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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곤 칼럼] 우리 신앙의 시작점: 창조주 신앙

▲김이곤 한신대 명예교수
사도신경 첫 머리에서, 우리 기독교 신앙인들은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 라는 말로 시작하는 신앙고백을 늘 하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 기독교의 경전(經典)인 성서 첫머리에서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라는 말씀을 만나게 됩니다. 이 사실은 우리 신앙의 시작점은 어디까지나 “창조주(創造主) 신앙”이라는 것을 강하게 증언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사실, 이 신앙고백이 없이는!! 우리는 결단코 우리가 “신앙인”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창조주”에 대한 신앙고백을 부정하면 우리 신앙의 근본을 우리 스스로가 부정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자주 창조주에 대한 이 신앙고백에 대해서 분명한 “확신”을 가지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의문들 중에서 가장 풀기 어려운 수수께끼 같은 의문이 바로 다음과 같은 의문이기 때문에 그런 것 같습니다. 즉 우리는 막상 우리 자신을 향해 “우리는 과연 어디서 와서 또 어디로 가고 있느냐?” 라고 물으면 우리 중 어느 누구도 이에 대해선 확실하게 대답하지 못한다는 것, 이것 때문에, 그런 것 같습니다.이것은 실로 기막힌 자기모순적인 사실입니다.

그리하여,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하여 마침내 거기에는 철학도 등장하고 신학도 등장하며 심지어 의학이나 물리학(특히 천체 물리학)도 등장하고 하여 이 물음을 붙들고 결사적인 씨름을 해왔지만 그 대답은 여전히 오리무중(五里霧中)일 뿐입니다.

이 논쟁은 마치 “진화냐? 창조냐?”라는 매우 해묵은 논쟁 같이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렇게 존재하고 있다는 것 그것만은 너무도 분명하다는 이 사실 하나 때문에!! 우리는 이 물음을 단순히 하나의 “말장난”이나 “사고(思考)의 악순환(vicious circle)”에 불과한 것이라고 말해버릴 수는 없습니다.

그리하여 <갈릴레오→뉴턴→아인슈타인→호킹>으로 이어지는 세계적 물리학자들 중, 21세기 “최고의 우주 물리학자”로 널리 알려진 호킹(Stephen Hawking) 박사가 1988년에 『시간의 역사』라는 책을 써서 세인들의 관심을 모았었을 그 때 그 “호킹” 박사는 그의 책 “결론”(한국어 번역판[1998], P. 233)에서 아래와 같이 말한 바가 있습니다.

… 오늘에 이르기까지 대다수의 과학자들은 우주가 무엇인가를 기술(記述)하는 새로운 이론을 개발하는데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우주가 왜 존재하는가?’라는 물음은 제기할 수 없었다. 반면 왜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이 자신들의 직업인 철학자들[과 신학자들]은 [불행하게도]과학이론의 진전을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 그러나 만약에 … 우리가 그 물음[왜?]의 답을 발견한다면, 그것은 인간 이성의 최종적인 승리가 될 것이다. ― 그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신(神)의 마음을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  ]안은 뜻을 좀 더 쉽게 풀기위하여 필자가 삽입한 것임

그리하여 나는 이 금세기 세계 최고의 물리학자인 “호킹”(Hawking)을 “유신론자”(有神論者)라고 믿게 되었고 그래서 이 금세기 최고의 우주 물리학자와 더불어 “창조와 진화”에 관한 문제를 조만간 심도 있게 논의해 볼 수 있으리라는 큰 기대를 가졌었습니다.
 
그러나 아주 최근, 즉 금년(2010) 여름에, 이 호킹 박사는 『위대한 설계』(2010)라는 새로운 책을 출판하여, 뜻밖에도!!, 그는 나의 기대와는 정반대로, 무신론자(無神論者)로 급선회한 후, 이미 22년 전, 즉 1988년에 그가 쓴 책 『시간의 역사』에서 던졌던 “물음”(위의 인용구 참조)에 대한 한 “대답”으로서, 감히, “신(神=하나님)이 우주(=세계)를 창조하지 않았다!”라는 말을 토해냈던 것입니다.

