하는 것에서 시작을 할 겁니다.
수좌스님 : 스스로가 먼저 정화되지 못하면 사회, 국가가 정화되지 않을 것으로 봅니다. 이 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폴니터교수 : 물론 동의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우리의 마음을 완전히 정화할 때까지 기다릴 수 없는 상황이 있죠. 왜냐하면 바깥에 고통이 있으니까요. 따라서 우리는 마음의 정화와 사회의 정화를 동시에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수좌스님 : 만약 부처님과 예수님이 마음의 완전한 정화가 되지 않은 채 마음의 정화와 사회와 정화를 동시에 하셨더라면 결과가 어땠을까요?
폴니터교수 : 만약 그랬다면 문제를 더 일으켰겠죠. 그들 자신을 바꾸지 않고 세상을 바꾸려했다면, 아마 두 가지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하나는 그들의 자아 쪽으로 가든지, 피곤해서 아예 포기하고 말든지.
수좌스님 : 그렇기 때문에 완벽하게 자기 정화가 이루어진 다음에 사회정화가 이루어지고, 사회 정화가 이루어진 다음에 나라와 세계 정화가 이루어질 것이라고 봅니다.
(중략)
수좌스님 : 교수님은 1980년대부터 명상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명상을 해서 내적 평화, 마음의 완성을 이루시려고 하는지, 아니면 하느님과 같이 되려고 명상을 하시는지 여쭙고 싶습니다.
폴니터교수 : 저는 감사한 마음으로 불교 형태의 수행을 해오고 있습니다. 불교의 명상 수행은 제가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기독교의 경험과 믿음에서 그리스도인으로 믿는 것은 영, 성령, 자비의 에너지가 그리스도안에서 경험되었고, 계속 경험되고 있습니다. 신약성서에서 바울은 그리스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바울은 “이제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사는 것이고, 그리스도로서 내 안에 사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스님께서 스님 안의 불성을 깨닫고 실행하려고 하는 것처럼, 저도 그리스도인으로서 제 안의 그리스도성을 깨닫고 실현하려고 노력합니다.
수좌스님 : 그러면 자신이 그리스도화 될 수 있다는 말씀인가요?
폴니터교수 : 예, 그렇습니다. 스님께서 부처가 될 수 있다면 저도 그리스도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희망합니다.
수좌스님 : 초월적인 신이 아니구요?
폴니터교수 : 제가 경험하고자 하는 그리스도는 불교에서 말하는 법신(法身)과 같이 초월적인, 우리가 이름 붙일 수 없는 것을 경험하고자 희망합니다.
수좌스님 : 감사합니다.
사회자 : 감사합니다. 이제 정리해야 될 시간인 것 같습니다. 잠깐 선원장스님께서 한 말씀 하시겠습니다.
선원장스님 : 중요한 것이라서 하나만 말씀드리겠습니다.
기독교에서는 하느님이 타자(他者)로서의 하느님인데, 불교에서는 동일자로서의 부처님을 믿습니다. 이 차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폴니터교수 :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특히 기독교 신비주의 전통에서는, 마이스터 에카르트, 쿠자의 니콜라스(Nicholas of Cusa), 십자가의 요한(John of the Cross) 그런 신비가들은 하느님을 두 가지 모드(mode), 타자이면서도 자아의 하느님으로 이야기해 왔습니다. 쿠자의 니콜라스는 “하느님을 비타자(非他者)”로 표현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타자도 자아도 아닌, 대승불교에서 공과 색을 다르다고 보지만, 동시에 공이 색이고 색이 공이라고 가르치는 것과 같습니다. 제가 정말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제가 하느님에 대한 비이원론적인 이해를 하도록 불교가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도움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선원장스님 : 주류의 기독교가 그렇게 가고 있습니까?
폴니터교수 : 현재는 아닙니다. 하지만 제 지도교수인 칼 라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미래의 그리스도인들은 신비가가 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 것도 아닌 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기를 희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