이 책에서 “호킹”(S. Hawking)박사는, “왜(Why) 무(無)가 아니라 무엇인가가 있는 것일까?” “왜 ‘우리’가 존재하는 것일까?” “왜 다른 법칙들이 아니라, [뉴턴→아인슈타인→호킹에 이르기까지 입증된 바,] 이 특정한 자연법칙(중력법칙)이 우리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것일까?”라고 묻고는, 마치 22년 전 그가 던진 질문에 대한 답변이라도 하듯, <이 우주는 신(神)이 창조한 것이 아니라(!) “우리”(인간)의 뇌(腦)가 “스스로 창조한” 생명모형이, 케임브리지 대학의 젊은 수학자(數學者) “존 콘웨이”가 발명, 논증하였던 그 “생명게임”(Game of life)의 모형의존(model-dependent) 법칙에서처럼, 그렇게, 끊임없이(영원히!) 새로운 모형을 만들며 진화(進化)해 가고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던 것입니다. 따라서 우주의 기원(起源)은, 그가 자주 말하여 온 바대로, “지금으로부터 약 137억 년 전의 태초에, 우주의 시작(始作)을 알리는 빅 뱅(big bang)을 일으켰던 그 우주의 첫 원인자는 신(神)이 아니라(!)  ‘자연법칙’, 이른 바, ‘중력법칙’이었을 뿐, 결코, 신(神)은 아니었다.”라고 역설(力說)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중력법칙은 또한 단지 “우연히”(!) 또는 “스스로”(!) 생긴 것이라고 결론지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호킹”의 무신론적 우주기원설, 즉, 그의 책『위대한 설계』가 내린 그 결론은, 논리상, 그의 이전의 책『시간의 역사』에서 던졌던 물음에 대한 “대답”은 아니었던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수차 강조한 바, What?이나 How?가 아닌 Why?(왜?)의 질문에 대한 그의 그 답변이란 분명! 이 우주를 시작케 하고 또 그 우주를 지금까지 지배한 자연법칙이 가진 그 “의미”(뜻)가 무엇인가에 대한 대답이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 우주가 시작된 그 의미와 목적, 이른 바, 이 우주가 생긴 “뜻”(why?)에 대해서는 결코! 한 마디도 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즉 그는 What?에 대한 대답만 하였지 Why?에 대한 대답은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어쨌든 그의 논리대로라면, “우주의 시작”이었던 그 “자연법칙”은 단지 “무의미한 시간운동의 한 시작”일 뿐, 거기에는 전혀 아무런 희망도 의미도 담겨있지 않은 것이 되고 만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 자신이 던진 질문(why?의 질문)에 대한 대답회피요 동시에 인간과 이 우주에 대해서는 무책임한 모독이 될 뿐일 것입니다.

그리하여 자연 질서와 역사의 시간들은 단지 “무의미한 운동”일 뿐, 그의 “대답”은 단지 우리의 기본 상식에서부터도 일탈(逸脫)한 무책임한, 어쩌면, 무신론(無神論)의 전도사(傳道師; 니이체, B. 럿셀, 최근의 도킨스 등등)들에게 던지는 정치적 아첨으로서 오해받을 수 있을 뿐일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것은 우주 기원(起源)에 대한 우주 물리학자로서의 그의 “철학적 논리”에 있어서도, 분명 논리적 모순을 범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비록 그는 여기서 “과학적 진화론”을 “자발적 창조론”[=“자발적 창조”야말로 無가 아니라 무엇인가가 存在하는 이유, 즉 우주가 존재하는 이유라고 그는 본다]이라고 변호하고는 있다 하더라도, 그의 그 “자발적 창조론”은 전혀 견지(堅持)하기가 불가능한 “인본원리”(人本原理)에 불과할 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말하는 우주의 기원(起源)이 “인간(=“우리”)의 두뇌”인 한, 그의 이러한 가설(인본원리 가설)을 과연 우리 같은 인간이 어찌 감히 이해할 수 있고 또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지 알 수 없고, 단지, 그것은 호킹 박사와 같은 “극소수의 천재”만이 상상할 수 있는 영역에 속한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인간을 창조신(創造神)으로 설정한다는 것, 그 자체가 단지 하나의 “수리논증만이 가능할 뿐인 한 가설”(에너지가 없더라도 어떤 물체가 운동하는 상태로 창조될 수 있을 것이라는 가설?)로 보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 본질상, 억겁(億劫)의 진화 역사를 통해서 볼 때, 결코 만능의 존재일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구약성서는 과연 “창조신앙”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며, 그 구약성서의 주장은 과연 진정성이 있는 주장일까요?

구약성서는 창세기 1:1에서 우주(인간과 존재하는 것 모두)는 하나님의 말씀(=神의 意志)에 의해서 창조된 것이라고 증언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흔히 잘못 이해하고 있듯이, 종교가 창작한 교리나 교조는 결코 아닙니다. 또한 그것은 어떤 고대 종교의 “신화”에서 빌려 온 것이거나 또는 그 신화를 신학적으로 개작한 것이거나 한 것도 또한 아니며, 심지어는, 어떤 특별한 신앙인이 하나님의 계시(啓示)를 직접 기계적으로!! 받아쓴 것도 또한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것은 “성서의 현실” 그 자체가 이미 철저히 부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창세기 1:1과 기타 구약성서 도처에서 말하고 있는 <하나님의 천지창조에 대한 신앙고백>은 성서 특유의 문맥(context) 안에 있습니다!! 이 사실이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성서 기자들의 입에서 이러한 신앙고백이 나오게 된 것은 분명, 어떤 확실한 실제적인 “동기”가 있어서(!) 이루어진 것이지, 결코 그 어떤 특정한 신앙인(信仰人)이나 또는 어떤 특정한 성인(聖人)이 그 무슨 보리수(菩提樹)나 박달나무 밑에서 끝없는 고행과 깊은 종교적 사유(思惟)를 통하여 “깨달음”[覺]에 이른 그런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실, 성서기자가 하나님을 창조주라고 고백하게 된 것은 그 무슨 환상을 본 때문도 아니고 또는 그 무슨 신(神)의 음성을 직접 듣고 기계적으로 받아 쓴(dictate) 것도 아니라는 것(!!)은 구약성서 전체를 읽고 자세히 그 내력을 살피면, 전문가가 아니라도 누구든 쉽게 알게 된다는 이 사실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성서는 그 무슨 토정비결이나 마술서와 같은 것은 결코!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구약성서 전체를 그 문맥을 잘 살피면서 자세히 읽다 보면, 성서기자가 그 맨 첫 머리에서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라고 고백한 그 이유는 매우 자연스럽게 발견하게 되는데, 그것은 그들 성서기자들이 그들의 삶의 역사 속에서 거듭되는 놀라운 구원경험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전능성(全能性)을 점차 몸으로 깨닫게 되었다는 그 사실입니다. 즉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모세 등등의 조상들이 고통의 유랑생활을 겪으면서 살아가는 동안 순간, 순간 그들은 그들을 이끄시고 구원해주시고 돌보아 주신 구원의 하나님을 체험하게 되었다는 것, 특히, 그들 소수의 유랑민들이 강대한 제국 애급의 마수(魔手)에서 건짐을 받았던 경험, 홍해에서 겪은 구원경험, 광야 유랑생활을 통해서 구원 받았던 경험, 요단 강 도강의 기적 경험, 가나안 땅에서 블레셋 사람들의 위협으로부터 건짐 받았던 경험, 특히 신흥 바벨론 제국의 포로상황에서 해방 받은 경험(이사야 43:1; 44:2ff.) 등등을 통해서 그들은 그들의 이러한 구원경험들이란 오직 홀로 천지를 창조하신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神]의 실재하심 때문에만 비로소 이루어진 것이라는 것을 불가항력적으로! 깨닫게 되었다는 그 사실입니다. 이것이 성서의 대답입니다!!

성서의 창조신앙은, 그러므로, 신앙적 경험의 불가역적(不可逆的) 산물(産物)이지, 그 무슨 하늘에서 “천등소리”로 계시한 그런 “신비 종교적”(神秘 宗敎的)인 산물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더욱이, “호킹”이 그의 천재적 감각과 오랜 각고(刻苦)의 학문적 노력을 통하여 논증한 것처럼, 그 어떤 과학적 논증의 결과로 얻은 것은 더 더욱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 창조신앙은, 문자 그대로, 경험적 신앙의 산물이요 살아계시는 하나님의 구원사적(救援史的) 사건에 대한 체험적 증언(證言)과 신앙고백(信仰告白)으로부터 온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창세기 1장 1절은, 분명, 오경(五經; 창세기→신명기)을 구성하고 있는 모든 문서자료들 중에서 “최 후대”(最 後代)의 글이며!!, 따라서 오경이 경전으로 결정될 즈음에 결론지은 신앙적 최종결산(最終決算)으로 나타난 것이었습니다. 이것이야 말로 놀라운!! 사실로서, 창조주 하나님 자신의 고유한 계시방식(啓示方式)과 섭리방식(攝理方式)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는(방법론적인 의미에서만 말한다면),천재적 천체 물리학자인 호킹(Hawking)이 “우주의 기원(起源)”을 밝히기 위하여 “우리가 존재한다.”라는 그 존재 사실(事實, fact)에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존재문제”를 논증해 간 방식과도 유사하다 하겠으며, 나아가서는 17세기의 유명한 수학자요 철학자인 데카르트(Rene Descartes, 1596-1667)가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I think, therefore, I am.)라고 외치며 “이미 필연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어떤 원리(=자연법칙)”로부터 “신(神)의 존재”를 추론해간 방식(cf. 갈릴레오, 뉴턴 등)과도 유사하고 하이데거(M. Heidegger, 1889- 1976)의 실존주의 철학의 신(神)이해 방식과도 또한 그 형식면에서는 유사하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위에서 언급한대로 구약성서가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에 이른 “그 길”은 이상의 길들과는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구약성서는 하나님의 역사개입에 의한 <구원경험>을 통하여 우선 먼저(!!) 하나님[神]의 자기계시(自己啓示)를 체험하고 그 다음 그 체험된 구원의 하나님이 곧 창조주 하나님이심을 그분의 역사적 구원사건을 통하여 확인하는 그런 형식으로!!(cf. 출15:1-8, 21)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에 도달한 매우 독특하고도 고유한 <신 인식(神 認識)>의 길을 걸어 온 “거룩한 책”[聖書]입니다. 전적으로(!!) 이러한 길(=하나님의 구원역사에 대한 체험을 먼저 갖는 그 길)을 통하여서만!! 성서기자들은 창조주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또 창조신앙도 갖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길은 인간의 이성(理性)과 신 계시(神 啓示)의 조화를 시도하였던 저 유명한 기독교 최초, 최대의 신학자인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1225-1274)의 “존재(存在)의 유비(類比)”(analogy of being/ analogia entis)라는 신(神) 논증 방법의 길과도 분명히 다르다고 하겠습니다.
 
구약성서는 단지!, <인간역사 속에 개입해 들어 오셔서 구원의 은총을 베풀어주신 그 하나님을 경험한 그 사실이 먼저(!!) 있었기 때문에 비로소 그 하나님이 바로 유일하신 창조주 하나님이신 것을 알게 되었다>고 말하는 그러한 방식으로만(!!) 창조주 하나님의 실재하심에 대한 신앙고백을 해왔을 뿐입니다. 그렇습니다. 창조신앙은 어떤 “인간논리”로 만들어 내거나 논증한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인간 역사 안에 들어오셔서 구원의 은총을 베푸신 그 전능하신 구원의 하나님을 먼저 만나게 되고 나니까(!) 비로소(!) 깨닫게 된 그런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성서의 증언이 갖고 있는 고유한 본질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우리와 우리를 보듬어 안고 있는 이 온! 우주가 우리를 구원해 주셨던 그 분 하나님에 의하여 창조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믿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신앙은 바로 이 창조신앙을 기초로 하고서야 비로소 바르게 정립될 수 있고 또 시작될 수 있는 것입니다.(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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